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로새서 3장 12-17절 “벗어 버릴 것과 덧 입을 것”/ 찬 41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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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 서신서의 말씀은 성탄절 후 주일에 뿐만 아니라 다가오는 새해를 준비하 는 송년 주일을 사는 성도들에게 전해주는 소중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골로새 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옛 자아가 죽고 이제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는 사실을 강 조하면서 주어진 말씀으로 벗어 버려야 할 옷과 새로 입어야 할 옷이라는 이미 지를 통해 말씀이 제시된다. 본문 바로 앞에서는 벗어 버려야 할 것이 5~9절에 서 제시되고, 10~17절에서는 새로운 존재가 덧입어야 할 것들을 제시한다. 이 것은 마치 세례식에서 물에 잠기는 세례를 받기 위하여 물에 들어갔다 세례를 받고 물에서 나올 때 새 옷을 입혀 주는 이미지를 연상하게 한다. 이제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되었고, 거룩하게 하시고 사랑받는 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택하심은 우연히 된 것이 아니라 창 세 전부터라는 말씀에서 우리는 깊은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게 된다. 여기에 서 옷 입어야 할 것은 긍휼, 자비, 겸손, 온유, 오래 참음 등의 내적 차원이 제시 된다. 이러한 것은 지녀야 한다는 의미뿐만 아니라 옷은 남의 눈에 보여지는 것처럼 그러한 성품이 온전히 드러날 수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이러한 다섯 가지 의 덕목은 이제 구체적으로 적용이 제시되는데, 겸손, 온유, 오래 참음은 용납으 로 나타나야 하며, 긍휼, 자비는 용서하는 자세로 나타나야 한다. 이 모든 덕목과 실천을 완전하게 하는 것은 사랑이다. 이것은 모든 삶과 덕의 실천에 있어서 근 간이 되기 때문이다. 사랑의 마음이 있으면 이 모든 것은 가능해지는 요소로 이 해할 수 있다. 이것을 보존해 주는 요소는 그리스도의 말씀과 평강이다. 말씀이 풍성하게 거할 때 이 모든 것은 가능해지며, 평강이 우리 마음을 다스리게 될 때 그것은 우리에게 유익이 될 수 있다. 말씀은 모든 것의 능력이며 원동력이 된다.
12~16절의 결론으로 17절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는 자 세가 필요함을 알려 준다. 윤리적인 명령들의 중간에 나타나는 예배와 관련된 말씀들이 삽입되고 있다. 온갖 지혜로 서로 가르치고 권고하며, 감사한 마음과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하나님을 예배할 것을 권고한다. 그리스도인 공동 체는 이 땅에서 어떠한 삶을 사느냐 뿐만 아니라, 어떠한 예배를 드리고 있느냐 로 그 질이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끼리의 상호관계뿐만 아니라 공 동체가 어떻게 찬양하고 예배하는 삶을 사느냐가 중요하다. 본문에는 감사하는 삶이 세 번 언급되고 있는데(15, 16, 17절), 아마도 독자들이 그것을 은연중에라도 외면하지 않게 해준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미 허락하신 은혜를 깊 이 기억하고 감사의 삶을 사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질을 결정해 주는 중 요한 요소가 된다. 감사하며 사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택한 백성으로, 거룩하게 함을 입은 사랑받는 존재들로 계속해서 서갈 수 있도록 해준다.
