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226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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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과 겸손

다들 성탄 잘 보냈나요? 어제 은혜로운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함께 모여 준비팀 모임으로 만나게 되어 너무나도 반갑습니다.
제가 지난주에 조리고 학생영성수련회를 다녀왔었는데요, 그곳에서 말씀을 전해주시는 목사님이 강조하셨던 것이 바로 부활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실제 역사이고, 이것을 믿는 것이 우리 신앙에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해주셨습니다.
그 설교 말씀을 들으면서 저도 많은 은혜가 되었습니다. 사실 우리는 바로 어제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면서도 그 이유를 정확히 모르고 그냥 축하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이유가 뭐죠? 좋아하는 분 생일이라 그런가요? 그렇지 않죠. 예수님께서 이 땅에 태어나신 이유, 다시말해,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이유가 무엇이기 때문이에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그의 구원사역이 그의 출생으로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크리스마스를 기념하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땅에 오시고 약 30년 뒤에 3년간의 사역을 통해 십자가에 달리시고 우릴 위해 죽으심으로서 우리의 죄가 사함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보통 여기서 예수님의 죽음에만 포커싱이 되어서 그의 고통만을 생각하고 슬퍼하는 것으로 끝내게 됩니다.
물론 예수님의 고난도 중요하죠. 그의 낮아지심, 그 최종장이 바로 대역죄인이 당하는 십자가에서의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잊어서는 안될 것이 바로 오늘 이야기할 부활의 측면입니다. 우리가 부활을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우리 모든 복음은 헛것이 되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러면 왜 그렇게 부활이 중요한 것인지, 오늘 본문을 통해서 한번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의 본문을 자세히 보시면 지난주 금요일에 나눴던 본문의 바로 두장 뒤의 내용이라는 것을 확인하실 수 있죠. 지난 금요일에 말씀을 들으신 분들, 무슨 내용이었는지 기억하시나요? 사랑에 대한 내용이었죠. 우리가 사랑이 없으면 성령의 어떤 은사들을 가지더라도 소용이 없음을 바울이 전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내용으로 바울은 방언과 예언에 대해 말하면서 그 모든 것을 자랑을 위한 것이 아니라 질서를 따라 품위있게 행하도록 성도들에게 권면합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을 이야기하는데요, 오늘의 본문을 이전의 사랑장과 같이 부활장이라고도 부릅니다. 15장이 58절까지 긴 내용인데요, 그 모든 구절에서 부활에 대해 바울은 강조하고 말하고 있다는 거에요.
그러면 바울이 왜 이렇게 부활을 강조하는 것일까요? 당연히 부활이 우리 신앙에 있어 매우 중요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사실 우리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그 고통, 다시말해 예수님의 낮아지심에 대해서만 너무 집중하는 경향성이 있습니다. 왜 그런 일들이 있을까요? 생각해보자면, 부활이라는 것이 너무 초자연적 현상이기 때문에 그럴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당시 고린도 성도들 중에도 그런 이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부활이라는 것이 너무 대단한 것이다보니, 그것을 실제로 믿지 않던 이들이 있었던 것이죠. 바울은 앞서 은사를 과도하게 사용하는 문제와 함께 이 부활에 대한 문제들도 말씀을 통해 집고 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가 그대로 굳게 지키고 믿고 있다면 너희는 구원을 받을 수 있어. 그러면서 무엇을 자신이 전했는지를 이야기합니다.
3절부터 등장하는데요, 성경에 예언된 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지낸 후 예언된 대로 사흘만에 다시 부활하셨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보이시고, 열두 제자와, 수많은 형제들에게 보이셨다. 또한 만삭되지 못하여 난 미숙아 같은 나에게도 예수님은 부활하신 육체를 보이셨다.
바울이 말하는 내용을 보자구요. 바울은 전형적인 복음의 내용을 이야기하는데, 여기서 우리가 매우 집중하는 고난에 대한 내용은 오직 두 마디입니다.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 더 많은 내용들을 어디에 할애하고 있어요? 부활의 내용에 할애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예언된 대로 삼일만에 부활하셔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보이셨다는 것이죠. 바울이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은, 부활의 실제성을 말하고자 함이었습니다.
너희가 부활을 믿지 못하고 있는데, 예수님은 분명히 부활하셔서 나를 비롯한 수많은 그의 자녀들에게 보이셨다. 부활은 실제이다! 라고 말한다는 거에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부활이 실제라는 거에요. 뿐만 아니라 부활이라는 것이 마치 영적인 무언가와 같은 측면이 아니고, 정말 실제 그 몸이 부활하셨다는 것을 우리가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부활이라고 생각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나요? 보통 예수님의 몸에서 막 광채가 나면서 제자들에게 다가오시고 하는 모습들이 떠오를지도 모르겠어요.
