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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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본문: 히브리서 11:1 히브리서 12:1-4히브리서 11:1 NKRV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히브리서 12:1–4 NKRV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 저는 오늘 여러분들과 함께 ‘믿음이란’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을 나누겠습니다.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믿음을 통해 삶을 의미있게 살아기를 원하십니다. 하지만 세상은 저와 여러분들이 삶을 의미있게 살도록 만들지 않습니다. 세상 가치와 기준은 너무 자극적이고, 일시적 만족만 가져다 주는 것들이 많습니다. 마약, 도박, 쾌락...오늘 유명 연예인이 그 세상 가치에 발목이 잡혀 허덕이다가 결국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비보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소식입니다. 세상은 그저 세상이란 공간적 개념으로만 바라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을 통치하고 있는 어둠의 권세자인 사단이 세상 의가치와 그 영향력으로 사람들의 발목을 붙잡고 이리저리 끌고 다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라고하여서 그 영향력에서 예외가 되는 게 아닙니다. 우리도 세상 안에서 살고 있기한 그 영향력을 받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세상에서 삶을 사셨을 때 사단의 영향력을 경험했습니다. 사단은 예수님을 넘어뜨리려고 예수님을 시험했습니다. 1. 하나님의 뜻보다 배고픈 현실을 빠르게 극복해 보려는 시험을 통해 예수님의 발목을 붙잡았습니다. 2. 하나님을 신뢰하기보다 도리어 그 하나님을 시험해 보라는 유혹으로 예수님의 발목을 붙잡았습니다. 3.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려야 할 이유가 뭐가 있냐며? 자신이 영광을 받을 수 있다는 유혹으로 그 발목을 붙잡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살든지 죽든지 흥하든지 성하든지 쇠하든지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이란 믿음을 가지고 그 모든 시험을 이겨내시고 오늘 저와 여러분들의 구원자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처럼 믿음의 삶을 살지 못하고 사단의 유혹 시험에 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지키지 못하고 중간에 삶을 끊거나, 삶을 허랑방탕하게 살거나, 삶을 나태하게 살아갑니다. 그래서 히브리기자는 오늘 본문 말씀 일절에 “구름같이 둘러싸인 허다한 무리들”을 말씀합니다. 구름 같다는 표현은 많은 사람들이 태어나고 죽고 또 태어나고 죽었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겠지요. 그들 중 예수님과 같이 믿음을 지킨 자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를 히브리기자는 히브리서 십일장에서 말씀했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태어난 사람들 중에는 믿음을 지키지 못하고 사단에게 이리저리 끌려다니다 그 삶을 마친 무리들이 더 많을 것입니다. 2023년 다사다난한 한 해가 저물어가고 있습니다. 얼마 안 있으면 2024년 새해가 다가오는데 그 얼마 안 남은 시간이 누군가에게는 무척 길거나 무겁게 느껴져 오늘 자신의 생명을 끊거나, 삶을 포기하는 인생들이 있을 것입니다. 참으로 안타깝고 슬픈현실입니다. 우울증을 심하게 앓던 한 감독이 만든 영화가 있었는데 그 영화의 시작은 어떤 여인이 잠에서 깨어나는 장면으로 시작 됩니다. 그런데 그 여인은 잠에서 깨었을 때 자신이 70도가까운 비탈 위에 누워 있는 모습을 발견합니다. 여인은 위로 올라가기 위해 몸을 조금 욺직여 보았는데 천길 낭떨어지로 자신의 몸이 미끄러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래서 그 어떤 노력도 멈추고 양손을 뻗어 비탈진 면에 최대한 부착을 시키고 손톱으로는 몸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비탈 표면을 최대한 파내려갑니다. 결국 손톱 사이에는 피가 나옵니다. 그렇게 계속 버티고 버팁니다. 심신이 지쳐갈 쯤 하늘에서는 비가내립니다. 이 빗물에 몸은 미끄러져 더이상 버틸 수 없는 단계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여인은 절규합니다. 그리고 비명을 지릅니다. 이 영화의 감독은 자신이 앓았던 우울증의 모습을 끝도 보이지 않는 절망의 나락 끝에서매달려 살고자 바락하지만 그러한 노력마저 부질없는 것을 매일 경험하는 것이라 말했습니다. 비단 우울증만 그러겠습니까? 계속 겹치게 되는 절망의 경험은 절망염이란 심각한 마음의 병을 만들어 냅니다. 세상은 성공의 가도에서 뒤쳐지지 않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하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잠시의 쉼과 안락을 취하고 다시 그 경쟁의 삶에서 승리하라고 말하며 마약과 술 그리고 성적인 쾌락이란 올무의 자리로 인도합니다. 오늘도 이 올무에서 많은 사람들이 발목이 잡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 그 좋던 건강과 행복 그리고 감사를 잃고 좀비와 같이 할 수 없이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히브리기자가 말하는 “구름같이 둘러싸인 허다한 무리들” 이란 이와 같이 좀비와 같은 인생을 살아갔던 선진들뿐 아니라 손톱에서 피가 흐르지만 그래도 그 세상 올무에 잡히지 않기 위해 믿음을 지켰던 선진들 또한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피흘리기 까지 사투하며 세상 올무에 잡히지 않기 위해 몸부림친 믿음의 사람들인 것입니다. 믿음이란 추상적인 개념이면서 또한 매우 실제적인 개념입니다. 왜냐하면 천길 낭떠러지에 걸쳐 아슬아슬하게 살고 있는 자들에게 믿음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매우 추상적일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믿음은 당장의 성공을 약속하고 있는 눈에 보이는 그 무언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신들의 삶이 미끄러질 거 같은데 미끄러지지 않고 삶이 살아진다는 사실을깨닫는 사람들 있습니다. 이들의 눈에는 자신의 발 아래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튼튼한 받침대가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사람일 것입니다. 이런 분들에게 있어서 믿음은무척 실제적인 것입니다. 믿음에 대해 좀 더 알아보겠습니다. 히브리서 11:1 NKRV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실상’이란 보증서, 또는 권리증서와 같은 ‘받침대’를 말하는 것입니다. 받침대가 튼튼하면 그 어떤 거구도 그 위에서 안전한 삶을 보장받게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기자는 그 튼튼한 받침대 때문에 믿음의 선진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삶에 바라게 하셨던 것들을 바라보게 되는 은혜를 경험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울러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말씀합니다. 히브리기자가 말하는 ‘증거’는 믿음의 선진들이 올라서 있던 ‘말씀의 받침대’을 ㄱ 증거란 시험하고 점검해 보고 입증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바침대를 흔들어 보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지금 앉아 계신 의자를 흔들어 보십시오! 비끄덕 거리는 의자가 있나요?대부분의 의자들은 무거운 원목으로 만들어진 의자기 때문에 흔들지도 않습니다.아브라함은 믿음이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 하셨기 때문에 자신이 바라는 것 즉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에 영롱하게 보여주셨던 바침대를 믿기로 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 즉 바침대이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4:17 NKRV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아브라함은 “죽은 자도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신다는 믿음”이란 바침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바침대에서 그가 바라는 것은 단 하나였습니다. 이삭을 살려주십시오! 내 아내 사라의 경수가 끊어진 가운데 내게 주셨던 아들이었기에 “나는 그 사건을 통해 당신은 죽은 자도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분이심을 믿습니라”라는 바침대를 아브라함은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할 때 그 실상은 “확증하고, 점검하고, 검증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실상이기 때문에 자신이 서 있는 받침대를 흔들어 보기 시작했습니다. 이 받침대가 얼마나 튼튼한 받침대인지 그는 3일길을 걸어 나귀 위에 이런저런 물품들을 싣고 종과 자신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산으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종과 나귀는 산 아래서 기다리라고 말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모리아산에서 자신의 받침대를 심각하게 흔들어볼 참이었습니다. “내가 지금 서서 발로 밟고 있는 받침대는 절대 내 욕심, 생각, 뜻으로 이루어진게 맞아!” “분명 하나님께서 독자 이삭을 바치라고 했어!” 지금 내 눈에는 보이는바가 없고 내 손에는 잡히는 바가 없고, 내 현실이 칠흑같이 어둡지만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받침대와 함께 나는 살든지 죽든지 흥하든지 망하든지 쇠하든지 !”라고 속으로 말하고 칼을 들고 이삭을 잡으려고 할 때 하늘에서 음성이 들렸습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네 손에서 칼을 거두어라 네가 하나밖에 없는 독자까지 내게 아끼지 않는줄을 내가 아노라!” 아브라함의 어안은 벙벙했습니다. 그런데 분명 이삭과 함께 번제단을 쌓고, 이삭을 결박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했을 때에도 있었을 한 양이 보입니다. 분명 그 양은 그 곳에 있었던 양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마음이 너무 긴장해 있고, 다양한 생각들로 가득차 있었기 때문에 그 양이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 그렇습니다. 받침대를 확인해보고, 점검해 보려는 믿음의 행위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증거”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받침대 약속을 보다 빛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 그 양이 언제부터 여기에 있었지?” 드디어 아브라함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를 얻게 됩니다. 그 양은 독자 이삭을 위해 대신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게 될 예수님을 예표하는 양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절망의 자리에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란 받침대 위에 서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란 받침대를 이리저리 흔들어 보는 “점검, 확인, 시험”이란 행동을 통해 한 걸음 믿음으로 걸어보시기 바랍니다. 그 때 수풀 속에 감추어져 있던, 아니 원래 그 곳에 늘 여러분들과 함께 계셨던 어린양 되신 예수님을 바라보게 되실 것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욕심과 야망이 받침대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의 소원을 두고 행하시는 하나님으로서 우리가 원하는 욕심과 야망이 아니라 꿈과 희망이란 하나님 뜻을 그 마음에 품고 행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빌립보서 2:13 NKRV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품게 하신 그 꿈과 희망이란 받침대를 가지고 있다고 하여도 사단은 세상을 통해 저와 여러분들을 계속 시험할 것입니다. “그 꿈과 희망은 가짜야! 너 지금 몇년째 그 자리에서 그 꿈과 희망 타령하면서 인내하고 있냐? 그냥 인내하면 다 잘 될거 같지?” 저는 사단의 이런 음성에 매번 속는 목사입니다.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가며 자기 합리화의 이유로 내가 서 있는 받침대를 신뢰하지 못하고 세상 이리저리 떠밀려 흘러가는 인생을 살았고 지금도 그 유혹 속에 있는 목사입니다. 그래서 새벽에 기도할 뿐입니다. 제가 구하는 것은 단 하나 오직 주님꼐신 곳을 사모하고 그 천국을 이루어가는 삶을 살도록해주세요!하지만 기도하고 주님을 바라볼 때 마다 내가 서 있는 그 바침대를 흔들어 보고 싶은 뜨거움이 생겨납니다. 그리고 그 마음에 포착된 작고 작은 동인인 ‘하나님 나라’를 생각하며 포기하고 싶은 절망의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 주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히브리서 12:2 NKRV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님”이란 표현은 “믿음의 창시자(시작자, 개척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님”이란 표현인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도 자신이 서 있는 신념의 받침대가 다 있습니다. 돈과 명예와 권세라는 받침대는 실제 쉽게 흔들리지 않는 받침대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대부분으 그 받침대를 갖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부와 명예와 권세를 다 가져본 솔로몬은 그와 같은 받침대가 “헛되고 헛되고 헛되다!”라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지탱하고 있는 받침대에 대한 신념이 그리 오래갈 수 없기 때문이고그 받침대도 영원할 수 없는 것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히브리기자는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믿음의 시작이고 완성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아파요 오메가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믿음을 시작하신 분이 예수님이시고, 그 믿음의 내용예수님이시고, 그 믿음을 완성하실 분이 예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믿음은 예수님께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받침대는 예수님의 말씀이란 영원한 성질로 만들어진 받침대어야 합니다. 예수님이란 받침대는 첫째 그 앞에 있는 이란 미래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로마서 8:18 NKRV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 자체가 현재의 제한을 발판으로 삼지 않고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영광이란 미래에 그 발판을 삼고 삶을 사셨습니다. 그렇다고 현재를 무시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지금은 미래라는 길로 나아가는 발판가 같은 것입니다. 지금이 모여 미래가 되는 것입니다.죽은시인들의 사회라는 영화로 유명해진 표현이지요! “카르페디엠” 세상 사람들은 이를 “현재를 즐기라!”는 측면을 강조하여 사용합니다. 그런데 이 뜻의 실제 의미는 현재의 기회를 잘 선용하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영어는 이를 이렇게 번역했지요. “Seize the day” 현재를 잡으라는 뜻입니다. 현재를 잡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미래가 없는 것이겠지요. 현재 하나님의 통치를 갈망해 보시길 소망합니다. 저와 여러분들의 마음을 다스리스는 하나님께서 현재를 잡도록 하실 뿐 아니라 그 현재를 토대로 그 앞에 있는 것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된 꿈과 희망이요, 다른 표현으로 말하면 푯대인 것입니다. 빌립보서 3:14 NKRV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그 앞에 있는 것을 향해 달려가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말씀하고 계시는 그 분의 뜻이라는 푯대가 있어어 합니다. 잠언 29:18 NKRV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묵시란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꿈과 희망입니다. 푯대와 꿈과 희망은 현재라는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통해 만들어진 발판입니다. 우리는 그 발판을 밟으며 앞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땀방울이 핏방울 되도록 기도하셨던 것도 현재라는 삶에 하나님의 통치를 받기 위함 몸부림이셨고, 그로인해 바라보았던 푯대와 꿈과 희망이 바로 십자가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란 받침대는 그 앞에 있는 것을 넘어 “즐거움”에 있습니다.예수님이 올라 타셨던 즐거움이란 받침대는 현재라는 자신의 삶에서 하나님나라의 통치를 받게될 때 자신의 삶에서 누려지게 되는 다양한 마음의 상태였습니다. 이를 예수님의 말씀으로 확인해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5:3–8 NKRV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이 팔복은 예수님의 마음이 즐거움이란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받게될 때에만 즐거움이 될 수 있는 즐거움이고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즐거움이었던 것입니다. 성령 충만을 사모하십시오! 성령충만은 말씀충만이고말씀충만은 하나님의 말씀의 뜻과 원리가 저와 여러분들의 지식과 의지와 감정을 다스리게 되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비로 우리 앞에 있는 것이 십자가라는 부담스러운 미래라고 하지만 그 십자가를 짊어지는 선택을 통해 누리게 되는 즐거움을 경험하게 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즐거움이라는 “받침대”위에서 하나님을 바라보셨던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올라서 계셨던 받침대는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셨던 받침대였습니다. 마음이 가난한데 어떻게 부끄럽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마음이 가난해지면 하나님을 찾고 이지할 수 있게 돼 천국의 기쁨을 경험하게 됩니다. 남들 앞에서 애통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입니다. 우는 것은 약자들의 심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울어야 하나님께서 등을 토닥여주시는 위로를 받게되는 “즐거움”을 경험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경쟁 사회에서 빼앗고 쟁취해야 하는데 내 마음이 온유해진다면 그것은 참으로 창피한 노릇입니다. 그런데 그 창피함을 개의치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세상 사람들이 취하지 못하는 하나님 나라의 영토를 그 온유한 마음을 통해 취하도록 하십니다. 진짜 강함은 단단한데 있는게 아니라 부드럽고 유연한 온유함에 있기 때문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은 창피한 노릇입니다. 먹지 못하고, 마시지 못하는 것은 약자들의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나누고 베풀고 섬기는 삶을 통해 경험하게 되는 주림과 목마름이란 창피를 개의치 않는다면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의 주림과 목마름을 영원토록 채워주실 것입니다. 긍휼을 베푸는 것은 현대 사회에서 바보소리 듣는 행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결국은 창피한 것일 수 있지요. 그런데 세상 법칙과 다르게 타인을 긍휼이 여긴다면 저와 여러분들을 심판대 앞에서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들도 현대 사회에서 매번 손실을 보는 바보요, 세상 통치자들에게 부끄러움을 당할 수 있는 자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이러한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고 누가 보든지 보지 않든지청결한 마음을 따라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삶을 살게 된다면 우리는 다양한 손실 가운데서도 우리의 필요을 채우기 위해 서 계신 하나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들도 그와 같은 역할 때문에 주변 사람들에게 부끄러움을 당할 때가 많습니다. 모세도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서 화평을 말하였지만 완강한 마음을 가진 그들은 모세에게 “누가 너를 우리의 재판관을 세웠느냐?”고 말하며모세를 부끄럽게 만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평하게 할 때 경험하게 될 당야한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는다면 우리는 세상 사람들에게 결국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인정을 받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의를 위하야 박해를 받는 일은 세상 사람들이 볼 때 미련하고, 무가치한 일로 보일 수 있습니다.그렇기 때문에 선교지에서 선교사님들이 다양한 부끄러운 상황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옷을 벗겨진 상태로 볼기를 맞을 때도 있고침밷음과 조롱을 받는 부끄러움에 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선교사님들은 이러한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십니다. 그 이유는 이미 그 분들의 마음에는 천국이 임하여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 서 계셨던 받침대는 하나님의 뜻이었던 십자가였습니다.“그는 그 앞에 있는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시고 십자가를 참으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심이라!” 십자가는 하나님 보좌와 연결된 통로라 말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볼 수도 그 음성을 들을 수도 없는 것은 실제 우리의 삶에 십자가가 없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자기 부인입니다. 십자가는 나는 죽고 하나님과 예수님 그리고 성령님이 살아 역사하시는 통치를 말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저와 여러분들의 죄의 값을 대신 치르신 예수님의 사랑이기도 합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의 땀방울과 핏방울이 베어있는 나무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은 바쁜 사역을 마치고늘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보통은 이른 새벽에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나의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기도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치실 때도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해달라는 기도를 통해” 자신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이 중요하다는 십자가 정신을 제자들에게 강조했던 것입니다.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비우시고 그 안에 하나님의 사랑을 담아 세상을 구원하신 희생을 말합니다. 또한 십자가는 세상이 끝까지 발악하여 파괴하기를 원하는 하나님 나라의 가장 핵심 지대입니다.그래서 세상은 십자가를 대항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3 NKRV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유대인들은 자신들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세상은 십자가를 거역하려고 하고 그 십자가를 따르는 사람들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려고 합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공격방법이 또한 십자가셨습니다. 골로새서 2:15 NKRV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에베소서 2:16 NKRV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예수님은 이 십자가의 받침대에서 서 계셨고 그 십자가에서 6시간 동안 물과 피를 쏟는 고통 속에서 그 십자가 받침대를 흔들어 보시는 “확인, 검증, 테스트”를 해보셨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바라보게 하셨던 것들이라는 실상이란 ‘받침대’ 위에서 죽기 전까지는 보이지 않았던 “증거”인 부활을 경험하게 되셨던 것입니다.“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의 삶을 사셨기 때문에 히브리기자는 예수님을 가리켜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라는 표현을 사용했던 것입니다. 실제 예수님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구약 성도들에게는 믿음의 실체는 메시아라는 기다림의 언어를 통해 그림자와 같은 믿음의 실상을 선물해 주셨던 것이고 신약 백성들에게 구약 성도들이 경험하지 못했던 믿음의 실체이신 예수님을 직접 보고, 만지고, 경험하도록 하여 믿음의 성취가 십자가와 부활로 이루어졌음을 깨닫게 하셨던 것입니다. 아울러 예수님은 당신의 재림을 통해 믿음의 완성 또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선물해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2023년도를 마무리해가는 이 시점에 저와 여러분들이 서 있는 받침대를 점검해 보시고 그 받침대를 흔들어 보시며 예수님께서 그 흔들리는 받침대 위에서 당신의 받침대가 현재만을 위한 받침대가 아닌 “그 앞에 있는”받침대라는 사실을 깨닫고 세상 즐거움이 아닌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통해 만끽하게 되는 “즐거움”이란 받침대를 확인하시고 자기 뜻이란 야망과 욕심이 아닌 하나님 나라라는“십자가”의 받침대를 확인하시고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으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는 연말연시 되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2024년도에는 저와 여러분들이 “그 앞에 있는” “즐거움”“십자가”라는 받침대 위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확인해 보실 수 있는은혜가 있기를 소망해 봅니다.
