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7일 수요예배
Notes
Transcript
1 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낭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
2 주인이 그를 불러 이르되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찌 됨이냐 네가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직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니
3 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까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 먹자니 부끄럽구나
4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사람들이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 하고
5 주인에게 빚진 자를 일일이 불러다가 먼저 온 자에게 이르되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빚졌느냐
6 말하되 기름 백 말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 하고
7 또 다른 이에게 이르되 너는 얼마나 빚졌느냐 이르되 밀 백 석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팔십이라 쓰라 하였는지라
8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9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
서론
우리 앞뒤좌우의 성도님들과 환하게 인사해보겠습니다.
“잘 오셨습니다.”
반대쪽을 보시고 이렇게 인사하시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것을 덮습니다”
저는 성인이 되어서부터 이것저것 일을 많이 했었는데요. 인천공항, 택배, 서빙, 편의점, 피시방, 행사업체, 호텔, 공장 등 많은 알바를 했었습니다. 그런데 항상 알바를 할때마다 느끼는 것은
언제나 항상 진짜 상대하기 어려운 분, 상대 하기 싫은분들이 계셨습니다. 그런 분은 모두가 대하기 어려워했습니다. 그런 분들은 항상 자기의 주장이 맞습니다. 또한 어떤 주제든, 정치,경제,사회, 스포츠 등 어떤 주제가 나와도 자기가 맞고 모든 것을 알고있는 듯하게 허세아닌 허세를 부리곤했습니다. 항상 감정적이시고 쉽게 분을 내고, 사과는 절대 하지 않으셨지요.
처음에 저도 사회 생활의 경험이 없었을때, 아니 ‘지혜’라는 것이 없었을때는 같이 분노로 맞받아치기도하고, 싸우기도하고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는 마음으로 대했던것 같습니다.
근데 이러한 성향의 사람들을 대하는 지혜가 저에게도 생기고 자라나기 시작했는데요.
전에 사역하던 교회에도 그러한 분이 계셨는데, 모두들 그분을 대하는 것을 어려워했습니다. 교회니까 더 어렵겠죠? 품어주고 소망없어 보여도 소망을 둬야하잖아요? 처음에는 저도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왜 저렇게 행동하시지? 라는 생각이 가득했는데, 조금씩 성화를 겪어나가면서 그분을 받아드릴수 있는 마음이 되어갔고, 저는 드디어 집사님 사용법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용법이란 설명서 같은 것이죠? 저는 그분의 감정적인 모습에 같이 감정적인 모습으로 받아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이해할수있는 그분의 설명서, 사용법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사실 간단했습니다. 그분에게는 ‘인정’과 ‘관심’이 핵심이었습니다. 그분이 교회에서 하시는 모든 사역에 대해서 인정해드리고 관심을 먼저 가져드리고, 따뜻한 라떼한잔을 드리면, 그순간부터 저는 그분과 일심동체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후로는 집사님께서는 저에게 맘을 활짝 여셔서 사실 제가 잘못한 때가 있을때도 너털웃음을 짓고 넘어가시게 되었습니다. 반대로 집사님 사용법을 익히지 못했던 저의 친구 전도사님은 같은 상황에서 집사님에게 엄청 혼이 나기도 했습니다. 그 전도사님은 무척이나 억울해 하셨습니다.
이것처럼 저는 적어도 교회에서 만큼은 서로 날선모습으로 자존심 싸움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사용법을 익혀야합니다. 서로의 모습에는 설명서가 적혀있단 말이죠. 누구나 적혀있습니다. 그 사람에게 관심을 쏟으면 그 사람의 사용 설명서가 보이게 됩니다. 그것을 바탕으로 서로 품어주고 덮어주는 모습이 교회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제가 그 집사님의 사용법을 알게된 것 처럼, 저 또한 누군가에게 무조건 나는 이렇게 사용해야 합니다. 라고 말하고 있을거란 말이죠? 우리 성도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사람도 예외없이 모두가 자신의 사용법을 나도모르게 얼굴에 붙이고 다니고 나의 주변인들은 그것을 알고있을 수 있을 확률이 높다는 것입니다.
그럼 성도 여러분들은 여러분들 자신의 사용법을 알고계신가요? ‘나’사용법, 나에 대한 설명서를 알고있으신가 문제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정체성과도 관련됩니다. 우리는 우리가 누군가를 정확히 알아야, 하나님께서 우리 개개인마다 특성을 살려서 적어놓으신 우리의 진정한 사용법을 알 수 있다는 것이죠.
