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티클라이맥스

에스라 강해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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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스 3:1-13
제목: 안티클라이맥스
주제: 안티클라이맥스가 영적인 클라이맥스이다.
목적: 영적인 지루함을 두려워하지 않고 신앙의 성장에 대한 고민의 무게를 제하게 하소서.
평형깨기
저번 주에 다루었는데, 에스라서의 주된 관심이 무엇이었는지, 제가 강조했는데 혹시 기억 나시나요? 그것은 바로 “50년이라는 세월이 지나고 세대가 바뀌면서 잃어버린 신앙의 유산을 어떻게 다시 연속적으로 계승할 수 있을까”였어요. 에스라는 항상 이러한 관점을 갖고 읽으면 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에서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 분별하는 방법이 되기 때문이라고 했어요. 즉 내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정말로 계승했는지, 어떻게 계승할 수 있는지를 에스라서를 통해서 알 수 있다는 겁니다. 이 점을 꼭 리마인드 하고 계세요.
그런데 여러분, 내가 정말 예수님을 따르고 싶은데,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은데, 이 결단을 방해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세요? “죄”라고 많이 대답할 겁니다. 맞습니다. 모든 문제는 사실 우리의 죄로부터 비롯되는 것이 맞는데, 오늘은 조금 더 깊게 나아갈 거예요.
오늘 말씀 제목이 뭐죠? 안티클라이맥스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에서 안티클라이맥스가 찾아올 때 우리의 신앙이 길을 잃어요. 예수님을 따르고 싶지 않게 됩니다.
안티클라이맥스가 무엇일까요? 문학 용어인데요, 문학이나 연극이 클라이맥스로 치닫는 순간에 기대와는 달리 그 클라이맥스가 시시하게 실망스럽게 해결되는 것을 뜻해요.
예를 들자면, <재벌집 막내아들>이라는 드라마가 있었죠. 결말을 스포하자면 모든 게 꿈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드라마는 첫화와 마지막화만 보면 된다는 우스갯 소리가 있었죠. 중간에 배우들이 열연했던 내용들이 전부 <무의미>해지는 것 같아 보이게 만드는 것이 바로 안티클라이맥스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에요. 우리의 삶과, 행동, 또는 환경을 모두 무색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 같아 보이는 것이 바로 신앙생활에서의 안티클라이맥스입니다. 결말이 시시해지는 거죠. 가령 열심히 기도한 제목을 끝끝내 들어주지 않으시면 기도했던 행위들이 모두 무의미하게 느껴질 수도 있고요, 나의 신앙이 성장하기를 바랐지만 결과적으로 세상과 타협하며 사는 나 자신을 볼 때, “신앙생활이 뭔 의미가 있나” 이런 생각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거예요.
한 마디로 나의 기대와 헌신에 비해 결과가 매우 시시하고 실망스러울 때 안티클라이맥스라고 합니다.
자, 그러면 어떻게 되냐, 안티클라이맥스가 아닌 클라이맥스를 만들기 위해서 인위적으로 더 극적인 요소를 집어넣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복음과 신앙을 그대로 계승하면 우리와 맞지 않는다든지, 결과가 나타나지 않고 비효율적이라든지, 이러한 이유로 예수님의 가르침에 뭔가를 더 첨가하거나 제거하는 일들이 발생하는 것이죠. 그러면 복음을 왜곡하게 됩니다. 우리가 이런 위험에서 벗어나야겠죠?
갈등심화
오늘 이야기는 안티클라이맥스를 직면한 이스라엘 백성의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제 드디어 성전 집기들을 가지고, 그리고 고레스 왕과 페르시아 시민들의 물질적 지원을 힘입어서 드디어 본향으로 귀환하게 됩니다. 하루 이틀 걸리지 않았겠죠? 1년 정도 걸려서 B.C. 537년 경에 예루살렘에 도착하게 됩니다. 성전의 회복에 대한 확신을 갖고 왔을 겁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합니다. 이스라엘 멸망 후 그 땅에 살고 있었던 사마리아인들이 성전 건축을 방해하고 이스라엘 백성을 위협하고 있었습니다. 3절 읽어보겠습니다.
3 무리가 모든 나라 백성을 두려워하여 제단을 그 터에 세우고 그 위에서 아침 저녁으로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며
이 말씀을 좀만 더 원어의 뉘앙스에 가깝게 번역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지역에 있는 사마리아인들을 비롯한 이방 혼혈 민족들의 위협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제단을 그 터에 세우고...” 많이 다르죠?
