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7과 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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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오늘도 예배로 모인 성산의 청년들 반갑습니다.
우리 서로 함께 은혜 안에서 함께 예배하길 원하는데요.
앞뒤 서로 보면서 인사하면 좋겠습니다.
“반갑습니다.”, “반갑습니다.”
오늘 본문은 빌립보서 2:12-18 절의 내용입니다.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게 권면을 하는 내용입니다. 지지난주 설교 빌리보서 강해 6강에 이어서 7강으로 이어집니다.
7강의 제목은 순종안에서 누리는 기쁨입니다.
기쁨, 기쁨이라고 하면 주로 어떤게 생각이 드시나요? 제가 기쁨이란 단어를 위키피디아에 검색해보니, 이런 결과를 줍니다. “욕구가 충족되었을때 가지는 감정이나 느낌, 혹은 행복의 일종으로 볼 수 있다.
저는 이 사전이 주는 의미에 동의하기도 하지만, 한 편으로는 동의하지 못하는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가장 핫한 뉴스가 무엇인가요? 단연 이선균배우의 죽음이 가장 핫 이슈인듯 합니다. 제가 정말 좋아하는 배우였는데,,, 저도 엄청난 충격이 이번주에 있었습니다.
이선균 배우가 어떤 일을 했는지 확실하게 수사결과가 나온게 아니라 언급하기 매우 조심스럽스빈다. 그래서 이 이야기를 떠나서, 요즘 이슈가 되는 마약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고자 합니다. 전체적으로 연예계 및 다른 많은 곳에서 마약에 대한 이야기를 심심치 않게들어 볼 수 있는데 마약은 무엇입니까?
인간이 평소에 느끼는 도파민의 한계를 극한으로 올려서 그 무엇보다 기쁘게 해주는 것입니다. 제가 영상으로 찾아보다가 도파민 지수를 알려주는 마취통증의학과 전문의의 영상을 보게되었습니다. 그분이 도파민 지수를 나열해주시는데요.
기본적으로 강아지 산책을 시킬 때 60정도, 음주를 할 때 150, 게임을 할 때 175 정도라고 합니다. 그리고 정말 높게 나온게 두 가지가 있는데요. 바로 남녀가 처음 사랑에 빠지게 되는 순간과 로또 1등에 당첨되는 순간이 750 이라고 합니다. 정말 높죠 !!ㅎㅎ
그런데 진짜 마지막으로 가장 높게 측정된 것은 마약을 주사하면 느끼는 도파민 지수입니다. 무려 1250이라고 합니다. 주사 한 방에요. 마약에는 종류가 많기에 어떤 마약인지 정확하게 특정지을 수 없지만, 마약이라는 주사 한 방에 인생에서 느낄 수 없는 쾌락을 느끼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약에 손을 댄 사람들이 마약을 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각자 저마다의 이유가 있겠지만, 결국 동일하게 그들은 그 잠시나마 행복하길 원했고, 기쁨을 넘어 쾌락을 원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한 번의 주사는 기쁨을 주겠지만, 그 결과는,,,, 중독,,, 그리고 사회에서의 격리,,, 평소에 누리는 것들로 부터 다 멀어져,,, 허망한 길로,, 걷게 됩니다.
마약이 나랑 뭐 얼마나 관련이 있겠어? 라고 생각하며,너무 멀리 있는 것이란 생각이 들 수도 있기에 공감이 잘 안될 수 있지만, 마약 뿐 아니라, 세상에서 이야기하는 행복을 위한것, 나를 위한 행복, 쾌락은 대부분 잠시 기쁨을 주지만, 그러한 것들은 결국 허망함이란 후 폭풍을 동시에 주게 됩니다.
