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7:2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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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면적인 크리스천이 되지 마십시오

본문을 읽고 여러분은 어떤 분위기 또는 상황이라고 느껴지시나요? 아니면 본문이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고 오늘 설교는 무슨 교훈을 주는 말씀이 있을까라고 생각하시나요? 이를 위해서 먼저 본문의 분위기를 요한 사도가 어떻게 기록하고 있는지를 설명 드리겠습니다. 혹시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요한 사도는 1장의 1-18절까지 마치 지구 창조의 역사를 요즘 유행하는 쇼츠의 빠른 영상처럼 18절 만에 빠르게 통과합니다. 그리고 2장부터 시작된 유월절을 중심하는 사건은 6장 오병이어 사건이 ‘마침 유월절'을 앞두고 행하셨다고 기록함으로 2번째 유월절까지의 시간을 보내면서 5장에서의 38년된 병자를 안식일에 고치신 사건과 하나님과 예수님을 동등하게 여기는 일로 인해 유대인들은 예수를 죽이려고 했고 지금 또 다른 명절인 초막절 즉 유월절로 부터 1년 6개월즘의 시간 속에서 한 번 지나간 사건이 아니라 ‘예수는 죽여야 할’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죠.
이런 분위기를 아셨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명절에 예루살렘으로 올라 가려 하지 않으셨고 우리는 7장 본문에서 명절 중간 즘에 은밀히 올라가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시간의 구성은 빠르게 휙휙 지나가듯이 지나가지만 2번째 유월절을 지나면서는 더 많은 장을 할애해서 요한 사도가 기록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3번째 유월절 즉 예수께서 십자가의 죽으시는 사건은 어떨가요? 앞으로 아시겠지만 더 많은 장을 할애합니다. 다시 말해서 빠른 영상으로 지나갔다면 갈수록 더 자세하게 다루는 글쓰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죠.
그런 시간의 흐름에 예수께서 7장에서의 특징은 ‘가르치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를 죽이려는 유대인들과 무리들의 다양한 예수에 대한 생각이 드러나지만 예수님 입장에서는 계속해서 ‘은밀히' 행하실 필요가 있음에도 ‘가르치신다'는 드러나는 행위로 말미암아 결국은 노출된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가르친다는 것은 왜 중요할까요? 이를 위해서는 요한 사도가 예수님의 이야기를 어떤 상황에서 전달하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요한 사도의 글을 읽는 사람들은 ad 70년 경 이스라엘이 망했고 로마의 장군 티투스에 의해 성전도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불리던 이들은 지중해의 다양한 국가로 뿔뿔히 흩어졌으며 이젠 예수와 같이 특출나게 백성를 리더해 줄만한 상황도 없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일제 강점기에 있을 때 막막하지만 그래도 북방 어디에서 독립군이 싸워 이겼다는 소식을 들으면 희망이라는 것이 생기지만 이스라엘은 로마에 거의 완전히 흡수되는 상황을 배경에 두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요한 사도가 썼다고 추정되는 에베소 지역은 제2의 로마 도시라고 불릴 만큼 로마에 충성하는 도시, 로마의 시선을 받기 위해 로마보다도 더 로마스럽게 운영되는 도시 속에서 소수의 기독교 인은 과연 어떤 모습이었겠습니까? 마치 일제 강점기 시대에 동경이나 오사카 같은 일본의 중심 도시에서 ‘조선인'이라면 어떨까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활동하셨던 시기에 사람들도 사실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들에게는 성전을 중심으로 매년 유월절이나 장막절이면 흩어진 먼 곳에서 예루살렘 즉 하나님의 성전에 나오는 길을 마다하지 않고 다녔습니다. 그곳에서 같은 의식을 치루는 자신들의 동족을 보면서 이스라엘 백성은 이런 거야하면서 자부심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렇게 그나마도 로마의 점령 초기에는 민족의 정체성을 누리며 살 수 있었고 이것을 다행이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의 등장은 혹시라도 예수 때문에 그나마 누리는 ‘성전 중심'의 이스라엘 정체성을 훼손 당할까봐 유대인들 그중에서도 정치적 종교적 엘리트 들에게는 노심초사하고 있었다는 것이죠
그럼 이런 상황은 오늘 우리에게는 적용되지 않을까요? 한 때는 큰 교회를 다니면서 많은 사람들 그리고 각종 프로그램이 마치 예수님을 열심히 믿는 것 같은 생각을 들게 했고, 어떤 때는 작은 교회지만 이렇게 하는 것이 올바른 길이라고 생각하며 소수의 사람들이 열심히 교회를 성장시킵니다. 그렇지만 서로 맞지 않아 또 다시 분열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몇 명되지 않는 예배가 어쩔 수 없는 선택인지 아니면 이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하며 바르게 하려고 하는 상황 속에서 과연 우리는 과거의 즐거움, 또는 그런 것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펴보면 우리 마음의 자세가 예배에 임하는 태도와 잘 맞는지 점검할 필요가 분명하게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상황이 로마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로마의 도시에서 성전을 중심하던 이들의 예배 의식은 사라졌습니다. 그렇게 모이는 작은 무리를 향한 요한 사도의 글은 간절했던 것이죠.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이 무엇이며, 예수를 믿고 살아가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치시는 예수님'을 통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기적을 행하시는 예수'께서 왜 그렇게 하셨는지를 기록하면서도 그보다 더 중요한 가르침에 집중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의도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앞으로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알려고 하는 분들이 찾았으면 합니다. 