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을 내밀어 이르시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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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손을 내밀어 이르시되
본문 : 마태복음 8장 1-4절
Ⅰ 도입
Ⅰ 도입
Ⅱ 본문주해
Ⅱ 본문주해
1. 수 많은 무리가 따름
1. 수 많은 무리가 따름
마태복음 5장부터 7장은 예수님께서 산에서 말씀하신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산상수훈이죠. 산상수훈의 주된 내용은 “하나님 나라” 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바로 이런 곳이란다 맛보여주셨습니다. 능력의 말씀은 “많은 무리”라고 표현된 대상들에게 울려퍼졌습니다.
2. 무리 속의 나병환자 - 자신을 감춤
2. 무리 속의 나병환자 - 자신을 감춤
그 큰 무리 속에 누가 있었는가 하고 보니, “나병환자”가 있습니다. 2절을 보니 “한 나병 환자가 나아와 절하며 이르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나병 환자가 무리 중에 섞여 있다가,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사람들은 그가 나병환자임을 알아보는 이 상황. 구약의 율법이 결코 허락하지 않는 상황입니다. 이 행위는 금기 행위입니다.
레위기 13장 3절입니다. “제사장은 그 피부의 병을 진찰할지니 환부의 털이 희어졌고 환부가 피부보다 무욱하여졌으면 이는 나병의 환부라 제사장이 그를 진찰하여 그를 부정하다 할 것이요” (레13:3) 나병환자는 예배 규정들과 관련되었을 때 죄를 나타내는 상징입니다. 더럽고 오염된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나병이 치유가 되면 반드시 제사장 앞에 나아가 나병의 나음을 보이고, 정하게 되는 예식을 치러야 했습니다. 레위기 14장 2절입니다. “나병 환자가 정결하게 되는 날의 규례는 이러하니 곧 그 사람을 제사장에게로 데려 갈것이요”
율법대로 하자면 제사장은 나병환자를 향해 “부정하다!” 말합니다. 그의 공동체는 나병환자를 즉시 격리조치 시킵니다. 그와 접촉하면 안됩니다. 병이 옮는 것은 둘째 치고, 그는 율법이 정한 ‘부정한 자’가 되기 떄문입니다. “내가 얘 부모야!” 소용 없습니다. 못 만집니다. 같이 못 지냅니다. “내가 이 사람의 남편이고 아내야!” 다 필요 없습니다. 그와 가장 가까울수록, 그를 잘 알면 알수록 그와의 떨어짐을 가장 먼저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율법이 정한 죄인이기에 나병환자들은 자신을 숨기지 말아야 했습니다. 누군가가 자신에게 다가오려고 하면, 그는 그 즉시 자신의 윗 입술을 가리고 “나는 부정하다! 나는 부정하다!” 외쳐서 그 사람의 다가옴을 필사적으로 막아야 합니다. 이런 그가 지금까지 무리 속에서 자신을 숨기며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다녔습니다. 이 행위는 무리에게도 위험했고 나병환자에게도 위험했습니다. 무리는 그와 닿는 동시에 부정해지니 위험했고, 나병환자는 발각 즉시 돌로 맞아야 했기에 위험했습니다.
질문은 이것이죠. 그는 왜 이 위험을 감내하고 있느냐는 것이죠.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무서움 때문이에요. 돌로 맞아 죽는 무서움보다 세상과의 단절이 더 큰 고통이요, 두려움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두려움과 무서움 속에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소식을 듣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천국 복음을 듣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곳이야! 복음이 선포되니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를 믿습니다. 그의 능력을 믿습니다.
