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을 주시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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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사 30:1-7
제목: 시험을 주시는 이유
주제: 우리에게 시험을 주시는 이유는 인간적인 방법을 내려놓게 하기 위함이다.
목적: 상황과 환경에 얽메이지 않고 모든 걸 뛰어넘으시는 하나님께 부르짖게 하소서.
먼저 본문의 배경은 저번 주 배경과 똑같아요. B. C. 701년 경의 남유다의 상황입니다. 당시 남유다의 왕은 히스기야 왕이었어요. 이때 남유다는 앗수르에 포위를 당한 상태였습니다. 그러자 – 여러분이 기억하실 수도 있지만 – 남유다는 이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이집트를 의지하는 죄를 저지르게 됩니다. 이러한 유다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책망하시는 장면이 오늘 본문의 배경입니다.
그들이 이집트의 도움을 받아서 앗수르에 대항하기 위해서 했던 일이 무엇이냐면: 4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4 그 고관들이 소안에 있고 그 사신들이 하네스에 이르렀으나
여기서 소안과 하네스는 이집트와 남유다 사이의 접경지역입니다. 남유다 사신들이 이집트 사신들을 만나기 위해서 갔던 곳이 소안 또는 하네스입니다. 나일강 삼각주에 인접한 장소이죠.
남유다 사신들이 바로 이 소안 또는 하네스라는 지역에 나귀와 낙타 등에다가 이집트 왕에게 줄 많은 재물을 실어서 먼길을 항상 왔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집트 군대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죠.
자, 그런데 그들은 왜 이집트에 도움을 구했을까요?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이유가 있었습니다. 과거 아하스 왕 때에 비슷한 상황이었던 적이 있었는데, 이때 남유다는 앗수르에 편승합니다. 왜냐하면 북이스라엘과 아람을 다 합쳐도 앗수르 제국을 넘어서지 못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앗수르에게 곡물을 보내면서 자신들을 구원해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러자 앗수르는 북이스라엘과 아람 군대를 모두 무찌르게 되었죠. 그런데 나중에 밑에서 에돔이란 나라도 침공하니까 앗수르에게 한 번 더 도움을 요청하는데, 이때 앗수르가 남유다의 뒤통수를 칩니다. 왜냐하면 팔레스타인 전체를 점령할 절호의 기회였기 때문이에요.
한 30년 정도가 지나서 히스기야 왕 때에 남유다 백성들은 이때를 교훈을 삼았던 거예요.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말이 있듯이, 이들은 이렇게 생각했어요. 가장 강력한 강대국이었던 앗수르에게 편승했더니 앗수르가 뒤통수를 치더라, 그래서 강대국에게 편승하지 말고 그보다 조금 힘이 약한 쪽에 붙어야 이 위기를 모면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그런데 결과가 어떻게 되었냐면, 이집트도 남유다를 도와주지 않고 가만히 앉아있는 겁니다. 도와주겠다고 해놓고선 전혀 도와주지 않았어요. 이걸 7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7 애굽의 도움은 헛되고 무익하니라 그러므로 내가 애굽을 가만히 앉은 라합이라 일컬었느니라
여기서 라합은 사람 이름이 아니라 바다 깊은 곳에 살았던 거대한 고대 동물의 이름이라고 합니다. 멀리 접경지역까지 가서 자신들의 재물을 다 갖다 바쳤는데도 불구하고 돌아온 것은 방관이었던 것이죠.
이것이 세상의 실체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갖고 있는 문제를 이제 봅시다. 남유다 백성들은 누가 봐도 악한 세력, 하나님의 기준에서 보아도 악한 세력인 앗수르를 대항하기 위해서 선택한 것이 무엇이냐면, 바로 이집트의 무력입니다. 이 위기를 벗어날 방법이 현실적으로 이 방법 밖에는 없었던 것이죠. 앗수르라는 폭력적인 나라에 대응하기 위해서 선택한 것이 무엇이냐면 또 폭력이었던 거에요.