그러한 이미지가 있다보니 아무래도 부활의 예수님은 뭔가 영적인 느낌이 드는 것 같다는 생각도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부활은 분명히 육체적이셨습니다. 도마와의 대화에서 정확히 드러나죠.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했던 도마에게 예수께서 그의 말 그대로 손과 옆구리의 상처를 만지도록 하셨습니다. 분명히 우리와 같이 만져지는 이 몸이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요. 부활이 육체적이라는 것은 알겠어요. 그러면 왜 우리가 이 부활에 집중을 해야하는지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아야 합니다.
왜 부활이 중요할까요? 이미 죽으심에서 모든 것이 해결된 것 아닌가요?
부활이 중요한 것은 그가 하나님이심이 부활을 통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사실 죄가 없는 생명이 다른 생명의 죄를 대신 가지고서 죽는 것은 사람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대표적으로 신앙으로 순교한 이들도 있을 것이구요, 신앙에 관련되어 있지 않더라도, 여러 사고들 속에서 자신의 목숨을 바쳐 다른 이들을 구한 일들도 존재합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예수님의 모든 크신 사역은 그들의 희생과 전혀 다를 것이 없어지겠죠. 그저 이스라엘 어떤 청년의 큰 희생과 같이 끝나버리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어떤 문제가 생겨요? 우리의 구원이라는 것이 불가능해지겠죠. 예수님의 죽으심을 통해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되는 이유가 어디에 있었어요? 예수님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의 무한하신 속성이 그 안에 존재하시기 때문에, 그의 거룩하심이라는 속성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를 통해 우리 안의 수많은 죄악들, 심지어 그 모든 죄악의 원인이 되는 원죄까지도 용서받을 수 있게 되는 것이잖아요.
하지만 부활이 없다면, 예수님은 그저 육신을 가진 인간과 다를 것이 없어지게 되고, 모든 사역의 의미가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그가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었지만, 동일한 인간이 아닌 하나님이실 수 있었고, 우리의 모든 죄악은 그의 희생을 통해 용서받을 수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부활의 중요성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부활이 중요한 것은 그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에서 더 나아가 우리와 하나님의 언약을 갱신하는 효과가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내용은 신학적 접근인데요, 우리가 가장 처음 하나님과 맺은 언약은 어떤 것일까요? 바로 행위언약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맨 처음 동산 중앙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지만 않으면, 동산의 모든 것을 먹고, 그것을 다스릴 수 있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인간이 그것을 지키지 못했고, 그 죄로 인해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되었죠.
그리고 하나님은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의 말씀을 기록하여 지키도록 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율법이었죠. 그리고 율법을 잘 지켜 행한다면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과 함께하시고 복을 주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율법을 따르지 않으면 분명한 벌이 있을 것임을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신명기 30:16–18 NKRV
곧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차지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 그러나 네가 만일 마음을 돌이켜 듣지 아니하고 유혹을 받아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그를 섬기면 내가 오늘 너희에게 선언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망할 것이라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차지할 땅에서 너희의 날이 길지 못할 것이니라
이 율법이 바로 대표적인 행위언약의 모습입니다. 말씀을 잘 지켜 행해야, 그 복이 찾아오고, 죄악을 행하면, 그 가운데 벌이 있는, 바로 뿌린대로 거두는 것이 이 행위언약의 모습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 어떤 모습이었나요? 정말 말씀대로 행했나요? 그렇지 않았죠. 오히려 말씀대로 행하는 모습보다는, 그렇지 않은 모습들이 더욱 많았습니다. 그 안에 존재하는 원죄라는 죄악들 때문이었죠.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벌을 내리셔야 했으나, 그들을 사랑하시는 마음으로 그들의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제사라는 것을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흠없는 제물을 하나님께 바침으로서, 그들의 죄악을 제물에 대신 매기고 용서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제사들은 불완전한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흠이없다 하더라도 동물에 불과하기에, 일시적인 용서만 받을 수 있을 뿐, 모든 죄악을 용서받을 수는 없었죠.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수없이 제사를 행했던 이유였습니다. 죄악을 지을 때마다 제사로서 죄를 용서받았던 것이죠.
결과적으로 인간은 평생동안 제사를 드려야 했던 것입니다. 우리 몸에 발생하는 충치나 티눈같은 것들이 그 뿌리까지 확실히 제거해야 재발하지 않듯, 그 안에 있는 원죄라는 핵심을 제거하지 않는다면, 인간의 죄는 계속해서 발생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었죠.
