여호와의 열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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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9:1–7 (NKRV)
1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2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
3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하게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눌 때의 즐거움 같이 그들이 주 앞에서 즐거워하오니
4 이는 그들이 무겁게 멘 멍에와 그들의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주께서 꺾으시되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셨음이니이다
5 어지러이 싸우는 군인들의 신과 피 묻은 겉옷이 불에 섶 같이 살라지리니
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7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예배를 위한 기도]
참으로 사랑과 은혜가 많으신 삼위 하나님, 이 시간 성탄을 기념하여 예배드립니다. 주님의 오심이 세상과 우리를 향한 주님의 무한하신 사랑을 나타내시고 구원의 생명을 주셨기에 참으로 감사드립니다. 이 시간 이미 이루신 주님의 사랑을 온전히 경험하게 하시고, 주님의 은혜를 온전히 맛보는 시간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배의 자리에 나아오며 주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않고 나아온 모든 지체들 기억하여 주시고, 또한 그들의 헌금을 받으시며, 주를 알지 못하는 영혼들이 돌아오는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사역에 귀하게 사용되게 하소서. 이 예배의 시작과 마침을 주님께 의탁드립니다. 우리를 위해 이 땅 위에 오시며 자신을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Hook]
메리 크리스마스! 오늘은 성탄 이브이지만, 함께 성탄 예배로서 드리기에 이 인사로 함께 인사하길 원합니다.
그에 앞서서 이 의미를 다시금 한번 나누겠습니다. “메리”는 말 그대로, “즐거운”이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그리고 “크리스마스”는 Christ와 Mas의 합성어로서 “그리스도의 모임” 또는 “그리스도의 예배”라는 뜻을 가집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도 모두 함께 사용하는 이 인사가,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을 기뻐하는 예배의 인사라는 겁니다.
함께 인사하겠습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우리가 이렇게 인사함과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뻐하고, 또한 동시에 다시 오실 예수님을 고대합시다.
[본문]
이사야 9:6 (NKRV)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가장 핵심 포인트,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오늘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한 가지를 이야기 한다면, 사 9:6 에서 언급되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입니다. 본문에서 한 아기가 태어난 것은 그저 한 인간의 출생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한 아들이자, 그에게는 몇가지의 이름이 수식되는데, 모두 하나님을 가르키는 이름들입니다.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셨다> 하나의 아들로 표현되지만, 신약에서는 독생자로 표현됩니다.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뒤에 이어지는 이름들은 모두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니 하나님이신 분께서 아기로 태어나심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것이 본문의 구조 속에서 가장 핵심적인 이야기입니다. 여러분들이 오늘 이 부분을 정확히 이해한다면 본문의 전체를 잘 이해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하기에 앞서서 이것이 이미 성취된 일이라는 것을 나눠야겠습니다.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이미 성취된 일이자, 익숙한 사건입니다. 우리에게는 이미 시작된 일입니다.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우리는 이미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본문을 유심히 살피면 여전히 우리에게 이뤄지지 않은 것들이 있습니다. 완성의 때를 동시에 그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는 우리에게는 이미 이뤄진 일들과 완성될 일을 함께 하나로 연결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사야의 본문을 접하는 우리는 이 본문을 말 그대로 발로 딛고 서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본문 사이를 거닐며 다니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사야의 오늘 말씀이 현재 우리의 시점에서는 이뤄진 일들이 있고, 여전히 이뤄지지 않은 일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여기서 오는 유익은 무엇이 있을까요?
마지막을 기대하며 살게 합니다. 마지막을 이미 성취된 사건으로 내 이야기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먼 미래 먼 후손의 이야기가 아니라 내 삶의 이야기로 받아들이게 된다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본문을 보면서, 본문에 깊이 들어가며, 본문과 더불어 호흡한다면, 완성의 때를 바라보게 된다는 것이 가장 큰 유익입니다. 완성의 때를 본다는 것은 잠시나마 여러분들을 최종적인 시기로 데려다 주는 것과 같습니다. 타임머신은 우리에게 없지만, 그와 같은 완성의 때를 맛보고 오늘을 살도록 돕는다는 겁니다.
