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짜리로 살아가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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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창세기 1:31(구약 2쪽)
설교제목: 얼마짜리로 살아가십니까?
31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반갑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늘 충만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 서로를 축복합시다.
‘잘 오셨습니다. 당신은 존귀한 사람입니다.’
# 축복후
저는 이 시간 설교를 준비하면서 이런 생각을 합니다. 먼저는 이 시간 예배하러 오시는 분들의 상황은 어떨까하고 말입니다. 어떤 분들은 오늘도 일터에서 열심히 일하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이 자리에 나왔을 것입니다. 또 어떤 분들은 바쁜 삶의 시간을 쪼개어 분주한 마음으로 이 자리에 나왔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분들은 약해진 몸 또는 마음을 겨우겨우 붙들고 이 자리에 나왔을 것입니다. 물론 그 외에도 제가 다 헤아릴 수 없는 여러 상황과 형편이 있을 겁니다.
한편 그러면서 또 생각해 봅니다. 앞서와 같은 상황에도 불구하고 오늘 이곳에 모여 예배하러 나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하고 말입니다. 분명 그것에도 다양한 이유가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그러나 그 다양한 이유는 결국 한 곳을 향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예배를 통해 우리가 구하고 기대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예배는 본래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입니다. 우리 가운데 임재하시고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곳에 모인 우리는 하나님을 뵈옵고자하는 목적에서 예배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우리가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처럼 얼굴을 마주하고 악수하고 대화하며 친교를 나누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마주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태양을 마주하는 것과 같아서 우리는 차마 그분을 마주할 수 없습니다. 자칫 우리는 그분 앞에서 소멸해버릴지 모릅니다. 또 성경은 하나님을 영이라고 소개합니다. 그분은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사람을 만나는 것과는 다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예배 시간에 하나님을 만납니까? 쉽게 말하면 그것은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 말이 더 어렵게 느껴질지 모르나 설명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경험한다고 할 때, 보고 듣고 만지고 하면서 경험하기도 하지만 그 대상에 관한 지식을 통해 경험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우리는 직접 북극이나 남극을 가보지 않았지만, 그것에 관한 지식을 영상이나 책 등을 통해 보고 배웠기 때문에 그것을 알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지 않았고 대면하지도 못하지만, 이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우리가 하는 예배를 통해 알게 됩니다. 어떤 분은 찬양을 통해 또 어떤 분은 설교를 통해 그리고 어떤 분은 예배라는 전체의 예식 과정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살아 역사하심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이른바 ‘은혜받았다’라고 종종 표현합니다.
이렇게 예배는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입니다. 오늘 저는 그것에 관계된 한 역할을 맡았습니다. 설교만이 예배에서 전부는 아니지만, 설교가 하나님을 만나는 것에 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기에 저는 이 역할을 담당함에 깊이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이 예배에 참여하시는 분들의 상황을 생각해 보고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하는 것에 맡겨진 한 역할을 잘 감당할지를 고민합니다.
그러면서 저는 오늘 ‘우리의 가치’에 관한 얘기를 나누면 어떨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도 다소 거칠 수 있지만, 이렇게 정했습니다. “얼마짜리로 살아가십니까?” 사실 약간은 도발적인 이러한 제목에는 어떤 배경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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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임목사님은 제게 종종 읽기를 권하는 책을 추천해 주십니다. 이는 제가 믿고 생각하기로 담임목사님이 후배 목사인 저의 앞날의 목회를 위해, 또한 저의 삶을 돕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라 여겨집니다. 좋은 책을 통해 앞으로의 목회를 준비하고 약점을 극복하는 성장을 이뤄서 앞으로 좋은 목회를 하고 풍성한 삶을 살라는 뜻에서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제가 어리석어서 책 읽기를 게을리하는 것에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떤 책은 한 세 번이나 권유받고 읽은 책이 있습니다. 그것은 ‘오제은 교수의 자기사랑노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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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에서 보았던 인상적인 내용 중 하나가 이러했습니다. 책의 저자인 오제은 교수는 상담심리를 공부하고 현재는 미국의 한 대학에서 이를 가르치는 교수이자 목사입니다. 그가 미국에서 공부하던 중에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리는 영성과 심리 치료를 주제로 하는 대회에 참가했었습니다. 그곳에는 기독교인뿐만 아니라, 여러 종교에 속한 분들이 모여서 영성과 심리 치료에 관해 다양한 토론을 벌이는 곳이었습니다.
오제은 교수는 그곳에서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며 여러 유명인사들과 명함을 주고받으며, 분주히 돌아다녔습니다. 그러던 중에 눈에 띄는 특별한 한 분을 만나게 됩니다. 분주한 자신과는 달리 느긋하게 점심식사를 즐기는 그를 보고 호기심이 동해 그와 대화를 나누고려 했습니다. 그러나 좀처럼 대화를 잘 받아주지 않는 그에게서 뜻밖에 질문을 받게 됩니다. ‘선생님은 자신이 얼마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세요? 선생님은 자신이 돈으로 따지면 얼마나 된다고 생각해요?’