그래서 하나님은 그 사랑으로 우리의 원죄를 제거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 성자 하나님을 보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악이 제거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가 예수님께로 전가되어지고, 예수님께서 이루신 행위의 의가 우리에게 주어짐으로서 예수님은 행위언약대로 죽으시고, 우리는 행위언약대로 복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일까요? 행위언약의 틀은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행위에 따라 죽고 사는 것은 그대로라는 것이죠.
그러나 예수님께서 죽음이라는 모든 권세를 깨고 부활하셨을 때, 행위언약의 틀도 함께 깨어지게 됩니다. 죄는 곧 사망이라는 틀이 깨어져버린 것이죠.
그리고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새 언약을 주십니다. 바로 은혜언약이라는 것이죠.
은혜언약은 말 그대로 은혜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예수님께서 주신 믿음이라는 은혜로 모든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이죠.
이전에는 행위를 통해 복을 받는 것이었다면, 이제는 믿음만으로 구원의 복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의 중요성인 것입니다. 우리는 부활을 통해 새 언약을 누리고, 부활을 통해 구원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때에는 우리 자신들도 새 언약을 통해 부활하여 하나님 나라를 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전해야 할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지고 죽으셨다가 부활하셨고, 그것을 통해 우리도 죄로부터 죽어졌다가 부활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이 사실을 전해야 한다는 것이죠.
우리가 이렇게 고3데이를 하고, 여러 사역들을 행하는 것도 결국 다 이 부활의 복음을 전하기 위함입니다. 우리 모두가 말씀을 통해 부활의 복음을 깨닫고, 그것을 누리고, 또한 전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바울은 이 복음의 중요성을 전한 후에 9절부터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이야기를 합니다. 자신이 작은 자이고, 본래 교회를 핍박하던 자였음을 언급한 것입니다.
바울이 갑자기 자신의 작음을 이야기한 것은 다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교회 안에서 제기되었던 바울의 사도성을 증명하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사실 여러 교회들에서 바울을 대적하는 이들이 주로 사용하였던 논지가 이 바울이라는 사람이 정말 사도가 맞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우리가 잘 알다시피 학식이 뛰어난 자였기 때문에, 복음을 논리있게 아주 잘 전하고, 그에 따라 교회가 세워지는 열매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우리가 소위 말하는 ‘근본’이 떨어지는 자였죠. 왜? 일단 당시 사도로 불리던 모든 자들이 가지고 있는, 예수님의 생존 때 그와 함께한 자라는 타이틀을 바울은 가지고 있지 않죠. 게다가 그의 생애 초기는 예수님과 교회라는 존재를 가장 싫어하고 앞장서서 박해했던 ‘교회의 적’으로 불리기 충분한 일들을 행하였습니다.
그런데다가 그가 회심하고서 전하는 말들이 율법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지 않고, 믿음이 중요하다라는 내용들을 전하고 다니니, 유대인 그리스도인들 입장에서는 저 사람이 정말 사도 맞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이죠.
그래서 많은 이들이 바울을 욕하면서 그가 자격이 없고, 그러니 그를 따를 필요 없다는 식으로 많은 교회들에 말을 하고 다녔습니다.
그의 이름인 바울이라는 말 또한 ‘작은 자’라는 파울루스였기에, 그것과 함께 엮어서 바울을 조롱하기도 하였죠.
그래서 바울은 본문에서 그들을 반박하며 자신이 물론 부족하고 작은 자가 맞다. 하지만 내가 한 이 모든 일들은 작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로 함께하신 것이다라고 자신을 변호한 것입니다.
‘나 스스로도 사도로서 칭함받기도 어려운 작은 자이지만, 내가 받은 이 사도의 직분은 예수님께서 내게 보이셔서 직접 허락하신 정말 근본있는 직분이다’라고 말한다는 것이죠.
그렇습니다. 사실 바울은 이와 같이 사도직을 의심하고 하는 이들에게 충분히 자신의 학식이나 로마 시민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서 반박할 수 있었습니다. 너가 배우면 얼마나 배웠냐, 나야말로 복음을 아주 잘 전달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반박할 수 있었다는 것이죠.