본론
오늘 우리가 읽은 누가복음의 불의한 청지기 비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사용법의 한 모습입니다. 누가복음에서 하나님은 은혜의 원리에 대해서 설명해주십니다. 은혜를 받은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면서 살아야 하는지 보여줍니다.
먼저 성경의 이야기를 쭉 살펴보면, 일단 부자의 재산을 관리하는 청지기가 나옵니다. 부자의 재산을 관리할 정도라면 일단 능력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주인은 청지기가 자신의 소유를 낭비한다는 소문을 듣게됩니다. 주인은 당연히 청지기를 불러서 해명을 요구합니다. 청지기는 직감했습니다. 자신이 해고될것을 직감하게됩니다.
그리고 머리를 굴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살아갈 길이 막막한 것을 깨달은 것이죠. 왜냐면 청지기의 기본 자격은 신뢰성과 책임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불의한 청지기는 3절에 보면 몸도 튼튼하지 않았던것 같습니다. 그리고 또 구걸을 하자니 부끄러움을 느끼죠. 그래서 4절에서 청지기는 번뜩이는 생각을 해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읽은 것 처럼 주인에게 빛진자들의 문서를 조작해서 빚을 탕감해줍니다.
이걸 좀 우리가 와닿게 계산을 해보면요. 물론 제가 한건 아닙니다. 유명한 박사분들이 이미 계산을 해놓으셨습니다. 6절의 기름 백말은 노동자의 500-600일치의 임금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기 위해서 주거비, 교육비, 물가상승률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최저임금보다 높은 수준의 소득을 보장하는 임금이 한달 약 240만원입니다.
한달 평균 근무일수 22일 정도로 나누면 하루치는 약 11만원입니다. 그럼 500일치의 임금은 약 5 천만원이 넘는 돈이겠습니다. 그중에 약 2500만원을 탕감해주죠. 뒤의 밀 백석을 팔십으로 탕감해준 것의 현대 가치는 약 5 천만원 입니다.
보면 채무자들이 많은 돈을 빌렸을 가능성도 있지만, 이 주인이 과도하게 이자를 요구했을수도 있겠죠. 그런데 중요한 포인트는 이 채무자들은 지금 예상치 못한 은혜를 받게 된것입니다. 의도치 않은 은혜
이미 알고계실수도 있지만, 이 시대에 은혜라는 것은 사실 우리가 알고있는 은혜와는 살짝 다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은혜는 가장큰 특징이 뭐였죠? 바로 ‘값없이 주어지는 것’ ‘선물’의 의미가 강합니다. 그렇죠? 우리는 은혜로 구원받았고, 은혜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니까요.
그런데 이 당시의 ‘은혜’라 함은 ‘갚아야하는 의무’가 생겨버리는 관계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은혜를 입고 그냥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은혜를 입는 순간 그 은혜를 갚아야만 하는 것 입니다. 은혜를 받으면 갚아야 하기에 은혜를 갚을 수 있는 사람에게만 베풀수 있던 것이 은혜이기도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 당시에 유대문화와 더 넓은 문화권에서 보편적으로 이해되던 은혜 상호성의 원리였습니다.
그렇다면 그 문화속에서 이 청지기가 한 행동은 한마디로 자신 인생 최고의 적금을 들어버린것입니다. 워랜버핏이 주식을 지수추종에 투자하는게 최고라고 말한것처럼 이 청지기는 인생 최대의 위기에서, 최고의 적금을 들어버리게 됩니다. 자신의 주인인 부자를 위한 투자도 아닙니다. 심지어 자기돈으로 투자를 한 것도 아닙니다. 남의 돈으로 자신의 미래를 완벽하게 준비했습니다. 나중에 빛을 탕감받은 사람들은 이 청지기에게 다시 갚아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바라고 이러한 일을 실행한 것입니다.
근데 아주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보통의 사람들이라면 부자인 주인은 자신의 청지기에게 화를내야 정상인데, 8절에서 오히려 칭찬을 해버립니다. 물론 여기서 정확한 것은 먼저 청지기에게 옳지 않다라고 평가를 했다는 것입니다. 일단 청지기는 불의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주인은 어떤 점에서 이 옳지 않은 청지기를 칭찬했냐면 미래를 준비하는 것에서 만큼은 지혜로웠기 때문입니다.
이 청지기는 자기사용법을 정확하게 알았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몸이 약하다는 약점도 알았구요, 자신은 자존심이 강해서 구걸도 못하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권한을 정확하게 알고 사용했습니다. 물론 옳지 않다고 평가를 받긴했지만, 동시에 지혜로운 행동이라고 평가됐습니다.
이제 이 뭔가 알듯 말듯한 이야기를 우리에게 적용해보겠습니다. 예수님은 뒤이어서 이 비유를 해설해주십니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미래를 준비하는 것에 있어서 우리 빛의 자녀들보다 영민하다고 하십니다.