본문: 히브리서 11:1 히브리서 12:1-4히브리서 11:1 NKRV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히브리서 12:1–4 NKRV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 저는 오늘 여러분들과 함께 ‘믿음이란’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을 나누겠습니다.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믿음을 통해 삶을 의미있게 살아기를 원하십니다. 하지만 세상은 저와 여러분들이 삶을 의미있게 살도록 만들지 않습니다. 세상 가치와 기준은 너무 자극적이고, 일시적 만족만 가져다 주는 것들이 많습니다. 마약, 도박, 쾌락...오늘 유명 연예인이 그 세상 가치에 발목이 잡혀 허덕이다가 결국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비보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소식입니다. 세상은 그저 세상이란 공간적 개념으로만 바라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을 통치하고 있는 어둠의 권세자인 사단이 세상 의가치와 그 영향력으로 사람들의 발목을 붙잡고 이리저리 끌고 다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라고하여서 그 영향력에서 예외가 되는 게 아닙니다. 우리도 세상 안에서 살고 있기한 그 영향력을 받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세상에서 삶을 사셨을 때 사단의 영향력을 경험했습니다. 사단은 예수님을 넘어뜨리려고 예수님을 시험했습니다. 1. 하나님의 뜻보다 배고픈 현실을 빠르게 극복해 보려는 시험을 통해 예수님의 발목을 붙잡았습니다. 2. 하나님을 신뢰하기보다 도리어 그 하나님을 시험해 보라는 유혹으로 예수님의 발목을 붙잡았습니다. 3.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려야 할 이유가 뭐가 있냐며? 자신이 영광을 받을 수 있다는 유혹으로 그 발목을 붙잡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살든지 죽든지 흥하든지 성하든지 쇠하든지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이란 믿음을 가지고 그 모든 시험을 이겨내시고 오늘 저와 여러분들의 구원자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처럼 믿음의 삶을 살지 못하고 사단의 유혹 시험에 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지키지 못하고 중간에 삶을 끊거나, 삶을 허랑방탕하게 살거나, 삶을 나태하게 살아갑니다. 그래서 히브리기자는 오늘 본문 말씀 일절에 “구름같이 둘러싸인 허다한 무리들”을 말씀합니다. 구름 같다는 표현은 많은 사람들이 태어나고 죽고 또 태어나고 죽었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겠지요. 그들 중 예수님과 같이 믿음을 지킨 자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를 히브리기자는 히브리서 십일장에서 말씀했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태어난 사람들 중에는 믿음을 지키지 못하고 사단에게 이리저리 끌려다니다 그 삶을 마친 무리들이 더 많을 것입니다. 2023년 다사다난한 한 해가 저물어가고 있습니다. 얼마 안 있으면 2024년 새해가 다가오는데 그 얼마 안 남은 시간이 누군가에게는 무척 길거나 무겁게 느껴져 오늘 자신의 생명을 끊거나, 삶을 포기하는 인생들이 있을 것입니다. 참으로 안타깝고 슬픈현실입니다. 우울증을 심하게 앓던 한 감독이 만든 영화가 있었는데 그 영화의 시작은 어떤 여인이 잠에서 깨어나는 장면으로 시작 됩니다. 그런데 그 여인은 잠에서 깨었을 때 자신이 70도가까운 비탈 위에 누워 있는 모습을 발견합니다. 여인은 위로 올라가기 위해 몸을 조금 욺직여 보았는데 천길 낭떨어지로 자신의 몸이 미끄러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래서 그 어떤 노력도 멈추고 양손을 뻗어 비탈진 면에 최대한 부착을 시키고 손톱으로는 몸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비탈 표면을 최대한 파내려갑니다. 결국 손톱 사이에는 피가 나옵니다. 그렇게 계속 버티고 버팁니다. 심신이 지쳐갈 쯤 하늘에서는 비가내립니다. 이 빗물에 몸은 미끄러져 더이상 버틸 수 없는 단계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여인은 절규합니다. 그리고 비명을 지릅니다. 이 영화의 감독은 자신이 앓았던 우울증의 모습을 끝도 보이지 않는 절망의 나락 끝에서매달려 살고자 바락하지만 그러한 노력마저 부질없는 것을 매일 경험하는 것이라 말했습니다. 비단 우울증만 그러겠습니까? 계속 겹치게 되는 절망의 경험은 절망염이란 심각한 마음의 병을 만들어 냅니다. 세상은 성공의 가도에서 뒤쳐지지 않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하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잠시의 쉼과 안락을 취하고 다시 그 경쟁의 삶에서 승리하라고 말하며 마약과 술 그리고 성적인 쾌락이란 올무의 자리로 인도합니다. 오늘도 이 올무에서 많은 사람들이 발목이 잡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 그 좋던 건강과 행복 그리고 감사를 잃고 좀비와 같이 할 수 없이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히브리기자가 말하는 “구름같이 둘러싸인 허다한 무리들” 이란 이와 같이 좀비와 같은 인생을 살아갔던 선진들뿐 아니라 손톱에서 피가 흐르지만 그래도 그 세상 올무에 잡히지 않기 위해 믿음을 지켰던 선진들 또한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피흘리기 까지 사투하며 세상 올무에 잡히지 않기 위해 몸부림친 믿음의 사람들인 것입니다. 믿음이란 추상적인 개념이면서 또한 매우 실제적인 개념입니다. 왜냐하면 천길 낭떠러지에 걸쳐 아슬아슬하게 살고 있는 자들에게 믿음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매우 추상적일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믿음은 당장의 성공을 약속하고 있는 눈에 보이는 그 무언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신들의 삶이 미끄러질 거 같은데 미끄러지지 않고 삶이 살아진다는 사실을깨닫는 사람들 있습니다. 이들의 눈에는 자신의 발 아래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튼튼한 받침대가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사람일 것입니다. 이런 분들에게 있어서 믿음은무척 실제적인 것입니다. 믿음에 대해 좀 더 알아보겠습니다. 히브리서 11:1 NKRV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실상’이란 보증서, 또는 권리증서와 같은 ‘받침대’를 말하는 것입니다. 받침대가 튼튼하면 그 어떤 거구도 그 위에서 안전한 삶을 보장받게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기자는 그 튼튼한 받침대 때문에 믿음의 선진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삶에 바라게 하셨던 것들을 바라보게 되는 은혜를 경험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울러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말씀합니다. 히브리기자가 말하는 ‘증거’는 믿음의 선진들이 올라서 있던 ‘말씀의 받침대’을 가 확실한 받침대인지를 시험하고 점검해 보고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증거란 헬라어 엘렝코스가 “점검하다, 확증하다, 시험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란 그 받침대가 확실한 받침대인지를 흔들어 보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지금 앉아 계신 의자를 흔들어 보십시오! 비끄덕 거리는 의자가 있나요?이곳에 있는 의자들은 대부분 무겁고 단단한 원목으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흔들지도 않습니다.아브라함은 믿음에 있어서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ㅇ 로마서 4:17 NKRV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아브라함은 “죽은 자도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신다는 믿음”이란 바침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바침대에서 그가 바라는 것은 단 하나였습니다. 이삭을 살려주십시오! 내 아내 사라의 경수가 끊어진 가운데 내게 주셨던 아들이었기에 “나는 그 사건을 통해 당신은 죽은 자도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분이심을 믿습니라”라는 바침대를 아브라함은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할 때 그 실상은 “확증하고, 점검하고, 검증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실상이기 때문에 자신이 서 있는 받침대를 흔들어 보기 시작했습니다. 이 받침대가 얼마나 튼튼한 받침대인지 그는 3일길을 걸어 나귀 위에 이런저런 물품들을 싣고 종과 자신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산으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종과 나귀는 산 아래서 기다리라고 말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모리아산에서 자신의 받침대를 심각하게 흔들어볼 참이었습니다. “내가 지금 서서 발로 밟고 있는 받침대는 절대 내 욕심, 생각, 뜻으로 이루어진게 맞아!” “분명 하나님께서 독자 이삭을 바치라고 했어!” 지금 내 눈에는 보이는바가 없고 내 손에는 잡히는 바가 없고, 내 현실이 칠흑같이 어둡지만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받침대와 함께 나는 살든지 죽든지 흥하든지 망하든지 쇠하든지 !”라고 속으로 말하고 칼을 들고 이삭을 잡으려고 할 때 하늘에서 음성이 들렸습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네 손에서 칼을 거두어라 네가 하나밖에 없는 독자까지 내게 아끼지 않는줄을 내가 아노라!” 아브라함의 어안은 벙벙했습니다. 그런데 분명 이삭과 함께 번제단을 쌓고, 이삭을 결박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했을 때에도 있었을 한 양이 보입니다. 분명 그 양은 그 곳에 있었던 양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마음이 너무 긴장해 있고, 다양한 생각들로 가득차 있었기 때문에 그 양이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 그렇습니다. 받침대를 확인해보고, 점검해 보려는 믿음의 행위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증거”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받침대 약속을 보다 빛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 그 양이 언제부터 여기에 있었지?” 드디어 아브라함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를 얻게 됩니다. 그 양은 독자 이삭을 위해 대신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게 될 예수님을 예표하는 양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절망의 자리에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란 받침대 위에 서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란 받침대를 이리저리 흔들어 보는 “점검, 확인, 시험”이란 행동을 통해 한 걸음 믿음으로 걸어보시기 바랍니다. 그 때 수풀 속에 감추어져 있던, 아니 원래 그 곳에 늘 여러분들과 함께 계셨던 어린양 되신 예수님을 바라보게 되실 것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욕심과 야망이 받침대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의 소원을 두고 행하시는 하나님으로서 우리가 원하는 욕심과 야망이 아니라 꿈과 희망이란 하나님 뜻을 그 마음에 품고 행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빌립보서 2:13 NKRV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품게 하신 그 꿈과 희망이란 받침대를 가지고 있다고 하여도 사단은 세상을 통해 저와 여러분들을 계속 시험할 것입니다. “그 꿈과 희망은 가짜야! 너 지금 몇년째 그 자리에서 그 꿈과 희망 타령하면서 인내하고 있냐? 그냥 인내하면 다 잘 될거 같지?” 저는 사단의 이런 음성에 매번 속는 목사입니다.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가며 자기 합리화의 이유로 내가 서 있는 받침대를 신뢰하지 못하고 세상 이리저리 떠밀려 흘러가는 인생을 살았고 지금도 그 유혹 속에 있는 목사입니다. 그래서 새벽에 기도할 뿐입니다. 제가 구하는 것은 단 하나 오직 주님꼐신 곳을 사모하고 그 천국을 이루어가는 삶을 살도록해주세요!하지만 기도하고 주님을 바라볼 때 마다 내가 서 있는 그 바침대를 흔들어 보고 싶은 뜨거움이 생겨납니다. 그리고 그 마음에 포착된 작고 작은 동인인 ‘하나님 나라’를 생각하며 포기하고 싶은 절망의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 주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히브리서 12:2 NKRV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님”이란 표현은 “믿음의 창시자(시작자, 개척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님”이란 표현인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도 자신이 서 있는 신념의 받침대가 다 있습니다. 돈과 명예와 권세라는 받침대는 실제 쉽게 흔들리지 않는 받침대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대부분으 그 받침대를 갖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부와 명예와 권세를 다 가져본 솔로몬은 그와 같은 받침대가 “헛되고 헛되고 헛되다!”라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지탱하고 있는 받침대에 대한 신념이 그리 오래갈 수 없기 때문이고그 받침대도 영원할 수 없는 것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히브리기자는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믿음의 시작이고 완성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아파요 오메가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믿음을 시작하신 분이 예수님이시고, 그 믿음의 내용예수님이시고, 그 믿음을 완성하실 분이 예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믿음은 예수님께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받침대는 예수님의 말씀이란 영원한 성질로 만들어진 받침대어야 합니다. 예수님이란 받침대는 첫째 그 앞에 있는 이란 미래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로마서 8:18 NKRV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 자체가 현재의 제한을 발판으로 삼지 않고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영광이란 미래에 그 발판을 삼고 삶을 사셨습니다. 그렇다고 현재를 무시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지금은 미래라는 길로 나아가는 발판가 같은 것입니다. 지금이 모여 미래가 되는 것입니다.죽은시인들의 사회라는 영화로 유명해진 표현이지요! “카르페디엠” 세상 사람들은 이를 “현재를 즐기라!”는 측면을 강조하여 사용합니다. 그런데 이 뜻의 실제 의미는 현재의 기회를 잘 선용하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영어는 이를 이렇게 번역했지요. “Seize the day” 현재를 잡으라는 뜻입니다. 현재를 잡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미래가 없는 것이겠지요. 현재 하나님의 통치를 갈망해 보시길 소망합니다. 저와 여러분들의 마음을 다스리스는 하나님께서 현재를 잡도록 하실 뿐 아니라 그 현재를 토대로 그 앞에 있는 것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된 꿈과 희망이요, 다른 표현으로 말하면 푯대인 것입니다. 빌립보서 3:14 NKRV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그 앞에 있는 것을 향해 달려가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말씀하고 계시는 그 분의 뜻이라는 푯대가 있어어 합니다. 잠언 29:18 NKRV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묵시란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꿈과 희망입니다. 푯대와 꿈과 희망은 현재라는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통해 만들어진 발판입니다. 우리는 그 발판을 밟으며 앞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땀방울이 핏방울 되도록 기도하셨던 것도 현재라는 삶에 하나님의 통치를 받기 위함 몸부림이셨고, 그로인해 바라보았던 푯대와 꿈과 희망이 바로 십자가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란 받침대는 그 앞에 있는 것을 넘어 “즐거움”에 있습니다.예수님이 올라 타셨던 즐거움이란 받침대는 현재라는 자신의 삶에서 하나님나라의 통치를 받게될 때 자신의 삶에서 누려지게 되는 다양한 마음의 상태였습니다. 이를 예수님의 말씀으로 확인해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5:3–8 NKRV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이 팔복은 예수님의 마음이 즐거움이란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받게될 때에만 즐거움이 될 수 있는 즐거움이고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즐거움이었던 것입니다. 성령 충만을 사모하십시오! 성령충만은 말씀충만이고말씀충만은 하나님의 말씀의 뜻과 원리가 저와 여러분들의 지식과 의지와 감정을 다스리게 되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비로 우리 앞에 있는 것이 십자가라는 부담스러운 미래라고 하지만 그 십자가를 짊어지는 선택을 통해 누리게 되는 즐거움을 경험하게 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즐거움이라는 “받침대”위에서 하나님을 바라보셨던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올라서 계셨던 받침대는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셨던 받침대였습니다. 마음이 가난한데 어떻게 부끄럽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마음이 가난해지면 하나님을 찾고 이지할 수 있게 돼 천국의 기쁨을 경험하게 됩니다. 남들 앞에서 애통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입니다. 우는 것은 약자들의 심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울어야 하나님께서 등을 토닥여주시는 위로를 받게되는 “즐거움”을 경험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경쟁 사회에서 빼앗고 쟁취해야 하는데 내 마음이 온유해진다면 그것은 참으로 창피한 노릇입니다. 그런데 그 창피함을 개의치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세상 사람들이 취하지 못하는 하나님 나라의 영토를 그 온유한 마음을 통해 취하도록 하십니다. 진짜 강함은 단단한데 있는게 아니라 부드럽고 유연한 온유함에 있기 때문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은 창피한 노릇입니다. 먹지 못하고, 마시지 못하는 것은 약자들의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나누고 베풀고 섬기는 삶을 통해 경험하게 되는 주림과 목마름이란 창피를 개의치 않는다면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의 주림과 목마름을 영원토록 채워주실 것입니다. 긍휼을 베푸는 것은 현대 사회에서 바보소리 듣는 행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결국은 창피한 것일 수 있지요. 그런데 세상 법칙과 다르게 타인을 긍휼이 여긴다면 저와 여러분들을 심판대 앞에서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들도 현대 사회에서 매번 손실을 보는 바보요, 세상 통치자들에게 부끄러움을 당할 수 있는 자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이러한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고 누가 보든지 보지 않든지청결한 마음을 따라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삶을 살게 된다면 우리는 다양한 손실 가운데서도 우리의 필요을 채우기 위해 서 계신 하나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들도 그와 같은 역할 때문에 주변 사람들에게 부끄러움을 당할 때가 많습니다. 모세도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서 화평을 말하였지만 완강한 마음을 가진 그들은 모세에게 “누가 너를 우리의 재판관을 세웠느냐?”고 말하며모세를 부끄럽게 만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평하게 할 때 경험하게 될 당야한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는다면 우리는 세상 사람들에게 결국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인정을 받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의를 위하야 박해를 받는 일은 세상 사람들이 볼 때 미련하고, 무가치한 일로 보일 수 있습니다.그렇기 때문에 선교지에서 선교사님들이 다양한 부끄러운 상황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옷을 벗겨진 상태로 볼기를 맞을 때도 있고침밷음과 조롱을 받는 부끄러움에 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선교사님들은 이러한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십니다. 그 이유는 이미 그 분들의 마음에는 천국이 임하여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 서 계셨던 받침대는 하나님의 뜻이었던 십자가였습니다.“그는 그 앞에 있는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시고 십자가를 참으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심이라!” 십자가는 하나님 보좌와 연결된 통로라 말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볼 수도 그 음성을 들을 수도 없는 것은 실제 우리의 삶에 십자가가 없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자기 부인입니다. 십자가는 나는 죽고 하나님과 예수님 그리고 성령님이 살아 역사하시는 통치를 말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저와 여러분들의 죄의 값을 대신 치르신 예수님의 사랑이기도 합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의 땀방울과 핏방울이 베어있는 나무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은 바쁜 사역을 마치고늘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보통은 이른 새벽에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나의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기도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치실 때도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해달라는 기도를 통해” 자신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이 중요하다는 십자가 정신을 제자들에게 강조했던 것입니다.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비우시고 그 안에 하나님의 사랑을 담아 세상을 구원하신 희생을 말합니다. 또한 십자가는 세상이 끝까지 발악하여 파괴하기를 원하는 하나님 나라의 가장 핵심 지대입니다.그래서 세상은 십자가를 대항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3 NKRV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유대인들은 자신들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세상은 십자가를 거역하려고 하고 그 십자가를 따르는 사람들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려고 합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공격방법이 또한 십자가셨습니다. 골로새서 2:15 NKRV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에베소서 2:16 NKRV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예수님은 이 십자가의 받침대에서 서 계셨고 그 십자가에서 6시간 동안 물과 피를 쏟는 고통 속에서 그 십자가 받침대를 흔들어 보시는 “확인, 검증, 테스트”를 해보셨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바라보게 하셨던 것들이라는 실상이란 ‘받침대’ 위에서 죽기 전까지는 보이지 않았던 “증거”인 부활을 경험하게 되셨던 것입니다.“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의 삶을 사셨기 때문에 히브리기자는 예수님을 가리켜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라는 표현을 사용했던 것입니다. 실제 예수님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구약 성도들에게는 믿음의 실체는 메시아라는 기다림의 언어를 통해 그림자와 같은 믿음의 실상을 선물해 주셨던 것이고 신약 백성들에게 구약 성도들이 경험하지 못했던 믿음의 실체이신 예수님을 직접 보고, 만지고, 경험하도록 하여 믿음의 성취가 십자가와 부활로 이루어졌음을 깨닫게 하셨던 것입니다. 아울러 예수님은 당신의 재림을 통해 믿음의 완성 또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선물해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2023년도를 마무리해가는 이 시점에 저와 여러분들이 서 있는 받침대를 점검해 보시고 그 받침대를 흔들어 보시며 예수님께서 그 흔들리는 받침대 위에서 당신의 받침대가 현재만을 위한 받침대가 아닌 “그 앞에 있는”받침대라는 사실을 깨닫고 세상 즐거움이 아닌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통해 만끽하게 되는 “즐거움”이란 받침대를 확인하시고 자기 뜻이란 야망과 욕심이 아닌 하나님 나라라는“십자가”의 받침대를 확인하시고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으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는 연말연시 되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2024년도에는 저와 여러분들이 “그 앞에 있는” “즐거움”“십자가”라는 받침대 위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확인해 보실 수 있는은혜가 있기를 소망해 봅니다.