그렇다고 제가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이 세상이 주는 행복이 모두 잘 못되었으니, 다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ㅎㅎ 교회다니니까 교회에서만 기쁨을 느껴라고 이야기하는 것 절대 아닙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누리게 되는 행복, 기쁨 인간으로 가지는 욕구에 대한 충족으로 우리는 행복을 누리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점점 어떠한 선을 넘어가고, 기준을 자신이 정해버리는 시대 가운데서 무분별하게 계속 행복만, 쾌락만 추구하는 것, 그 것이 기쁨이라 하는 것에 대해서 저는 의문을 던져보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 오늘 우리가 본 본문에서는 바울이 이야기 하는 기쁨이 나옵니다. 오늘 그 기쁨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게 권면을 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그의 권면의 시작은 2장 12절로, 요약하자면 항상 복종하고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것 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이야기 하고 13절에 하나님께서 기쁘신 뜻을 우리게 소원으로 주시며 행하게 하신다라고 이야기 합니다.
이는 좀 아리송한 말씀인 것 같습니다. 분명 구원을 이루라 했는데 하나님께서 기쁘신 뜻을 우리게 소원으로 주시면서 행하게 하신다. 라고 하는데, 이는 그럼 하나님이 한다는 것인지 내가 하라는 것인지 헷갈리는데요.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바울은 구원을 이루어 가시는 것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그렇다고 모든 것을 하나님이 하시니, 나는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구원을 이루어 가는 것, 항상 복종하는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행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럼 여기서 질문이 있을 수 있는데요. 여기서 구원이 우리를 진정으로 구원하는 것을 미래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는 것에 우리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야기 하시는 것 입니까? 라고 질문 할 수 있는데요. 그 것은 아닙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일이시고, 그 분께서 이루어 가시는 것 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바울이 빌립보교회에게 이야기 하는 구원은 우리 영혼의 구원보다는 분열된 교회가 하나되는 것, 그러으로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는 것을 이야기 하는 것 입니다. 이 땅에서 분열되어서 서로 각자가 맞다고 여기면서 싸우는 것에서 부터 구원 그 공동체 안에서 분열을 막고 하나되는 것을 구원으로 표현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구원자체를 굳이 영혼구원과 공동체 구원, 이렇게 딱 잘라서 나누기는 어렵겠지만, 적어도 여기서 말하고 있는 구원은 우리가 이 땅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는 것에 우리의 노력을 하나님이 사용하신다는 것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하는 말을 현재 우리게 적용하자면 우리도 한 공체룰 세워나가며 분열되지 않고 옆 사람들과 잘 지내는것, 한 마음이 되는 것, 서로를 걱정하고 관심을 가지고 돕는 것, 서로를 위해 기도해주는 것 이런 것이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어서 바울은 권면을 더 하게됩니다. 요약을 또 하자면 이런 거스르는 세대, 즉 패역한 세대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세상의 빛으로 나타내라고 합니다.
이는 마태복음 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한 말이 생각나게 하는 장면입니다. 제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겠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예수님도 바울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세상의 빛과 소망이며, 우리는 이세대를 패역한 세대 속에서 세상의 빛과 소망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빛과 소망으로 산다는 것? 그것은 어떤것이 있을까요?라는 이 질문에, 저는 이렇게 대답 하고 싶습니다. “적어도 우리가 세사의 소망과 빛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율법적인 틀안에서 갖혀서 살자는 것은 아니다” 이 말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예배를 잘 드리는것 우리가 매일 종교생활을 잘하는것, 혹은 술 담배를 하지 않는 것, 욕설을 하지 않는 것 이런 것들 어떤 것을 정하고 잘 지키는 것만을 이야기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 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속에서, 패역한 세상 속에서 빛으로 사는 것은 그런 율법을 잘 지키는 것을 넘어서, 정말 예수님을 사랑함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술-담배 안하고, 혹은 정해진 법을 잘지킴으로 우리 스스로를 우월하게 생각해서 그 행동들만, 그 율법들만 잘 지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
진정 우리가 이웃을 사랑함으로 주어진 말씀들을 잘지켜나가고, 진정한 기쁨을, 진정한 만족을 예수님으로 부터 발견하여, 내가 남들보다 낮은자리로, 남들보다 약한 자리로 갈 수 있는 것이 세상의 빛으로 사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세상은 쾌락을 쫒아살고, 세상은 자신의 유익에만 신경쓰면서 살아가고, 자기가 기준이 되어서 자신이 결정하고, 자신의 자유권이 중요하기에 다른 이들이 피해보는 것에 대해서는 깊이있게 생각하지 않는 그러한 개인주의, 이기주의 속에서, 한 공동체로 모여서 나와 조금 달라도 서로 하나되길 힘쓰고, 나의 유익을 좀 내려놓고, 서로를 돌볼줄 아는 것, 진정 사랑하며 사는 것이 우리가 이 땅에서 세상의 빛과 소망이 되는 것이지 않겠습니까 !!