말씀에로 나아감
언젠가 어느 가정의 이야기를 글로 읽은 적이 있다. 그 부부는 처음부터 서로 성격이 워낙 맞지 않아 늘 티격태격하기 일쑤였다. 아이들을 키울 때는 그래도 좀 나은 편이었지만 아이들이 장성한 후 둘만의 시간이 많아지자 걸핏하면 말 다툼하는 일이 많아졌다. 남들은 ‘제 2의 신혼’ 어쩌고 하는데 그 집은 정반대로 치달았다. 아내는 남편의 일거수일투족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남편은 아내 의 잔소리와 유별나게 따지는 성격에 죽을 맛이었다. 취미도 너무 달랐다. 남편 은 술과 담배, 커피 아니면 잠자기 등 아내가 싫어하는 것만 골라서 했다. 아내 는 학교 선생님답게 지성이 풍기기를 원했건만 어깃장만 놓는 남편에 정나미가 떨어졌다. 한번 밉게 보기 시작하니 연애할 때에는 마음에 들던 넓은 이마나 잘 생긴 코까지 보기 싫었다. 아이들과 주변의 눈이 있어 갈라서기도 쉽지 않은 상 황이라 그저 속앓이만 하면서 ‘한 지붕 두 가족’으로 살고 있었다. 주변에서는 혹시 저러다 진짜로 이혼하는 것은 아닌가 염려도 했다.
그런 부부가 언제부터인가 확연히 달라졌다. 등산을 같이 다니는가 하면 서 로의 취미도 존중해 주기 시작했다. 남편에게 ‘비결’을 물었다. “앞으로는 여자 들 말만 잘 듣기로 했다.”는 답이었다. “여자들이라니?” 하고 물었더니 한 사람 은 아내이고, 또 한 명은 내비게이션에서 길을 안내하는 ‘내비 걸’이란다. 어떻 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니까 아예 좌우명을 “당신 말이 맞소.”로 정했단다. 뭔가 비위에 맞지 않아 화가 날 때에도 얼른 “당신 말이 맞소.”라고 하고 나면 모든 것이 풀린다는 것이다. 아내 역시 남편의 눈부신 변화에 동참, 남편의 언행 이나 주장이 마음에 안 들어도 곧잘 “당신 말이 맞소.”라며 맞장구를 친다는 것 이다. 그 말만 하면 둘이 얼굴을 맞대고 웃어 버린다고 한다. 상대방 말이 정말 옳지 않을 때에는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더니 그럴 경우에는 “그건 당신 말이 틀 린 것 같소.”라고 말하며 토론으로 합의점을 찾는다고 한다.
간단한 이야기이지만 가정생활, 인생도 어떤 마음 자세를 갖느냐에 따라 달 라진다. 어떤 생각으로 옷 입고 사느냐에 따라 그 결과는 완전히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인은 구원받았다라는 사실도 중요하지만 구원받은 이후에 어떻 게 삶을 사느냐는 더욱 중요하다. 성탄절을 보낸 것도 중요하지만 성탄의 축복 을 받은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문제는 그 삶을 살아냄에 있어서 어 떤 자세를 가지고 살 것인가가 중요해진다.
본문 이해와 주안점
오늘 말씀은 하나님의 은혜로 택함 받은 백성들이 혼탁한 세상에서 어떻게 살 것인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인지에 대해 깊은 권면을 주고 있다. 노 사도는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 믿음을 지키고 있는 골로새 교인들에게 우리가 받은 은혜에 대해 깨닫게 해준다. 우리가 어떤 은혜를 받았는지, 그리고 우리 가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지에 대해 깨우쳐 준다. 그래서 오늘 말씀은 ‘그러므로’로부터 시작된다. 우리는 새사람을 입었고 우리를 창조하신 분의 형 상을 따라 지음 바된 존재이며, 그분의 형상을 따라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이기 때문에(10절) ‘그러므로’ 우리는 살아내야 할 삶이 있다는 것이다. 본문은 그리 스도인을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고 거룩한 자가 되어 하나님의 사랑받는 존재 가 된 사람”으로 규정한다. 그리스도인과 그 공동체인 교회의 구별성이 12절 전 반부에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 그들이 얼마나 특별한 존재들인가를 새롭게 기억할 수 있게 해준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이 며, 거룩하게 된 백성들이요, 사랑받는 존재들임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본문은 도덕적인 교훈을 전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선택받은 이 특별 한 그룹들에 대해서 증거하고 있다. 택함 받은 특별한 신분의 사람들의 삶이 어 떠한가를 중간에 삽입하여 보여 준다. 이 삽화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주시는 명 령과 연결지어서 보여지고 있으며, 삶의 광범위한 영역을 다루고 있다. 윤리적 인 명령으로 보여지는 이 말씀은 택함 받은 사람들의 삶의 내용임을 강조한다.