그들은 최대한 빨리 예배를 회복하려고 했단 말이죠. 경건해 보이지만 그렇지 않아요. 이방인들이 두려워서라고 합니다. 하나님께 온전히 마음을 다하여 찬양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하나님, 우리 좀 살려주세요”라고 애원하는 재단을 세운 거죠. 어떻게 보면 예배가 변질된 거예요. 초보적인 신앙으로 돌아간 거예요. 그래서 그렇게 애원만 하며 빈둥거리다가 성전 기초를 놓는 것도 실패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방인들의 위협 속에서 7개월 정도가 지난 후에 이제 드디어 성전 건축을 위한 조직 개편이 이루어지기 시작했어요. 왜 7개월이나 걸렸을까요? 아마 많은 방해꾼들 사이에서 성전 재건을 이어나가기 어려웠을 거예요. 또 이스라엘 백성들의 의지도 박약했을 겁니다. 또 종교력으로 7월부터 2월은 우기에 해당합니다. 그래서 제대로 성전을 건축하기가 어려웠어요. 땅이 물렀기 때문이죠.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들을 뚫고 드디어 조직 개편을 하고 성전의 기초를 설치했습니다. 감격스러운 순간이죠. 마치 지난 5월에 누리호를 발사했던 연구원들처럼 말이죠. 그들이 환호한 이유는 누리호의 성공적 발사를 위해 수년동안 잠도 제대로 못자고 연구했기 때문이었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던 겁니다. 멀리 레바논에서 수입한 백향목으로 비를 맞아가면서 많은 인부들이 썩빠지게 고생하면서 성전의 기촛돌을 가져다 놓은 거예요.
여기서 안티클라이맥스가 일어납니다. 오늘 본문 10-13절 읽어볼게요.
10 건축자가 여호와의 성전의 기초를 놓을 때에 제사장들은 예복을 입고 나팔을 들고 아삽 자손 레위 사람들은 제금을 들고 서서 이스라엘 왕 다윗의 규례대로 여호와를 찬송하되
11 찬양으로 화답하며 여호와께 감사하여 이르되 주는 지극히 선하시므로 그의 인자하심이 이스라엘에게 영원하시도다 하니 모든 백성이 여호와의 성전 기초가 놓임을 보고 여호와를 찬송하며 큰 소리로 즐거이 부르며
12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나이 많은 족장들은 첫 성전을 보았으므로 이제 이 성전의 기초가 놓임을 보고복삼 대성통곡하였으나 여러 사람은 기쁨으로 크게 함성을 지르니
13 백성이 크게 외치는 소리가 멀리 들리므로 즐거이 부르는 소리와 통곡하는 소리를 백성들이 분간하지 못하였더라
무슨 상황이냐면 대부분 다들 기뻐서 찬양하고 있는데, 옛날 솔로몬의 위대한 성전을 기억하고 있는 어르신들이 대부분 펑펑펑 울기 시작하는 겁니다. 대성통곡하였다는 건 큰 소리로 자신의 아픔을 눈물로 부르짖는 걸 뜻합니다. 그게 어느 정도였냐면 멀리서 들었을 때 환호소리와 통곡소리가 구별되지 않을 정도였다고 해요.
이게 무슨 말이냐면, 여기서 족장들이 소수이고 젊은이들이 훨씬 다수입니다. 그런데 족장들인 노인들이 얼마나 크게 울던지 나머지 젊은 애들의 환호성을 다 가릴 정도로 크게 울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본문은 기쁨과 환희보다는 통곡과 슬픔에 강조점이 있어요. 열심히 비 맞아가며 썩 빠지게 일해서 고급 소재를 운반해서 드디어 기촛돌을 하나 놨는데, 어떤 상황으로 끝이 났죠? 드라마라고 생각해 봐요. 펑펑 우는 장면으로 끝났습니다. “뭐지?” 이런 반응이 생길 겁니다. 다음 화가 기다려지는데 이게 결말이라는 게 에스라서의 골자예요.
그러면 노인들이 ‘왜’ 울었는지를 생각해 봐야 해요. 왜 울었을까? 단순히 옛날 성전이 그리워서 운 건 아니에요. 만약 그랬다면 크게 실망하고 심심해 하고 말았을 거에요.
그런데 왜 울었을까요? 7개월 동안 전전긍긍해서 겨우 돌멩이 하나 놓은 현실에 대한 서러움이 찾아왔기 때문이에요. 이렇게 고생했는데 하나님 겨우 이거에요? 다윗과 솔로몬 때는 안 그랬잖아요? 쉽게 말해 “현타”가 온 거죠. 과거와 달리 이방인들의 눈치를 보면서 맨날 목숨을 잃을까봐 두려워하면서 7개월 만에 겨우 돌멩이 하나를 설치한 상황이 너무나 비참한 겁니다. 과거보다 더 많은 열심을 쏟았는데 결과는 성전의 기초 하나예요. 귀환 인구도 적어서 더 힘들어요. 그 땅을 왜 사마리아인들로 물들게 만드셔서 우리를 괴롭게 하신 것인지, 아직 기초도 제대로 설치가 안 된 성전을 보면서, 세상에 쉽게 휘둘리는 자신을 보았기 때문에 눈물이 났던 겁니다. 그러니 태평성대였던 다윗과 솔로몬 때를 자꾸 추억하는 것이죠.