본문: 히브리서 11:1 히브리서 12:1-4히브리서 11:1 NKRV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히브리서 12:1–4 NKRV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 저는 오늘 여러분들과 함께 ‘믿음이란’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을 나누겠습니다.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믿음을 통해 삶을 의미있게 살아기를 원하십니다. 하지만 세상은 저와 여러분들이 삶을 의미있게 살도록 만들지 않습니다. 세상 가치와 기준은 너무 자극적이고, 일시적 만족만 가져다 주는 것들이 많습니다. 마약, 도박, 쾌락...오늘 유명 연예인이 그 세상 가치에 발목이 잡혀 허덕이다가 결국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비보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소식입니다. 세상은 그저 세상이란 공간적 개념으로만 바라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을 통치하고 있는 어둠의 권세자인 사단이 세상 의가치와 그 영향력으로 사람들의 발목을 붙잡고 이리저리 끌고 다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라고하여서 그 영향력에서 예외가 되는 게 아닙니다. 우리도 세상 안에서 살고 있기한 그 영향력을 받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세상에서 삶을 사셨을 때 사단의 영향력을 경험했습니다. 사단은 예수님을 넘어뜨리려고 예수님을 시험했습니다. 1. 하나님의 뜻보다 배고픈 현실을 빠르게 극복해 보려는 시험을 통해 예수님의 발목을 붙잡았습니다. 2. 하나님을 신뢰하기보다 도리어 그 하나님을 시험해 보라는 유혹으로 예수님의 발목을 붙잡았습니다. 3.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려야 할 이유가 뭐가 있냐며? 자신이 영광을 받을 수 있다는 유혹으로 그 발목을 붙잡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살든지 죽든지 흥하든지 성하든지 쇠하든지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이란 믿음을 가지고 그 모든 시험을 이겨내시고 오늘 저와 여러분들의 구원자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처럼 믿음의 삶을 살지 못하고 사단의 유혹 시험에 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지키지 못하고 중간에 삶을 끊거나, 삶을 허랑방탕하게 살거나, 삶을 나태하게 살아갑니다. 그래서 히브리기자는 오늘 본문 말씀 일절에 “구름같이 둘러싸인 허다한 무리들”을 말씀합니다. 구름 같다는 표현은 많은 사람들이 태어나고 죽고 또 태어나고 죽었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겠지요. 그들 중 예수님과 같이 믿음을 지킨 자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를 히브리기자는 히브리서 십일장에서 말씀했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태어난 사람들 중에는 믿음을 지키지 못하고 사단에게 이리저리 끌려다니다 그 삶을 마친 무리들이 더 많을 것입니다. 2023년 다사다난한 한 해가 저물어가고 있습니다. 얼마 안 있으면 2024년 새해가 다가오는데 그 얼마 안 남은 시간이 누군가에게는 무척 길거나 무겁게 느껴져 오늘 자신의 생명을 끊거나, 삶을 포기하는 인생들이 있을 것입니다. 참으로 안타깝고 슬픈현실입니다. 우울증을 심하게 앓던 한 감독이 만든 영화가 있었는데 그 영화의 시작은 어떤 여인이 잠에서 깨어나는 장면으로 시작 됩니다. 그런데 그 여인은 잠에서 깨었을 때 자신이 70도가까운 비탈 위에 누워 있는 모습을 발견합니다. 여인은 위로 올라가기 위해 몸을 조금 욺직여 보았는데 천길 낭떨어지로 자신의 몸이 미끄러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래서 그 어떤 노력도 멈추고 양손을 뻗어 비탈진 면에 최대한 부착을 시키고 손톱으로는 몸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비탈 표면을 최대한 파내려갑니다. 결국 손톱 사이에는 피가 나옵니다. 그렇게 계속 버티고 버팁니다. 심신이 지쳐갈 쯤 하늘에서는 비가내립니다. 이 빗물에 몸은 미끄러져 더이상 버틸 수 없는 단계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여인은 절규합니다. 그리고 비명을 지릅니다. 이 영화의 감독은 자신이 앓았던 우울증의 모습을 끝도 보이지 않는 절망의 나락 끝에서매달려 살고자 바락하지만 그러한 노력마저 부질없는 것을 매일 경험하는 것이라 말했습니다. 비단 우울증만 그러겠습니까? 계속 겹치게 되는 절망의 경험은 절망염이란 심각한 마음의 병을 만들어 냅니다. 세상은 성공의 가도에서 뒤쳐지지 않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하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잠시의 쉼과 안락을 취하고 다시 그 경쟁의 삶에서 승리하라고 말하며 마약과 술 그리고 성적인 쾌락이란 올무의 자리로 인도합니다. 오늘도 이 올무에서 많은 사람들이 발목이 잡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 그 좋던 건강과 행복 그리고 감사를 잃고 좀비와 같이 할 수 없이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히브리기자가 말하는 “구름같이 둘러싸인 허다한 무리들” 이란 이와 같이 좀비와 같은 인생을 살아갔던 선진들뿐 아니라 손톱에서 피가 흐르지만 그래도 그 세상 올무에 잡히지 않기 위해 믿음을 지켰던 선진들 또한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피흘리기 까지 사투하며 세상 올무에 잡히지 않기 위해 몸부림친 믿음의 사람들인 것입니다. 믿음이란 추상적인 개념이면서 또한 매우 실제적인 개념입니다. 왜냐하면 천길 낭떠러지에 걸쳐 아슬아슬하게 살고 있는 자들에게 믿음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매우 추상적일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믿음은 당장의 성공을 약속하고 있는 눈에 보이는 그 무언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신들의 삶이 미끄러질 거 같은데 미끄러지지 않고 삶이 살아진다는 사실을깨닫는 사람들 있습니다. 이들의 눈에는 자신의 발 아래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튼튼한 받침대가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사람일 것입니다. 이런 분들에게 있어서 믿음은무척 실제적인 것입니다. 믿음에 대해 좀 더 알아보겠습니다. 히브리서 11:1 NKRV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실상’이란 보증서, 또는 권리증서와 같은 ‘받침대’를 말하는 것입니다. 받침대가 튼튼하면 그 어떤 거구도 그 위에서 안전한 삶을 보장받게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기자는 그 튼튼한 받침대 때문에 믿음의 선진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삶에 바라게 하셨던 것들을 바라보게 되는 은혜를 경험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울러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말씀합니다. 히브리기자가 말하는 ‘증거’는 믿음의 선진들이 올라서 있던 ‘말씀의 받침대’을 가 확실한 받침대인지를 시험하고 점검해 보고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증거란 헬라어 엘렝코스가 “점검하다, 확증하다, 시험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란 그 받침대가 확실한 받침대인지를 흔들어 보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지금 앉아 계신 의자를 흔들어 보십시오! 비끄덕 거리는 의자가 있나요?이곳에 있는 의자들은 대부분 무겁고 단단한 원목으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흔들지도 않습니다.아브라함은 믿음에 있어서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을이와 같이 시험해 보았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바라고 바랐던 것은 사라를 통해 자녀를 낳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바람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때가 이르렀을 때 엘리에셀이란 종을 통해 자녀를 낳는 게 아니라 사라를 통해 자녀를 낳게 하시겠다는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란 받침대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셨습니다. 그는 그 받침대 위에 있을 때마다 경수가 끊어진 상태의 사람의 몸에서 자녀가 태어날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바라는 것들의 실상은 하나님께서 하늘의 뭇별처럼 땅의 모래알 처럼 그의 자손을 번창하게 할 것이란 말씀과 사라의 몸에서 네 씨가 태어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 하나님의 약속이란 실상 즉 받침대를 위에서 하나님을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하나님께서 그가 서 있던 받침대를 흔들어 보십니다. 이는 아브라함에게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는말씀을 깨닫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증거”란 엘렝코스 즉 흔들다, 입증하다, 시험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서 있던 그 말씀의 받침대가 얼마나 튼튼한 받침대라는 사실을 믿음의 조상이란 타이틀을 가지게 될 아브라함이라면 반드시 검증하고 가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받침대를 크게 흔드셨습니다. “네 독자 이삭을 모리아산에서 바쳐라!” 천청병력과 같은 음성에 아브라함의 받침대는 이리저리 흔리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아브라함은 자신이 서 있던 받침대에서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무엇때문이었을까요? 로마서 4:17 NKRV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아브라함은 자신이 “죽은 자도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신다는 믿음”이란 받침대를 가지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 바침대 위에서 그가 바라는 것은 단 하나였습니다. 이삭을 살려주십시오! 내 아내 사라의 경수가 끊어진 가운데 내게 주셨던 아들이었기에 “나는 이 사건을 통해 당신은 죽은 자도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분이심을 믿게 될 것이라 신앙 고백을 하며”하나님께서 그에게 약속하신 받침위에서 내려오지 않았던 것입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휘청휘청 흔들리는 받침대 위에서 그는 자신이 서 있던 받침대가 참으로 견고한 받침대라는사실을 점검, 증명, 시험하기 위해 모리아산으로 떠납니다. “보이지 않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할 때 그 실상은 “확증하고, 점검하고, 검증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신이 서 있던 받침대가 얼마나 튼튼한 받침대인지 그는 3일길을 걸어 모리아 산으로 향했습니다. 나귀 위에 이런저런 물품들을 싣고 종과 자신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3일 길을 걸어 모리아산으로 갔던 것입니다. 그리고 종과 나귀는 산 아래서 기다리라고 말하고 이삭과 제사에 사용할 나무만 갖지고 모리아산으로 올라갑니다. 아브라함은 모리아산에서 자신의 받침대를 심각하게 흔들어볼 참이었습니다. “내가 지금 서서 발로 밟고 있는 이 받침대는 절대 내 욕심, 생각, 내 뜻으로 이루어진게 아니야!” “분명 하나님께서 독자 이삭을 바치라고 하셨어!” 지금 내 눈에는 보이는바가 없고 내 손에는 잡히는 바가 없고, 내 현실이 칠흑같이 어둡지만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받침대와 함께 나는 살든지 죽든지 흥하든지 망하든지 쇠하든지 !”라고 속으로 말하고 칼을 들고 이삭을 잡으려고 했습니다. 그 때 하늘에서 음성이 들렸습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네 손에서 칼을 거두어라 네가 하나밖에 없는 독자까지 내게 아끼지 않는줄을 내가 아노라!” 아브라함의 어안은 벙벙했습니다. 그런데 분명 이삭과 함께 번제단을 쌓고, 이삭을 결박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했을 때에도 있었을 한 양이 보였습니다. 분명 그 양은 그 곳에 있었던 양이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마음이 너무 긴장해 있었고, 다양한 생각들로 가득차 있었기 때문에 그 양이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 그렇습니다. 받침대를 확인해보고, 점검해 보려는 믿음의 행위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증거”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받침대 약속의 실재를 보다 빛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 그 양이 언제부터 여기에 있었지?” 드디어 아브라함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를 얻게 됩니다. 그 양은 독자 이삭을 위해 대신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게 될 예수님을 예표하는 양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절망의 자리에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란 받침대 위에 서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란 받침대를 이리저리 흔들어 보는 “점검, 확인, 시험”이란 행동을 통해 한 걸음 믿음으로 걸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 때 수풀 속에 감추어져 있던, 아니 원래 그 곳에 늘 여러분들과 함께 계셨던 어린양 되신 예수님을 바라보게 되실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게 있다면 우리가 원하는 욕심과 야망이 받침대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의 소원을 두고 행하시는 하나님으로서 우리가 원하는 욕심과 야망이 아니라 꿈과 희망이란 하나님 뜻을 그 마음에 품고 행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믿음을 믿음되게 하는 받침대는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주신당신의 뜻인 것입니다. 빌립보서 2:13 NKRV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하지만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품게 하신 그 꿈과 희망이란 받침대를 가지고 있다고 하여도 사단은 세상을 통해 저와 여러분들을 계속 시험할 것입니다. “그 꿈과 희망은 가짜야! 너 지금 몇년째 그 자리에서 그 꿈과 희망 타령하면서 인내하고 있냐? 그냥 인내하면 다 잘 될거 같지?” 저는 사단의 이런 음성에 많이 속았던 목사입니다. 그래서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가며 자기 합리화로 내가 서 있는 받침대를 신뢰하지 못하고 세상 이리저리 떠밀려 흘러갔던 선택을 하였던 목사입니다. 물론 그러한 유혹은 오늘도 제게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저는 새벽에 기도할 뿐입니다. 제가 구하는 것은 단 하나 오직 주님꼐신 곳을 사모하고 그 천국을 이루어가는 삶을 살도록해주세요!라고 말입니다.그렇게 기도하고 주님을 바라볼 때 마다 내가 서 있는 그 바침대를 흔들어 보고 싶은 뜨거움이 생겨납니다. 그리고 저는 그 마음에 포착된 작고 작은 ㅈ를 생각하며 포기하고 싶은 절망의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 주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히브리서 12:2 NKRV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님”이란 표현은 “믿음의 창시자(시작자, 개척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님”이란 표현인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도 자신이 서 있는 신념의 받침대가 다 있습니다. 돈과 명예와 권세라는 받침대는 실제 쉽게 흔들리지 않는 받침대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대부분으 그 받침대를 갖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부와 명예와 권세를 다 가져본 솔로몬은 그와 같은 받침대가 “헛되고 헛되고 헛되다!”라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지탱하고 있는 받침대에 대한 신념이 그리 오래갈 수 없기 때문이고그 받침대도 영원할 수 없는 것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히브리기자는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믿음의 시작이고 완성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아파요 오메가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믿음을 시작하신 분이 예수님이시고, 그 믿음의 내용예수님이시고, 그 믿음을 완성하실 분이 예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믿음은 예수님께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받침대는 예수님의 말씀이란 영원한 성질로 만들어진 받침대어야 합니다. 예수님이란 받침대는 첫째 그 앞에 있는 이란 미래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로마서 8:18 NKRV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 자체가 현재의 제한을 발판으로 삼지 않고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영광이란 미래에 그 발판을 삼고 삶을 사셨습니다. 그렇다고 현재를 무시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지금은 미래라는 길로 나아가는 발판가 같은 것입니다. 지금이 모여 미래가 되는 것입니다.죽은시인들의 사회라는 영화로 유명해진 표현이지요! “카르페디엠” 세상 사람들은 이를 “현재를 즐기라!”는 측면을 강조하여 사용합니다. 그런데 이 뜻의 실제 의미는 현재의 기회를 잘 선용하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영어는 이를 이렇게 번역했지요. “Seize the day” 현재를 잡으라는 뜻입니다. 현재를 잡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미래가 없는 것이겠지요. 현재 하나님의 통치를 갈망해 보시길 소망합니다. 저와 여러분들의 마음을 다스리스는 하나님께서 현재를 잡도록 하실 뿐 아니라 그 현재를 토대로 그 앞에 있는 것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된 꿈과 희망이요, 다른 표현으로 말하면 푯대인 것입니다. 빌립보서 3:14 NKRV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그 앞에 있는 것을 향해 달려가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말씀하고 계시는 그 분의 뜻이라는 푯대가 있어어 합니다. 잠언 29:18 NKRV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묵시란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꿈과 희망입니다. 푯대와 꿈과 희망은 현재라는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통해 만들어진 발판입니다. 우리는 그 발판을 밟으며 앞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땀방울이 핏방울 되도록 기도하셨던 것도 현재라는 삶에 하나님의 통치를 받기 위함 몸부림이셨고, 그로인해 바라보았던 푯대와 꿈과 희망이 바로 십자가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란 받침대는 그 앞에 있는 것을 넘어 “즐거움”에 있습니다.예수님이 올라 타셨던 즐거움이란 받침대는 현재라는 자신의 삶에서 하나님나라의 통치를 받게될 때 자신의 삶에서 누려지게 되는 다양한 마음의 상태였습니다. 이를 예수님의 말씀으로 확인해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5:3–8 NKRV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이 팔복은 예수님의 마음이 즐거움이란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받게될 때에만 즐거움이 될 수 있는 즐거움이고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즐거움이었던 것입니다. 성령 충만을 사모하십시오! 성령충만은 말씀충만이고말씀충만은 하나님의 말씀의 뜻과 원리가 저와 여러분들의 지식과 의지와 감정을 다스리게 되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비로 우리 앞에 있는 것이 십자가라는 부담스러운 미래라고 하지만 그 십자가를 짊어지는 선택을 통해 누리게 되는 즐거움을 경험하게 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즐거움이라는 “받침대”위에서 하나님을 바라보셨던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올라서 계셨던 받침대는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셨던 받침대였습니다. 마음이 가난한데 어떻게 부끄럽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마음이 가난해지면 하나님을 찾고 이지할 수 있게 돼 천국의 기쁨을 경험하게 됩니다. 남들 앞에서 애통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입니다. 우는 것은 약자들의 심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울어야 하나님께서 등을 토닥여주시는 위로를 받게되는 “즐거움”을 경험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경쟁 사회에서 빼앗고 쟁취해야 하는데 내 마음이 온유해진다면 그것은 참으로 창피한 노릇입니다. 그런데 그 창피함을 개의치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세상 사람들이 취하지 못하는 하나님 나라의 영토를 그 온유한 마음을 통해 취하도록 하십니다. 진짜 강함은 단단한데 있는게 아니라 부드럽고 유연한 온유함에 있기 때문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은 창피한 노릇입니다. 먹지 못하고, 마시지 못하는 것은 약자들의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나누고 베풀고 섬기는 삶을 통해 경험하게 되는 주림과 목마름이란 창피를 개의치 않는다면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의 주림과 목마름을 영원토록 채워주실 것입니다. 긍휼을 베푸는 것은 현대 사회에서 바보소리 듣는 행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결국은 창피한 것일 수 있지요. 그런데 세상 법칙과 다르게 타인을 긍휼이 여긴다면 저와 여러분들을 심판대 앞에서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들도 현대 사회에서 매번 손실을 보는 바보요, 세상 통치자들에게 부끄러움을 당할 수 있는 자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이러한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고 누가 보든지 보지 않든지청결한 마음을 따라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삶을 살게 된다면 우리는 다양한 손실 가운데서도 우리의 필요을 채우기 위해 서 계신 하나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들도 그와 같은 역할 때문에 주변 사람들에게 부끄러움을 당할 때가 많습니다. 