자, 그러면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다>라는 중요한 이야기를 중심으로 오늘 본문을 찬찬히 살펴봅시다. 이 이야기는 크게 2가지의 이미지가 있습니다. 두 가지의 이미지를 가지지만, 사실은 하나의 이야기입니다. 두 그림을 통해서 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거지요. 공통된 이야기가 무엇이냐면 <구원> 입니다. 우리에게 구원이 무엇인지 아주 선명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미지1. 구원, ‘흑암을 밝히는 빛’
먼저 그중 첫 번째 그림은 칠흑 같은 어둠에 물려내는 태양과 같습니다. ‘빛’이라는 속성은 ‘어둠’을 물려내는 속성을 가집니다. ‘어둠’과 ‘빛’은 이처럼 상반됩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어둠’과 ‘낮’이라는 각 속성은 인간의 삶과 연관 짓는다면, 우리의 생활과 너무나도 밀접한 연관을 가집니다.
빛이 있을 때, 우리는 활동하고, 빛이 없을 때 우리는 활동을 멈춥니다. 그러나 본문은 밤과 낮의 사이클이 아니라, 끝없이 이어질 거 같은 흑암에서 빛이 비추인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이사야 9:1 (NKRV)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사 9:1 부터 보면, 역사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중요한 지명을 먼저 살펴야 합니다.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언급됩니다. 그리고 이곳은 동시에 ‘이방의 갈릴리’라고 불리는 지역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조금만 안다면, 스불론과 납달리는 이스라엘의 12지파 중 2지파의 이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야곱의 12아들의 이름이죠.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지금 ‘이방의 갈릴리’라고 불리는 겁니다.
‘갈릴리’라고 통칭되는 것은 이 주변에 ‘갈릴리’ 호수가 있거든요. 갈릴리를 주변으로 하는 모든 지역이 ‘이방의 갈릴리’로 불리는 겁니다.
‘이방의 갈릴리’의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백성인데 이들이 모두 ‘이방인’이 되었다는 겁니다. 잘 이해되지 않는 간극은 우리가 역사를 어느정도 알아야 합니다. 열왕기상하를 통해서 알 수 있지요.
요약해서 들려드리면, 이 이야기는 북이스라엘의 멸망을 가르키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바벨론이 세계를 제패하기 직전에 앗수르, 또는 앗시리아라는 제국이 전 세계를 제패했습니다. 가장 잔인하고 무서운 제국으로 생각됩니다. 단순히 사람들을 잔인하게 죽이는 것 뿐만 아니라, 이들은 민족의 정체성까지 말살했던 제국이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북쪽 이스라엘 사람들, 즉 갈릴리를 둘러싸고 살고 있던 이스라엘 민족들이 모두 외국인들과 피가 섞이면서 민족적인 개념과 정체성이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이스라엘 민족으로 불릴 수 없는 지경이 이르렀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기에는 혈통적으로 심각한 결함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방의 갈릴리’라고 불렸습니다.
이러한 정체성이 말살되었다가 회복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저는 이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한다면, 남성성을 상실한 남자가 한 가정을 이루어 가정의 회복을 이루는 일에 가깝다고 생각됩니다. 말살된 민족의 정체성, 그리고 그들과 하나님의 관계가 그토록 상실되었기에 다시 회복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이사야 9:2 (NKRV)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
이러한 좌절된 삶의 형태가 흑암 가운데 살아가는 모습을 그려집니다. 1-2절의 모습입니다. 수치와 멸시 속에서 도저히 회복할 수 없는 흑암 속에 살아가던 이들입니다. 특히나 사9:2 을 보면, 사망의 그늘진 땅에서 이들이 살아갔다고 말합니다.