이어서 바울은 그렇게 빛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생명의 말씀을 밝히고, 수고 하는 자에게 그리스의 날에, 주님 만나는 날에 칭찬받을 것이 있지 않겠냐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세대를 거슬러 사는 것, 세상의 빛으로 사는 것은 쉽지는 않겠지만, 그 쉽지 않은 것을 하나 하나 해 나간다면, 주님 께서 기억하시고, 칭찬하시지 않을까요? ㅎㅎ
바울은 이제 기쁨에 대해서 말합니다. 제가 서두에 이야기한 세상이 이야기 하는 기쁨과는 다른 기쁨에 대해서 바울은 말합니다. 제가 앞전에 사전에 기쁨을 쳤때 그 내용에 대해서 인정하지만, 인정하지 못하는 부분도 있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기쁨을 너무 감정적으로만 묘사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감정적인 것을 배제할 수 없지만 오늘 본문에서의 기쁨은 감정적인 것만이 전부가 아님을 말해줍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믿음과 그들의 제물을 드리는 것과 섬기는 그것 위에 자신을 전제로드리는 것, 즉 불에 태워서 제물이 되더라도 기뻐한다고 말합니다.
상식적으로 자신을 불태워서 바치는 제사의 제물로 사용되는 것이 어찌 기쁠 수 있겠습니까? 이게 가능 한건가요? 이건 일반적인 기쁨, 세상이 이야기 하는 자신을 기쁘게 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기쁨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기뻐한다며, 그리고 더해서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너희도 나와 함께 기뻐하라!!
바울이 전하는 기쁨은 제가 아까 서론에 적었던 기쁨과는 다릅니다. 적어도 도파민이 나오는 기쁨은 아니었을것 같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게 그리고 오늘날 우리에게 기뻐하라고 이야기 합니다. 이 기쁨은 어떤 기쁨일까요?
당시 바울은 그리스도를,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힌 상태였습니다. 그런데도 그 와중에 바울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기뻐했고, 그리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기뻐하라고 전했습니다. 왜냐면 그는 자신 스스로도 고난 중에도 진실로 그리스도 때문에 기뻤고, 고난중에도 기쁨으로 하나님의 사자로 일하였습니다.
그럼 우리는 그의 기쁨 앞에서 고난중의 기쁜 것은 무엇일까? 그리스도로 기쁜 것, 자신을 채우기 위한 기쁨이 아니라, 자신을 버리는 행위로보이는 그 행위로 부터 오는 기쁨은 무엇인가? 질문 해볼 수 있을 듯 합니다.
그 기쁨은 당장은 힘들고, 당장은 버겁고, 당장은 어려움이 뻔히 보히는 자리에서, 정말 우리의 주인이신 주님께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우리를 인도하시고, 우리를 언제나 선으로 이끄신다는 것을 누리는 것이지 않을까 합니다.