모세도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서 화평을 말하였지만 완강한 마음을 가진 그들은 모세에게 “누가 너를 우리의 재판관을 세웠느냐?”고 말하며모세를 부끄럽게 만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평하게 할 때 경험하게 될 당야한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는다면 우리는 세상 사람들에게 결국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인정을 받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의를 위하야 박해를 받는 일은 세상 사람들이 볼 때 미련하고, 무가치한 일로 보일 수 있습니다.그렇기 때문에 선교지에서 선교사님들이 다양한 부끄러운 상황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옷을 벗겨진 상태로 볼기를 맞을 때도 있고침밷음과 조롱을 받는 부끄러움에 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선교사님들은 이러한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십니다. 그 이유는 이미 그 분들의 마음에는 천국이 임하여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 서 계셨던 받침대는 하나님의 뜻이었던 십자가였습니다.“그는 그 앞에 있는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시고 십자가를 참으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심이라!” 십자가는 하나님 보좌와 연결된 통로라 말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볼 수도 그 음성을 들을 수도 없는 것은 실제 우리의 삶에 십자가가 없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자기 부인입니다. 십자가는 나는 죽고 하나님과 예수님 그리고 성령님이 살아 역사하시는 통치를 말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저와 여러분들의 죄의 값을 대신 치르신 예수님의 사랑이기도 합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의 땀방울과 핏방울이 베어있는 나무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은 바쁜 사역을 마치고늘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보통은 이른 새벽에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나의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기도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치실 때도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해달라는 기도를 통해” 자신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이 중요하다는 십자가 정신을 제자들에게 강조했던 것입니다.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비우시고 그 안에 하나님의 사랑을 담아 세상을 구원하신 희생을 말합니다. 또한 십자가는 세상이 끝까지 발악하여 파괴하기를 원하는 하나님 나라의 가장 핵심 지대입니다.그래서 세상은 십자가를 대항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3 NKRV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유대인들은 자신들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세상은 십자가를 거역하려고 하고 그 십자가를 따르는 사람들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려고 합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공격방법이 또한 십자가셨습니다. 골로새서 2:15 NKRV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에베소서 2:16 NKRV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예수님은 이 십자가의 받침대에서 서 계셨고 그 십자가에서 6시간 동안 물과 피를 쏟는 고통 속에서 그 십자가 받침대를 흔들어 보시는 “확인, 검증, 테스트”를 해보셨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바라보게 하셨던 것들이라는 실상이란 ‘받침대’ 위에서 죽기 전까지는 보이지 않았던 “증거”인 부활을 경험하게 되셨던 것입니다.“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의 삶을 사셨기 때문에 히브리기자는 예수님을 가리켜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라는 표현을 사용했던 것입니다. 실제 예수님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구약 성도들에게는 믿음의 실체는 메시아라는 기다림의 언어를 통해 그림자와 같은 믿음의 실상을 선물해 주셨던 것이고 신약 백성들에게 구약 성도들이 경험하지 못했던 믿음의 실체이신 예수님을 직접 보고, 만지고, 경험하도록 하여 믿음의 성취가 십자가와 부활로 이루어졌음을 깨닫게 하셨던 것입니다. 아울러 예수님은 당신의 재림을 통해 믿음의 완성 또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선물해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2023년도를 마무리해가는 이 시점에 저와 여러분들이 서 있는 받침대를 점검해 보시고 그 받침대를 흔들어 보시며 예수님께서 그 흔들리는 받침대 위에서 당신의 받침대가 현재만을 위한 받침대가 아닌 “그 앞에 있는”받침대라는 사실을 깨닫고 세상 즐거움이 아닌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통해 만끽하게 되는 “즐거움”이란 받침대를 확인하시고 자기 뜻이란 야망과 욕심이 아닌 하나님 나라라는“십자가”의 받침대를 확인하시고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으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는 연말연시 되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2024년도에는 저와 여러분들이 “그 앞에 있는” “즐거움”“십자가”라는 받침대 위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확인해 보실 수 있는은혜가 있기를 소망해 봅니다.
믿음 본문: 히브리서 11:1 히브리서 12:1-4히브리서 11:1 NKRV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히브리서 12:1–4 NKRV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 저는 오늘 여러분들과 함께 ‘믿음이란’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을 나누겠습니다.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믿음을 통해 삶을 의미있게 살아기를 원하십니다. 하지만 세상은 저와 여러분들이 삶을 의미있게 살도록 만들지 않습니다. 세상 가치와 기준은 너무 자극적이고, 일시적 만족만 가져다 주는 것들이 많습니다. 마약, 도박, 쾌락...오늘 유명 연예인이 그 세상 가치에 발목이 잡혀 허덕이다가 결국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비보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소식입니다. 세상은 그저 세상이란 공간적 개념으로만 바라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을 통치하고 있는 어둠의 권세자인 사단이 세상 의가치와 그 영향력으로 사람들의 발목을 붙잡고 이리저리 끌고 다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라고하여서 그 영향력에서 예외가 되는 게 아닙니다. 우리도 세상 안에서 살고 있기한 그 영향력을 받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세상에서 삶을 사셨을 때 사단의 영향력을 경험했습니다. 사단은 예수님을 넘어뜨리려고 예수님을 시험했습니다. 1. 하나님의 뜻보다 배고픈 현실을 빠르게 극복해 보려는 시험을 통해 예수님의 발목을 붙잡았습니다. 2. 하나님을 신뢰하기보다 도리어 그 하나님을 시험해 보라는 유혹으로 예수님의 발목을 붙잡았습니다. 3.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려야 할 이유가 뭐가 있냐며? 자신이 영광을 받을 수 있다는 유혹으로 그 발목을 붙잡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살든지 죽든지 흥하든지 성하든지 쇠하든지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이란 믿음을 가지고 그 모든 시험을 이겨내시고 오늘 저와 여러분들의 구원자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처럼 믿음의 삶을 살지 못하고 사단의 유혹 시험에 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지키지 못하고 중간에 삶을 끊거나, 삶을 허랑방탕하게 살거나, 삶을 나태하게 살아갑니다. 그래서 히브리기자는 오늘 본문 말씀 일절에 “구름같이 둘러싸인 허다한 무리들”을 말씀합니다. 구름 같다는 표현은 많은 사람들이 태어나고 죽고 또 태어나고 죽었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겠지요. 그들 중 예수님과 같이 믿음을 지킨 자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를 히브리기자는 히브리서 십일장에서 말씀했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태어난 사람들 중에는 믿음을 지키지 못하고 사단에게 이리저리 끌려다니다 그 삶을 마친 무리들이 더 많을 것입니다. 2023년 다사다난한 한 해가 저물어가고 있습니다. 얼마 안 있으면 2024년 새해가 다가오는데 그 얼마 안 남은 시간이 누군가에게는 무척 길거나 무겁게 느껴져 오늘 자신의 생명을 끊거나, 삶을 포기하는 인생들이 있을 것입니다. 참으로 안타깝고 슬픈현실입니다. 우울증을 심하게 앓던 한 감독이 만든 영화가 있었는데 그 영화의 시작은 어떤 여인이 잠에서 깨어나는 장면으로 시작 됩니다. 그런데 그 여인은 잠에서 깨었을 때 자신이 70도가까운 비탈 위에 누워 있는 모습을 발견합니다. 여인은 위로 올라가기 위해 몸을 조금 욺직여 보았는데 천길 낭떨어지로 자신의 몸이 미끄러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래서 그 어떤 노력도 멈추고 양손을 뻗어 비탈진 면에 최대한 부착을 시키고 손톱으로는 몸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비탈 표면을 최대한 파내려갑니다. 결국 손톱 사이에는 피가 나옵니다. 그렇게 계속 버티고 버팁니다. 심신이 지쳐갈 쯤 하늘에서는 비가내립니다. 이 빗물에 몸은 미끄러져 더이상 버틸 수 없는 단계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여인은 절규합니다. 그리고 비명을 지릅니다. 이 영화의 감독은 자신이 앓았던 우울증의 모습을 끝도 보이지 않는 절망의 나락 끝에서매달려 살고자 바락하지만 그러한 노력마저 부질없는 것을 매일 경험하는 것이라 말했습니다. 비단 우울증만 그러겠습니까? 계속 겹치게 되는 절망의 경험은 절망염이란 심각한 마음의 병을 만들어 냅니다. 세상은 성공의 가도에서 뒤쳐지지 않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하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잠시의 쉼과 안락을 취하고 다시 그 경쟁의 삶에서 승리하라고 말하며 마약과 술 그리고 성적인 쾌락이란 올무의 자리로 인도합니다. 오늘도 이 올무에서 많은 사람들이 발목이 잡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 그 좋던 건강과 행복 그리고 감사를 잃고 좀비와 같이 할 수 없이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히브리기자가 말하는 “구름같이 둘러싸인 허다한 무리들” 이란 이와 같이 좀비와 같은 인생을 살아갔던 선진들뿐 아니라 손톱에서 피가 흐르지만 그래도 그 세상 올무에 잡히지 않기 위해 믿음을 지켰던 선진들 또한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피흘리기 까지 사투하며 세상 올무에 잡히지 않기 위해 몸부림친 믿음의 사람들인 것입니다. 믿음이란 추상적인 개념이면서 또한 매우 실제적인 개념입니다. 왜냐하면 천길 낭떠러지에 걸쳐 아슬아슬하게 살고 있는 자들에게 믿음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매우 추상적일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믿음은 당장의 성공을 약속하고 있는 눈에 보이는 그 무언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신들의 삶이 미끄러질 거 같은데 미끄러지지 않고 삶이 살아진다는 사실을깨닫는 사람들 있습니다. 이들의 눈에는 자신의 발 아래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튼튼한 받침대가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사람일 것입니다. 이런 분들에게 있어서 믿음은무척 실제적인 것입니다. 믿음에 대해 좀 더 알아보겠습니다. 히브리서 11:1 NKRV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실상’이란 보증서, 또는 권리증서와 같은 ‘받침대’를 말하는 것입니다. 받침대가 튼튼하면 그 어떤 거구도 그 위에서 안전한 삶을 보장받게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기자는 그 튼튼한 받침대 때문에 믿음의 선진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삶에 바라게 하셨던 것들을 바라보게 되는 은혜를 경험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울러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말씀합니다. 히브리기자가 말하는 ‘증거’는 믿음의 선진들이 올라서 있던 ‘말씀의 받침대’을 ㄱ 증거란 시험하고 점검해 보고 입증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바침대를 흔들어 보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지금 앉아 계신 의자를 흔들어 보십시오! 비끄덕 거리는 의자가 있나요?대부분의 의자들은 무거운 원목으로 만들어진 의자기 때문에 흔들지도 않습니다.아브라함은 믿음이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 하셨기 때문에 자신이 바라는 것 즉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에 영롱하게 보여주셨던 바침대를 믿기로 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 즉 바침대이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4:17 NKRV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아브라함은 “죽은 자도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신다는 믿음”이란 바침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바침대에서 그가 바라는 것은 단 하나였습니다. 이삭을 살려주십시오! 내 아내 사라의 경수가 끊어진 가운데 내게 주셨던 아들이었기에 “나는 그 사건을 통해 당신은 죽은 자도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분이심을 믿습니라”라는 바침대를 아브라함은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할 때 그 실상은 “확증하고, 점검하고, 검증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실상이기 때문에 자신이 서 있는 받침대를 흔들어 보기 시작했습니다. 이 받침대가 얼마나 튼튼한 받침대인지 그는 3일길을 걸어 나귀 위에 이런저런 물품들을 싣고 종과 자신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산으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종과 나귀는 산 아래서 기다리라고 말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모리아산에서 자신의 받침대를 심각하게 흔들어볼 참이었습니다. “내가 지금 서서 발로 밟고 있는 받침대는 절대 내 욕심, 생각, 뜻으로 이루어진게 맞아!” “분명 하나님께서 독자 이삭을 바치라고 했어!” 지금 내 눈에는 보이는바가 없고 내 손에는 잡히는 바가 없고, 내 현실이 칠흑같이 어둡지만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받침대와 함께 나는 살든지 죽든지 흥하든지 망하든지 쇠하든지 !”라고 속으로 말하고 칼을 들고 이삭을 잡으려고 할 때 하늘에서 음성이 들렸습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네 손에서 칼을 거두어라 네가 하나밖에 없는 독자까지 내게 아끼지 않는줄을 내가 아노라!” 아브라함의 어안은 벙벙했습니다. 그런데 분명 이삭과 함께 번제단을 쌓고, 이삭을 결박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했을 때에도 있었을 한 양이 보입니다. 분명 그 양은 그 곳에 있었던 양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마음이 너무 긴장해 있고, 다양한 생각들로 가득차 있었기 때문에 그 양이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 그렇습니다. 받침대를 확인해보고, 점검해 보려는 믿음의 행위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증거”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받침대 약속을 보다 빛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 그 양이 언제부터 여기에 있었지?” 드디어 아브라함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를 얻게 됩니다. 그 양은 독자 이삭을 위해 대신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게 될 예수님을 예표하는 양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절망의 자리에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란 받침대 위에 서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란 받침대를 이리저리 흔들어 보는 “점검, 확인, 시험”이란 행동을 통해 한 걸음 믿음으로 걸어보시기 바랍니다. 그 때 수풀 속에 감추어져 있던, 아니 원래 그 곳에 늘 여러분들과 함께 계셨던 어린양 되신 예수님을 바라보게 되실 것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욕심과 야망이 받침대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의 소원을 두고 행하시는 하나님으로서 우리가 원하는 욕심과 야망이 아니라 꿈과 희망이란 하나님 뜻을 그 마음에 품고 행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빌립보서 2:13 NKRV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품게 하신 그 꿈과 희망이란 받침대를 가지고 있다고 하여도 사단은 세상을 통해 저와 여러분들을 계속 시험할 것입니다. “그 꿈과 희망은 가짜야! 너 지금 몇년째 그 자리에서 그 꿈과 희망 타령하면서 인내하고 있냐? 그냥 인내하면 다 잘 될거 같지?” 저는 사단의 이런 음성에 매번 속는 목사입니다.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가며 자기 합리화의 이유로 내가 서 있는 받침대를 신뢰하지 못하고 세상 이리저리 떠밀려 흘러가는 인생을 살았고 지금도 그 유혹 속에 있는 목사입니다. 그래서 새벽에 기도할 뿐입니다. 제가 구하는 것은 단 하나 오직 주님꼐신 곳을 사모하고 그 천국을 이루어가는 삶을 살도록해주세요!하지만 기도하고 주님을 바라볼 때 마다 내가 서 있는 그 바침대를 흔들어 보고 싶은 뜨거움이 생겨납니다. 그리고 그 마음에 포착된 작고 작은 동인인 ‘하나님 나라’를 생각하며 포기하고 싶은 절망의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 주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히브리서 12:2 NKRV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님”이란 표현은 “믿음의 창시자(시작자, 개척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님”이란 표현인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도 자신이 서 있는 신념의 받침대가 다 있습니다. 돈과 명예와 권세라는 받침대는 실제 쉽게 흔들리지 않는 받침대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대부분으 그 받침대를 갖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부와 명예와 권세를 다 가져본 솔로몬은 그와 같은 받침대가 “헛되고 헛되고 헛되다!”라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지탱하고 있는 받침대에 대한 신념이 그리 오래갈 수 없기 때문이고그 받침대도 영원할 수 없는 것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히브리기자는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믿음의 시작이고 완성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아파요 오메가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믿음을 시작하신 분이 예수님이시고, 그 믿음의 내용예수님이시고, 그 믿음을 완성하실 분이 예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믿음은 예수님께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받침대는 예수님의 말씀이란 영원한 성질로 만들어진 받침대어야 합니다. 예수님이란 받침대는 첫째 그 앞에 있는 이란 미래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로마서 8:18 NKRV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 자체가 현재의 제한을 발판으로 삼지 않고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영광이란 미래에 그 발판을 삼고 삶을 사셨습니다. 그렇다고 현재를 무시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지금은 미래라는 길로 나아가는 발판가 같은 것입니다. 지금이 모여 미래가 되는 것입니다.죽은시인들의 사회라는 영화로 유명해진 표현이지요! “카르페디엠” 세상 사람들은 이를 “현재를 즐기라!”는 측면을 강조하여 사용합니다. 그런데 이 뜻의 실제 의미는 현재의 기회를 잘 선용하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영어는 이를 이렇게 번역했지요. “Seize the day” 현재를 잡으라는 뜻입니다. 현재를 잡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미래가 없는 것이겠지요. 현재 하나님의 통치를 갈망해 보시길 소망합니다. 저와 여러분들의 마음을 다스리스는 하나님께서 현재를 잡도록 하실 뿐 아니라 그 현재를 토대로 그 앞에 있는 것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된 꿈과 희망이요, 다른 표현으로 말하면 푯대인 것입니다. 빌립보서 3:14 NKRV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그 앞에 있는 것을 향해 달려가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말씀하고 계시는 그 분의 뜻이라는 푯대가 있어어 합니다. 잠언 29:18 NKRV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묵시란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꿈과 희망입니다. 푯대와 꿈과 희망은 현재라는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통해 만들어진 발판입니다. 