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2.24 주일 청소년 설교/ 마태복음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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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주가 나셨다!
구주가 나셨다!
서론
서론
주님은 우리를 부끄러워 하지 않으시고 모두 받아주신다.
주님은 우리를 부끄러워 하지 않으시고 모두 받아주신다.
오늘날 이력서는 자신을 알리는데 매우 중요합니다.
자기 학력과 경력, 스펙등을 열거하여 자기를 홍보하고 추천하기 때문입니다.
고3 서진이 이야기를 들어보니 ‘자기추천제’로 해서 면접에서 합격했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고대사회에서는 가족 중심의 공동체 사회였기 때문에, 족보가 이력서와 같았습니다.
당시의 이력서는 어땠을까요? 집안과 혈통, 가문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즉 족보야 말로 “나는 이런 사람이야” 라고 말할 수 있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불리한 점이 있으면 이력서를 위조하기도 했습니다.
자기 조상중에 수치스러운 죄를 저지른 자가 있으면 빼버리고,
수준 높은 명문가 출신이라는 것을 내세우기 위함이었죠.
그렇다면 마태는 예수님의 족보를 소개할 때 어떻게 소개할까요?
마태는 이상하게도 고대의 여타 족보와는 달라보입니다.
족보에 여자 이름이 네명이나 등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은 꽤나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고대 가부장사회에서 여자를 족보에 언급하는 일은
거의 전무하기 때문이죠.
그럼 그 여인들은 훌륭하고, 세상이 알아주고 인정해줄만한 여인들이었을까요?
아니오 그렇지 않습니다. 대부분 다 이방인이었죠.
다말과 라합은 가나안사람, 룻은 모압사람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굉장히 부정하게 취급했죠.
이들은 성전에 들어가 예배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족보에 버젓이 등장하고 있는 거죠.
마태는 이 여인들의 이름을 언급하면서,
이 여인들과 관련된 어떤 이야기들을 독자들에게 알리고 싶어하는거에요.
어떤 일일까요?
1:3에 보면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았다고 되어있습니다.
어떤 일이 일어난걸까요?
창세기에서 다말은 자기 시아버지인 유다를 속여서 자신과 잠자리를 갖게 만들죠.
이런 것을 근친상간이라고 하는데 도저히 도덕적으로도 있을 수 없는 일이고,
하나님의 법에도 완전히 어긋나는 일이었습니다.
마태는 이 사건을 기어코 소환해서 수면위로 올리고 싶어하는 것이죠.
이런 수치가 묻어있는 가정에서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1:5에서는 라합이란 여인도 등장합니다.
그녀는 가나안 사람인 것도 모자라 매춘부였습니다.
6절에서는 다윗왕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마태는 다윗을 소개할 때,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았다”는 표현을 합니다.
어떤 의미로 마태는 이렇게 표현한 것일까요?
족보에 왕의 이름이 들어가면 최고이겠지만, 마태의 의도는 그 점이 아닙니다.
왜 그냥 여자의 이름을 쓰지 않고, 우리아의 아내라고 표현한 것일까요?
우리아의 아내의 이름은 ‘밧세바’입니다.
마태는 이것 역시 이스라엘의 비참한 역사를 끄집어내고 싶어하는 의도인거죠.
이 안에는 다윗의 치명적 흠이 포함되어있죠.
다윗은 밧세바를 얻기 위해서, 자기를 위해 목숨을 걸고 전장에서 싸운 장수 우리야를
전쟁 최전방으로 배치하며 죽게 만들어버렸습니다.
우리야가 죽고나자 다윗은 밧세바와 결혼합니다.
마태가 밧세바라는 이름을 뺀 이유가 바로 이것이죠.
다윗의 치부를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런 치명적 흠이 있는 인간에게서 메시야, 예수님이 오셨다는 것입니다.
보세요. 도덕적 실패자, 간음과 근친상간, 성적인 범죄와 매춘을 저지른 남녀가 보입니다.
남자 조상들이었던 유다와 다말도 실패자들이고 수치를 가진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법에 따르면 그 누구도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가 없는 자들이었어요.
하지만 오늘 족보를 통해 무엇을 알 수 있나요?
세상에서 어떤 상황에서라도 배제되고, 차별당하고, 그 어떤 죄를 지은 수치스러운 자라도,
실패자라도, 심지어 하나님의 법을 어긴 어떠한 죄인이라 할지라도
예수님의 가족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사람이건, 내 혈통이 어떻고 스펙이 어떻건, 내 이력서가 어떻건, 내 부모가 어떻고,
내 가진 것이 얼마건, 수행평가를 어떻게 받고, 선생님들과 친구들에게 어떤 평가를 받건,
내가 얼마나 훌륭한 인격과 성품을 가지고 도덕적으로 살건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면 그 분의 은혜가
여러분의 죄를 덮고
여러분과 그 분을 연합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더럽고 부정해지는 부정함은 부정한 것과 접촉하면 그렇게 되었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부정한 자들과 함께 하셔서
자기가 더러워지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들을 순결하게 만드셨습니다.
