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위기(2023) 11:4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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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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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 11:44–45 “44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땅에 기는 길짐승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45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지난 주 예수님을 만나면 인생에 사건이 발생하죠 그래서 ‘사건의 지평선'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의 7장은 긴 가르침을 중심으로 다양한 그룹인 1)유대인 2)무리 3)어떤 사람 4)바리새인과 대제사장들이 등장합니다. 그러니까 요즘 같으면 ‘예수 믿으세요'라는 말에 대부분의 사람들의 반응이라고도 해볼 수 있습니다. 물론 사람들의 반응이 중요합니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의 반응에 촛점이 맞춰지기 쉽지만 실제로는 그런 사람들의 오해와 잘못을 바로 잡는 예수님의 말씀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놓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자신이 생각 또는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은 인간 설교자들에 의해 본문이 해석되고 의미를 확인하기 위해 연구하는 것과는 질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하나님의 뜻'은 예수님만 아시는 것인가라는 질문에 당연히 맞습니다. 하지만 이미 하나님께서는 레위기라는 말씀을 통해서 하셨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이미 그들이 잘 알고 있는 모세오경 그리고 시편과 선지자의 글들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뜻하심을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7:28 “28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외쳐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알고 내가 어디서 온 것도 알거니와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니라 나를 보내신 이는 참되시니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나” 라는 것입니다.
레위기의 위치는 출애굽기 (25-40)장의 성막에 관한 내용이 나오고 레위기가 자리를 잡습니다. 그리고 민수기 (1-10)장의 성막이 이어집니다. (표 1, 2)
그러니 주제는 성막이고 성막이 어떻게 하나님과 연결되는가를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죠. 여기 ‘성막'을 의미하는 단어가 우리가 살피고 있는 요한복음의 ‘거하심' 즉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인간의 몸에 거하심과 같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성막'에 거하신다는 것 까지는 알겠다고 하면 ‘성막'과 백성 즉 나와의 관계는 무엇인가를 ‘레위기'가 말하고 있고 레위기를 압축해서 한 단어로 표현한다면 ‘거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표 3,4,5 거룩 설명)
출애굽기 19:5–6 “5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는 말씀이 ‘성막에 거하시는 하나님'과 백성의 관계에서 드러나게 된다. 즉 거룩한 백성이 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죠. 정의적으로 명제를 내린다면 1. 하나님께서 백성으로 불렀다. 2. 백성의 특징은 ‘거룩'이다.
여기에서 이해해야 할 내용은 우리가 쉽게 사용하는 ‘거룩하신 하나님'이라고 할 때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무엇이며 이러한 ‘거룩하심'이 우리가 ‘거룩한 백성이 된다'는 것과의 연관성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렇게 하면 거룩하게 된다'는 의도에서 요한복음의 유대인들이 ‘이렇게 하면'처럼 이해합니다. 결과는 이런 것이죠 ‘내가 하나님의 율법을 지켰으니' 나는 거룩한다는 도식이 형성된 것인데 여기에서 ‘율법을 지킨다' 그래서 다른 사람과 구별되었다. 그 방식 ‘유대인의 전통에 따라'서 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께서 너희가 이렇게 하면 ‘거룩'하게 된다하신 것이 바로 ‘레위기'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유대인의 방식'이 아니라 ‘레위기 즉 하나님의 방식대로' 하면 되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성경대로'라고 할 때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처럼 예수님께서도 5장, 7장에서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당연히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서 완전 숨겨진 비밀처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말하는(지킴으로 거룩하다고 믿는) ‘모세의 율법'에 있는 하나님의 의도( 하나님의 뜻) 이거야라고 ‘말씀과 행하심'으로 드러내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 대표적이 예가 안식일에 ‘38년된 병자'를 고치신 사건입니다.