우리는 그 발판을 밟으며 앞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땀방울이 핏방울 되도록 기도하셨던 것도 현재라는 삶에 하나님의 통치를 받기 위함 몸부림이셨고, 그로인해 바라보았던 푯대와 꿈과 희망이 바로 십자가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란 받침대는 그 앞에 있는 것을 넘어 “즐거움”에 있습니다.예수님이 올라 타셨던 즐거움이란 받침대는 현재라는 자신의 삶에서 하나님나라의 통치를 받게될 때 자신의 삶에서 누려지게 되는 다양한 마음의 상태였습니다. 이를 예수님의 말씀으로 확인해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5:3–8 NKRV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이 팔복은 예수님의 마음이 즐거움이란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받게될 때에만 즐거움이 될 수 있는 즐거움이고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즐거움이었던 것입니다. 성령 충만을 사모하십시오! 성령충만은 말씀충만이고말씀충만은 하나님의 말씀의 뜻과 원리가 저와 여러분들의 지식과 의지와 감정을 다스리게 되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비로 우리 앞에 있는 것이 십자가라는 부담스러운 미래라고 하지만 그 십자가를 짊어지는 선택을 통해 누리게 되는 즐거움을 경험하게 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즐거움이라는 “받침대”위에서 하나님을 바라보셨던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올라서 계셨던 받침대는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셨던 받침대였습니다. 마음이 가난한데 어떻게 부끄럽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마음이 가난해지면 하나님을 찾고 이지할 수 있게 돼 천국의 기쁨을 경험하게 됩니다. 남들 앞에서 애통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입니다. 우는 것은 약자들의 심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울어야 하나님께서 등을 토닥여주시는 위로를 받게되는 “즐거움”을 경험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경쟁 사회에서 빼앗고 쟁취해야 하는데 내 마음이 온유해진다면 그것은 참으로 창피한 노릇입니다. 그런데 그 창피함을 개의치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세상 사람들이 취하지 못하는 하나님 나라의 영토를 그 온유한 마음을 통해 취하도록 하십니다. 진짜 강함은 단단한데 있는게 아니라 부드럽고 유연한 온유함에 있기 때문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은 창피한 노릇입니다. 먹지 못하고, 마시지 못하는 것은 약자들의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나누고 베풀고 섬기는 삶을 통해 경험하게 되는 주림과 목마름이란 창피를 개의치 않는다면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의 주림과 목마름을 영원토록 채워주실 것입니다. 긍휼을 베푸는 것은 현대 사회에서 바보소리 듣는 행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결국은 창피한 것일 수 있지요. 그런데 세상 법칙과 다르게 타인을 긍휼이 여긴다면 저와 여러분들을 심판대 앞에서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들도 현대 사회에서 매번 손실을 보는 바보요, 세상 통치자들에게 부끄러움을 당할 수 있는 자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이러한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고 누가 보든지 보지 않든지청결한 마음을 따라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삶을 살게 된다면 우리는 다양한 손실 가운데서도 우리의 필요을 채우기 위해 서 계신 하나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들도 그와 같은 역할 때문에 주변 사람들에게 부끄러움을 당할 때가 많습니다. 모세도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서 화평을 말하였지만 완강한 마음을 가진 그들은 모세에게 “누가 너를 우리의 재판관을 세웠느냐?”고 말하며모세를 부끄럽게 만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평하게 할 때 경험하게 될 당야한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는다면 우리는 세상 사람들에게 결국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인정을 받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의를 위하야 박해를 받는 일은 세상 사람들이 볼 때 미련하고, 무가치한 일로 보일 수 있습니다.그렇기 때문에 선교지에서 선교사님들이 다양한 부끄러운 상황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옷을 벗겨진 상태로 볼기를 맞을 때도 있고침밷음과 조롱을 받는 부끄러움에 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선교사님들은 이러한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십니다. 그 이유는 이미 그 분들의 마음에는 천국이 임하여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 서 계셨던 받침대는 하나님의 뜻이었던 십자가였습니다.“그는 그 앞에 있는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시고 십자가를 참으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심이라!” 십자가는 하나님 보좌와 연결된 통로라 말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볼 수도 그 음성을 들을 수도 없는 것은 실제 우리의 삶에 십자가가 없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자기 부인입니다. 십자가는 나는 죽고 하나님과 예수님 그리고 성령님이 살아 역사하시는 통치를 말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저와 여러분들의 죄의 값을 대신 치르신 예수님의 사랑이기도 합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의 땀방울과 핏방울이 베어있는 나무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은 바쁜 사역을 마치고늘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보통은 이른 새벽에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나의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기도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치실 때도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해달라는 기도를 통해” 자신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이 중요하다는 십자가 정신을 제자들에게 강조했던 것입니다.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비우시고 그 안에 하나님의 사랑을 담아 세상을 구원하신 희생을 말합니다. 또한 십자가는 세상이 끝까지 발악하여 파괴하기를 원하는 하나님 나라의 가장 핵심 지대입니다.그래서 세상은 십자가를 대항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3 NKRV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유대인들은 자신들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세상은 십자가를 거역하려고 하고 그 십자가를 따르는 사람들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려고 합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공격방법이 또한 십자가셨습니다. 골로새서 2:15 NKRV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에베소서 2:16 NKRV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예수님은 이 십자가의 받침대에서 서 계셨고 그 십자가에서 6시간 동안 물과 피를 쏟는 고통 속에서 그 십자가 받침대를 흔들어 보시는 “확인, 검증, 테스트”를 해보셨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바라보게 하셨던 것들이라는 실상이란 ‘받침대’ 위에서 죽기 전까지는 보이지 않았던 “증거”인 부활을 경험하게 되셨던 것입니다.“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의 삶을 사셨기 때문에 히브리기자는 예수님을 가리켜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라는 표현을 사용했던 것입니다. 실제 예수님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구약 성도들에게는 믿음의 실체는 메시아라는 기다림의 언어를 통해 그림자와 같은 믿음의 실상을 선물해 주셨던 것이고 신약 백성들에게 구약 성도들이 경험하지 못했던 믿음의 실체이신 예수님을 직접 보고, 만지고, 경험하도록 하여 믿음의 성취가 십자가와 부활로 이루어졌음을 깨닫게 하셨던 것입니다. 아울러 예수님은 당신의 재림을 통해 믿음의 완성 또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선물해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2023년도를 마무리해가는 이 시점에 저와 여러분들이 서 있는 받침대를 점검해 보시고 그 받침대를 흔들어 보시며 예수님께서 그 흔들리는 받침대 위에서 당신의 받침대가 현재만을 위한 받침대가 아닌 “그 앞에 있는”받침대라는 사실을 깨닫고 세상 즐거움이 아닌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통해 만끽하게 되는 “즐거움”이란 받침대를 확인하시고 자기 뜻이란 야망과 욕심이 아닌 하나님 나라라는“십자가”의 받침대를 확인하시고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으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는 연말연시 되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2024년도에는 저와 여러분들이 “그 앞에 있는” “즐거움”“십자가”라는 받침대 위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확인해 보실 수 있는은혜가 있기를 소망해 봅니다.
본문: 히브리서 11:1 히브리서 12:1-4히브리서 11:1 NKRV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히브리서 12:1–4 NKRV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 저는 오늘 여러분들과 함께 ‘믿음이란’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을 나누겠습니다.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믿음을 통해 삶을 의미있게 살아기를 원하십니다. 하지만 세상은 저와 여러분들이 삶을 의미있게 살도록 만들지 않습니다. 세상 가치와 기준은 너무 자극적이고, 일시적 만족만 가져다 주는 것들이 많습니다. 마약, 도박, 쾌락...오늘 유명 연예인이 그 세상 가치에 발목이 잡혀 허덕이다가 결국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비보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소식입니다. 세상은 그저 세상이란 공간적 개념으로만 바라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을 통치하고 있는 어둠의 권세자인 사단이 세상 의가치와 그 영향력으로 사람들의 발목을 붙잡고 이리저리 끌고 다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라고하여서 그 영향력에서 예외가 되는 게 아닙니다. 우리도 세상 안에서 살고 있기한 그 영향력을 받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세상에서 삶을 사셨을 때 사단의 영향력을 경험했습니다. 사단은 예수님을 넘어뜨리려고 예수님을 시험했습니다. 1. 하나님의 뜻보다 배고픈 현실을 빠르게 극복해 보려는 시험을 통해 예수님의 발목을 붙잡았습니다. 2. 하나님을 신뢰하기보다 도리어 그 하나님을 시험해 보라는 유혹으로 예수님의 발목을 붙잡았습니다. 3.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려야 할 이유가 뭐가 있냐며? 자신이 영광을 받을 수 있다는 유혹으로 그 발목을 붙잡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살든지 죽든지 흥하든지 성하든지 쇠하든지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이란 믿음을 가지고 그 모든 시험을 이겨내시고 오늘 저와 여러분들의 구원자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처럼 믿음의 삶을 살지 못하고 사단의 유혹 시험에 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지키지 못하고 중간에 삶을 끊거나, 삶을 허랑방탕하게 살거나, 삶을 나태하게 살아갑니다. 그래서 히브리기자는 오늘 본문 말씀 일절에 “구름같이 둘러싸인 허다한 무리들”을 말씀합니다. 구름 같다는 표현은 많은 사람들이 태어나고 죽고 또 태어나고 죽었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겠지요. 그들 중 예수님과 같이 믿음을 지킨 자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를 히브리기자는 히브리서 십일장에서 말씀했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태어난 사람들 중에는 믿음을 지키지 못하고 사단에게 이리저리 끌려다니다 그 삶을 마친 무리들이 더 많을 것입니다. 2023년 다사다난한 한 해가 저물어가고 있습니다. 얼마 안 있으면 2024년 새해가 다가오는데 그 얼마 안 남은 시간이 누군가에게는 무척 길거나 무겁게 느껴져 오늘 자신의 생명을 끊거나, 삶을 포기하는 인생들이 있을 것입니다. 참으로 안타깝고 슬픈현실입니다. 우울증을 심하게 앓던 한 감독이 만든 영화가 있었는데 그 영화의 시작은 어떤 여인이 잠에서 깨어나는 장면으로 시작 됩니다. 그런데 그 여인은 잠에서 깨었을 때 자신이 70도가까운 비탈 위에 누워 있는 모습을 발견합니다. 여인은 위로 올라가기 위해 몸을 조금 욺직여 보았는데 천길 낭떨어지로 자신의 몸이 미끄러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래서 그 어떤 노력도 멈추고 양손을 뻗어 비탈진 면에 최대한 부착을 시키고 손톱으로는 몸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비탈 표면을 최대한 파내려갑니다. 결국 손톱 사이에는 피가 나옵니다. 그렇게 계속 버티고 버팁니다. 심신이 지쳐갈 쯤 하늘에서는 비가내립니다. 이 빗물에 몸은 미끄러져 더이상 버틸 수 없는 단계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여인은 절규합니다. 그리고 비명을 지릅니다. 이 영화의 감독은 자신이 앓았던 우울증의 모습을 끝도 보이지 않는 절망의 나락 끝에서매달려 살고자 바락하지만 그러한 노력마저 부질없는 것을 매일 경험하는 것이라 말했습니다. 비단 우울증만 그러겠습니까? 계속 겹치게 되는 절망의 경험은 절망염이란 심각한 마음의 병을 만들어 냅니다. 세상은 성공의 가도에서 뒤쳐지지 않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하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잠시의 쉼과 안락을 취하고 다시 그 경쟁의 삶에서 승리하라고 말하며 마약과 술 그리고 성적인 쾌락이란 올무의 자리로 인도합니다. 오늘도 이 올무에서 많은 사람들이 발목이 잡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 그 좋던 건강과 행복 그리고 감사를 잃고 좀비와 같이 할 수 없이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히브리기자가 말하는 “구름같이 둘러싸인 허다한 무리들” 이란 이와 같이 좀비와 같은 인생을 살아갔던 선진들뿐 아니라 손톱에서 피가 흐르지만 그래도 그 세상 올무에 잡히지 않기 위해 믿음을 지켰던 선진들 또한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피흘리기 까지 사투하며 세상 올무에 잡히지 않기 위해 몸부림친 믿음의 사람들인 것입니다. 믿음이란 추상적인 개념이면서 또한 매우 실제적인 개념입니다. 왜냐하면 천길 낭떠러지에 걸쳐 아슬아슬하게 살고 있는 자들에게 믿음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매우 추상적일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믿음은 당장의 성공을 약속하고 있는 눈에 보이는 그 무언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신들의 삶이 미끄러질 거 같은데 미끄러지지 않고 삶이 살아진다는 사실을깨닫는 사람들 있습니다. 이들의 눈에는 자신의 발 아래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튼튼한 받침대가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사람일 것입니다. 이런 분들에게 있어서 믿음은무척 실제적인 것입니다. 믿음에 대해 좀 더 알아보겠습니다. 히브리서 11:1 NKRV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실상’이란 보증서, 또는 권리증서와 같은 ‘받침대’를 말하는 것입니다. 받침대가 튼튼하면 그 어떤 거구도 그 위에서 안전한 삶을 보장받게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기자는 그 튼튼한 받침대 때문에 믿음의 선진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삶에 바라게 하셨던 것들을 바라보게 되는 은혜를 경험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울러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말씀합니다. 히브리기자가 말하는 ‘증거’는 믿음의 선진들이 올라서 있던 ‘말씀의 받침대’을 가 확실한 받침대인지를 시험하고 점검해 보고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증거란 헬라어 엘렝코스가 “점검하다, 확증하다, 시험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란 그 받침대가 확실한 받침대인지를 흔들어 보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지금 앉아 계신 의자를 흔들어 보십시오! 비끄덕 거리는 의자가 있나요?이곳에 있는 의자들은 대부분 무겁고 단단한 원목으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흔들지도 않습니다.아브라함은 믿음에 있어서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ㅇ 로마서 4:17 NKRV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아브라함은 “죽은 자도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신다는 믿음”이란 바침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바침대에서 그가 바라는 것은 단 하나였습니다. 이삭을 살려주십시오! 내 아내 사라의 경수가 끊어진 가운데 내게 주셨던 아들이었기에 “나는 그 사건을 통해 당신은 죽은 자도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분이심을 믿습니라”라는 바침대를 아브라함은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할 때 그 실상은 “확증하고, 점검하고, 검증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실상이기 때문에 자신이 서 있는 받침대를 흔들어 보기 시작했습니다. 이 받침대가 얼마나 튼튼한 받침대인지 그는 3일길을 걸어 나귀 위에 이런저런 물품들을 싣고 종과 자신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산으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종과 나귀는 산 아래서 기다리라고 말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모리아산에서 자신의 받침대를 심각하게 흔들어볼 참이었습니다. “내가 지금 서서 발로 밟고 있는 받침대는 절대 내 욕심, 생각, 뜻으로 이루어진게 맞아!” “분명 하나님께서 독자 이삭을 바치라고 했어!” 지금 내 눈에는 보이는바가 없고 내 손에는 잡히는 바가 없고, 내 현실이 칠흑같이 어둡지만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받침대와 함께 나는 살든지 죽든지 흥하든지 망하든지 쇠하든지 !”라고 속으로 말하고 칼을 들고 이삭을 잡으려고 할 때 하늘에서 음성이 들렸습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네 손에서 칼을 거두어라 네가 하나밖에 없는 독자까지 내게 아끼지 않는줄을 내가 아노라!” 아브라함의 어안은 벙벙했습니다. 그런데 분명 이삭과 함께 번제단을 쌓고, 이삭을 결박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했을 때에도 있었을 한 양이 보입니다. 분명 그 양은 그 곳에 있었던 양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마음이 너무 긴장해 있고, 다양한 생각들로 가득차 있었기 때문에 그 양이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 그렇습니다. 받침대를 확인해보고, 점검해 보려는 믿음의 행위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증거”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받침대 약속을 보다 빛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 그 양이 언제부터 여기에 있었지?” 드디어 아브라함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를 얻게 됩니다. 그 양은 독자 이삭을 위해 대신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게 될 예수님을 예표하는 양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절망의 자리에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란 받침대 위에 서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란 받침대를 이리저리 흔들어 보는 “점검, 확인, 시험”이란 행동을 통해 한 걸음 믿음으로 걸어보시기 바랍니다. 그 때 수풀 속에 감추어져 있던, 아니 원래 그 곳에 늘 여러분들과 함께 계셨던 어린양 되신 예수님을 바라보게 되실 것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욕심과 야망이 받침대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의 소원을 두고 행하시는 하나님으로서 우리가 원하는 욕심과 야망이 아니라 꿈과 희망이란 하나님 뜻을 그 마음에 품고 행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빌립보서 2:13 NKRV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품게 하신 그 꿈과 희망이란 받침대를 가지고 있다고 하여도 사단은 세상을 통해 저와 여러분들을 계속 시험할 것입니다. “그 꿈과 희망은 가짜야! 너 지금 몇년째 그 자리에서 그 꿈과 희망 타령하면서 인내하고 있냐? 그냥 인내하면 다 잘 될거 같지?” 저는 사단의 이런 음성에 매번 속는 목사입니다.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가며 자기 합리화의 이유로 내가 서 있는 받침대를 신뢰하지 못하고 세상 이리저리 떠밀려 흘러가는 인생을 살았고 지금도 그 유혹 속에 있는 목사입니다. 그래서 새벽에 기도할 뿐입니다. 제가 구하는 것은 단 하나 오직 주님꼐신 곳을 사모하고 그 천국을 이루어가는 삶을 살도록해주세요!하지만 기도하고 주님을 바라볼 때 마다 내가 서 있는 그 바침대를 흔들어 보고 싶은 뜨거움이 생겨납니다. 그리고 그 마음에 포착된 작고 작은 동인인 ‘하나님 나라’를 생각하며 포기하고 싶은 절망의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 주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히브리서 12:2 NKRV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님”이란 표현은 “믿음의 창시자(시작자, 개척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님”이란 표현인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도 자신이 서 있는 신념의 받침대가 다 있습니다. 