자신들의 미래를 위해서 돈을 영리하게 사용한다는 것이죠. 정말 맞는 것 같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부동산 투자를 더 잘할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주식과 펀드로 가진 재산을 더 불릴수 있을지 하루 종일 고민합니다. 그리고 실제 행동으로 옮깁니다.
그러나 이어서 마지막 그 재물이 없어질때에라고 표현하시면서 이들의 부를 쌓는 행동은 부질없음을 보여주십니다. 부는 영원 할 수 없다는 것이죠. 동시에 우리에게는 어떤 권면이 주어지냐면 , 우리도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고 합니다.
알쏭달쏭한 소리 같습니다. 옳지 않은 일을 해서 돈을 벌어서 나눠주라는건가? 싶기도합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우리도 이 불의한 청지기 처럼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는 이야기 입니다. 우리도 자신의 사용법을 정확하게 알고 행동한 청지기처럼 ‘나’사용법을 알야야 한다는 이야기 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시대의 자녀들이 가지고있는 사용법과는 다른 사용법을 가지고 있습니다. 원리 자체가 다릅니다. 그래서 길게 풀어왔는데, 이제 이야기 드릴것은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의 사용법은 무엇인가 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구원한 은혜의 원리와 같습니다. 우리는 이 당시의 문화에서는 은혜를 받으면 반드시 갚아야 한다는 의무가 생기는 것을 알았습니다. 근데 예수님이 하신일은 바로 이 은혜의 원리를 다르게 만들어버리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주셨는데 그것은 엄청난 충격이었다는 것입니다. 값없이 주셨기 때문입니다. 갚을 능력이 없는데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청지기가 속한 시대처럼 은혜를 받았으면 갚아야 한다라는 문화속에서 우리에게 이 비유를 들려주신 것은 다른 원리, 다른 사용법을 가르쳐주신것입니다.
예수님이 성경에서 사용하신 모든 비유는 당시의 문화권에서 아주 찰떡으로 알아 들을 수 있는 너무 적절한 비유들인것을 우리는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일단 이 문화대로라면 우리도 갚아야 하는데, 그 엄청난 은혜를 우리는 갚을 방법이 없습니다. 아무리 부자라도 갚을 수 없을 것입니다. 아무리 능력이 많아도 갚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 안에 다른 것이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기브앤 테이크가 아닌 다른 원리가 작동하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반응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에 어떤 변화가 생기냐면 먼저 그 은혜에 저절로 겸손하게됩니다. 한 없는 은혜를 마주하니 나의 마음이 저절로 겸손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은혜에 조금이라도 반응해보고자 몸무림치게됩니다. 그것이 바로 마태복음에서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라는 실천을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 받으면 갚아야하는 의무가 생긴다’라는 문화속에서 청지기에 대한 비유를 들려주셨다는 것은
우리도 마땅히 갚아야 하는데 그럴 능력도 없고 할수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 우리가 반응하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한 없는 은혜에 나는 철저히 무능함을 깨닫고, 그 은혜가 얼마나 큰지 깨닫고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 자연스럽게 변화되길 바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반응을 원하시냐면 자격없는 자에게 내려주신 구원의 은혜, 그 은혜에 대한 반응으로 우리의 마음이 이웃에게 퍼저나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이웃에게 퍼준다고 해도 은혜를 갚을 수는 없지만, 갚을 수 없기에 더욱 더 겸손한 마음으로 그저 베풀면서 조금이라도 따라가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저절로 나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받은 은혜는 철저하게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니 그것을 나만 누리고 내가 쥐고잇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흘러보내는 삶의 모양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말로 다 할수없는 구원의 은혜를 경험한 우리 인간이 마땅히 가져야할 반응이라는 것입니다. 도움을 받은 우리는 하나님의 선물에 감사하면서 또 다른 이웃에게 호의를 베풀고 되받기를 기대하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기브 앤 테이크가 당연시되는 현대 시대도 이 청지기의 시대와 다를바 없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부부사이에서도, 연인사이에서도 내가 이만큼 해줬으니 너도 이만큼 해줘 라는 것이 심각합니다. 젊은 부부들 사이에서는 반반이라는 것이 굉장히 민감한 이슈입니다.