모두 비유적인 것이겠지요. 그러나 한번 상상해봅시다. 밤낮 없이 흑암이 지속되는 땅에서 이들이 살아갑니다. 우리가 어둠 속에서 생활해야만 한다고 생각해봅시다. 무슨 일을 할 수 있습니까.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겁니다. 걸어가려고 하면 어디 걸려 넘어지기 십상이고, 크게 다칠 우려가 큽니다. 그래서 어두운 곳에서는 더듬거리며 다닙니다. 두발로 걷기보다는 기어다니는 것이 안전합니다. 이들의 삶 또한 그렇습니다. 자동적으로 겸손해지는 겁니다. 서서 살아갈 수 없고, 엎드리고, 기어다니는 삶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물론 왜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이토록 어려운 시련을 주셨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떠남으로 스스로 자초한 일이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의 측면에서는 비난받을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끊임없이 돌아오라, 제발 돌아오라는 수 없이 외치시고, 이전에도 수 없이 자기 희생적인 사랑으로서 붙잡으셨기 때문입니다.
<지도>
그런데 놀랍게도 아무런 구원의 희망이 없는 이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섬광과 같이 빛으로 임하십니다. 그곳이 바로 특별히 <스불론과 납달리 땅>으로 임하십니다. 이곳은 특히나 이스라엘 역사상 침공을 많이 받았던 곳입니다. 먼저 <납달리 땅>에 공격받고, 이어서 붙어있는 <스불론 땅>도 연이어서 공격을 받았습니다. 가장 흑암이 짙은 이곳에 하나님께서 임재하신다는 겁니다. “이방의 갈릴리” 모두가 흑암의 땅이지만, 그 중에서도 납달리와 스불론이 더 흑암이 깊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바로 이러한 곳에 주님께서 빛으로 임재하신다는 겁니다.
실제로 우리가 지난주에 들었던 나사렛 사람으로 불리우시는 예수님, 또 나사렛의 동네에 살고 있는 마리아, 그리고 요셉의 가정에 잉태되신 예수님이 이곳에 임재하심으로 성취되었습니다.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이것으로 말미암아 성취된 겁니다.
스불론 땅에 나사렛이라는 동네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공적인 사역을 하시면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곳이 갈릴리 주변에서 가장 많은 활동을 하셨습니다. 특히 납달리 땅에서 가장 많이 활동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의 구성도 갈릴리 호수에서 물고기를 잡던 어부들이 가장 많았습니다.
예수님께서 활동하시던 때에도 갈릴리 지역은 순수 유대인들은 1/3 정도에 불과했다고 말합니다. 여전히 “이방의 갈릴리”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그곳에서 가장 많은 활동을 하시면서, 아무 소망 없던 이들에게 소망되어 주시고, 구원을 바랄 수 없는 이들에게 흑암에 비추인 빛과 같이 구원을 베푸셨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나눈 구원의 첫 번째 그림입니다. 흑암이 가득한 곳에 빛으로 임하신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한 아기의 나심으로 말미암은 섬광과 같은 구원입니다. 하나님께서 아기가 되심으로 이뤄진 일입니다.
이미지 2. 구원, ‘전쟁을 없애는 불’
두 번째 이미지는 무엇이냐면, 이사야 9:3-6 까지 연결되는 이미지입니다. 바로 전쟁의 이미지를 이야기 합니다. 승리의 이미지를 이야기하는 한편, 보다 궁극적으로는 이 전쟁이 사라지는 이미지를 말합니다.
이사야 9:3 (NKRV)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하게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눌 때의 즐거움 같이 그들이 주 앞에서 즐거워하오니
사 9:3 은 앞선 1-2절을 잘 연결하는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3절의 주된 내용은 구원이 임한 그 땅의 즐거움과 기쁨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추수하는 즐거움 또는 전쟁에서 승리하여서 탈취물을 나누는 즐거움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또한 우리에게 상상이 필요합니다. 저는 시골에서 살았다 보니, 추수의 즐거움은 곧 마을의 잔치로 연결됩니다. 온 마을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평소 먹지 못했던 고기도 실컷 먹고, 모두의 웃음 소리가 떠나지 않습니다. 그곳 가운데서 슬프거나 우울한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가 기뻐하며 즐거워하는 거죠.