돈과 명예와 권세라는 받침대는 실제 쉽게 흔들리지 않는 받침대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대부분으 그 받침대를 갖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부와 명예와 권세를 다 가져본 솔로몬은 그와 같은 받침대가 “헛되고 헛되고 헛되다!”라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지탱하고 있는 받침대에 대한 신념이 그리 오래갈 수 없기 때문이고그 받침대도 영원할 수 없는 것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히브리기자는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믿음의 시작이고 완성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아파요 오메가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믿음을 시작하신 분이 예수님이시고, 그 믿음의 내용예수님이시고, 그 믿음을 완성하실 분이 예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믿음은 예수님께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받침대는 예수님의 말씀이란 영원한 성질로 만들어진 받침대어야 합니다. 예수님이란 받침대는 첫째 그 앞에 있는 이란 미래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로마서 8:18 NKRV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 자체가 현재의 제한을 발판으로 삼지 않고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영광이란 미래에 그 발판을 삼고 삶을 사셨습니다. 그렇다고 현재를 무시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지금은 미래라는 길로 나아가는 발판가 같은 것입니다. 지금이 모여 미래가 되는 것입니다.죽은시인들의 사회라는 영화로 유명해진 표현이지요! “카르페디엠” 세상 사람들은 이를 “현재를 즐기라!”는 측면을 강조하여 사용합니다. 그런데 이 뜻의 실제 의미는 현재의 기회를 잘 선용하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영어는 이를 이렇게 번역했지요. “Seize the day” 현재를 잡으라는 뜻입니다. 현재를 잡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미래가 없는 것이겠지요. 현재 하나님의 통치를 갈망해 보시길 소망합니다. 저와 여러분들의 마음을 다스리스는 하나님께서 현재를 잡도록 하실 뿐 아니라 그 현재를 토대로 그 앞에 있는 것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된 꿈과 희망이요, 다른 표현으로 말하면 푯대인 것입니다. 빌립보서 3:14 NKRV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그 앞에 있는 것을 향해 달려가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말씀하고 계시는 그 분의 뜻이라는 푯대가 있어어 합니다. 잠언 29:18 NKRV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묵시란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꿈과 희망입니다. 푯대와 꿈과 희망은 현재라는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통해 만들어진 발판입니다. 우리는 그 발판을 밟으며 앞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땀방울이 핏방울 되도록 기도하셨던 것도 현재라는 삶에 하나님의 통치를 받기 위함 몸부림이셨고, 그로인해 바라보았던 푯대와 꿈과 희망이 바로 십자가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란 받침대는 그 앞에 있는 것을 넘어 “즐거움”에 있습니다.예수님이 올라 타셨던 즐거움이란 받침대는 현재라는 자신의 삶에서 하나님나라의 통치를 받게될 때 자신의 삶에서 누려지게 되는 다양한 마음의 상태였습니다. 이를 예수님의 말씀으로 확인해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5:3–8 NKRV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이 팔복은 예수님의 마음이 즐거움이란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받게될 때에만 즐거움이 될 수 있는 즐거움이고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즐거움이었던 것입니다. 성령 충만을 사모하십시오! 성령충만은 말씀충만이고말씀충만은 하나님의 말씀의 뜻과 원리가 저와 여러분들의 지식과 의지와 감정을 다스리게 되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비로 우리 앞에 있는 것이 십자가라는 부담스러운 미래라고 하지만 그 십자가를 짊어지는 선택을 통해 누리게 되는 즐거움을 경험하게 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즐거움이라는 “받침대”위에서 하나님을 바라보셨던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올라서 계셨던 받침대는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셨던 받침대였습니다. 마음이 가난한데 어떻게 부끄럽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마음이 가난해지면 하나님을 찾고 이지할 수 있게 돼 천국의 기쁨을 경험하게 됩니다. 남들 앞에서 애통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입니다. 우는 것은 약자들의 심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울어야 하나님께서 등을 토닥여주시는 위로를 받게되는 “즐거움”을 경험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경쟁 사회에서 빼앗고 쟁취해야 하는데 내 마음이 온유해진다면 그것은 참으로 창피한 노릇입니다. 그런데 그 창피함을 개의치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세상 사람들이 취하지 못하는 하나님 나라의 영토를 그 온유한 마음을 통해 취하도록 하십니다. 진짜 강함은 단단한데 있는게 아니라 부드럽고 유연한 온유함에 있기 때문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은 창피한 노릇입니다. 먹지 못하고, 마시지 못하는 것은 약자들의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나누고 베풀고 섬기는 삶을 통해 경험하게 되는 주림과 목마름이란 창피를 개의치 않는다면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의 주림과 목마름을 영원토록 채워주실 것입니다. 긍휼을 베푸는 것은 현대 사회에서 바보소리 듣는 행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결국은 창피한 것일 수 있지요. 그런데 세상 법칙과 다르게 타인을 긍휼이 여긴다면 저와 여러분들을 심판대 앞에서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들도 현대 사회에서 매번 손실을 보는 바보요, 세상 통치자들에게 부끄러움을 당할 수 있는 자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이러한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고 누가 보든지 보지 않든지청결한 마음을 따라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삶을 살게 된다면 우리는 다양한 손실 가운데서도 우리의 필요을 채우기 위해 서 계신 하나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들도 그와 같은 역할 때문에 주변 사람들에게 부끄러움을 당할 때가 많습니다. 모세도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서 화평을 말하였지만 완강한 마음을 가진 그들은 모세에게 “누가 너를 우리의 재판관을 세웠느냐?”고 말하며모세를 부끄럽게 만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평하게 할 때 경험하게 될 당야한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는다면 우리는 세상 사람들에게 결국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인정을 받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의를 위하야 박해를 받는 일은 세상 사람들이 볼 때 미련하고, 무가치한 일로 보일 수 있습니다.그렇기 때문에 선교지에서 선교사님들이 다양한 부끄러운 상황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옷을 벗겨진 상태로 볼기를 맞을 때도 있고침밷음과 조롱을 받는 부끄러움에 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선교사님들은 이러한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십니다. 그 이유는 이미 그 분들의 마음에는 천국이 임하여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 서 계셨던 받침대는 하나님의 뜻이었던 십자가였습니다.“그는 그 앞에 있는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시고 십자가를 참으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심이라!” 십자가는 하나님 보좌와 연결된 통로라 말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볼 수도 그 음성을 들을 수도 없는 것은 실제 우리의 삶에 십자가가 없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자기 부인입니다. 십자가는 나는 죽고 하나님과 예수님 그리고 성령님이 살아 역사하시는 통치를 말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저와 여러분들의 죄의 값을 대신 치르신 예수님의 사랑이기도 합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의 땀방울과 핏방울이 베어있는 나무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은 바쁜 사역을 마치고늘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보통은 이른 새벽에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나의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기도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치실 때도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해달라는 기도를 통해” 자신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이 중요하다는 십자가 정신을 제자들에게 강조했던 것입니다.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비우시고 그 안에 하나님의 사랑을 담아 세상을 구원하신 희생을 말합니다. 또한 십자가는 세상이 끝까지 발악하여 파괴하기를 원하는 하나님 나라의 가장 핵심 지대입니다.그래서 세상은 십자가를 대항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3 NKRV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유대인들은 자신들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세상은 십자가를 거역하려고 하고 그 십자가를 따르는 사람들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려고 합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공격방법이 또한 십자가셨습니다. 골로새서 2:15 NKRV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에베소서 2:16 NKRV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예수님은 이 십자가의 받침대에서 서 계셨고 그 십자가에서 6시간 동안 물과 피를 쏟는 고통 속에서 그 십자가 받침대를 흔들어 보시는 “확인, 검증, 테스트”를 해보셨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바라보게 하셨던 것들이라는 실상이란 ‘받침대’ 위에서 죽기 전까지는 보이지 않았던 “증거”인 부활을 경험하게 되셨던 것입니다.“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의 삶을 사셨기 때문에 히브리기자는 예수님을 가리켜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라는 표현을 사용했던 것입니다. 실제 예수님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구약 성도들에게는 믿음의 실체는 메시아라는 기다림의 언어를 통해 그림자와 같은 믿음의 실상을 선물해 주셨던 것이고 신약 백성들에게 구약 성도들이 경험하지 못했던 믿음의 실체이신 예수님을 직접 보고, 만지고, 경험하도록 하여 믿음의 성취가 십자가와 부활로 이루어졌음을 깨닫게 하셨던 것입니다. 아울러 예수님은 당신의 재림을 통해 믿음의 완성 또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선물해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2023년도를 마무리해가는 이 시점에 저와 여러분들이 서 있는 받침대를 점검해 보시고 그 받침대를 흔들어 보시며 예수님께서 그 흔들리는 받침대 위에서 당신의 받침대가 현재만을 위한 받침대가 아닌 “그 앞에 있는”받침대라는 사실을 깨닫고 세상 즐거움이 아닌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통해 만끽하게 되는 “즐거움”이란 받침대를 확인하시고 자기 뜻이란 야망과 욕심이 아닌 하나님 나라라는“십자가”의 받침대를 확인하시고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으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는 연말연시 되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2024년도에는 저와 여러분들이 “그 앞에 있는” “즐거움”“십자가”라는 받침대 위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확인해 보실 수 있는은혜가 있기를 소망해 봅니다.
본문: 히브리서 11:1 히브리서 12:1-4히브리서 11:1 NKRV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히브리서 12:1–4 NKRV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 저는 오늘 여러분들과 함께 ‘믿음이란’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을 나누겠습니다.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믿음을 통해 삶을 의미있게 살아기를 원하십니다. 하지만 세상은 저와 여러분들이 삶을 의미있게 살도록 만들지 않습니다. 세상 가치와 기준은 너무 자극적이고, 일시적 만족만 가져다 주는 것들이 많습니다. 마약, 도박, 쾌락...오늘 유명 연예인이 그 세상 가치에 발목이 잡혀 허덕이다가 결국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비보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소식입니다. 세상은 그저 세상이란 공간적 개념으로만 바라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을 통치하고 있는 어둠의 권세자인 사단이 세상 의가치와 그 영향력으로 사람들의 발목을 붙잡고 이리저리 끌고 다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라고하여서 그 영향력에서 예외가 되는 게 아닙니다. 우리도 세상 안에서 살고 있기한 그 영향력을 받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세상에서 삶을 사셨을 때 사단의 영향력을 경험했습니다. 사단은 예수님을 넘어뜨리려고 예수님을 시험했습니다. 1. 하나님의 뜻보다 배고픈 현실을 빠르게 극복해 보려는 시험을 통해 예수님의 발목을 붙잡았습니다. 2. 하나님을 신뢰하기보다 도리어 그 하나님을 시험해 보라는 유혹으로 예수님의 발목을 붙잡았습니다. 3.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려야 할 이유가 뭐가 있냐며? 자신이 영광을 받을 수 있다는 유혹으로 그 발목을 붙잡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살든지 죽든지 흥하든지 성하든지 쇠하든지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이란 믿음을 가지고 그 모든 시험을 이겨내시고 오늘 저와 여러분들의 구원자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처럼 믿음의 삶을 살지 못하고 사단의 유혹 시험에 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지키지 못하고 중간에 삶을 끊거나, 삶을 허랑방탕하게 살거나, 삶을 나태하게 살아갑니다. 그래서 히브리기자는 오늘 본문 말씀 일절에 “구름같이 둘러싸인 허다한 무리들”을 말씀합니다. 구름 같다는 표현은 많은 사람들이 태어나고 죽고 또 태어나고 죽었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겠지요. 그들 중 예수님과 같이 믿음을 지킨 자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를 히브리기자는 히브리서 십일장에서 말씀했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태어난 사람들 중에는 믿음을 지키지 못하고 사단에게 이리저리 끌려다니다 그 삶을 마친 무리들이 더 많을 것입니다. 2023년 다사다난한 한 해가 저물어가고 있습니다. 얼마 안 있으면 2024년 새해가 다가오는데 그 얼마 안 남은 시간이 누군가에게는 무척 길거나 무겁게 느껴져 오늘 자신의 생명을 끊거나, 삶을 포기하는 인생들이 있을 것입니다. 참으로 안타깝고 슬픈현실입니다. 우울증을 심하게 앓던 한 감독이 만든 영화가 있었는데 그 영화의 시작은 어떤 여인이 잠에서 깨어나는 장면으로 시작 됩니다. 그런데 그 여인은 잠에서 깨었을 때 자신이 70도가까운 비탈 위에 누워 있는 모습을 발견합니다. 여인은 위로 올라가기 위해 몸을 조금 욺직여 보았는데 천길 낭떨어지로 자신의 몸이 미끄러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래서 그 어떤 노력도 멈추고 양손을 뻗어 비탈진 면에 최대한 부착을 시키고 손톱으로는 몸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비탈 표면을 최대한 파내려갑니다. 결국 손톱 사이에는 피가 나옵니다. 그렇게 계속 버티고 버팁니다. 심신이 지쳐갈 쯤 하늘에서는 비가내립니다. 이 빗물에 몸은 미끄러져 더이상 버틸 수 없는 단계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여인은 절규합니다. 그리고 비명을 지릅니다. 이 영화의 감독은 자신이 앓았던 우울증의 모습을 끝도 보이지 않는 절망의 나락 끝에서매달려 살고자 바락하지만 그러한 노력마저 부질없는 것을 매일 경험하는 것이라 말했습니다. 비단 우울증만 그러겠습니까? 계속 겹치게 되는 절망의 경험은 절망염이란 심각한 마음의 병을 만들어 냅니다. 세상은 성공의 가도에서 뒤쳐지지 않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하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잠시의 쉼과 안락을 취하고 다시 그 경쟁의 삶에서 승리하라고 말하며 마약과 술 그리고 성적인 쾌락이란 올무의 자리로 인도합니다. 오늘도 이 올무에서 많은 사람들이 발목이 잡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 그 좋던 건강과 행복 그리고 감사를 잃고 좀비와 같이 할 수 없이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히브리기자가 말하는 “구름같이 둘러싸인 허다한 무리들” 이란 이와 같이 좀비와 같은 인생을 살아갔던 선진들뿐 아니라 손톱에서 피가 흐르지만 그래도 그 세상 올무에 잡히지 않기 위해 믿음을 지켰던 선진들 또한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피흘리기 까지 사투하며 세상 올무에 잡히지 않기 위해 몸부림친 믿음의 사람들인 것입니다. 믿음이란 추상적인 개념이면서 또한 매우 실제적인 개념입니다. 왜냐하면 천길 낭떠러지에 걸쳐 아슬아슬하게 살고 있는 자들에게 믿음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매우 추상적일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믿음은 당장의 성공을 약속하고 있는 눈에 보이는 그 무언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신들의 삶이 미끄러질 거 같은데 미끄러지지 않고 삶이 살아진다는 사실을깨닫는 사람들 있습니다. 이들의 눈에는 자신의 발 아래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튼튼한 받침대가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사람일 것입니다. 이런 분들에게 있어서 믿음은무척 실제적인 것입니다. 믿음에 대해 좀 더 알아보겠습니다. 히브리서 11:1 NKRV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실상’이란 보증서, 또는 권리증서와 같은 ‘받침대’를 말하는 것입니다. 받침대가 튼튼하면 그 어떤 거구도 그 위에서 안전한 삶을 보장받게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기자는 그 튼튼한 받침대 때문에 믿음의 선진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삶에 바라게 하셨던 것들을 바라보게 되는 은혜를 경험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울러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말씀합니다. 히브리기자가 말하는 ‘증거’는 믿음의 선진들이 올라서 있던 ‘말씀의 받침대’을 가 확실한 받침대인지를 시험하고 점검해 보고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증거란 헬라어 엘렝코스가 “점검하다, 확증하다, 시험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란 그 받침대가 확실한 받침대인지를 흔들어 보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지금 앉아 계신 의자를 흔들어 보십시오! 비끄덕 거리는 의자가 있나요?이곳에 있는 의자들은 대부분 무겁고 단단한 원목으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흔들지도 않습니다.아브라함은 믿음에 있어서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을이와 같이 시험해 보았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바라고 바랐던 것은 사라를 통해 자녀를 낳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바람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때가 이르렀을 때 엘리에셀이란 종을 통해 자녀를 낳는 게 아니라 사라를 통해 자녀를 낳게 하시겠다는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란 받침대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셨습니다. 그는 그 받침대 위에 있을 때마다 경수가 끊어진 상태의 사람의 몸에서 자녀가 태어날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바라는 것들의 실상은 하나님께서 하늘의 뭇별처럼 땅의 모래알 처럼 그의 자손을 번창하게 할 것이란 말씀과 사라의 몸에서 네 씨가 태어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 하나님의 약속이란 실상 즉 받침대를 위에서 하나님을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하나님께서 그가 서 있던 받침대를 흔들어 보십니다. 이는 아브라함에게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는말씀을 깨닫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증거”란 엘렝코스 즉 흔들다, 입증하다, 시험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서 있던 그 말씀의 받침대가 얼마나 튼튼한 받침대라는 사실을 믿음의 조상이란 타이틀을 가지게 될 아브라함이라면 반드시 검증하고 가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받침대를 크게 흔드셨습니다. “네 독자 이삭을 모리아산에서 바쳐라!” 