여전히 그리스도인으로 살려고 애쓰는
세상에서 이야기 하는 행복, 기쁨을 따라가기 보다, 그 기쁨보다 크신 하나님의 말씀안에서 누리는 기쁨을 누리자는 것이죠.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다 보면 가끔 포기해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내가 즐기던 기쁨을 내려 놓아야 할 때도 있다는 것이죠. 제가 갑자기 자신을 버리겠다는 바울의 고백처럼 여러분도 그 만큼 헌신하고, 그렇게 자신의 목숨을 내놓기 까지 모두 포기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우리는 이러한 고백을 합니다. 나는 죽고 예수로 살아가자. 맞습니다. 우리는 이 고백을 잊지 않고, 한 번에 많은 것을 하려하기 보다. 나의 삶에서 작은 것 부터, 차근 차근 큰 것까지 내려 놓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부어주시는 대로 순종하고, 하나님 안에서 기쁨을 찾으며 살자는 것입니다.
세상 속에서 기쁨이라고, 행복이라고 말하는 것들 앞에 진지하게 고민하고, 그 것이 정말 하나님안에서 기쁨이 되는지 고민해보고, 포기할 것들 버려야 할 것은 버리며 살기를 권면합니다.
바울을 다시 봅시다. 바울을 보면, 결국 그는 그리스도의 기쁨을 노래하고, 전하다 결국 잡혀서 죽게 됩니다. 복음의 사역을 붙드는데 결국 잡히는데요. 그의 결국은 목베임을 당하여 죽습니다. 그 결과를 놓고 이렇게 생각 할 수도 있습니다. 에이 결국은 그렇게 비참하게 죽는데 그게 순종의 결과 아닙니까? 열심히 순종했더니 고난 가운데 기쁨으로 그냥 스스로를 세뇌한거는 아니가요? 라고 질문을 해볼 수 있습니다.
저는 이렇게 대답하고 싶습니다. 진정 주님을 만난 바울은 자신의 목숨이 빼앗긴 듯 보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오히려 그는 죽음을 죽이신 , 다시 한번요 "죽음을 죽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를 안고 진정한 생명을 가지며 이 땅의 사명을 다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아마 하나님의 크심과 영생을 누린다는 것이 무엇인지 너무 잘 알았기에 이 땅에서 받는 고난이 혹은 그 고난 중에 순종하는 것이 기쁨이 되었지 않았을까 합니다.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 진정 알았던 바울은 이 땅에서의 고난이 주어졌을 때 힘들었지만 소망을 잃지 않을 수 있었고, 기뻐하며, 그 기쁨을 다른 모든 신자에게까지 전할 수 있었던것입니다.
오늘 설교를 마무리 하려고 합니다. 오늘 서두에 저는 기쁨이라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기쁨의 끝 아니 쾌락의 끝인 마약에 대해서 이야기 하였습니다. 그런 마약 뿐 아니라 세상의 기쁨은 유한하고, 그런 큰 기쁨 쾌락이라 여기는 것에는 항상 공허함이 남는다 하였습니다. 이에 비해 하나님 앞에서 순종안에서 기쁨은 고난을 받기도 하고, 때로는 자신의 것을 포기도 해야 하지만, 그래서 어렵고 고되지만, 그 기쁨은 진정한 기쁨으로 영원한 생명을 보상받으며, 공허하지 않는 진짜 기쁨이, 진짜 기쁨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오늘 설교를 마치려고 합니다. 그런데 마치기 전에 잠시 저의 간증이라기엔 부끄럽지만 저의 삶을 나누려고 합니다. ㅎㅎ
저는 어릴적에 정말 가지고 싶던게 있었습니다. 제가 중학교를 다닐 시즌이었는데요. 그때 당시 아이폰이란게 막 등장했습니다. 그때는 3gs부터 그 다음에는 4가 나왔는에요. 너무 이쁘고, 그 당시 스마트폰이란게 거의 처음 보급되어서, 너무 신기하고 2g폰으로는 상상도 못한 게임도 할 수 있고, 인터넷도 할 수 있는 그 작은 기기가 정말 너무 갖고 싶어서, 어머니께 말씀을 드렸습니다. ㅎㅎ 그런데,,,당연히 그 당시 중학생이 사용하기엔 너무 비싼가격이기도 했고, 어머니는 이거 사주면 공부 안하고 이 것만 붙잡고 놀줄을 아셨는지 절대 사주시지 않았습니다. ㅎㅎ
그런데 저는 지금 아이폰을 씁니다. 결국 성인이되어서 어머니께서 선물로 해주시는데요. 저는 그 때 이런 감정을 느꼈습니다. 정말 원하던 1-2년도 아니고 중학교때 부터니까 적어도 4년 정도를 정말 애타게 갖고 싶던 그 폰을 드디어 얻었는데 음,,,, 신기하게 하루 이틀이 지나가니까 이 것을 가진 것에 기쁨은 점점 흐려져가고, 당연한 것이 되어서 그냥 점점 그 기쁨이 얼마 가지 않는 것을 느꼈습니다.
