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 꺾. 믿.

히브리서 강해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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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히 11:32-12:2
제목: 중. 꺾. 믿.
주제: 믿음은 부족하냐의 문제가 아니라 선택의 문제이다.
목적: 연약한 자신의 신앙생활을 오히려 자랑스러워하고 포기하지 않도록.
평형깨기
여러분, 먼저 질문을 하겠습니다. 기독교에서 구원은 무엇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치나요? 그렇죠.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치죠.
그러면 또 한 가지 질문을 할게요. 믿음이 부족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종종 교회에서 이런 이야기를 듣습니다. “믿음이 부족하다”, “믿음을 더 많이 가져야 한다”라는 이야기를 듣죠.
그런데 성경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7:20절에 이렇게 말씀하세요.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예수님께서 작은 믿음을 지적하시면서 “겨자씨 한 알 만큼의 믿음만 있어도 산이 옮겨진다”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겨자씨는 클까요, 작을까요? 작습니다. 엄청 작아요. 예수님은 작은 믿음을 지적하셨지만 정작 믿음이 작아도 제대로 된 믿음이라면 능력이 있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러면 믿음이 작아도 된다는 걸까요, 아니면 작으면 안된다는 걸까요? 헷갈리죠.
당시 히브리서 수신자들의 상황은 어땠냐면, 네로 황제의 박해가 무서워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배신하고 교회를 떠나는 상황들이 벌어졌습니다. 그들은 사탄의 권세 앞에서 넘어졌어요.
우리도 마찬가지죠. 지난 한 주간의 삶을 되돌아 보세요. 그리스도인으로서 떳떳한 삶을 살았나요? 아니죠. 우리는 모두 부끄러운 삶을 살았어요. 세상과 타협하면서 살았어요. 죄의 유혹에 넘어졌어요. 짓지 않기로 한 죄를 또 다시 범하는 실수를 저질렀어요.
오늘 히브리서의 질문이 이겁니다. 이런 넘어짐들과 실수들은 저와 여러분에게 믿음이 부족해서 생긴 것일까요?
네로 황제의 박해로 인해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죄와 타협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믿음이 부족해서 타협했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어떤 이들은 그래서 자신은 하나님이 선택하신 그리스도인이 아니구나라고 스스로를 정죄해서 시험에 빠지고 교회를 떠났어요. 어떤 이들은 자신에게 강인한 믿음을 주지 않으신 하나님을 탓했어요. 또 어떤 이들은 연약한 믿음을 틈타 이단에 빠지기도 하였어요.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넘어진 성도들과 배교한 성도들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회복시켜야 하는 과제를 갖고 있었던 것이죠.
갈등심화
우리는 왜 넘어지는 것일까요? 믿음이 부족해서 그럴까요? 그래서 믿음을 더 많이 채우면 해결될까요? 오늘 말씀은 그렇지 않다고 말씀합니다.
오늘 말씀은 히브리서 11장과 12장인데요. 특히 11장은 중요한 부분이라서 전체를 요약하면서 설교의 본론으로 들어갈게요.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장”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말해보자. “믿음장”. 그래서 11장에는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라합 등 흔히 믿음의 위인들이라고 일컬음을 받는 사람들이 예시로 등장합니다. 후반부에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그리고 다윗과 사무엘을 언급하고 있어요. 이 사람들이 모두 “믿음으로 이러한 본이 되는 삶을 살았다”라는 취지로 언급이 되고 있어요.
자, 그런데 질문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정말 본이 되는 인물들일까요? 정말 위인들일까? 대부분은 그렇지 않아요. 시간이 없어서 다 언급은 못하고 여러분이 알만한 유명한 인물들만 언급해 볼게요. 아브라함이 정말 위인일까요? 그는 자신의 아내를 담보로 자신의 목숨을 건지려고 했던 사람이에요. 야곱은요? 사기꾼의 대명사입니다. 모세는요? 살인자입니다. 다윗은요? 간통과 살인교사를 했습니다. 평생 씻을 수 없는 더러운 죄들을 지었어요. 히브리서 수신자들은 대부분 유대인들이라서 이 사람들의 이런 연약함들을 모를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어찌된 일인지 이 사람들의 더러운 모습들은 생략하고, 마치 없는 셈 치고, 믿음으로 아주 잘 극복하며 살아낸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이 부분을 읽으면 여기에 언급된 사람들을 믿음의 위인처럼 오해하는 경향이 있어요.