Ⅲ 다리 놓기
Ⅲ 다리 놓기
1. 예수 앞에 나아옴
1. 예수 앞에 나아옴
나병 환자가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올 때에 한 행위를 주목하여 보십시오. 2절입니다. “한 나병 환자가 나아와 절하며 이르되...” 첫 번째, 절합니다. 두 번째 그를 ‘주’로 고백합니다. 천국 복음을 듣고 상처 있는 마음이 열리고 이 땅에 구주로 오신 예수를 예배하는 것. 그렇습니다. 말씀의 순기능이죠. 말씀 듣고 마음 문이 열리고 주님을 만나고 예배하는 말씀의 아름다운 순기능이 오늘 이 자리에서 나병 환자에게 역사한 것입니다. “아! 저분이라면 내가 나의 상처를 열고 나아가도 되겠다는 마음이 들고, 그가 나의 상처를 치유하시겠다”는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이렇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외칩니다.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병은 보통 낫게 해주세요가 맞죠? “주여 나를 고쳐주소서”가 이해 될만합니다. 예수님은 모든 환자들을 늘 “고치셨습니다” 그러나, 나병환자들은 늘 “깨끗함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고침을 받은게 아니라 깨끗함을 받았습니다.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무슨 말입니까. “주님! 나는 더럽습니다! 나는 부정합니다!”라는 외침입니다. 그러자 무슨 일이 있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돌을 던지고, 사랑하는 자들은 외면하며, 격리시켰지만 이 땅에 그리스도로 오신 주님께서는 손을 내미십니다. 그리고 그 손으로 어루어만지시자, 그의 더러움이 덮이고 정결하다 칭함을 받습니다. 이 대목은 그리스도 앞에 나아갈 수 있는 담대함을 확증해주는 장면입니다. 그리스도께 나아감은 담대함을 요구합니다. 창조주 앞에 나아가는 타락한 피조물의 처지가 그렇습니다. 담대함은 어디서 비롯합니까. 정확한 것은 피조물의 어떠함은 아닙니다. 어거스틴의 말처럼 “내가 가진 것은 죄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4장의 증언처럼,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시는 그리스도로부터 말미암습니다.
교회를 다니는 우리 아이들이 매일 직면하는 상황이 “나는 더럽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왜죠? 우리 아이들은 늘 세상에서 질문받는 아이들이거든요. 너 왜 교회다니냐. 믿어서 좋은게 뭐냐. 안믿는 나랑 믿는 너가 뭐가 그렇게 다르냐. 나도 욕하고 너도 욕하고, 나도 부정행위하고 너도 부정행위하고, 나도 음란한 영상보고 너도 옆에서 같이 히히거리며 보고 있고, 도대체 너랑 나랑 다를게 뭐냐, 교회 다닌다고 유세 떨지마라. 이 아이들이 커서 대학에 가면요? 술자리에서 술을 거절하면 대뜸, 너 술만 안마시지 다른 꼼수는 다 쓰지 않냐. 우리랑 다른척 하지 마라. 너도 어차피 더럽다. 이것 아닙니까? 실제로, 우리 아이들과 성인이 된 아이들이 다 거룩합니까? 세상 사람들과 탁월하게 다르게 살아갑니까? 우리의 생각이 다 거룩하고, 우리의 시선이 다 거룩하나요? 주님 앞에 나아가 당당하게 주여 나는 의인이로소이다! 외칠 수 있습니까? 아니라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무엇이 다릅니까. 우리의 아버지 되신 하나님이 우리의 다름입니다. 우리 주님은, 이 땅 가운데에 오신 우리 주님은 우리를 더러운 자리에 그냥 두지 않으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시고, 말씀 듣게 하시고, 그 자리에서 변화되게 하십니다.
2. 예수께 부르짖음
2. 예수께 부르짖음
이 나병환자의 절절한 외침을 저는 시편 57편 1절에서도 발견하였습니다. 시편 57편 1절입니다.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이 재앙들이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 재앙들 속에 주의 날개 그늘 아래, 그는 은혜를 갈구하며 주께 외칩니다. 구약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를 제 마음대로 두 가지 범주를 나누어 보았습니다. 하나는 방금 읽었던 구절이고, 나머지 하나는 열왕기상 8장 23절, 솔로몬이 성전 건축을 끝내고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입니다.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위로 하늘과 아래로 땅에 주와 같은 신이 없나이다 주께서는 온 마음으로 주의 앞에서 행하는 종들에게 언약을 지키시고 은혜를 베푸시나이다”
이 기도와 시편의 기도는 기도의 시작에서 차이를 보입니다. 재앙의 때를 지나고 있는 다윗의 외마디 비명과 같은 기도는 미사여구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지금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바로, 즉각적으로 아뢰며 “주여! 은혜가 필요합니다! 내게 은혜를 주소서!” 외칩니다. 이것이 아버지 앞에 나아가는 자녀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은혜를 구하는 자의 바람직한 자세입니다. 곧 이어 시편 57편 2절-3절은 완전히 나병 환자의 외침과 동일합니다. “내가 지존하신 하나님께 부르짖음이여 곧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로다 그가 하늘에서 보내사 나를 삼키려는 자의 비방에서 나를 구원하실지라 하나님이 그의 인자와 진리를 보내시리라” 그의 선하신 성품에 기대어 하나님께 외쳤던 다윗과, 예수 그리스도의 천국 복음 앞에 그의 능력에 기대어 “나를 고치소서” 하였던 나병 환자의 외침의 결이 제 눈에는 동일하게 보였습니다. 다윗과 나병환자 모두 사람 보기에만 달랐지 창조주 앞에 부정한 존재였고, 다윗과 나병환자 모두 능력의 주 그리스도의 이름을 향한 갈망, 그의 능력에 대한 갈망이 보이는 것이죠.