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시는가?
1.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벗어 버려야 할 것이 있다고 말 씀하신다(5-9절)
덧입기 위해서 먼저 내려놓아야 할 것이 있고 벗어 버려야 할 것이 있다. 옷 을 갈아입으려면 더러워진 옷을 먼저 벗어야만 한다. 오늘 본문 바로 앞부분에 서 먼저 벗어 버려야 할 것의 목록을 상세하게 제시해 준다. 음란과 부정, 사욕 과 악한 정욕, 탐심 등을 벗어 버려야 한다고 말씀한다. 이것은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일 때만 가능해지는 일이다(5절). 이러한 것의 결과는 하나님의 진노이다. 그것은 옛사람의 습관이었으며 세상 문화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내용이다. 성 경은 벗어 버려야 할 목록으로 이어서 분함과 노여움, 악의와 비방, 입의 부끄러 운 말과 거짓말을 추가하고 있다(8-9절). 이것은 옛사람의 행위라고 규정한다. 이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에 걸맞게 자 신을 성화해 나가야 할 영적 차원이며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덧입기 위하여 반드시 주어져야 할 전제조건이기도 하다. 그래서 플라벨은 이렇게 노래한다.
하나님이 한 영혼을 채우시려 할 때는 먼저 그것을 비우신다 하나님이 한 영혼을 부요하게 하시려고 할 때는 먼저 그것을 가난하게 하신다 하나님이 한 영혼을 높이시려 할 때는 먼저 그것으로 하여금 자신의 비참과 결핍과 무를 느끼게 하신다 그에게 의존해서 지혜를 구할 만큼 어리석고 그의 힘으로 덧입어야 할 만큼 연약하고 하나님의 명예 외에는 아무 명예도 없을 만큼 낫고 그분의 발 앞에서 먼지 속에 있을 만큼 멸시받고 하나님이 모든 것이 되실 만큼 아무것도 아닌 자……
여기에서 벗어 버려야 할 것으로 제시하는 내용은 교회를 무너뜨리고, 공동체 와 인간관계를 허무는 것들이다. 이것은 모임과 사람들 사이에 틈을 내어 사탄 이 자리잡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 그래서 초대교회는 아예 세례식에서 사탄의 자리와 역사를 아예 거부하는 순서를 넣기도 했다. 내가 거부하지 않으면 그것 은 자연스럽게, 슬그머니, 은밀하게 들어와 자리를 잡기 때문이다.
