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224주일예배_눅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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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유에서 탄생한 예수의 의미

본문: 누가복음 2:1-7
누가복음 2:1–7 NKRV
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에 처음 한 것이라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도대체 어째서 하나님의 아들이 누추한 마구간에서 태어나야만 했을까요? 모든 것이 부족함 없는 화려한 왕궁도, 아니면 그저 평범한 가정의 집일지언정 온기가 배인 안방도, 그것도 아니라면 비록 내 집이 아닐지언정 그래도 번듯한 여관의 한 방에서도 아니고 어째서 하필 마구간에서 태어나야 했을까요? 역사적 안목을 가진 누가는 예수의 탄생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면서 사실상 그 의도를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누가는 예수가 탄생한 시점을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재위 기간으로 설정하고 있습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재위 기간은 예수 탄생의 막연한 배경만은 아닙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통치와 예수의 탄생은 직접적으로 얽혀 있습니다. 말하자면 대극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누가는 단순히 '아우구스투스 황제 때 예수께서 태어나셨다' 하는 것을 전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아우구스투스 황제 때문에 예수께서 이렇게 태어나실 수밖에 없었다' 하는 것을 전하려고 합니다. 아우구스투스의 칙령으로 인구조사가 실시되고, 예수의 부모는 그 칙령을 따라 움직입니다. 실제 인구조사 방법이 어땠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누가가 전하는 바를 따르면 각기 고향으로 가 인구조사에 응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평온하게 일상을 살던 사람들이 황제의 명령으로 모든 일을 내팽개치고 부산히 움직여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 것입니다. 그렇게 움직이는 것도 번거로운 일인데, 길 떠난 그곳에는 편히 쉴 만한 방도 구하기 어렵습니다. 결국 그저 바람만이라도 막아줄 처소인 외양간에서 마리아는 예수를 낳습니다. 누가의 이 이야기는 처음부터 아우구스투스와 예수를 대비하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습니다. 로마제국 내의 내란을 종식시키고 더 이상 확장정책을 펼치지 않은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로마의 평화를 연 인물로 평가받고 있으며 당대에 그는 세계의 진정한 구원자로 칭송 받았습니다. 당대의 철학자 세네카는 그를 이렇게 칭송했습니다. "그는 국가를 결속시키는 기반이며, 수많은 사람들이 들이마시는 삶의 숨이다. 그가 제국에서 떠난다면, 수많은 사람들이 고난과 착취를 당할 수밖에 없다. '왕이 살아 있을 때에만 모든 것이 하나의 의미를 갖게 되며 그가 사라지면 모든 것이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그렇게 아우구스투스는 절대적 의미를 갖고 있었고 그의 존재는 당대 세계의 운명과 동일시되었습니다. 그에 비해 예수는 어떤 존재일까요? 한마디로 보이지도 않는 존재입니다. 변방 속국의 신민, 아우구스투스의 명령이면 이리도 가야 하고 저리도 가야 하는 사람들, 그 여행지에서조차 방 한 칸 구하지 못하는 사람의 아들로 태어난 존재입니다. 제국의 황제는 자신의 통치기반을 확고히 하기 위해 인구조사를 명하지만, 인구조사를 받아야 하는 대열에 낀 사람들은 하나의 통계수치 이외로서는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합니다. 그 자신들에게는 너무나도 소중한 삶을 지켜 가는 사람들이고, 그야말로 천하와도 바꿀 수 없는 생명을 지닌 존재들이지만 제국의 권력자 앞에서는 한갓 통계숫자에 불과한 존재들입니다. 예수는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마구간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은 알려지지 않은 존재, 잊혀진 존재의 시선에서 역사가 새로 기록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들은 아우구스투스가 진정한 구세주요, 그로부터 이룩된 로마의 평화가 진정한 평화인 것으로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의 평가대로 로마의 평화는 피로 물든 평화였습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평화가 존재했다. 그러나 이 평화는 피로 물든 평화였다." 누가는 로마의 평화를 부정할 뿐 아니라, 진정한 평화가 어떻게 어디에서 시작되는지를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평화가 구유에서 시작되고 있음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상실해버린 사람들의 자리에서 진정한 평화가 시작된다는 것을 선언합니다. 잊혀진 사람들,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관심은 누가의 일관된 관점입니다. 누가는 그와 같은 안목으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보편적인 구원사를 그릴 수 있었습니다. 편안히 누울 자리 하나 없어 구유에서 태어난 아기 예수를 가장 먼저 반긴 사람들도 다른 사람들이 아닌 목자들이었습니다. 들에서 밤을 새우면서 양떼를 지키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진정한 평화, 그리스도의 평화는 구유 위에서, 그리고 들에서 밤을 새우는 목자들에게서 시작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흔히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우리들의 삶을 긍정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무기력하게 휘둘리는 듯하지만 꿋꿋하게 자신의 삶을 지켜나가는 사람들의 삶에 대한 긍정을 말합니다. 고통뿐인 삶을 지켜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유에 태어난 아기, 그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요 진정한 구세주라는 이야기는 바로 그와 같은 상황에 처한 사람들의 처지에서 세계가 새롭게 구성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구유에서 태어난 예수 그리스도의 의미는 그래서 우리에게 중요합니다. 모든 인간이 그 자리에 처해 그 자리에서 세상을 바라보면 이제껏 경험했던 세상과는 전혀 다른 세상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볼 수 있게 됩니다. 어마어마한 업적을 이루고 그 이룬 업적 때문에 특권을 누리는 사람의 처지가 아니라 그저 진실하게 삶을 살아가는 사람의 처지에서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열광적인 환호와 기대, 그리고 어떤 특권 같은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의 삶이 소중하다는 것을 인정받는 것이고, 어떤 이유로든 불편하지 않는 삶을 누리는 것입니다. 숨가뿐 경쟁을 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서로가 인정해주면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구유에서 태어나신 아기 예수께서는 2천년 내내 우리들에게 그 진실을 일깨우고 계십니다. 2천년 내내 일깨우고 계시는데도 이루어지지 않으니 허망한 믿음일까요? 인내심 없는 신자들은 그 믿음을 실현해줄 수 있는 확실한 출구를 찾습니다. 그 꿈은 저 천국에서 이뤄질 것으로 확신해 버립니다. 누구도 경험하지 못했으니 그렇게 믿는 사람들은 오히려 더더욱 확신을 갖습니다. 세상은 이미 포기했으니 변화된 세상과 변화된 자신의 모습은 기대하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보증수표를 얻는 것을 믿음의 전부로 알고 착각합니다. 성급한 믿음의 귀결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2천년 내내 그 희망이 사라지지 않았고 그 희망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새삼 주목해야 합니다. 구유에 탄생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리는 것은, 우리들 모두가 그 자리에 나서야 한다는 결단의 표징이요, 거기에서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그 믿음을 갖기를 원합니다. 앞으로 몇 천년을 더 가도 세상이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좌절감에 빠져 성급한 출구를 찾으려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가 깨달은 진실대로 진지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구유에서 태어나신 아기 예수를 축하하는 오늘, 그 믿음으로 살아갈 것을 새삼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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