비록 앗수르보다는 작지만, 자신의 힘보다 더 큰 이집트의 폭력만이 현실을 극복하는 방법이었어요. 최악을 극복하기 위해 차악을 선택했습니다. 왜죠? 앗수르에 집어삼켜지면 끝장이니까, 시험드니까, 내가 원하는 하나님이 아니니까, 이집트라는 세상적인 요소를 사용하자는 거예요. 이 모든 게 내가 시험들면 신앙을 잃어버릴 것 같다는 착각에서 옵니다.
여러분, 우리를 시험들게 하시는 하나님을 피하기 위해, 우리는 대부분 작은 죄를 스스로 허용시킵니다. 이것이 우리의 죄성이에요. 앗수르보다는 작은 이집트라는 죄를 선택한다는 거에요.
예를 들어 볼게요. 여러분, 살인은 아주 큰 죄입니다. 그런데 이 살인 충동을 극복하기 위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선택하는 것은 뭐냐면 미워하는 것, 뒷담화하는 것이죠. 차악을 선택하면서 우리의 욕망을 해소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요한일서 3:15에 형제를 미워하는 건 살인이라고 하신 거예요. 미움과 살인이 완전히 똑같다는 것이 아니라, 살인을 하고 싶지만 그 마음을 참기 위해서 선택하는 것이 미움이기 때문이에요.
그러면서 하나님께 이렇게 따지는 거예요. “하나님, 내가 저 사람 미워하게라도 해주세요. 저 사람은 너무나 악한 사람인데 미워하지도 못하면 내 분이 풀리지 않아요. 안그러면 내가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데 상관없다는 건가요? 어디 가서 하소연도 하지 말고 그냥 꾹 참아요?”
여러분, 이걸 뭐라고 하냐면 ‘타협’이라고 합니다. 큰 시험을 막기 위해 작은 죄를 스스로 허용하는 것, 이것이 바로 타협입니다.
“시험에 든다”라는 것은 무엇이냐면, 내 신앙이 위협받는 것 같아서 두려워하는 것을 “시험에 든다”라고 합니다. 시험에 안들기 위해서 타협하는 신앙은 마치 하나님께 “내가 하나님을 떠나는 큰 죄를 짓도록 하실 건가요?”라는 으름장을 놓는 것과 같아요.
이런 경우도 있죠. “하나님, 내가 하나님도 믿으면서 열심히 죽도록 공부도 열심히 했는데 대학에 붙지 못하면 저는 시험 들 것 같아요!” 이런 학생들이 있을 수 있어요. 그러면 이 학생이 노출되는 유혹이 무엇이냐, 대학에 붙기 위해 고3쯤 되면 교회를 종종 빠져도 되지 않을까?라는 유혹에 쉽게 노출되는 것이죠. 대학에 붙어야 시험에 안드니까요.
물질과 타협하는 것도 마찬가지에요. 물질이 있어야만 내 신앙이 위협받지 않고, 시험들지 않고 신앙생활 잘 할 수 있을 것이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타협이 발생합니다. 모두 다 시험들면 내 신앙이 흔들린다고 착각해서 이렇게 되는 것이죠.
교회의 위기도 이러한 상황을 잘 말해주고 있어요. 교회가 자립하기 어렵고 기독교인 인구수가 줄어들기 시작하니까 교회가 스스로 위기를 느끼는 거예요. 이대로라면 우리가 시험들 수 있겠다, 우리의 신앙이 위협을 받을 수 있겠다, 이런 생각을 해서 교회가 세상과 타협하는 모습들을 종종 볼 수 있어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예로 동성애 문제가 있어요. 젊은이들이 자꾸 교회를 떠나니까 진리를 조금 왜곡시키더라도 사탕발린 말을 해주면서 동성애자들을 끌어모음과 동시에 젊은이들도 끌어모으려는 시도를 합니다. 이 외에도 교회가 존립하기 위해서 교회 스스로가 세상적인 방법론을 가져오는 경우가 굉장히 많아요.
하지만, 이렇게 우리가 시험들지 않기 위한 욕심 때문에 선택했던 타협이 오늘 본문에서 ‘헛되다’라고 말씀하죠. 시험이 신앙을 무너뜨리는 게 아니라 타협이 신앙을 무너뜨립니다.