참,,,, 별거 아닌 이야기이지만, 저는 아이폰 말고도 다른 것들을 갈망해보고 얻어보기를 반복하면서,,, 아 결국 진짜 계속 기쁘고 가지기 전에 느꼈던 그 갈망만큼 얻었을때 기쁨이 지속되어서 나를 항상 기쁘게, 만족케 해주는 것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가 22살에 예수님 앞에 회심하게 되었는데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경험하게 되었는데, 하나님을 진짜 만나니까, 앞서 제가 얻었던 그 어떤 것 보다 제가 만족되고, 나의 갈망이 갈증이 끊어진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제가 저의 삶을 통해서 하고 싶었던 말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라 그럼 모든 것이 해결된다 맨날 맨날 하나님만 붙잡아라 !! 이런 것은 아니고, 정말 하나님 안에서 그 갈증을 갈망을 그 기쁨을 누리면서 이 땅에서 주어진 것들을 누리자라는 것입니다.
말이 좀 어려운데요 ㅎㅎ 쉽게 말하자면 제가 아이폰을 좋아하고 그것을 얻으면 참 기쁨을 누릴 것이라 생각했던 그 제 마음이 이제는 진정한 참 기쁨은 하나님안에서 누리는 것이라는 것을 이야기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게 주어진 삶은 그저 단순하게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분법적으로 나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며 기쁨을 누리며 사는 것은 이 세상에서 주는 기쁨 가운데에서도 가장 큰 기쁨은 주님이시구나, 그러니 다른 것은 내 뜻대로 되지 않더라도 나는 괜찮구나를 아는 것 그럼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와서 주님을 더 알기를 그럼으로 주님 뜻안에 살기를 소망하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게 필요합니다.
주님은 날아가는 새들도 먹이시는데 어찌 그의 자녀라는 우리를 버리시겠습니까. 우리 눈에 여전히 보이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크신 계획안에 그 분의 선하심을 믿기를 소망합니다.
함께 찬양하겠습니다.
본론 : 말씀 속에서 주해(주해랑 삶에서의 적용이 같이 가면 좋을 듯하다.)
결론 : 우리가 삶을 살아가면서 어떻게 말씀으로 권면을 받은대로 살 수 있을까 적용
기도하자고 하고 이야기 하면서 오늘 본 내용을 토대로 짧게 영상 이야기하기
기쁨은 어떤 현상에 대한 감정적인 반응이다. 유익한 현상에 대한 긍정적인 반응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빌립보서는 예수님을 위해 고난을 당하는 가운데 누리는 기쁨이 있다고 한다.
바울은 본문에서 자신을 희생제물로 드리면서도 기뻐하고 기뻐한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고난 중에도 기쁨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된다.
어떻게 고난이 기쁨이 되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 하나님의 은혜가 고난을 기쁨으로 승화한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위해 받는 고난위에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참된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질문 ? 우리가 받는 고난은 무엇이 있을까?
참된 기쁨은 무엇일까?
참고자료 웨스터 민스터 자료
헤아릴 수 없는 슬픔
고난에 대한 자료를 충분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