천청병력과 같은 음성에 아브라함의 받침대는 이리저리 흔리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아브라함은 자신이 서 있던 받침대에서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무엇때문이었을까요? 로마서 4:17 NKRV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아브라함은 자신이 “죽은 자도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신다는 믿음”이란 받침대를 가지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 바침대 위에서 그가 바라는 것은 단 하나였습니다. 이삭을 살려주십시오! 내 아내 사라의 경수가 끊어진 가운데 내게 주셨던 아들이었기에 “나는 이 사건을 통해 당신은 죽은 자도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분이심을 믿게 될 것이라 신앙 고백을 하며”하나님께서 그에게 약속하신 받침위에서 내려오지 않았던 것입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휘청휘청 흔들리는 받침대 위에서 그는 자신이 서 있던 받침대가 참으로 견고한 받침대라는사실을 점검, 증명, 시험하기 위해 모리아산으로 떠납니다. “보이지 않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할 때 그 실상은 “확증하고, 점검하고, 검증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신이 서 있던 받침대가 얼마나 튼튼한 받침대인지 그는 3일길을 걸어 모리아 산으로 향했습니다. 나귀 위에 이런저런 물품들을 싣고 종과 자신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3일 길을 걸어 모리아산으로 갔던 것입니다. 그리고 종과 나귀는 산 아래서 기다리라고 말하고 이삭과 제사에 사용할 나무만 갖지고 모리아산으로 올라갑니다. 아브라함은 모리아산에서 자신의 받침대를 심각하게 흔들어볼 참이었습니다. “내가 지금 서서 발로 밟고 있는 이 받침대는 절대 내 욕심, 생각, 내 뜻으로 이루어진게 아니야!” “분명 하나님께서 독자 이삭을 바치라고 하셨어!” 지금 내 눈에는 보이는바가 없고 내 손에는 잡히는 바가 없고, 내 현실이 칠흑같이 어둡지만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받침대와 함께 나는 살든지 죽든지 흥하든지 망하든지 쇠하든지 !”라고 속으로 말하고 칼을 들고 이삭을 잡으려고 했습니다. 그 때 하늘에서 음성이 들렸습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네 손에서 칼을 거두어라 네가 하나밖에 없는 독자까지 내게 아끼지 않는줄을 내가 아노라!” 아브라함의 어안은 벙벙했습니다. 그런데 분명 이삭과 함께 번제단을 쌓고, 이삭을 결박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했을 때에도 있었을 한 양이 보였습니다. 분명 그 양은 그 곳에 있었던 양이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마음이 너무 긴장해 있었고, 다양한 생각들로 가득차 있었기 때문에 그 양이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 그렇습니다. 받침대를 확인해보고, 점검해 보려는 믿음의 행위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증거”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받침대 약속의 실재를 보다 빛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 그 양이 언제부터 여기에 있었지?” 드디어 아브라함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를 얻게 됩니다. 그 양은 독자 이삭을 위해 대신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게 될 예수님을 예표하는 양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절망의 자리에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란 받침대 위에 서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란 받침대를 이리저리 흔들어 보는 “점검, 확인, 시험”이란 행동을 통해 한 걸음 믿음으로 걸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 때 수풀 속에 감추어져 있던, 아니 원래 그 곳에 늘 여러분들과 함께 계셨던 어린양 되신 예수님을 바라보게 되실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게 있다면 우리가 원하는 욕심과 야망이 받침대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의 소원을 두고 행하시는 하나님으로서 우리가 원하는 욕심과 야망이 아니라 꿈과 희망이란 하나님 뜻을 그 마음에 품고 행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믿음을 믿음되게 하는 받침대는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주신당신의 뜻인 것입니다. 빌립보서 2:13 NKRV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하지만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품게 하신 그 꿈과 희망이란 받침대를 가지고 있다고 하여도 사단은 세상을 통해 저와 여러분들을 계속 시험할 것입니다. “그 꿈과 희망은 가짜야! 너 지금 몇년째 그 자리에서 그 꿈과 희망 타령하면서 인내하고 있냐? 그냥 인내하면 다 잘 될거 같지?” 저는 사단의 이런 음성에 많이 속았던 목사입니다. 그래서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가며 자기 합리화로 내가 서 있는 받침대를 신뢰하지 못하고 세상 이리저리 떠밀려 흘러갔던 선택을 하였던 목사입니다. 물론 그러한 유혹은 오늘도 제게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저는 새벽에 기도할 뿐입니다. 제가 구하는 것은 단 하나 오직 주님꼐신 곳을 사모하고 그 천국을 이루어가는 삶을 살도록해주세요!라고 말입니다.그렇게 기도하고 주님을 바라볼 때 마다 내가 서 있는 그 바침대를 흔들어 보고 싶은 뜨거움이 생겨납니다. 그리고 저는 그 마음에 포착된 작고 작은 ㅈ를 생각하며 포기하고 싶은 절망의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 주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히브리서 12:2 NKRV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님”이란 표현은 “믿음의 창시자(시작자, 개척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님”이란 표현인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도 자신이 서 있는 신념의 받침대가 다 있습니다. 돈과 명예와 권세라는 받침대는 실제 쉽게 흔들리지 않는 받침대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대부분으 그 받침대를 갖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부와 명예와 권세를 다 가져본 솔로몬은 그와 같은 받침대가 “헛되고 헛되고 헛되다!”라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지탱하고 있는 받침대에 대한 신념이 그리 오래갈 수 없기 때문이고그 받침대도 영원할 수 없는 것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히브리기자는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믿음의 시작이고 완성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아파요 오메가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믿음을 시작하신 분이 예수님이시고, 그 믿음의 내용예수님이시고, 그 믿음을 완성하실 분이 예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믿음은 예수님께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받침대는 예수님의 말씀이란 영원한 성질로 만들어진 받침대어야 합니다. 예수님이란 받침대는 첫째 그 앞에 있는 이란 미래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로마서 8:18 NKRV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 자체가 현재의 제한을 발판으로 삼지 않고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영광이란 미래에 그 발판을 삼고 삶을 사셨습니다. 그렇다고 현재를 무시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지금은 미래라는 길로 나아가는 발판가 같은 것입니다. 지금이 모여 미래가 되는 것입니다.죽은시인들의 사회라는 영화로 유명해진 표현이지요! “카르페디엠” 세상 사람들은 이를 “현재를 즐기라!”는 측면을 강조하여 사용합니다. 그런데 이 뜻의 실제 의미는 현재의 기회를 잘 선용하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영어는 이를 이렇게 번역했지요. “Seize the day” 현재를 잡으라는 뜻입니다. 현재를 잡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미래가 없는 것이겠지요. 현재 하나님의 통치를 갈망해 보시길 소망합니다. 저와 여러분들의 마음을 다스리스는 하나님께서 현재를 잡도록 하실 뿐 아니라 그 현재를 토대로 그 앞에 있는 것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된 꿈과 희망이요, 다른 표현으로 말하면 푯대인 것입니다. 빌립보서 3:14 NKRV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그 앞에 있는 것을 향해 달려가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말씀하고 계시는 그 분의 뜻이라는 푯대가 있어어 합니다. 잠언 29:18 NKRV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묵시란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꿈과 희망입니다. 푯대와 꿈과 희망은 현재라는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통해 만들어진 발판입니다. 우리는 그 발판을 밟으며 앞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땀방울이 핏방울 되도록 기도하셨던 것도 현재라는 삶에 하나님의 통치를 받기 위함 몸부림이셨고, 그로인해 바라보았던 푯대와 꿈과 희망이 바로 십자가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란 받침대는 그 앞에 있는 것을 넘어 “즐거움”에 있습니다.예수님이 올라 타셨던 즐거움이란 받침대는 현재라는 자신의 삶에서 하나님나라의 통치를 받게될 때 자신의 삶에서 누려지게 되는 다양한 마음의 상태였습니다. 이를 예수님의 말씀으로 확인해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5:3–8 NKRV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이 팔복은 예수님의 마음이 즐거움이란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받게될 때에만 즐거움이 될 수 있는 즐거움이고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즐거움이었던 것입니다. 성령 충만을 사모하십시오! 성령충만은 말씀충만이고말씀충만은 하나님의 말씀의 뜻과 원리가 저와 여러분들의 지식과 의지와 감정을 다스리게 되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비로 우리 앞에 있는 것이 십자가라는 부담스러운 미래라고 하지만 그 십자가를 짊어지는 선택을 통해 누리게 되는 즐거움을 경험하게 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즐거움이라는 “받침대”위에서 하나님을 바라보셨던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올라서 계셨던 받침대는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셨던 받침대였습니다. 마음이 가난한데 어떻게 부끄럽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마음이 가난해지면 하나님을 찾고 이지할 수 있게 돼 천국의 기쁨을 경험하게 됩니다. 남들 앞에서 애통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입니다. 우는 것은 약자들의 심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울어야 하나님께서 등을 토닥여주시는 위로를 받게되는 “즐거움”을 경험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경쟁 사회에서 빼앗고 쟁취해야 하는데 내 마음이 온유해진다면 그것은 참으로 창피한 노릇입니다. 그런데 그 창피함을 개의치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세상 사람들이 취하지 못하는 하나님 나라의 영토를 그 온유한 마음을 통해 취하도록 하십니다. 진짜 강함은 단단한데 있는게 아니라 부드럽고 유연한 온유함에 있기 때문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은 창피한 노릇입니다. 먹지 못하고, 마시지 못하는 것은 약자들의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나누고 베풀고 섬기는 삶을 통해 경험하게 되는 주림과 목마름이란 창피를 개의치 않는다면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의 주림과 목마름을 영원토록 채워주실 것입니다. 긍휼을 베푸는 것은 현대 사회에서 바보소리 듣는 행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결국은 창피한 것일 수 있지요. 그런데 세상 법칙과 다르게 타인을 긍휼이 여긴다면 저와 여러분들을 심판대 앞에서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들도 현대 사회에서 매번 손실을 보는 바보요, 세상 통치자들에게 부끄러움을 당할 수 있는 자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이러한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고 누가 보든지 보지 않든지청결한 마음을 따라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삶을 살게 된다면 우리는 다양한 손실 가운데서도 우리의 필요을 채우기 위해 서 계신 하나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들도 그와 같은 역할 때문에 주변 사람들에게 부끄러움을 당할 때가 많습니다. 모세도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서 화평을 말하였지만 완강한 마음을 가진 그들은 모세에게 “누가 너를 우리의 재판관을 세웠느냐?”고 말하며모세를 부끄럽게 만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평하게 할 때 경험하게 될 당야한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는다면 우리는 세상 사람들에게 결국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인정을 받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의를 위하야 박해를 받는 일은 세상 사람들이 볼 때 미련하고, 무가치한 일로 보일 수 있습니다.그렇기 때문에 선교지에서 선교사님들이 다양한 부끄러운 상황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옷을 벗겨진 상태로 볼기를 맞을 때도 있고침밷음과 조롱을 받는 부끄러움에 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선교사님들은 이러한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십니다. 그 이유는 이미 그 분들의 마음에는 천국이 임하여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 서 계셨던 받침대는 하나님의 뜻이었던 십자가였습니다.“그는 그 앞에 있는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시고 십자가를 참으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심이라!” 십자가는 하나님 보좌와 연결된 통로라 말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볼 수도 그 음성을 들을 수도 없는 것은 실제 우리의 삶에 십자가가 없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자기 부인입니다. 십자가는 나는 죽고 하나님과 예수님 그리고 성령님이 살아 역사하시는 통치를 말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저와 여러분들의 죄의 값을 대신 치르신 예수님의 사랑이기도 합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의 땀방울과 핏방울이 베어있는 나무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은 바쁜 사역을 마치고늘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보통은 이른 새벽에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나의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기도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치실 때도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해달라는 기도를 통해” 자신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이 중요하다는 십자가 정신을 제자들에게 강조했던 것입니다.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비우시고 그 안에 하나님의 사랑을 담아 세상을 구원하신 희생을 말합니다. 또한 십자가는 세상이 끝까지 발악하여 파괴하기를 원하는 하나님 나라의 가장 핵심 지대입니다.그래서 세상은 십자가를 대항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3 NKRV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유대인들은 자신들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세상은 십자가를 거역하려고 하고 그 십자가를 따르는 사람들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려고 합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공격방법이 또한 십자가셨습니다. 골로새서 2:15 NKRV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에베소서 2:16 NKRV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예수님은 이 십자가의 받침대에서 서 계셨고 그 십자가에서 6시간 동안 물과 피를 쏟는 고통 속에서 그 십자가 받침대를 흔들어 보시는 “확인, 검증, 테스트”를 해보셨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바라보게 하셨던 것들이라는 실상이란 ‘받침대’ 위에서 죽기 전까지는 보이지 않았던 “증거”인 부활을 경험하게 되셨던 것입니다.“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의 삶을 사셨기 때문에 히브리기자는 예수님을 가리켜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라는 표현을 사용했던 것입니다. 실제 예수님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구약 성도들에게는 믿음의 실체는 메시아라는 기다림의 언어를 통해 그림자와 같은 믿음의 실상을 선물해 주셨던 것이고 신약 백성들에게 구약 성도들이 경험하지 못했던 믿음의 실체이신 예수님을 직접 보고, 만지고, 경험하도록 하여 믿음의 성취가 십자가와 부활로 이루어졌음을 깨닫게 하셨던 것입니다. 아울러 예수님은 당신의 재림을 통해 믿음의 완성 또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선물해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2023년도를 마무리해가는 이 시점에 저와 여러분들이 서 있는 받침대를 점검해 보시고 그 받침대를 흔들어 보시며 예수님께서 그 흔들리는 받침대 위에서 당신의 받침대가 현재만을 위한 받침대가 아닌 “그 앞에 있는”받침대라는 사실을 깨닫고 세상 즐거움이 아닌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통해 만끽하게 되는 “즐거움”이란 받침대를 확인하시고 자기 뜻이란 야망과 욕심이 아닌 하나님 나라라는“십자가”의 받침대를 확인하시고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으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는 연말연시 되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2024년도에는 저와 여러분들이 “그 앞에 있는” “즐거움”“십자가”라는 받침대 위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확인해 보실 수 있는은혜가 있기를 소망해 봅니다.
본문: 히브리서 11:1 히브리서 12:1-4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
저는 오늘 여러분들과 함께 ‘믿음이란’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믿음을 통해 삶을 의미있게 살아기를 원하십니다.
하지만 세상은 저와 여러분들이 삶을 의미있게 살도록 만들지 않습니다.
세상 가치와 기준은 너무 자극적이고, 일시적 만족만 가져다 주는 것들이 많습니다.
마약, 도박, 쾌락...
오늘 유명 연예인이 그 세상 가치에 발목이 잡혀 허덕이다가 결국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비보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소식입니다. 세상은 그저 세상이란 공간적 개념으로만 바라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을 통치하고 있는 어둠의 권세자인 사단이 세상 의가치와 그 영향력으로 사람들의 발목을 붙잡고 이리저리 끌고 다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라고하여서 그 영향력에서 예외가 되는 게 아닙니다. 우리도 세상 안에서 살고 있기한 그 영향력을 받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세상에서 삶을 사셨을 때 사단의 영향력을 경험했습니다. 사단은 예수님을 넘어뜨리려고 예수님을 시험했습니다.
1. 하나님의 뜻보다 배고픈 현실을 빠르게 극복해 보려는 시험을 통해 예수님의 발목을 붙잡았습니다.
2. 하나님을 신뢰하기보다 도리어 그 하나님을 시험해 보라는 유혹으로 예수님의 발목을 붙잡았습니다.
3.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려야 할 이유가 뭐가 있냐며? 자신이 영광을 받을 수 있다는 유혹으로 그 발목을 붙잡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살든지 죽든지 흥하든지 성하든지 쇠하든지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이란 믿음을 가지고 그 모든 시험을 이겨내시고 오늘 저와 여러분들의 구원자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처럼 믿음의 삶을 살지 못하고 사단의 유혹 시험에 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지키지 못하고 중간에 삶을 끊거나, 삶을 허랑방탕하게 살거나, 삶을 나태하게 살아갑니다. 그래서 히브리기자는 오늘 본문 말씀 일절에 “구름같이 둘러싸인 허다한 무리들”을 말씀합니다. 구름 같다는 표현은 많은 사람들이 태어나고 죽고 또 태어나고 죽었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겠지요. 그들 중 예수님과 같이 믿음을 지킨 자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를 히브리기자는 히브리서 십일장에서 말씀했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태어난 사람들 중에는 믿음을 지키지 못하고 사단에게 이리저리 끌려다니다 그 삶을 마친 무리들이 더 많을 것입니다.
2023년 다사다난한 한 해가 저물어가고 있습니다. 얼마 안 있으면 2024년 새해가 다가오는데 그 얼마 안 남은 시간이 누군가에게는 무척 길거나 무겁게 느껴져 오늘 자신의 생명을 끊거나, 삶을 포기하는 인생들이 있을 것입니다. 참으로 안타깝고 슬픈현실입니다.