세상의 잘못된 문화에서 비롯된 것들이 많이 있다. 그 중에서 욕을 예로 들어 보자. 어렸을 적 시골에서 자랄 때 보면 욕을 참 많이 하고 들었던 기억이 난 다. 부모들이 자녀를 향해, 친구가 친구를 향해, 이웃이 이웃을 향해 참 많은 욕 을 하는 것을 들었다. 참 감사했던 우리 부모님은 그렇게 무지막지한 욕을 우리 에게는 많이 하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급살 맞을 놈아, 염병할 놈아, 쳐죽일 놈 아……. 이런 욕을 자녀들에게 서슴없이 퍼붓는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이 어떻 게 온전하게 자랄 수 있겠는가? 요즘 청소년들 사이에서 참 많은 욕들이 사용되 고 있는데, 최근 통계에 의하면 청소년들의 욕을 사용하는 비율은 73.4%(남학생 77.6%, 여학생 68.9%)나 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세 명 중에서 두 명, 세 마디 중에서 두 마디는 욕으로 채워진다는 말이 된다. 일전의 한 방송 프로그램에 의하면, 공 부도 잘하고 친구들에게도 인기가 많은 중3 청소년 학생이 하루에 백 번을 넘 게 욕을 하고, 여고생의 경우에도 약 50분 동안 무려 250번이나 욕을 주고받는 사례가 조사를 통해 밝혀졌다. 친구들끼리 욕을 사용하지 않으면 오히려 친하 다는 느낌이 떨어지고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 요즘 청소년들이 욕을 하 는 이유라고 하니 현대 문화에서는 벗어 버려야 할 것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동아대 강기수 교수는 『석당논총』(50집)에 욕의 유형을 4가지로 정리하는데, 쌍욕, 방귀욕, 익살욕, 채찍욕 등이 그것이다. 공격적이고 파괴적인 인간 본능이 그대로 표출되는 쌍욕에는 “개 같은 놈, 아작아작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놈, 제 기랄, 운수치고는” 등의 욕이 있다. 비아냥거림과 조소가 주를 이루는 방귀욕에 는 “이 팔자 더러운 년, 차라리 콱 뒤졌으면, 망할 놈의 세상하고는……” 등과 같은 표현으로 서민들의 억울한 감정을 배출하는 기능을 해왔다고 설명한다. 애칭과 유희의 익살욕에는 “야, 이 문둥아, 니 잘 있었나, 지랄 방구 쌈 싸먹네” 등이 있는데 이들 욕은 기발한 비유법을 사용해 일종의 언어유희에 가깝다. 꾸 지람과 차별의 채찍욕에는 “돼지같이 처먹기만 하는 놈, 오줌에 씻어 똥물에 튀 길 놈” 등을 사례로 들며 하지 말아야 할 욕이라기보다는 듣지 말아야 할 욕이 라고 규정했다. 욕은 스트레스 해소, 사회질서 유지, 친밀감 증대, 집단 결속 등 긍정적 기능도 많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을 깊이 파고들면 인격을 무시하고 흠집 을 내어 상처를 주는 말들임에는 틀림이 없다.
2. 주님께서는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이 옷 입어야 할 것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12-14절)
벗어 버리는 행동도 필요하지만 보다 적극적으로 옷을 덧입지 않으면 그것은 완성되지 않는다. 그래서 오늘 말씀은 벗어 버려야 할 것을 먼저 제시한 다음에 덧입어야 할 것을 구체적으로 제시해 준다.
5절에 나타나는 5가지 악덕과 연결해서 12절 후반부에는 5가지의 덕목이 묘 사된다. 이러한 덕목들은 그리스도인 된 사람들은 옷 입듯이 지니고 있어야 한 다고 강조한다. 13절에 나타나는 바와 같이 ‘용서’는 하나님의 속성이기에 하나 님의 백성들도 지녀야 할 속성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일회적인 뜻보다는 계속 해서 지니고 있어야 할 특성으로 설명한다. 13절의 시제도 일회적인 뜻보다는 계속적인 뜻을 담고 있다. 단 한 번의 용서가 아니라 하나님처럼 계속해서 용서 하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시며, 자비로우시고, 겸손하시며, 온유하시고, 오래 참으심과 같이 하나님의 그러한 은총을 받은 사 람들도 이제는 하나님의 속성을 닮아가야 한다.
그 목록으로는 긍휼, 자비, 겸손, 온유, 오래 참음, 용납, 용서 등이 제시된다. 이것은 모두 내면적인 것으로 우리 내면을 그러한 것으로 채워야 한다는 말이 다. 세상은 온통 자기 잘난 맛으로 살고 자기 자랑으로 살지만 그리스도인들은 늘 겸손해야 한다. 어려운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만 한다. 오래 참음과 용납의 정신이 약해지면 아무리 예수님의 보혈로 세워진 공동체라 할 지라도 허물어질 수밖에 없다. 오늘 한국교회 속에 필요한 덕목이 이러한 것들 이 아닌가? 교회에서 이런 덕목은 점점 약해지고 세상적인 가치관과 덕목들이 공동체를 사로잡고 있다.