하지만 바울은 오히려 이러한 모든 것을 내세우지 않고, 부끄럽게 여깁니다. 그리고 자신이 작은 자임을 인정하죠. 이것이 바로 바울이 보인 겸손의 모습입니다. 예수님 앞에는 학식과 지식 이런 것 다 필요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이 단 한가지만은 낮추지 않고 자랑하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에게 일하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10절에서 말한 것처럼, 나의 인간적인 모습은 사도로서 칭함받을 수 없지만, 내가 지금 사도인 것은, 또한 모든 다른 사도들보다 더 수고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함께하시기 때문이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는 바울의 이 모습에 집중해야 합니다. 바로 겸손의 모범이 되는 이 모습입니다.
우리는 사역의 자리에서, 또는 삶의 자리에서 많은 유혹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바로 높아지고자 하는 유혹이죠.
특히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조롱하고 낮추려고 할때, 우리는 특히 그러한 유혹을 받습니다.
그리스도인들 모두 대단한 삶을 살아간다, 너희가 그렇게 조롱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믿음이란 것이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이 이렇게 대단하다 라는 이야기들을 해주면서 오히려 그들을 조롱하고픈 마음이 들거에요.
그러다보니 자꾸 세상에서 최고가 되려하고, 높은 곳에 위치하려고 하는 모습들이 우리 가운데 나타나게 됩니다.
하지만 그것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가 바울을 통해 보았잖아요. 바울은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었어요. 실제로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죠.
하지만 바울은 스스로를 낮춥니다. 자신이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죠. 우리도 그와 같이 자신을 낮추어야 합니다. 아무리 우리가 세상에서 대단한 것을 이루고 하더라도 그것을 자랑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왜요? 그렇게되면 우리가 처음 의도하고자 했던 ‘이런 일을 하는 그리스도인이 대단해’ 에서 ‘이런일을 하는 그리스도인이 대단해’ 로 초점이 바뀌어지면서 이 일을 행한 자신을 높이는 모습들이 나타나기 떄문이죠.
‘그러면 알겠습니다. 제가 하는 모든 일들을 높이지 않고 낮추며 살면 되는거죠?’
하지만 그것이 정답은 아닙니다. 이상하게 또 너무 겸손을 강조하다보면, 이것도 역효과가 나게 되요. 그리스도인인 우리를 너무 셀프비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못해. 저 사람은 대단한데, 나는 교회다니니까 저런 일들을 하면 안될거야. 이런 식인 것이죠.
이러한 생각에서 나타나는 것들이 바로 고행을 하는 수도사들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죠. 마치 자신을 가장 낮은 곳으로 이끌어야만 옳은 일인 것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 또한 바른 길이 아닙니다. 이전에도 한번 이야기했지만, 겸손은 그냥 계속 낮아져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올바른 겸손은 자기 분수에 넘치지 않는 것입니다.
군대로 비유하자면, 상병이 병장처럼 행동하지 말라는 것이지, 굳이 이등병처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상병은 상병처럼 그 자리를 잘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 역시도 겸손의 올바른 가치를 잘 알았습니다. 그랬기에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대신, 자신을 일하게 하신 하나님을 자랑한 것입니다.
마찬가지에요. 여러분들도 여러분의 사역이 귀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하도 자신을 겸손하게 한다고 해서, 내가 한 사역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말할 때가 있는데, 그러한 행동은 마치 나를 통해 일하신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는거에요.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정말로 자랑할 것 없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러분들 안에 계신 하나님이 자랑할 것이 없는 존재가 아니십니다. 10절에 등장한 것처럼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헛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닐 겸손의 모습은, 나를 자랑하지 않고 하나님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릴 통해 일하실 그 모든 것들을 자랑하시기 바랍니다.
이번 고3데이 사역의 자리에도 여러분들께서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가셨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와 함께하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사역을 가장 좋은 모습으로 만들어주실 것이기에, 그것을 믿고 담대하게 모든 사역을 자리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한다면 할 수 없겠지만, 주님이 하신다면 반드시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모든 사역을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 주를 의지하며 행하시고, 모든 것이 끝났을 때, 주님의 일하심을 바라보며 감사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오늘 이 바울의 모습을 통해, 부활이 우리에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또한 올바른 겸손의 자세가 무엇인지를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믿는 것은 다름아닌 주님입니다. 사람이 행했다면 사역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구원또한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믿는 분은 주님이시기에, 부활을 통해 구원을 얻을 수 있었고, 그것을 전하기 위해 우리의 사역을 힘있게 행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주님이 우리와 언제나 함께하시고, 우리의 모든 사역을 이끌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우리 모두가 그저 한 개인이 아니라, 주님으로 하나된 교회의 일원, 주님의 전달자라는 자부심을 갖고 모든 사역의 자리에서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는 우리 모든 하임 구성원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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