탈취물을 나누는 즐거움도 유사합니다. 앞선 추수의 기쁨은 고단한 추수의 노동에 이은 기쁨이라면, 탈취물을 나누는 기쁨은 전장으로 떠나보낸 이가 간절히 만나기를 원하는 소망과 더불어, 다시 돌아오고 싶었던 군인들 또한 돌아와 지난 어려움들을 모두 물 씻듯이 씻어버리는 상황입니다. 뿐만 아니라 탈취물로 말미암아 힘겹게 살아가던 가정의 형편이 풍요로움이 온전히 회복되는 순간으로서 기쁨, 그리고 즐거움을 말하고 있습니다.
한편 이것이 완성된 이야기가 아니라, 논리적인 관계의 꼬리를 계속 이어 갑니다. 이러한 성취가 어떻게 가능한지, 4절이 등장하고, 또 4절이 어떻게 가능한지 5절이 등장하고, 또 5절이 어떻게 가능한지 궁극적으로 6절이 등장하는 식입니다.
이사야 9:4 (NKRV)
4이는 그들이 무겁게 멘 멍에와 그들의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주께서 꺾으시되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셨음이니이다
사 9:4“이는”으로 연결되지요. 이들이 이렇게 기뻐할 수 있는 이유는 압제자의 멍에와 채찍과 막대기를 제거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전쟁의 이미지를 그리고 있지만 양쪽이 팽팽하게 대립하는 전쟁이 아니었습니다. 일방적으로 압제당하고 있던 전쟁이었습니다. 즉, 구원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상 완전히 패배한 것이고, 짓눌려 살아가는 패배자의 삶 속에서 구원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특히나 “미디안의 날”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미디안의 날이 4절을 이해하기에 가장 적합한 예시입니다. 바로 그 예시를 언급하는 거지요.
성경에서 미디안의 날은 곧, 기드온과 그의 300명의 용사가 미디안 군대 13만 5천명을 이긴 사건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자신의 전능하심을 보게 하신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능력을 보게 하신 사건입니다. 어떻게 보면 홍해 바다를 갈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신 사건과 같은 놀라운 구원이었습니다.
원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디안 군대와 싸우려고 모였습니다. 처음에 모인 숫자는 3만 2천 명이었습니다. 13만 5천명에 비해서는 크게 열세였지만, 그래도 무언가를 해볼만한 숫자 아닙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을 통해서 두려워하는 자들을 돌려보내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2만 2천명이 무서워서 집으로 돌아가니다. 그리고 남은 숫자가 1만 명이었습니다. 그래도 특별한 용맹함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 숫자 아닙니까.
이때 하나님께서는 시냇가로 이들을 이끄시면서 두 가지 양상으로 물 마시는 사람들을 나누게 했습니다. 9천 700명은 무릎을 꿇고 마셨고, 300명만 독특하게 혀로 물을 핥듯이 마셨습니다. 그리고 이 소수의 300명으로 미디안 전체 13만 5천명을 이기게 하시고, 그들의 수장까지 죽이게 하신 대 승리의 사건이 미디안의 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 9:5 (NKRV)
어지러이 싸우는 군인들의 신과 피 묻은 겉옷이 불에 섶 같이 살라지리니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사건을 다른 양상으로 펼치실 것인데, 사 9:5 과 같이 펼치신다는 겁니다. 5절에서시작하면서도 “이는” 이 등장합니다. 개역개정에는 번역되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래서 5절과 같은 양상으로 이루신다는 겁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불이 “군인들의 신과 그들의 피 묻은 겉옷”을 태운다는 겁니다. “섶 같이 갈라진다”라고 말합니다. 무슨 말일까요. 이들의 무장이 불에 타는 지푸라기처럼 사그라진다는 겁니다. 지푸라기는 불을 처음에 일으키는 굉장히 잘타는 불씨 재료입니다. 대신 순식간에 타들어가 사라져 버립니다. 전쟁터의 군인들의 갑옷과 그들의 무장이 이같이 불탄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전쟁이 지속될 수 있을까요?