기술 문명의 발달로 현대 사회는 수많은 문명의 이기와 함께 삶의 편리성과 윤택을 누리게 되었지만 비인간화, 생태계 파괴, 생명 경시 등 새로운 위기를 양 산하고 있다. 개인주의의 발달로 공동체성과 도덕성이 상실되고 전통 가치관들 은 흔들리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새로운 윤리 체계의 모색의 필요성과 함 께 제시된 것이 ‘덕의 윤리’이다. 이것은 선하고 올바르며 덕스러운 것을 행한다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덕의 전통의 회복이라는 차원이 강한데, 행위 중 심보다는 행위자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즉, 나는 무엇을 행할 것인가가 아니라 나는 어떤 인간이 되어야 하는가의 문제가 중요한 이슈가 된다. 덕의 윤 리는 내가 되어야 할 인간이 되어 그러한 방식대로 행복하면 된다. 맥킨타워나 스탠리 하우어워스는 바로 내가 무엇을 말하는가보다는 내가 무엇이 되어야만 하는가가 더 중요하면서 행위자 중심의 윤리에 강조점을 둔다. 성품의 형성과 변화 및 성장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지금 한국교회에 필요한 것은 골로새 교회 와 같이 이런 성품의 변화에 초점을 맞춘 목회가 이루어져야 한다.
3. 주님께서는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인은 말씀과 하늘의 평화로 삶의 원동력을 삼아 야 한다고 말씀하신다(15-16절)
말씀은 그리스도인을 움직이는 원동력이 된다. 말씀이 있으면 방향을 잃지 않 게 되며 영적 부요함을 누리게 된다. 그래서 골로새 교회를 향한 권면은 “그리 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며…….”였다. 말씀이 풍성해질 때 그리 스도인다운 삶은 넉넉하게 살아지기 때문이다. 말씀은 우리 영혼에 활력을 가 져다준다. 말씀이 들어가는 곳에는 메마른 영혼이라 할지라도 소생하게 되는 말씀은 생명이다.
무신론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본래 독실한 기독교적인 성장 배경을 가지 고 있었는데 “내가 예수를 믿을 필요성을 느끼지 않은 이유는 그들의 생활에서 기쁨을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평생 아프리카 선교를 위해서 헌신 했던 슈바이처는 현대 그리스도인을 이렇게 비유했다. “아프리카에는 물 없는 강이 많다. 모래 언덕 사이로 겨우 명맥을 유지하며 흘러가는 강물을 보면 강이 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민망할 만큼 초라하고 비참하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도 물 없는 강처럼 억지로 흘러가는 신앙생활, 메마른 정신, 형식과 전통만 겨우 유 지하는 교회를 많이 본다.” 이러한 메마름은 나도 죽게 하고 이웃도 죽게 하며 교회도 죽게 한다. 이런 메마름에 대한 유일한 대안은 하나님의 말씀이 내 속에 생동적으로 살아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15절은 그리스도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게 하라고 말씀하신 다. ‘지배한다’는 말의 원어는 신약성경 중 오직 여기에서만 사용되는 단어로, 심판관이 경기에서 우승자를 결정짓는 동작에 사용하는 단어였다. 그리스도의 평화는 어떤 경기를 펼쳤는지를 체크해서 우승을 선언해 주는 심판관과 같이 우리들의 삶을 승리로 이끌어 주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인생을 살다보면 크고 작은 문제로 시달리다보면 마음이 번잡해지고, 몸은 무 거워지며, 기쁨은 상실하게 된다. 감격도 없이 기계의 부품처럼 움직이지만 그 안에 생명의 환희는 자리잡지 못한다. 기쁨과 솟아오름으로 시를 쓰고 있다는 시인 정현종은 늘 ‘싹’이나 ‘샘물’이나 ‘날개’처럼 가볍게 떠오르는 것들을 찬양 한다. 그래서 그는 “마음이여 몸이여 무거운 건 얼마나 나쁜가”라고 노래하기 도 한다.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은 일상의 삶 가운데서 늘 느끼는 것이지만 무거 워지면 가라앉는 것이기에 그것은 나쁜 것이다.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도 마찬가지로 경험하는 바이 다. 삶의 환경은 늘 기뻐하면서 살 수 있도록 허락하지 않고, 삶의 무게는 늘 힘 들게 우리를 짓누른다. 그러나 하늘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과 영혼을 사로잡으 면 어떤 자리에서든 우리는 승리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말씀은 우리에게 권면 한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또한 우리가 즐겨 부르 는 찬송은 그 사실을 알려 주지 않던가? “이 땅 위의 험한 길 가는 동안 참된 평 화가 어디 있나/ 우리 모두 다 예수를 친구 삼아 참 평화를 누리겠네/ 평화 평화 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덮으소서.”