그렇다면 ‘거룩'이라는 단어는 그렇다치면 과연 ‘거룩'이라는 안에는 무엇이있는가하는 구체성이 ‘레위기'가 담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레위기'를 연구하면 매우 ‘시스템'으로 정교하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그럼에도 누구든지 ‘선명하게' 알 수 있는 ‘표지판' 과 같은데 먼저 선입견은 ‘제사법'이다고 단정해서 기피한다는 것이죠. 물론 이해를 위해 제사법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오늘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은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며 하나님의 요구입니다.(그림) 함께하려면 성막이라는 곳에 거하시는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것인데 요즘 대부분 이것을 영적인 개념으로 이해를 합니다. 하나님께서 임재하여 계시는 성막을 중심으로 주위에 텐트를 치고 광야를 이동하는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지극히 현실적이죠. 그래서 현실을 사는 이스라엘 백성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하며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영적인 것 뿐만 아니라 대단히 현실적이라는 것이죠.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우리 생활 모든 곳에 ‘반도체'라는 작은 부품이 광범위하게 사용되는데 이 부품을 생산하는 과정에 ‘클린룸' 즉 먼저 하나도 허용되지 않는 공간에서 만들어지는 것이죠. 그러니 들어가려면 철저하게 먼지를 제거하는 과정을 거치고 또한 실제 반도체를 생산할 때도 엄청 강한 약품을 사용하면서 생산이 됩니다. 완전히 구별된 것이죠.
거룩은 이처럼 하나님의 하나님이심을 드러내시는 것인데 말 그대로 먼지 한톨까지 허용되지 않습니다. 여러분 생각에 그래도 한 번은 그럴수 있지 않느냐는 우리 편에서의 생각이 있는데 만일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께서 전능하신 신'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비록 우리가 사용하는 ‘완전하신 하나님'이라는 완전의 의미가 순도 100%로가 아닌 99.9%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99.9라고 생각한다는 것이죠.
자! 그럼 하나님의 거룩은 순도 100이라고 한다면 문제는 일상의 삶이 먼지 투성인 우리가 어떻게 거룩을 유지할 수 있으며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나아 올 수 있도록 주신 법이 ‘제사법'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제사법을 통해서만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죠. 그리고 그 중심에 ‘성막’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제사법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존재인 우리가 거룩하다 할 수 있는가 맞습니다. 하지만 몇 가지를 더 살펴야 합니다.
여러분 거룩하다하는 의미가 그렇다면 그 반대 즉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하는 상태는 어떤 상태인가? 교회에서 자주 사용하는 말 중에 ‘속되다'하는 표현이 있습니다. 출3장에서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데 출애굽기 3:1 “1 모세가 그의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 떼를 치더니 그 떼를 광야 서쪽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출애굽기 3:5 “5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 거룩한 땅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
거룩은 ‘구별’의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에 ‘영역'으로 이해하면 좋습니다/ 바로 거룩의 영역 밖이 ‘속'의 영역인데 대부분 우리는 ‘세상'을 그렇게 말하고 ‘세상은 속된 것'이다고 합니다. 어느정도 의미상은 맞습니다. 왜냐하면 제사법에서 바쳐진 동물들이 ‘성스럽다' 이는 ‘온전하다'는 의미이지만 어느순간부터 ‘하나님께 속한 것은 성스럽다'이렇게 말합니다. 안타깝게도 교회에 다양한 가구들, 필요한 여러가지 것들을 ‘성물'이라고 말합니다. 좋지 않습니다.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성물’이라고까지 이름 붙여야할까요? 물론 구약의 시대 즉 출, 레위기에서는 성물이 맞습니다. 오히려 지켜야할 의미와 본질은 사라지고 이렇듯 ‘성물'이라는 표현만 남아서 사용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것이죠.
그래서 ‘거룩하다'는 것과 ‘속되다'는 것은 영역의 의미에서 볼 때 모세가 하나님의 영역 거룩한 곳에 설 수 없다는 것이죠. 우리가 사는 현실은 말 그대로 ‘속’된 것이고 불교에서는 ‘속세'라고도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거룩의 영역에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속된 영역에 살고 있습니까? 답하기가 참 애매하죠. 구약적 표현에서는 ‘속된 곳에 있다'가 맞습니다.
그래서 순서적으로 거룩의 영역은 지성소> 지성소 앞> 성막 뜰> 진 즉 텐트를 치고 거주하는 공간> 진 밖의 순으로 영역이 나눠집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은 영역으로 ‘속'인데 속이 부정적인 의미를 갖는가라고 생각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은 속된 것이다는 표현도 들어보셨고 또 하나가 세상은 부정하다는 표현도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속' 역시 둘로 나뉘는데 ‘정결'과 ‘부정’입니다. 역시 좀 들어본 단어들이죠. 그렇습니다. 우리가 세상이 부정하다는 의미에서 말하는 것인데 우리는 ‘속과 부정'을 같이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죠.