여러분, 우리가 예배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당연히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사랑해서 등등의 이유일 겁니다. 그런데 문제가 무엇이냐면, 내가 기도하는 내용도, 하나님과 가까워지고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한 기도제목보다 내 삶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기도제목이 더 많아지고, 예배도 하나님을 잘 이용해 보려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경우가 많아진다는 겁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세상의 무게를 견디기 어렵기 때문이에요. 이걸 위한 기도를 안할 순 없어요. 그러나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일에 관심을 가질 겨를이 없다는 게 문제입니다. 삶에 무개를 견디기 어려워서 전전긍긍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고 비참함을 느낄 때가 많지 않나요? 남 모르게 서러워서 눈물을 훔치고 있는 모습이 여러분에게 있지 않나요?
열심히 교회를 다니고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를 열심히 하고 예배를 매주 드려도 하나님과 더 멀어지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죠. 이런 상황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극복
안티클라이막스를 극보하는 하나님의 방법이 무엇인지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냥 두는 겁니다. 극적인 역사나 초자연적인 개입이 없어요. 안티클라이막스를 그냥 두시는 겁니다.
하나님은 안티클라이맥스를 클라이맥스로 바꾸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안티클라이맥스를 통해 우리가 깨닫고 변화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으신 거예요. 학개 2장에 가면 이 상황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3 너희 가운데에 남아 있는 자 중에서 이 성전의 이전 영광을 본 자가 누구냐 이제 이것이 너희에게 어떻게 보이느냐 이것이 너희 눈에 보잘것없지 아니하냐
4 그러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스룹바벨아 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야 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 땅 모든 백성아 스스로 굳세게 하여 일할지어다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5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내가 너희와 언약한 말과 나의 영이 계속하여 너희 가운데에 머물러 있나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학개의 말은 이거에요. “그래, 보잘 것 없는 거 맞아. 느리고 초라하지. 그런데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셔. 그래도 믿을 수 있겠니?” 이겁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안티클라이맥스인데도 하나님을 신뢰하겠니?” 이걸 질문하고 계시는 겁니다. 이걸 아주 결정적으로 적나라하게 우리에게 질문하시는 사건이 하나가 있죠. 그게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에스라서를 볼 때 우리가 가져야 하는 질문이 뭐라고 했죠? “예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계승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였죠.
그 방법은 무엇이냐면 바로 영적인 안티클라이맥스에 도달해야 한다는 겁니다. 다른 말로 영적인 지루함. 여러분의 기도가 응답이 안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신앙이 성숙해지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오래 참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또 기대와 달리 이스라엘 백성처럼 신앙의 유산을 다 까먹고 초보적인 신앙으로 회귀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거꾸로 가는 것 같은데, 하나님께서 성전을 세우시는 과정이에요. 거꾸로 가는 것 같은데, 하나님 나라에 도달하는 과정이에요. 죄를 예전보다 더 많이 짓는 것 같은데, 모두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과정이에요. 기쁨보다 슬픔이 더 큰데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어지는 과정이에요! 믿어지시나요?
이게 가능한 이유는 방금 학개 2:5절에서 언급한 것처럼 하나님의 약속이 절대로 폐기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공로나 실력과 상관 없이 하나님께서 완성하신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기 위함이에요.
비전제시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에게 진정한 클라이맥스는 안티클라이맥스입니다. 뭔가를 성취하고 성공할 때가 가장 위험할 때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무너지는 모습을 직면하면, 절망하고 포기하는 게 아니라 십자가를 참으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더욱 소망하게 됩니다.
디모데전서 1장에서 바울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죄인들 중에서 1등 죄인이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누구보다도 탁월한 사도인데 누구보다도 비참한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겁니다. 바울은 다른 제자들보다 늦게 회심했습니다. 오늘 본문과 비교하면 성전의 기초를 가장 늦게 놓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님을 알아갈수록 자신의 연약함과 비참함을 계속 더욱 지속적으로 직면해야만 했어요. 자신의 죄 때문에 누구보다도 고통스러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렇게 고백하는 것과 같아요. “내가 괴수라서, 내가 가장 더러운 죄인이라서 주님의 일을 감당하는 것이라고. 성전의 기초를 너무 늦게 놓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일하실 거라고.”
여러분의 안티클라이맥스, 여러분의 신앙생활에서 실망스러운 일들을 절대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이야말로 여러분 신앙의 가장 클라이맥스입니다.
이번 한주간도 하나님 약속만 신뢰하면서 안티클라이맥스를 더욱 사모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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