여러분, 우리가 타협하지 않고 세상에 흔들리지 않고 굳센 믿음을 가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이때 하나님이 하시는 방법이 무엇인지 아시나요? 2절 읽어봅시다.
그들이 바로의 세력 안에서 스스로 강하려 하며 애굽의 그늘에 피하려 하여 애굽으로 내려갔으되 나의 입에 묻지 아니하였도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하나님께 질문하지 않아서 그들을 책망하셨어요. 그래서 질문할 수밖에 없는 환경을 만드십니다. 아이러니하게도 하나님께 요청하고 요구하고 부르짖고, 차라리 원망하게라도 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 우리를 가두십니다. 그러니까 일부러 “시험들게”하세요. 남유다의 멸망은 이미 예정되어 있었거든요.
즉 시험이란 우리의 행위로 그 어떠한 걸 할 수 없는 상태를 의미해요. 마치 이집트를 통해서 돌파구를 마련하려고 했지만 이마저도 막혀서 이젠 어떠한 인간적인 방법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린 것이에요.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냐면, 바로 모든 인생과 세상의 주관자가 하나님께만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시기 위함입니다.
시편 26:2절에 이렇게 말씀해요.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양심을 단련하소서
내 행위와 판단으로 어떠한 것도 할 수 없을 때 내 양심이 단련되고 믿음이 강해집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셔서 하나님 그 자체이신데 마태복음 4장에 보면 마귀에게 시험 당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마 4:1절 읽어볼까요?
그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여기서 누가 이끌었다고 했나요? 네, 성령이세요. 하나님이 예수님을 시험받도록 하시는 겁니다. 예수님은 그 누구도 대적할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시험을 받으세요. 그 이유가 무엇이냐면 시험에 빠지는 우리를 위로하시기 위함이에요. 예수님도 고통받으시고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의지할 수 있는 것이죠.
예수님의 더 큰 시험은 무엇이겠습니까? 십자가 위에서에요. 이때 예수님은 이렇게 부르짖으세요.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시험에 드신 예수님이 보이시나요?
그러나 예수님은 이 시험을 어떻게 이기셨냐면, 세상적인 방법으로, 정치적인 방법으로 이기지 않으셨죠. 바로 하나님만의 방법, 부활로 이기셔서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셨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세상을 선택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시험들까봐’에요. 시험이 들어서 내가 전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 찾아와서 절망에 빠질까봐 세상적인 방식을 선택합니다. 여러분이 기말고사와 주일성수 사이에서 고민할 때, 여러분이 친구들과 지낼 때, 그리고 입시 준비할 때, 여러분이 생각하는 방법이 있어야만 안심할 수 있는데, 모든 인간적인 방법이 막힐 때 그 절망을 감당하기 싫어서 세상적인 방식을 선택하는 것이죠.
저도 하나님께 원망을 많이 했습니다. 앞이 하나도 보이지 않고, 삶이 피폐해지고, 모든 계획이 틀어진 그러한 기간을 보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마음은, 내 우상으로, 내 계획과 생각으로 인생을 꾸려나갈 수 없다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함이었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 시험의 상황이 축복입니다. 하나님만 의지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에요. 여러분의 인생이 하나님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절박한 인생이 되어야만 해요. 물론 여러분의 문제들이 해결되기를 저도 소원하지만, 그보다 더 큰 은혜는 절망하는 여러분을 절대 버리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고린도전서 10:13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하나님은 어떠한 위기에서도 여러분을 구해주신다는 것을 여러분에게 계속 보여주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셔야 합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예레미야 33:3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사랑하는 중등부 여러분, 어떠한 상황이 오더라도 믿음을 잃지 마세요. 하나님은 절대 여러분을 버리지 않으세요. 그래서 예수님이 시험을 당하시고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을 때 하나님을 부르짖으세요. 하나님께 간구하세요. 무엇이든지 구하세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인간이 할 수 없는 은밀하고 뛰어난 일들이 여러분 삶에 일어날 것입니다.
이번 한 주도 힘든 상황이 생긴다면, 세상적인 방법이 아닌 하나님께 부르짖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