하나님의 극복
히브리서 기자는 왜 이렇게 작성했을까요? 우리가 저번 주에 살펴본 하나님의 약속 때문에 그렇습니다. 10:17절에 이렇게 말씀하죠.
17 또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를 기억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모든 죄를 제거하셨어요. 따라서 사람이 아무리 많은 죄를 짓고 평생 용서받을 수 없는 중대한 죄를 범했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결코 떠나지 않으셨다고 말씀하는 겁니다. 본문 39-40절 읽어볼게요.
39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40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서 39절에서 “이 사람들”은 위에서 언급한 사람들이에요. 그리고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라는 말은 “그들의 믿음이 증거가 되었다”라는 의미입니다. 믿음이 곧 증거라는 거예요.
그들은 자주 쓰러지고 중대한 죄를 저질렀어요. 그들의 믿음은 강하지 않았어요. 아주 연약하고 작은 믿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작은 믿음조차도 증거가 되었다는 거예요. 무엇에 대한 증거일까요? 이게 그 유명한 11장 1절입니다. 1-2절 함께 읽어봅시다.
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2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이건 너무나 중요하니까 꼭 기억하세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바라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뭐냐면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아까 읽었던 40절에서 ‘더 좋은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 야곱, 모세, 다윗과 같은 사람들은 숱한 죄를 짓고 넘어지고 쓰러졌지만, 그 연약한 믿음 그 자체가 바로 하나님 나라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의 증거라는 거예요. 오히려 그들이 평생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다고 해도 그들을 떠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들을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시기 위해서 사용하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증거가 되었다는 겁니다. 지금 여러분의 믿음을 이렇게 사용하신다는 거예요. 믿으십니까?
그러니 “너희가 네로의 박해로 인해 넘어지고 혹여 배교했더라도, 예수님께서 너희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고, 너희의 죄를 씻으셨고,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기 위해 지금도 여전히 부르고 계신다”고 히브리서 저자가 저와 여러분에게 간절하게 호소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구약시대 때 드러나지 않은 하나님 나라를 완전히 이루시려고 우리를 부르셨어요. 그래서 우리가 지금 스스로 보잘 것 없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삶과 신앙이 없으면, 아브라함, 야곱, 모세, 다윗의 삶은 다 무의미하다는 겁니다. 우리의 삶과 우리의 연약한 신앙이 있어야 아브라함, 야곱, 다윗과 같은 믿음의 선배들을 통해서 이루어가신 하나님의 약속이 비로소 완성되는 거예요. 지금 히브리서 기자가 우리의 연약한 삶을 얼마나 치켜세우는지 보셔야 돼요.
복음선포
그래서 우리가 넘어지는 이유는 믿음이 부족해서가 아니에요. 우리는 넘어질 수밖에 없고, 오히려 넘어져도 괜찮아요. 부족한 믿음, 작은 믿음, 괜찮다는 거예요.
우리 신앙의 진짜 문제는, 일어나지 않으려고 한다는 거예요. 우리에게 주신 믿음의 경주를 완주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겁니다. 즉 믿음은 끝까지 완주하려고 하는 책임감의 문제입니다. 중. 꺾. 믿. 입니다! 12장 1-2절 읽어보겠습니다.
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믿음장인 히브리서 11장의 결론은 12장 1-2절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을 읽을 때는 12장 2절까지를 한 단락으로 보아야 합니다.