그렇다면 그분들 역시 ‘예수님의 가르치신 내용'에 관심을 갖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기적이 당시의 사람들에게 한편으로는 예수를 죽이고자 했고 한편으로는 예수님의 뒷 조사를 했더니 글도 모르는 사람이라고도 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어쩌면 요즘처럼 정치적인 분위기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25절에 ‘어떤 사람이 말하되 이는 그들이 죽이고자 하는 사람이 아니냐' 아마도 작년 유월절에 38년된 병자를 안식일에 고치시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신성모독자 예수를 반드시 죽여야 한다는 유대 당국자들의 프레임에 동조 또는 귀를 열고 있는 사람입니다. 한편으로 이렇게도 해석합니다. “보십시오 그가 드러내 놓고 말하는데도 사람들이 그에게 아무 말도 못합니다. 그렇다면 지도자들은 정말로 이 사람을 그리스도로 알고 있는 것입니까? 그들 역시 27절에 눈에 보이는 예수, 뒷 조사로 예루살렘에 알려진 목수의 아들 예수는 알았지만 그리스도 즉 메시아로 오신 예수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1) 기록된 예언을 통해서 2)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을 통해서 알았지만 다만 예수를 메시야요 그리스도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주장에 예수께서 28절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지금 예루살렘 성전 뜰에서 즉 유대인들이어야 들어올 수 있는 공간에서 ‘외쳐' 가르치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앞서 설명드렸던 유대인들은 모세와 율법을 들먹었지만 그들은 표면적으로만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들은 24절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는 말씀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로마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로마서 2:28 “28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여전히 오늘 우리도 여기에서 예배 드리는 그것만이 1순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인 다운 삶. 즉 하난미의 공의로움을 따라 사는 삶이 예배로 드려져야 한다는 것을 지난 시간 ‘레위기'의 구성을 통해 살펴 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임재하셔서 함께 하시는 삶은 실제로 매우 위험한 것입니다. 지극히 거룩한 하나님 앞에는 거룩 외에는 그 누구도 가까이 갈 수 없고 유일하게 대제사장만 그것도 1년에 대속죄일 딱 하루만 철저한 제사의 방식으로만 가능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제사는 임재하시는 하나님과의 관계라면 성막 밖에서의 하나님의 백성의 삶은 레위기 후반부를 가득 채우고 있다는 것을 유념해야 합니다. 백성으로 살다보니 잘못된 방식 즉 하나님의 공의로운 삶이 드러나지 못할 때 부정하게 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나름 예수 믿는 티를 내면서 주위도 좀 돌아보면서 아파하는 이웃을 기억하면서 그리고 힘들고 어려운 이웃을 향해 기부도 좀 하면서 살아도 우리 속에서는 미워하는 감정도 들끓고, 손해보면 욱하는 마음도 들고 그래서 말도 삐뚤게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하는 행동만 봐도 미워하는 사람이 있고, 어떤 경우에는 그보다 심하게 다투고 살아가면서 상처를 받기도 주기도 한다는 것입이다. 그런데 거룩한 영역이 아닌 속된 세상의 영역에서는 술 한잔 마시며 이랬다, 저랬다 하면서 자신과 이웃의 관계를 풀어냅니다. 나쁜 것은 아니지요 하지만 그들의 풀어내는 방식은 ‘너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먼저 ‘나와의 관계' 즉 하나님과의 관계를 먼저 풀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거룩한 영역과 속된 영역의 차이이며 그리스도인들과 비그리스도인들의 차이입니다. 삶에서 하나님의 동행하심을 인정하는 것, 그러면서 나의 나됨이 내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서 전이되어 표면적인 유대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를 삶으로 살아내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표면적'이지 말고 ‘공의롭게' 행하시는 모습을 가르치고 계시는 현장입니다. 그렇게 예수께서 외쳐 가르치신 것이 ‘나를 보내신 이’의 뜻입니다. 이런 뜻이 ‘레위기'라는 제사와 삶에 그대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걸 줄여서 우리가 흔히 말하는 ‘공의로운 삶, 정의로운 행동'이라고 하는 것이죠. 관계 속에서 부부에 대하여, 자녀에 대하여, 이웃에 대하여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하나님의 뜻을 예수께서 ‘표면적인 유대인'들 그리고 정치적으로 현실을 보는 이들에게 ‘가르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주 특별한 말씀으로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우리도 흔히 사용하는 ‘때’는 무엇입니까? 인간만이 ‘때'를 압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정확하게 흐르는 시간과 달리 ‘때'라는 시간의 개념을 갖고 있다는 것이죠.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이 바로 그 때를 의미합니다. 그 사건으로 인해 인류는 전혀 다른 세계를 맞이 합니다. 제사장만이 그것도 일 년에 딱 하루만 열고 들어가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막고 있는 휘장이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찢어 지는 사건은 이제 누구라도 예수의 이름을 힘입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되는 때의 시작입니다. 