모든 집안일을 정확히 반반, 양말 4개 빨았으면 나도 4개만 건조기 돌리는 그런 세상이 왔다는 것입니다. 내가 아기를 4시간 돌봤으니 너도 4시간 돌봐라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다른 원리 ‘ 다른 사용법’을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용법은 유일하게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순환시킬수 있는 힘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청지기의 비유가 비단 돈에만 해당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현대 사회는 돈을 베푸는 것 보다 마음을 베푸는 것이 더 어렵고 더 힘들고 더 찾아보기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그때에 우리는 이 청지기를 보고 배우는 겁니다. 비록 불의했지만 영민하게 전략을 짠 것처럼 우리도 베푸는 것입니다. 호의를 베풀고 은혜를 베풀고, 긍휼의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가지 더 약속된 엄청난 은혜가 있습니다. 청지기는 호의를 베풀면서 자신의 확실한 미래를 보장받았습니다. 그 베푼 사람들에게 다시 돌려받을 수 있거든요. 우리는 이제껏 값없이 받은 구원으로 베풀고 다시 받기를 원하지 않는 삶의 모양을 가질 수 있게되었는데, 엄청난 은혜의 반응으로 그저 거저 받은 것을 거저 돌려주는 것인데 하나님은 지금 거저 주신 것도 모자라 우리에게 베풀었다면 이 비유처럼 갚아주시겠다는 것을 약속하십니다.
근데 예수님이 이 비유를 사용하신것은, 기브앤 테이크의 비유를 사용하신것은 우리도 결국 돌려받을 것을, 베푼 호의를 다시 받을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시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하나님은 우리의 긍휼과 은혜를 기억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만의 특별한 사용법을 제대로 사용한다면, 하나님은 우리들의 그 베푼것들을 기억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도움을 준 사람들이 우리에게 갚아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기억하시고 직접 갚아주신 다는 것입니다.
이 것이 바로 하나님 자녀된 ‘우리’의 사용법입니다. 세상과는 근본부터가 다른 사용법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사용법은 자신의 이익과 미래를 보장 받기 위한 사용법입니다.
우리의 사용법은 나의 미래가 아닌 타인의 미래를 보장하는 사용법입니다.
세상의 사용법은 남의 것을 빼았는 사용 법입니다.
우리의 사용법은 남에게 나의 것을 주는 사용법입니다.
세상의 사용법은 나의 꿈을 실현하기 위한 사용법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사용법은 타인의 꿈을 실현하기 위한 사용법입니다.
이 터무니 없이 어려워 보이는 우리의 사용법은, 그래서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없음을 알게됩니다. 언제 알게되냐면 죄악에서 구원받은 그 은혜가 엄청나다는 것을 알 때에 우리는 저절로 겸손하여져서 모든 욕심을 내려놓고 내가 아닌 타인을 위해서 삶을 살수 있게 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원리가 얼마나 강력하냐면 조나단 에드워즈는 까다롭고 냉혹하며 옹졸하고 교만하며 심술을 굳은 사람은 참 그리스도인일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 것이나 어제보다 오늘 더 따뜻한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단 1g이라도 우리는 더 사랑이 커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이웃을 위해서 살 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우리의 받은 은혜가 너무 크기때문임을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오늘 또 약속하신 것은 우리의 모든 그 마음과 베푸는 것을 기억하신 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의 방식으로 갚아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으로 갚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오해 할수 있는 세상적인 갚음은 아닐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우리에게 확실히 약속하신 것은 우리가 이 사용법을 끊임없이 실천하려고 애쓴다면, 선한 싸움을 다 마치고 마침내 우리는 우리를 위해 준비된 면류관을 받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 이것 기억하시면서 함께 찬양하겠습니다.
기도
사랑 없는 자에게 사랑을 주신 하나님, 우리의 마음과 생명과 뜻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하고 내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주님의 말씀처럼 사랑하기에 부족한 인간합니다. 우리의 마음에는 순결한 사랑이 없고 매순간 우리의 사랑은 없어지고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려고 합니다. 오직 우리의 모든 것을 깨끗하게 하셔서 우리가 은혜로 주님을 섬기고 사랑하게 해주옵소서 주님의 길로 더 가까이 이끌어 주시옵소서. 주님의 거룩하신 말씀으로 사랑의 길을 걷게 하여 주시고 주님의 명령을 기쁨으로 삼아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고 사랑을 전하는 삶의 모습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의 사랑 안에서 계속해서 자라나게 하시고, 그 사랑을 사람 앞에 흐르게 해 주시옵소서.
사랑의 성령님 예수님 닮게 도와주시고 예수님의 온유하신 성품과 선하신 행실을 따르는 삶이 되게 해주셔서 온 세상에 흘러 넘처 주께 영광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의 사랑을 행할수록 우리가 더욱 더 겸손하게 하시고, 온유하고 낮은 자 되게 하시고, 언제나 주께 영광 돌리는 교회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유일한 중보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