다르게 말한다면 전쟁터에 있는 군인들의 살의를 제거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이렇게 펼치겠다는 겁니다. 앞선 4절의 압제자들의 멍에와 채찍과 막대기를 제거하시는데, 바로 이러한 살의와 적의를 제거하시는 방식으로 없애시겠다는 겁니다. 계속해서 우리의 생각을 뒤집습니다. 반전을 계속해서 보여주십니다. 우리는 멍에와 채찍과 막대기를 하나님의 힘으로 꺽으실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방식보다는 내면의 미움과 질투와 시기, 분노를 없애시는 방식으로 일하십니다.
이사야 9:6 (NKRV)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리고 이제 대망의 사 9:6 로 이어집니다. 4절과 5절에 있었던, “이는”이 6절에서도 동일하게 시작됩니다. 그래서 논리적으로 3-6절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또 그래서 설교를 시작하면서 <한 아기>가 그토록 중요하다고 말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남으로 말미암아 앞선 이야기를 모두 성취하시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가장 밝고 선명하게 무언가를 그려야 한다면, 바로 이처럼 하나님께서 <한 아기>로 태어나시는 것을 말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오심으로 말미암아 그의 구원 사역을 이루시는 겁니다.
이 사건은 하나님께서 약해지심과 같습니다. 우리와 같이 상처 입으실 수 있는 인간의 몸으로 오셨습니다. 피 흘리시고, 또 마침내는 죽음까지 경험하셨습니다. 우리와 같이 모든 고통과 어려움들 경험하시는 겁니다. 왜 이렇게 고통당하시는 겁니까. 우리를 위한 고통 당하심입니다. 이유가 있다면, 우리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피를 흘리시고, 자신을 아낌 없이 내어주시는 겁니다. 약해지심으로 주시는 겁니다.
여러분들은 이 하나님의 사랑의 이야기, 즉 사람이 되셨다는 이야기에 무슨 힘이 있나 생각할 수 있습니다.
*참고: 1차대전 때 병사들이 많이 부른 캐럴… ‘고요한 밤’ 탄생의 비밀 (chosun.com)
[브릿지]
이 이야기가 조금 구체적으로 들릴 수 있는 한 예화를 여러분들에게 들려 드릴려고 합니다. 여러분들은 혹시 캐럴로 인해서, 전쟁이 그친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오늘 우리 청년부 또한 성탄을 준비하면서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을 부르는 것으로 시작하지요. 그 뒤에는 <뿐이고> 율동으로 이어지지만, 시작은 캐롤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캐롤이 굉장한 힘이 있는 찬양이었습니다.
바로 전쟁을 그치게 한 곡이었습니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어둠에 묻힌 밤 주의 부모 앉아서 감사 기도 드릴 때, 아기 잘도 잔다, 아기 잘도 잔다.”
예수님의 탄생을 기뻐하는 이 곡, 무엇보다도 아기로 오신 예수님을 보는 이 찬양은 특별하게 없어 보입니다. 승리하신 예수님도 아닌, 아기로 오신 예수님을 찬양한 것 이것이 무슨 힘이 있을까 싶습니다.