우울증을 심하게 앓던 한 감독이 만든 영화가 있었는데 그 영화의 시작은 어떤 여인이
잠에서 깨어나는 장면으로 시작 됩니다. 그런데 그 여인은 잠에서 깨었을 때 자신이 70도가까운 비탈 위에 누워 있는 모습을 발견합니다. 여인은 위로 올라가기 위해 몸을 조금 욺직여 보았는데 천길 낭떨어지로 자신의 몸이 미끄러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래서 그 어떤 노력도 멈추고 양손을 뻗어 비탈진 면에 최대한 부착을 시키고 손톱으로는 몸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비탈 표면을 최대한 파내려갑니다. 결국 손톱 사이에는 피가 나옵니다. 그렇게 계속 버티고 버팁니다. 심신이 지쳐갈 쯤 하늘에서는 비가내립니다. 이 빗물에 몸은 미끄러져 더이상 버틸 수 없는 단계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여인은 절규합니다. 그리고 비명을 지릅니다.
이 영화의 감독은 자신이 앓았던 우울증의 모습을 끝도 보이지 않는 절망의 나락 끝에서
매달려 살고자 바락하지만 그러한 노력마저 부질없는 것을 매일 경험하는 것이라 말했습니다.
비단 우울증만 그러겠습니까? 계속 겹치게 되는 절망의 경험은 절망염이란 심각한 마음의 병을 만들어 냅니다. 세상은 성공의 가도에서 뒤쳐지지 않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하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잠시의 쉼과 안락을 취하고 다시 그 경쟁의 삶에서 승리하라고 말하며 마약과 술 그리고 성적인 쾌락이란 올무의 자리로 인도합니다. 오늘도 이 올무에서 많은 사람들이 발목이 잡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 그 좋던 건강과 행복 그리고 감사를 잃고 좀비와 같이 할 수 없이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히브리기자가 말하는 “구름같이 둘러싸인 허다한 무리들” 이란 이와 같이 좀비와 같은 인생을 살아갔던 선진들뿐 아니라 손톱에서 피가 흐르지만 그래도 그 세상 올무에 잡히지 않기 위해 믿음을 지켰던 선진들 또한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피흘리기 까지 사투하며 세상 올무에 잡히지 않기 위해 몸부림친 믿음의 사람들인 것입니다.
믿음이란 추상적인 개념이면서 또한 매우 실제적인 개념입니다.
왜냐하면 천길 낭떠러지에 걸쳐 아슬아슬하게 살고 있는 자들에게 믿음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매우 추상적일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믿음은 당장의
성공을 약속하고 있는 눈에 보이는 그 무언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신들의 삶이 미끄러질 거 같은데 미끄러지지 않고 삶이 살아진다는 사실을
깨닫는 사람들 있습니다. 이들의 눈에는 자신의 발 아래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튼튼한
받침대가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사람일 것입니다. 이런 분들에게 있어서 믿음은
무척 실제적인 것입니다.
믿음에 대해 좀 더 알아보겠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실상’이란 보증서, 또는 권리증서와 같은
‘받침대’를 말하는 것입니다. 받침대가 튼튼하면 그 어떤 거구도
그 위에서 안전한 삶을 보장받게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기자는 그 튼튼한 받침대 때문에 믿음의 선진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삶에 바라게 하셨던 것들을 바라보게 되는 은혜를 경험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울러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말씀합니다.
히브리기자가 말하는 ‘증거’는 믿음의 선진들이 올라서 있던 ‘말씀의 받침대’을 가 확실한 받침대인지를 시험하고 점검해 보고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증거란 헬라어 엘렝코스가 “점검하다, 확증하다, 시험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란 그 받침대가 확실한 받침대인지를
흔들어 보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지금 앉아 계신 의자를
흔들어 보십시오! 비끄덕 거리는 의자가 있나요?
이곳에 있는 의자들은 대부분 무겁고 단단한 원목으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흔들지도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에 있어서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을
이와 같이 시험해 보았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바라고 바랐던 것은 사라를 통해
자녀를 낳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바람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때가
이르렀을 때 엘리에셀이란 종을 통해 자녀를 낳는 게
아니라 사라를 통해 자녀를 낳게 하시겠다는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란 받침대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셨습니다. 그는 그 받침대 위에 있을 때마다
경수가 끊어진 상태의 사람의 몸에서 자녀가 태어날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바라는 것들의 실상은
하나님께서 하늘의 뭇별처럼 땅의 모래알 처럼
그의 자손을 번창하게 할 것이란 말씀과 사라의 몸에서
네 씨가 태어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 하나님의 약속이란 실상
즉 받침대를 위에서 하나님을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하나님께서 그가 서 있던 받침대를
흔들어 보십니다. 이는 아브라함에게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는
말씀을 깨닫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증거”란 엘렝코스 즉 흔들다, 입증하다, 시험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서 있던
그 말씀의 받침대가 얼마나 튼튼한
받침대라는 사실을 믿음의 조상이란
타이틀을 가지게 될 아브라함이라면
반드시 검증하고 가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받침대를 크게 흔드셨습니다.
“네 독자 이삭을 모리아산에서 바쳐라!”
천청병력과 같은 음성에 아브라함의 받침대는
이리저리 흔리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아브라함은 자신이 서 있던 받침대에서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무엇때문이었을까요?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아브라함은 자신이 “죽은 자도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신다는 믿음”이란
받침대를 가지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 바침대 위에서 그가 바라는 것은 단 하나였습니다.
이삭을 살려주십시오! 내 아내 사라의 경수가 끊어진 가운데 내게 주셨던 아들이었기에
“나는 이 사건을 통해 당신은 죽은 자도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분이심을 믿게 될 것이라 신앙 고백을 하며”하나님께서 그에게 약속하신 받침위에서 내려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휘청휘청 흔들리는 받침대 위에서 그는
자신이 서 있던 받침대가 참으로 견고한 받침대라는사실을
점검, 증명, 시험하기 위해 모리아산으로 떠납니다.
“보이지 않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할 때 그 실상은 “확증하고, 점검하고, 검증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신이 서 있던 받침대가 얼마나 튼튼한 받침대인지 그는 3일길을 걸어 모리아 산으로 향했습니다. 나귀 위에 이런저런 물품들을 싣고 종과 자신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3일 길을 걸어 모리아산으로 갔던 것입니다. 그리고 종과 나귀는 산 아래서 기다리라고 말하고 이삭과 제사에 사용할 나무만 갖지고 모리아산으로 올라갑니다. 아브라함은 모리아산에서 자신의 받침대를 심각하게 흔들어볼 참이었습니다. “내가 지금 서서 발로 밟고 있는 이 받침대는 절대 내 욕심, 생각, 내 뜻으로 이루어진게 아니야!” “분명 하나님께서 독자 이삭을 바치라고 하셨어!” 지금 내 눈에는 보이는바가 없고 내 손에는 잡히는 바가 없고, 내 현실이 칠흑같이 어둡지만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받침대와 함께 나는 살든지 죽든지 흥하든지 망하든지 쇠하든지 !”라고 속으로 말하고 칼을 들고 이삭을 잡으려고 했습니다. 그 때 하늘에서 음성이 들렸습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네 손에서 칼을 거두어라 네가 하나밖에 없는 독자까지 내게 아끼지 않는줄을 내가 아노라!” 아브라함의 어안은 벙벙했습니다. 그런데 분명 이삭과 함께 번제단을 쌓고, 이삭을 결박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했을 때에도 있었을 한 양이 보였습니다. 분명 그 양은 그 곳에 있었던 양이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마음이 너무 긴장해 있었고, 다양한 생각들로 가득차 있었기 때문에
그 양이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 그렇습니다. 받침대를
확인해보고, 점검해 보려는 믿음의 행위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증거”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받침대 약속의 실재를 보다 빛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 그 양이 언제부터 여기에 있었지?” 드디어 아브라함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를 얻게 됩니다. 그 양은 독자 이삭을 위해 대신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게 될 예수님을 예표하는 양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절망의 자리에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란 받침대 위에 서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란 받침대를 이리저리 흔들어 보는 “점검, 확인, 시험”이란
행동을 통해 한 걸음 믿음으로 걸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 때 수풀 속에 감추어져 있던, 아니 원래 그 곳에 늘 여러분들과 함께 계셨던 어린양 되신 예수님을 바라보게 되실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게 있다면
우리가 원하는 욕심과 야망이 받침대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의 소원을 두고 행하시는 하나님으로서
우리가 원하는 욕심과 야망이 아니라 꿈과 희망이란
하나님 뜻을 그 마음에 품고 행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믿음을 믿음되게 하는 받침대는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주신
당신의 뜻인 것입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하지만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품게 하신 그 꿈과 희망이란
받침대를 가지고 있다고 하여도 사단은 세상을 통해
저와 여러분들을 계속 시험할 것입니다.
“그 꿈과 희망은 가짜야! 너 지금 몇년째 그 자리에서
그 꿈과 희망 타령하면서 인내하고 있냐? 그냥 인내하면 다 잘 될거 같지?”
저는 사단의 이런 음성에 많이 속았던 목사입니다. 그래서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가며
자기 합리화로 내가 서 있는 받침대를 신뢰하지 못하고 세상 이리저리
떠밀려 흘러갔던 선택을 하였던 목사입니다. 물론 그러한 유혹은 오늘도 제게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저는 새벽에 기도할 뿐입니다. 제가 구하는 것은 단 하나 오직 주님꼐신
곳을 사모하고 그 천국을 이루어가는 삶을 살도록해주세요!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기도하고 주님을 바라볼 때 마다 내가 서 있는 그 바침대를 흔들어 보고
싶은 뜨거움이 생겨납니다. 그리고 저는 그 마음에 포착된 작고 작은 증거를
생각하며 포기하고 싶은 절망의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
주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주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님”이란 표현은 “믿음의 창시자(시작자, 개척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님”이란 표현인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도 자신이 서 있는 신념의 받침대가 다 있습니다. 돈과 명예와 권세라는 받침대는
실제 쉽게 흔들리지 않는 받침대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대부분으 그 받침대를 갖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부와 명예와 권세를 다 가져본 솔로몬은 그와 같은 받침대가 “헛되고 헛되고 헛되다!”라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지탱하고 있는 받침대에 대한 신념이 그리 오래갈 수 없기 때문이고
그 받침대도 영원할 수 없는 것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히브리기자는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믿음의 시작이고 완성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아파요 오메가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믿음을 시작하신 분이 예수님이시고, 그 믿음의 내용예수님이시고, 그 믿음을 완성하실 분이 예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믿음은 예수님께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받침대는 예수님의 말씀이란 영원한 성질로 만들어진 받침대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서 계셨던 받침대를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첫째 그는 “그 앞에 있는”이란 받침대를 사용하셨습니다.
그 앞에 있는이란 미래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 자체가 현재의 제한을 발판으로 삼지 않고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영광이란 미래에 그 발판을
삼고 삶을 사셨습니다.
그렇다고 현재를
무시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지금은 미래라는 길로 나아가는
발판가 같은 것입니다. 지금이 모여 미래가 되는 것입니다.
죽은시인들의 사회라는 영화로 유명해진 표현이지요!
“카르페디엠” 세상 사람들은 이를 “현재를 즐기라!”는
측면을 강조하여 사용합니다. 그런데 이 뜻의 실제 의미는
현재의 기회를 잘 선용하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영어는 이를 이렇게 번역했지요.
“Seize the day” 현재를 잡으라는 뜻입니다.
현재를 잡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미래가 없는 것이겠지요.
현재 하나님의 통치를 갈망해 보시길 소망합니다.
저와 여러분들의 마음을 다스리스는 하나님께서
현재를 잡도록 하실 뿐 아니라 그 현재를 토대로
그 앞에 있는 것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된
꿈과 희망이요, 다른 표현으로 말하면
푯대인 것입니다.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그 앞에 있는 것을 향해 달려가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말씀하고 계시는 그 분의 뜻이라는 푯대가 있어어 합니다.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
묵시란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꿈과 희망입니다.
푯대와 꿈과 희망은 현재라는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통해
만들어진 발판입니다. 우리는 그 발판을 밟으며 앞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땀방울이 핏방울 되도록 기도하셨던 것도 현재라는 삶에
하나님의 통치를 받기 위함 몸부림이셨고, 그로인해 바라보았던
푯대와 꿈과 희망이 바로 십자가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란 받침대는
그 앞에 있는 것을 넘어 “즐거움”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올라 타셨던 즐거움이란 받침대는
현재라는 자신의 삶에서 하나님나라의 통치를 받게될 때
자신의 삶에서 누려지게 되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이 팔복은 예수님의 마음이 즐거움이란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받게될 때에만
즐거움이 될 수 있는 즐거움이고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즐거움이었던 것입니다.
성령 충만을 사모하십시오! 성령충만은 말씀충만이고
말씀충만은 하나님의 말씀의 뜻과 원리가 저와 여러분들의
지식과 의지와 감정을 다스리게 되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비로 우리 앞에 있는 것이 십자가라는 부담스러운
미래라고 하지만 그 십자가를 짊어지는 선택을 통해 누리게 되는
즐거움을 경험하게 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즐거움이라는 “받침대”위에서 하나님을
바라보셨던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올라서 계셨던 받침대는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셨던 받침대였습니다.
마음이 가난한데 어떻게 부끄럽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마음이 가난해지면 하나님을 찾고 이지할 수 있게 돼
천국의 기쁨을 경험하게 됩니다.
남들 앞에서 애통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입니다.
우는 것은 약자들의 심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울어야
하나님께서 등을 토닥여주시는
위로를 받게되는 “즐거움”을
경험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
경쟁 사회에서 빼앗고 쟁취해야 하는데
내 마음이 온유해진다면 그것은 참으로
창피한 노릇입니다.
그런데 그 창피함을 개의치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세상 사람들이 취하지 못하는
하나님 나라의 영토를 그 온유한 마음을 통해
취하도록 하십니다. 진짜 강함은 단단한데 있는게
아니라 부드럽고 유연한 온유함에 있기 때문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은 창피한 노릇입니다.
먹지 못하고, 마시지 못하는 것은 약자들의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나누고 베풀고 섬기는 삶을 통해
경험하게 되는 주림과 목마름이란 창피를 개의치 않는다면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의 주림과 목마름을
영원토록 채워주실 것입니다.
긍휼을 베푸는 것은 현대 사회에서
바보소리 듣는 행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은 창피한 것일 수 있지요.
그런데 세상 법칙과 다르게 타인을
긍휼이 여긴다면 저와 여러분들을
심판대 앞에서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들도 현대 사회에서
매번 손실을 보는 바보요, 세상 통치자들에게
부끄러움을 당할 수 있는 자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고 누가 보든지 보지 않든지
청결한 마음을 따라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삶을 살게 된다면
우리는 다양한 손실 가운데서도 우리의 필요을 채우기 위해
서 계신 하나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들도
그와 같은 역할 때문에
주변 사람들에게 부끄러움을 당할 때가 많습니다.
모세도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서 화평을 말하였지만
완강한 마음을 가진 그들은 모세에게 “누가 너를 우리의 재판관을 세웠느냐?”고 말하며
모세를 부끄럽게 만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평하게 할 때 경험하게 될
당야한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는다면 우리는 세상 사람들에게 결국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인정을 받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의를 위하야 박해를 받는 일은
세상 사람들이 볼 때 미련하고, 무가치한 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교지에서 선교사님들이 다양한 부끄러운 상황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옷을 벗겨진 상태로 볼기를 맞을 때도 있고
침밷음과 조롱을 받는 부끄러움에 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선교사님들은 이러한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십니다. 그 이유는 이미
그 분들의 마음에는 천국이 임하여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 서 계셨던
받침대는 하나님의 뜻이었던 십자가였습니다.
“그는 그 앞에 있는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시고
십자가를 참으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심이라!”
십자가는 하나님 보좌와 연결된
통로라 말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볼 수도 그 음성을 들을 수도
없는 것은 실제 우리의 삶에 십자가가 없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자기 부인입니다.
십자가는 나는 죽고 하나님과 예수님 그리고
성령님이 살아 역사하시는 통치를 말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저와 여러분들의 죄의 값을 대신 치르신
예수님의 사랑이기도 합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의 땀방울과 핏방울이
베어있는 나무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은 바쁜 사역을 마치고
늘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보통은 이른 새벽에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나의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기도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치실 때도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해달라는
기도를 통해” 자신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이 중요하다는 십자가
정신을 제자들에게 강조했던 것입니다.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비우시고
그 안에 하나님의 사랑을 담아 세상을
구원하신 희생을 말합니다.
또한 십자가는
세상이 끝까지 발악하여
파괴하기를 원하는 하나님 나라의
가장 핵심 지대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십자가를 대항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세상은 십자가를 거역하려고 하고
그 십자가를 따르는 사람들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려고 합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공격방법이
또한 십자가셨습니다.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예수님은 이 십자가의 받침대에서
서 계셨고 그 십자가에서
6시간 동안 물과 피를 쏟는 고통 속에서
그 십자가 받침대를 흔들어 보시는
“확인, 검증, 테스트”를 해보셨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바라보게 하셨던
것들이라는 실상이란 ‘받침대’ 위에서
죽기 전까지는 보이지 않았던 “증거”인
부활을 경험하게 되셨던 것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의 삶을 사셨기 때문에
히브리기자는 예수님을 가리켜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라는
표현을 사용했던 것입니다.
실제 예수님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구약 성도들에게는 믿음의 실체는 메시아라는
기다림의 언어를 통해 그림자와 같은 믿음의 실상을 선물해 주셨던
것이고 신약 백성들에게 구약 성도들이
경험하지 못했던 믿음의 실체이신
예수님을 직접 보고, 만지고, 경험하도록
하여 믿음의 성취가 십자가와 부활로 이루어졌음을
깨닫게 하셨던 것입니다.
아울러 예수님은 당신의 재림을 통해
믿음의 완성 또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선물해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2023년도를 마무리해가는
이 시점에 저와 여러분들이
서 있는 받침대를 점검해 보시고
그 받침대를 흔들어 보시며
예수님께서 그 흔들리는 받침대 위에서
당신의 받침대가 현재만을 위한 받침대가 아닌
“그 앞에 있는”받침대라는 사실을 깨닫고
세상 즐거움이 아닌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통해
만끽하게 되는 “즐거움”이란 받침대를 확인하시고
자기 뜻이란 야망과 욕심이 아닌 하나님 나라라는“십자가”
의 받침대를 확인하시고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으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는 연말연시 되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2024년도에는
저와 여러분들이
“그 앞에 있는”
“즐거움”
“십자가”라는
받침대 위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확인해 보실 수 있는
은혜가 있기를 소망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