우리는 유행가처럼 ‘거룩'을 외치며 경망스러울 정도로 ‘거룩'을 부르지만 그럼에도 그만큼 예수의 이름이 힘있어 그보다 더한 것도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쉽게 부르고 찾을 수 있다고 해서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신 ‘때'의 가치는 결코 흔하거나 저렴한 것이 아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고 있다고 31절에 말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표적의 숫자 즉 세상이 말하는 능력을 중심으로 예수를 보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한 가지 사건 또는 사실 등에 대해 다양한 의견을 내고 이런 사람, 저런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런 다양성은 교회도 마찬가지 입니다. 사람이 모이는 곳이라면 여지없이 서로 다른 생각의 사람이 있기 마련입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말인들 무슨 말이라도 못하겠습니까' 그러나 믿음은 그렇게 말이 된다고 해서 이 말, 저 말을 해서 논리를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의 이름을 힘입는 것이 믿음이며 그러기 위해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하기 위해 기록한 것입니다. 무리들은 표적을 보았고 표적의 많음을 보았습니다. 다만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아직까지 믿는 자로 있을 뿐입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앞으로 어떤 어려움이 다가올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때론 사고로, 병으로 인해 우리 믿음이 송두리째 흔들릴 때도 올 것입니다. 아니면 알 수 없는 그 무엇이 우리의 마음에서 믿음을 빼앗아 갈 것입니다. 가룟 유다의 마음에 벌써 시작된 것을 알고 있지 않습니까? 저들 즉 32절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말 그대로 특권층입니다. 종교적 특권은 정치적인 힘까지 갖고 있었고 그들은 아랫사람 즉 성전을 수호하기 위한 일종의 사병을 거느리는 특권을 가진 자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보내어 예수를 잡으려 했습니다. 예수는 아셨고 자리를 떠나시지만 자신의 떠남 즉 십자가의 죽으심을 담아서 아직은 아니며 33절 ‘조금 더 있다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자신을 잡으려는 상황에서 떠나면서 아직은 떠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표현을 ‘아이러니'라고 합니다. 말 장난하듯 떠나는 데 아직은 떠나는 것이 아니지만 떠날 것이고 떠나는 곳에 지금 자신을 따르는 많은 사람들에게 오히려 떠나는 곳에는 따라 올 수 없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죠. 우리는 이미 예수께서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다시 하늘로 오르사 하나님 우편 보좌에 계심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우리는 ‘다시 오실 예수'를 그때의 그들처럼 바라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온다'라고 말하시면서 아직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너희와 같이 있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라고 하시는 것이죠. 당연히 요즘 표현으로 ‘이게 뭔 말이야'할 것입니다. 그렇게 느껴지십니까? 그들은 그래서 34-36절까지 자신들의 해석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아 이제 예루살렘을 떠나는 구나, 이제는 흩어져 사는 헬라인들을 가르치겠구나라고 말이죠. 요한 사도는 우리가 그렇게 예수를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여전히 우리는 성령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으면서도 감각적으로 우리를 이끌고 무엇인가 당기는 듯한 느낌을 제시받기 원합니다. 타고 가던 버스가 갑자기 멈춰서 이상하게 생각할 때 앞에서 큰 사고가 일어나 기적적으로 일어난 일이라고 말하길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 사도는 계속해서 37절에도 ‘외쳐 이르시되'라고 말씀하시면서 가르치시는 예수님께 집중합니다. 여러분 편식하지 말라는 말을 듣는 아이가 건강하게 자라고 일찍자고 일찍 일어나라는 말을 듣고, 양치를 잘 하라는 가르침을 따르는 자녀가 건강을 지키는 것이며 주위 사람들 따라 집을 사거나 팔아서 이익을 챙기거나 사회의 부조리를 보면서도 모른 체하면서 자기 살 궁리만 하는 부끄러운 어른으로 살면 안된다는 가르침에서 벗어났기에 우리 사회는 지금 고통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적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 믿는 사람이 많았을 때 ‘외모가 아니라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각자도생의 시대를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에베소에 있는 소수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으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살아내신 하나님의 아들의 가르침을 따라 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래서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참되신 분'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그렇게 살아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으로 불려야 하는 것이지, 교회에서 예배를 드린다고, 주일에 교회에 간다고 그리스도인으로 불려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결국은 유대인, 무리, 어떤 사람 중 하나에 속할 뿐 예수에 속한 사람이 되지는 않는 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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