역사상 가장 참혹했던 전쟁이라고 평가 받는 전쟁이 세계 1차대전입니다. 병사 900만명 이상이 죽은 전쟁이었습니다. 사라예보 사건을 기점으로 영국, 프랑스, 러시아 삼국의 협상국과 미국, 그리고 또 다른 진영은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동맹의 충돌이었습니다. 강대국들 간의 치열한 전쟁이었습니다. 전쟁이 발발하고 6개월이 지난 전선은 어느새 ‘지옥도’가 되었습니다. 매서운 추위 속에서 연속되는 참호전이었습니다. 밤이 되면 호각 소리에 병사들이 돌격해 오고 기관총으로 대응하는 일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던 1914년 12월 24일 밤은 이상하리 만큼 정적만 흘렀습니다. 먼저 독일군 부대에서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어둠에 묻힌 밤” 양쪽에서 서로 노랫 소리가 오고 가며 동화같은 상황들이 벌어졌습니다. 전쟁이 있었던 여러 전선에서 동일한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특히 이프리(Ypres)시 근처에는 독일군과 영국군이 고작 수십 미터의 무인 지대를 두고 대치했습니다. 이곳에서도 캐롤이 울려퍼지며, 서로 휴식 시간을 두자고 이야기합니다. 각 군에서 가수 출신의 병사가 흉벽 위에 올라가서 열창하며 서로 정답게 인사를 나누고 크리스마스 트리를 세우고, 서로 담배를 권하고, 초콜릿과 술을 교환하는 초현실적인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심지어 어떤 곳에서는 축구까지 했다는 내용들이 있습니다. 정말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당시의 기록물들이 이를 증언합니다. 당시에는 보안이 엄격하지 않아서 카메라를 휴대할 수 있었고, 역사적인 사진과 편지들이 무수히 많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 모두 왜 자신들이 싸우는지 되묻기 시작했습니다. 아마도 당시 상황이었다면 그대로 종전이 되었을 것으로 모두 입을 모읍니다. 다만 전선에서 멀리 떨어진 수뇌부에서 이 소식을 듣고, 캐롤을 부르면 총살 등 엄벌하겠다는 엄포가 있으면서 다시금 참혹한 전쟁이 되고 말았습니다.
비록 마지막은 비극적이지만, 이브에 찾아온 평화 이 이야기가 참 놀랍스니다. 가장 큰 적개심은 정작 전선으로부터 가장 먼 곳에 있을 뿐이었습니다. 실제로 피를 흘리고 싸우는 전선에서는 이들이 왜 싸워야하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피 흘리는 적개심을 한 순간에 사라지게 하고, 평화를 불러 일으킨 것이 바로 <캐롤>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하듯 하나님이신 주님께서 아기로 오셨다는 것이 이 캐롤입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캐롤은 아무 힘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치열하고 적개심이 가장 높을 것처럼 보이는 전선을 평화롭게 만들만큼 강력합니다.
[적용/결단]
이처럼 하나님의 약하심을 보며, 우리는 지극한 사랑을 느낍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실제로 임재하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와 같은 연약한 모습으로 오셨다는 것이 놀라운 감동이 아닙니까. 하나님이 연약한 아기로 오셨다는 놀라운 소식을 우리는 접하며 기이한 경외감에 사로잡힙니다.
그리고 1914년에 있었던 피흘리는 전장 속에서 평화가 깃든 것처럼 우리 또한 적개심을 넘어 상대방의 총구를 향해 나는 무장을 해제하고 먼저 나아갈 수 있는 용기를 얻을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감동과 평안이 있다면, 여러분들 또한 하나님의 사랑하심으로서 이제 다른 이웃을 사랑할 수 있음을 믿으십시오.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말미암아 흑암에 임한 태양처럼, 또 전쟁의 무장을 불사르는 불처럼 우리에게 평안을 이미 주셨습니다. 이제는 이를 믿고 우리가 한 걸음을 옮겨야 합니다. 주님의 사랑을 바라본다면, 이처럼 겨울을 녹이는 봄처럼 여러분들의 마음에 용기가 생길 것입니다.
*말씀-결단찬양-기도제목1-기도제목2-축도-송영
지난 시간에 이어서 다시금, 시간을 뚫고 찬양합니다.
기도제목 1.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를 채워주소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나도 나를 사랑하게 하시고, 또한 우리 가운데 서로 사랑함을 가득하게 하소서. 우리 안에 있는 적의와 미움의 쓴 무장들이 섶과 같이 불타게 하시고, 오직 하나님의 사랑만 꽃피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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