이러한 모습의 주의 자녀들에게 하나님은 능력을 베푸셨고 우리 주님은 그의 손을 내밀어, 나병 환자를 만지십니다. 이러한 모습의 오늘 저와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은 능력을 베푸시고, 그의 손을 내밀어 우리를 만지십니다. 그 때 어떠한 일이 일어납니까.
3. 회복케 됨
3. 회복케 됨
연약한 우리의 발은 사슴과 같이 바위를 뛰어 오르고, 거룩하지 않은 우리의 눈에는 하나님의 꿈이 담깁니다. 부정한 우리의 입술에 정결한 언어와 찬양이 흘러나옵니다. 세상 사람들 모두 “너도 똑같이 더럽다”고 손가락질 할 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손을 내미시며 “너는 깨끗하게 살 수 있고, 너는 내가 거룩하다고 여기는 내 자녀고, 내가 너를 의롭다고 칭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하여진지라” 이 선언이 우리의 신앙을 강건하게 하는 줄로 믿습니다. 이 장면이 여전히 하루하루 승리를 선포하고 싶으나 패배 속에 좌절하는 연약함을 깨어 부수고 다시 승리를 맛보는 자리로 나아가게 합니다. 이 진리 붙들고 우리의 더러운 입술에 거룩한 언어를 채우고, 우리의 부정한 눈에 하나님의 꿈을 채우며, 걱정과 염려로 갇그한 우리의 인생에 하나님 나라의 찬란한 영광을 채우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우리의 부르짖음에 주님은 찾아오십니다. 애당초, 주께서 안 계셔서 내가 이 어려움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외마디 비명을 지를 때에, 발견하는 것은 나를 향해 내미시는 주의 능력의 손입니다. 나는 더러운 자입니다! 나아가는 우리에게 거룩함과 꺠끗함을 주시며 우리를 치유하십니다.
Ⅳ 삶의 적용
Ⅳ 삶의 적용
1. 예배를 소중하게
1. 예배를 소중하게
주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현장에는, 이러한 귀하고 아름다운 역사가 일어나는 줄로 믿습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예배가 더욱 소중해지기를 원합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어지는 예배의 자리자리에 소망을 가지고 나아오시기를 원합니다. 치료와 회복을 넘어서, 다시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적극적인 자리로 나아가는 소망입니다. 뒤떨어졌다가 원점으로 오는 회복이 아니라, 내가 이전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신앙의 아름다움을 꽃피우는 자리까지 나아가는 회복입니다. 나의 과거의 상처로 말미암은 이상한 종류의 외로움과 자기연민으로부터 온전하여져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가지는 담대함과, 그 자녀가 누리는 당당함으로 나아가는 열망입니다.
그 자리는 냉랭한 자리가 아닐 것입니다. 나병환자와 같이 부르짖으며 나아가는 예배의 자리, 다윗과 같이 은혜의 주요! 외치며 나아가는 그 예배의 자리에 우리의 마음이 냉랭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를 묵상하는 주간, 우리의 마음이 아무런 감흥이 없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예배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묵상하는 이 기간이 기대와 소망 가득하기 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삶에 실질적인 회복과 치유와 채움을 주신다는 믿음 붙들고 우리의 예배를 소중히 여기기를 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