의외로 ‘정결'과 ‘거룩'을 함께 생각하지만 레위기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씀드린다면 ‘정결'이 정상적인 상태이고 하나님게 나아가려면 즉 ‘거룩'한 영역으로 가려면 ‘제사'가 필요하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죠. 그렇다면 ‘부정'은 무엇인가요? 정결한 상태에서 이러저러하면 부정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제사에는 바쳐지는 ‘제물'이 있어야 합니다. 대표적으로 ‘양’이 많은데 양은 ‘정상적인 상태'가 바쳐질 수 있는 것이고 하나님께 바쳐진 상태가 ‘거룩'한 상태가 되는 것이죠. 그러면 신약 로마서에서 바울이 이렇게 이야기한 것을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로마서 12:1 “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여기에 거룩한 산 제물이라고 ‘너희 몸'을 말할때 먼저는 ‘정결'한 상태가 되어야 하죠. 그럼 우리는 ‘정결'을 윤리적인 상태를 먼저 생각합니다. 좋은 생각이지만 그보다 먼저 레위기에서 ‘정결'한 상태가 무엇인가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이런 개념을 모르니까? 자꾸 윤리적인 면을 강조하게 되는 것입니다.
정상적인 양이란 무엇인가요? 우리가 잘 아는 말로 ‘흠없는 양'입니다. 태어난 양이 흠이 없다는 것은 그냥 그대로의 상태, 정상적인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죠. 다시 말씀드려서 ‘정상적인' 상태를 하나님께 바치면 하나님의 영역 안에서 ‘거룩'한 상태가 됩니다.
이제 좀 머리 속에서 정리가 될 것입니다. 부정한 상태에 있다면 ‘정결의식을 통해 정결해야 하고' 다시 ‘제사의식을 통해' 성결 즉 ‘거룩한 상태'로 나아가는 것이죠. 그러면 ‘속된 영역'에서 ‘거룩의 영역'까지 나아가는 것입니다.
반대로 거룩의 영역에서 속된 영역으로 간다는 것은 죄/악/허물, 부정과의 접촉 등으로 정결, 부정 즉 속한 영역에 있게 된다는 것이죠. 유념할 것 중 하나가 부정한 상태에서 거룩의 상태로는 정결의식 또는 제사의식을 통해서만 가능하지만 부정한 상태로 가는 것은 자신의 잘못 뿐만 아니라 영향을 받는 다는 것이죠. 일종의 전염성으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마치 건강한 사람 옆에 있으면 건강해지지는 않지만 감기나 전염성 병원근처에 있으면 전염되어 건강을 잃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레위기는 1-7장 까지 상황에 맞는 제사법을 알려주고 / 8-10장은 제사를 집행하는 제사장은 어떠해야 하고, / 11-16까지 속된 영역에서 정결하다는 것 즉 대표적으로 가정에서 무엇이며 / 17-27장은 공동체 즉 사회에서 어떠해야 하는가/를 담은 것이 레위기이니 다시 말씀드리면 레위기는 ‘거룩하신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해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 생활 지침서'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거룩은 하나님 백성의 궁극적 목표이다. 거룩/정결/부정은 하나님의 백성이 취할 수 있는 세 가지 상태이다. 정결은 거룩과 부정의 중간 상태이자 일반적으로 정상적인 상태인데 부정은 전이성이 있다. 하나님의 백성은 부정의 전이성에 영향을 받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반면 거룩에 이르는 길은 하나님의 방법 즉 예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뜻'인 예수를 믿음으로 받는 것,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것이다. 지난 주 ‘장막절’ 즉 그들이 광야에 있었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막’ 가운데 임재하신 하나님의 요구이신 거룩하심에 대한 요구가 제사를 통해 매일 거룩 즉 구별된 삶을 레위기 하반부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야 하는데 그것을 성막이신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시고 보여주신 ‘올바름’ 이것이 절의 ‘공의롭게’ 입니다. 레위기의 법은 영원성을 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영원성을 두지 않았다는 것은 제사법에 의한 방식이지 결코 하나님의 거룩하심의 요구는 분명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통해 완성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안에 담겨 있고 그래서 눈에 보이는 예수를 보면서 예수께서 가르치시는 내용을 들으면서 ‘믿음'이 일어나는 것이다.
길로 행하는 것/ 올바른 안식일에 대한 길을 행하신 예수를 말씀과 합치시키지 못한 ‘유대인’들을 저와 여러분은 반면교사를 삼아야 합니다.
신명기 28:9 “9 여호와께서 네게 맹세하신 대로 너를 세워 자기의 성민이 되게 하시리니 이는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할 것임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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