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모데후서 1장 9-1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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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것을 지키라(딤후 1:9-18절)
오늘 묵상은 11절의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가 중심입니다. 이 복음은 9~10절을 의미합니다. 그러면서 내가 이 복음을 위해서 세우심을 입었고, 너도 또한 그렇다는 것입니다. 너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5~19절은 다른 이야기입니다. 사도 바울을 버린 사람들과 오네시보로에 대한 이야기인 것입니다.
우선 9~10절은 구원에 대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셔서 거룩한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부르심, 즉 소명이라는 말입니다. 창세 전에 하나님께서 구원 계획을 세우시고 때가 차매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여기서 행위대로 가 아니라는 것은 우리를 부르신 부르심이 우리의 행위로 인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값없이 은혜로 부르심을 입은 것입니다.
우리는 이 소명을 1차적 소명, 즉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받은 소명이라고 부릅니다. 이 부르심이 바로 거룩한 소명인 것입니다. 즉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게 하시기 위함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부르심의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부활의 산소망이 있게 하셨다는 말입니다.
사실 여기까지는 수식어입니다.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를 위해서 복음을 설명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다고 말합니다. 이런 설명들을 하는 이유는 부끄러움이라는 앞 단락의 주제 때문입니다. 즉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에 걸려 있다는 말입니다. 즉, 나를 부르신 부르심은 거룩한 소명으로의 부르심인데 그 소명은 이 복음을 위한 선포자,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다는 사실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끄러워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와 유사하게 바울은 딤전 2:7에서 자신을 '전파하는 자와 사도, 스승'으로 소개하고 있기도 합니다. 여기서 '선포자'는 복음을 전하는 자를 가리키며 '사도'는 복음 전파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를 위임받은 제자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교사'는 기독교 진리를 체계적으로 잘 가르치는 사람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전도자로 교사로 사도 이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고난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복음을 위해서 고난을 받기 때문에 고난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12절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이게 무슨 의미일까요?
여기서 '내가 믿는 자'는 바울이 믿고 의지하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9절 말씀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을 거룩한 부르심이라고 했고 이 복음을 위해 세움 받았다고 했던 사도 바울은 이제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안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분이 지키실 것을 확신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8:35~39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 세상 그 무엇도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고백했었습니다. 여기서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은 전도자로서 바울의 사명을 뜻하는 것이며 이것을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받은 것을 말합니다. 그날까지는 주님 다시오실 때까지를 의미합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 다시오실 때까지 능히 지키실 주님 때문에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제 디모데에게 부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3절입니다.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을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편지는 단지 그리움 만이 아닙니다. 복음을 향한 사도 바울의 거룩한 열정이 녹아 있습니다.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내가 본을 보인 것처럼 디모데 너도 주님 다시오실 때까지 그 거룩한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께서 이것을 깨닫게 하고 가능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 아름다운 것, 생명의 복음을 지켜나가라는 것입니다. 혼탁한 세상입니다. 목회자로서 디모데는 영지주의와 율법주의 그리고 이 둘이 혼합된 각종 이단들의 위협으로부터 그리스도의 생명의 복음을 지켜내야 합니다. 성령의 도우심없이 불가능한 일입니다. 고난을 받는 것을 두려워해서도 안 됩니다. 그래서 사도는 내가 이 복음을 위해서 고난 받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당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또한 우리 시대에 이 아름다운 복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지켜야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다른 교훈을 전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세상입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우리를 부르신 부르심이 무엇인지 생각해야 합니다.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신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값없이 은혜로 된 것입니다. 이 복음을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지켜내야할 거룩한 책임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를 앞서간 믿음의 선진들, 즉 사도 바울과 디모데와 같은 믿음의 선진들을 본받아 우리 시대에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증거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 새로운 한 주간, 새로운 한 달이 시작되었습니다. 복음 안에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승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오네시보로의 집에
여기서부터는 일종의 추신(追伸) 부분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처한 개인적 상황을 디모데에게 알려주면서 오네시보로의 집에 대해 부탁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15절에서 사도 바울은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린 이 일을 네가 아나니 그 중에는 부겔로와 허모게네도 있다고 말합니다. 문제의 핵심은 버렸다는 말입니다.
버렸다는 말 '아포스트레포'(ajpostrevfw)는 다른 곳에서 진리를 저버린 거짓교사를 가리킬 때 사용되었습니다(딤전 6:5; 딛 1:14). 문제의 핵심은 이 말이 교리적인 배교를 의미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맥상으로 볼 때 이 말은 교리적 배교(背敎) 행위 라기 보다는 아시아의 모든 교인들이 감옥에 투옥된 바울을 돌보지 않거나, 또는 바울을 위해 법정에서 증인되기를 거부한 행위를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합당해 보입니다. 왜냐하면 곧 이어 16~18절에서 바울은 아시아의 모든 사람들과 달리 오네시보로가 감옥에 있는 자신을 돌아본 것에 대하여 감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2차 투옥되어 죽음을 눈 앞에 둔 상황에서 아시아의 모든 사람이 바울을 홀로 내버려두고 떠난 것은 매우 참기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그들 중에서 특별히 '부겔로' (Phygelus)와 '허모게네'(Hermogenes)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은 바울은 물론 디모데도 이 두 사람이전부터 매우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디모데에게 이 사람들을 올바르게 알라는 의미로 실명을 이야기하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그러나 오네시보로의 집처럼 힘을 실어주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가 이룬 교회에서 오네시보로의 집처럼 어려울 때 함께하고 힘을 주는 그런 성도가 많아지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오네시보로는 누가(딤후 4:11)와 더불어 옥중에 있는 바울을 돌아본 사람입니다. 오네시보로가 어떤 사람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그의 집이 에베소에 있었다는 사실만 알 수 있을 뿐입니다(딤후 4:19). 그리고 17절에 의하면 그는 옥중에 있는 바울을 만나기 위하여 여러 차례 로마에 있는 감옥을 방문한 바가 있으며 극진히 바울을 섬겼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특이한 것은 바울이 오네시보로 개인을 위하여 축복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집'에 대하여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바울은 오네시보로의 후의에 감사하여 오네시보로는 물론 그의 모든 가족에게까지'하나님의 긍휼', 즉 구원의 은총과 돌보심의 은혜가 있기를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오네시보로는 사도 바울이 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핵심이 있습니다.
8절에 부끄러워 하지 말고, 12절에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그리고 16절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는 지금 두 번째 투옥된 상황에 대한 이해가 버린 사람과 남아 있는 사람 사이의 간격이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이로인해 자신에게 무슨 손해라도 있을까 염려하여 사도 바울을 떠나간 사람들이 바로 부끄러워하는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 부끄러워한다는 말은 곧 복음을 위해 고난 받기를 거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오네시보로는 그런 사도 바울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어려울 때 힘을 다해 돕고 위로하고 격려자가 되어주었습니다. 부지런히 찾아와 만났습니다. 귀하고 귀한 동역자입니다.
그래서 어제와 오늘 묵상의 핵심은 부끄러워하여 버린 사람, 부끄러워하지 않고 곁을 지킨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핵심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우리 시대에 우리는 복음을 부끄러워 떠나가는 사람인지 말입니다. 또한 교회가, 공동체의 일원이 힘들고 어려울 때 외면하여 떠나가는 사람은 아닌지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탁하신 그 아름다운 복음을 지키고 살아내야 할 사람들입니다. 이것을 기억하시면서 오늘 하루도 복음과 함께 시작하시기를 소망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