2절에서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는 “믿음의 창시자이시자 완성자이신 예수”를 뜻합니다. 이 말은 곧 예수님이 믿음 그 자체와 같다라는 거예요. 그래서 앞서서 “믿음으로 아벨은..”,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이런 문장은, 예수님께서 믿음을 만드셨고, 믿음을 완성하시는 분이시니까 “예수님으로 아벨은..”, “예수님으로 아브라함은..”이라는 말로 대체할 수도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만약에 “믿음이 부족하다”라고 한다면 “예수님이 부족하다”라고 바꿔 말할 수도 있어요. 이게 말이 되나요? 말이 안되죠. 그러니까 내가 스스로 잘 믿는 것을 통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믿음, 예수님께서 완성하신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겁니다.
요약하면 지금 이렇게 말하고 있는 거예요. “앞서 믿음의 선배들을 열거했잖니. 너가 다윗처럼 간통을 했니 살인교사를 했니? 걔네들은 너보다 잘난 게 하나도 없다! 예수님께서 그들이 믿음의 경주를 완주하게 하셨어. 너라고 못할 것 있겠니? 너의 믿음이 아니라 너 안에 있는 예수님의 믿음을 봐! 그러면 믿음의 경주를 완주할 수 있어!”라는 거예요.
로마서 3:22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여러분, 이건 꼭 기억하면 좋은데, 이 구절의 원문에는 두 가지의 뜻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도 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도 됩니다. 저는 두 번째 번역을 더 좋아해요. 우리의 믿음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 겁니다.
이게 우리에게 엄청 큰 은혜예요. 우리의 믿음이 부족한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믿음,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이루신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삶이 완전하시기 때문에, 예수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을 받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실패하고 넘어지는 것은 우리들의 믿음이 부족해서 생긴 일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믿음의 경주 안에 있기 때문에 실패하고 넘어지는 것이에요. 히브리서 수신자들처럼 배교하고 도망가는 그런 믿음의 연약함들을 경험하는 것 자체가 믿음이 훈련받는 과정이라는 거예요. 믿음이 부족해서가 아니라는 거에요. 이걸 헷갈리지 말라고 오늘 성경이 말씀하는 것이죠.
“끝까지만 가기만 하면 돼. 느려도 돼. 넘어져도 돼. 잠시 쉬어도 돼. 그러나 끝까지만 가자.” 이 마음이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비전제시
올림픽 정신에는 이러한 뜻을 담고 있다고 합니다. 근대 올림픽의 창시자인 피에르 쿠베르탱 남작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해요. “중요한 것은 승리가 아니라 참가하는 것이다(The important thing is not to win, but to take part)”
즉 경기에서 어떤 메달을 따는가, 몇 등을 하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경기에 참여해 선수 자신의 한계를 시험하고 극복하는 그 과정 자체를 중요시하는 것이 올림픽 정신입니다. 올림픽에 참가하기 위한 피와 땀과 눈물, 그 과정 자체를 귀하게 여기는 것이고, 그래서 올림픽에서는 꼴찌도 박수를 받는 문화가 정착되었죠.
야구에서는 최고 타율이 3할이라고 합니다. 10번 중 3번 안타 이상을 치면 잘 치는 거예요. 7번은 아웃을 당해야 합니다. 쾌감보다 좌절이 훨씬 더 많은데 최고 타자의 영예를 얻을 수 있는 거예요.
신앙생활도 이와 같아요. 잘할 필요 없어요. 아니, 잘 못해야 정상입니다. 그저 포기하지만 않으면 돼요. 완주하세요.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것입니다.
믿음은 마치 부족하기라도 해서 부족한만큼 어떤 영양제를 섭취하면 늘어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이미 우리에겐 완전한 믿음이 있어요. 바로 예수님의 믿음이죠. 부족한 나의 믿음을 보지 말고, 완전하신 예수님의 믿음만 보아라. 그러면 넘어져도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겁니다.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저 그 예수님의 믿음만 바라보고 포기하지만 않으면 됩니다.
특히 우리보다 더 못났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세, 다윗, 기드온, 삼손 등등을 통해서 우리가 결코 하나님께 포기되지 않는다는 확신을 얻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말해봅시다. “내가 모세보다 낫다”, “내가 다윗보다 낫다” 이들이 위대한 게 아니라 위대하게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세요. 이걸 꼭 기억하시고 신앙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 여러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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