말씀의 갈무리
우리는 성탄의 축복을 온몸으로 느끼며 경배하고 찬양하였던 성탄절을 보내 고 그 첫 번째 주일에 서 있다. 뿐만 아니라 한 해를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서 살고 송년 주일을 보내고 있다. 수만 가지의 은혜를 입고 여기까지 이르렀는 데 은혜를 받은 사람으로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우리는 자주 잊고 살 때가 참 많이 있다. 그래서 벗어 버려야 할 것을 버리고, 채워야 할 것으로 채워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이끌려 살지 않는 한 충만한 사람으로 넉넉히 서갈 수 있 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렇다. 그 은혜를 기억하는 사람에게는 살아내야 할 삶이 있고, 반드시 수행 해야 할 사명이 있다. 아무리 힘들어도, 답답해도 잊어버리지 말아야 할 것이 있 음을 기억하자. 세상의 어디를 향해서 걷든 나는 그 여정이 내 삶의 중심이신 그 분을 향해 있게 하자. 영남대 교수를 지낸 이기철 시인이 은퇴하면서 쓴 시로 알 려진 “자주 한 생각”이라는 시가 떠오른다.
내가 새로 닦은 땅이 되어서/ 집 없는 사람들의 집터가 될 수 있다면 내가 빗방울이 되어서/ 목 타는 밭의 살을 적시는 여울물로 흐를 수 있다면 내가 바지랑대가 되어서/ 지친 잠자리의 날개를 쉬게 할 수 있다면 내가 음악이 되어서/ 슬픈 사람의 가슴을 적시는 눈물이 될 수 있다면 아, 내가 뉘 집 창고의 과일로 쌓여서/ 향기로운 술이 될 수 있다면
우리는 그냥 살아서는 안 되는 존재이다. 우리는 보냄을 받은 존재요, 우리 주 님의 상급을 바라보며 달려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주저앉 아서도 안 되고, 누군가에게 힘이 되어주고 눈물을 닦아 주어야 하며, 누군가를 웃게 하는 사람으로 나아가야 한다.
어느 나라의 왕이 사냥을 나갔다가 울퉁불퉁한 자갈길에서 잘못하여 넘어져 발에 상처가 났다. 화가 난 임금은 발을 보호하기 위해 온 나라의 길이란 길에는 모두 소가죽을 깔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때 현명한 신하 하나가 황급히 달려와 말했다. “폐하, 발을 보호하려면 작은 가죽 두 장이면 충분하옵니다. 가죽을 폐 하의 발에 붙이면 온 나라가 다 가죽 아래 있사옵나이다.” 왕은 고개를 끄덕이 며 자기의 발에 가죽을 붙였다. 세상을 탓하지 말고, 세상을 다 가죽으로 깔아야 만 된다고 생각하지 말고, 내 자신이 변화되면 세상은 살 만한 곳이 되며 하나님 이 다스리는 나라로 바뀌어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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