이 분이 주님이시죠.
착한 사람만 용납되고, 악한 사람은 배제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은혜로만 받아들여집니다.
예수님께서 이루어주신 일을 믿음으로만,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십니다.
내가 어떤 사람이라 할지라도요. 예수님께 나아가기만 하면 됩니다.
그리고 그 분이 이루신 일을 믿고 그 분을 신뢰하며
내 인생의 중심에 왕으로 모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시고 사랑하십니다.
주님이 그런 사람들의 혈통으로 오셨음을 기억하세요!
주님은 말씀하세요.
“네가 어떤 사람이라도 괜찮아.
나는 네가 실수하고 실패하고, 성격이 못나고 모질어도.
다른 사람과 인간관계를 잘 맺지 못하고,
친구 사이에서 인기가 없어도. 좋은 대학에 못가도.
네 몸이 건강하지 않아도.
심지어 매일 매일 나를 배신하고 멀리 떠나가도
나는 너를 버리거나 포기하지 않는단다.
네가 어떤 사람이든 나는
너를 십자가에 못박혀 죽기까지 사랑하기로 결심했거든.
그래서 내가 이 땅에 온 것이란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렴.”
예수의 복음은 충고 정도가 아니라 ‘좋은 소식’이다.
예수의 복음은 충고 정도가 아니라 ‘좋은 소식’이다.
이런 귀한 사실이 복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복음은 단순한 충고 정도가 아니라, 좋은 소식입니다.
예수님의 족보가 동화처럼 “옛날 옛날에”라는 식으로 시작하지 않죠.
분명한 역사적 사실로 시작합니다.
어떻게 시작하죠? 1절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라고 시작하죠.
이 모든 일은 허구가 아니라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세요!
이 사실이 왜 중요할까요?
‘충고’는 여러분이 해야 하는 일을 조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소식’은, 이미 행해진 일을 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충고는요, 당신이 무엇을 해내라고 재촉하지만,
소식은 이미 벌어진 일을 인식하고
그에 맞게 반응하라고 하죠.
예를 들어볼까요? 전쟁이 났습니다.
어느 요새에 침략군이 쳐들어옵니다.
그렇다면 이 요새에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충고가 필요하겠죠.
보루를 어디에 쌓고, 참호를 파고, 사수들을 한 쪽에 배치하고,
탱크와 비행기는 어디에 놓아야 한다고
설명하고 작전을 배치해야겠죠?!
그런데 상황을 바꿔봅시다.
만일 아주 강력한 왕이 이미 침략군을 정복하고 무찔렀다면,
이 요새에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이 성에 필요한 것은 설명하고 충고하는 지도자가 아니라,
이 좋은 소식을 전하는 ‘사자’ 소식전달자가 필요한 것입니다.
‘사자’는 “너희는 이렇게 해야 한다” 라고 말하지 않고,
“내가 큰 기쁨의 좋은 소식, 승리의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눅2:10.)라고 하죠.
“달아나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요.
요새와 성을 그만 구축하고, 더는 스스로를 구하기 위해서 애쓰지 않아도 되요.
우리의 왕께서 이미 우리를 구하셨어요.
이미 모든 일이 이루어졌고, 그래서 모든게 달라졌답니다!”
여러분, 구원은 스스로 이루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과 이후의 삶 모두 나의 노력과 힘으로 사는 것도 얻는 것도 아니에요.
예수님이 오셨다는 것은 이 구원의 이야기에 시작이에요.
예수님은 결국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셨고,
우리의 죗값을 치르셨고, 다시 부활하세요.
이것이 기독교의 시작이요, 여러분 신앙의 시작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 역사적 사건은
여러분을 어떻게 살면 행복한 지 알려주는 행복의 비결, 충고가 아니라
이미 그 행복을 가져오셨고 이루신 그것을
인격적으로 반응하는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의 시작입니다.
그 소식의 시작,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성탄절이 내일입니다.
2023년 한해를 마무리하고 2024년을 준비하는 이번 한주
예수님이 여러분에게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보세요.
그리고 그 분께 나아오세요.
그 분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계세요.
5년동안 여러분과 선생님들 함께해서 행복했습니다.
여러분과 나누는 마지막 청소년부 예배와 설교,
마지막 까지 잘 해줘서 고마워요.
새로오시는 목사님과 더욱 신앙도 믿음도 건강히 자라
예수님과 더욱 친밀해지는 우리 청소년부 되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