오제은 교수는 이러한 질문에 마음이 상했지만, 그의 특별함에 애써 그 질문에 답을 합니다. 길게 이야기를 늘어놓다가 성경 구절을 인용하여 ‘예수님이 한 생명이 우주보다 소중하다 하셨고, 자신도 그것에 동의한다’라고 답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참 좋은 표현이라고 화답하고, 덧붙여 묻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반 푼어치도 안 되게 굴어요?’
이 말에 오제은 교수는 화가 났지만, 훗날 이 말을 통해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스스로가 자신을 천하보다 귀하다고 여기면서도 허둥지둥 유명인을 쫓아다니기에 바쁜 자기 모습을 돌이켜보니, 진정으로 스스로 자신을 천하보다 귀한 존재로 여기지 못했음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이 내용에 바탕을 두고 오늘 설교의 제목을 정했습니다. 한번 우리도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과연 우리 성도분들은 자신을 얼마짜리로 또는 얼마의 가치로 여기며 살아가고 있는지 말입니다. 저는 우리가 자신의 가치를 어떻게 매기고 살아가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이 완전히 달라지리라 생각합니다. 뒤에 좀 더 구체적으로 얘기를 나눌 것인데요. 우리가 생각하는 가치와 성경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가치는 다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우리는 신앙적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신앙 안에서 우리의 가치는 어떠한 것일까요? 이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 1. 가격과 가치는 다릅니다. >
먼저 신앙 안에서 우리의 가치를 말하기에 앞서서 우리는 이 점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가격과 가치는 다릅니다.’ 가격은 가치를 반영하기도 하지만 그렇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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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우리가 보통 마트에서 500ml 물을 산다고 하면, 낱개로 사게 될 경우는 대략 천원 정도가 될 것입니다. 물론 그보다 싸기도 하고 비싸기도 합니다. 그런데 물이 정말로 그 정도의 가치밖에 없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물이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그러니 사실 물은 우리의 삶에 굉장히 가치 있는 것입니다. 과연 500ml의 물을 천원으로 가격을 매기는 것은 물의 충분한 가치를 담고 있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이처럼 가격과 가치는 다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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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가격을 결정하는 것에는 여러 요소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상품을 만드는 것에 사용된 비용, 상품을 유통하는 것에 사용된 비용, 구매자들의 선호도, 경쟁 업체와 국가 및 세계의 경제 상황과 같은 복합적인 요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주 단순하게 말하면, 수요와 공급에 따른 원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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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약 10년 전에 제가 호주에서 잠깐 생활했습니다. 저는 거기서 제가 참 한국인임을 다시 깨닫게 됐습니다. 몸은 외국에 있지만 여전히 한국 음식을 찾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곳에서도 김치를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격이 어마어마했습니다. 찾는 사람보다 판매하는 곳이 적었기 때문입니다. 일반 마트에서는 팔지 않고 ‘아시안 푸드 마트’라는 아주 한정적인 가게에서만 김치를 팔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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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기억에 약 500g의 김치를 30불을 주었는데요. 당시 환율로 우리 돈 약 3만원에 해당되는 금액입니다. 문득 현재 우리나라에서 김치 500g은 얼마인지를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았습니다. 인터넷에서 김치 500g은 약 1만원 정도에 판매됩니다. 아마 10년 전에는 더 쌌을 테니, 적어도 3배 이상 비싼 가격을 주고 저는 호주에서 김치를 사 먹었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이처럼 판매하는 곳은 작고 사는 사람이 많은 경우에는 가격은 비싸집니다. 반대로 판매하는 사람이 많고 사는 사람이 적으면 가격은 싸집니다. 결국 가격이라는 것은 온전한 가치의 반영이 아닙니다. 가장 직접적으로는 수요와 공급에 따른 원리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물 500mL에 약 천원 정도의 가격을 가질 수 있는 것은요. 그만큼 물을 파는 곳이 많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물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그것은 더 높은 가격이 되겠지요. 그래서 산이나 사막에서 파는 물은 더 비싸지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물의 가격이 싸다고 해서 물의 가치가 낮은 것은 아닙니다. 이처럼 가치는 가격과 다릅니다.
< 2. 하나님은 우리를 존귀하게 만드셨습니다. >
이제 신앙 안에서 우리의 가치를 점검해 봅시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성경 구절을 다시 봅니다. 창세기 1장 31절의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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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31(구약 2쪽)
31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저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성경이 참 매력적인 책이라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책 읽기에 게으른 저도 방금 읽은 성경 구절은 거짓말 조금 보태서 수백 번 읽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설교를 준비하면서 아주 묘하게 이 말씀이 이전과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오는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이렇습니다. 방금 읽은 성경 구절은 하나님 창조의 여섯째 날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하나님은 6일 동안 세상을 만드시고 7일째 안식하셨습니다. 그래서 흔히 7일의 창조를 이야기하지만 사실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것은 여섯째 날 모두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읽은 성경 구절은 사실상 창조의 마침을 보여주는 구절입니다. 너무나 익숙하고 잘 아는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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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저의 눈길을 사로잡는 것이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전혀 새로운 것이 없는 이 익숙한 구절 속에서요. 저는 우리가 어떤 존재인가를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리는 존귀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존재 가치는 우리의 노력과 우리의 업적과 성과와는 무관합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께서 ‘심히 좋아’하시는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비유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저는 아직 경험이 없어서 잘 모르지만, 그런 얘기를 합니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자식’이라고 말입니다. 부모에게 자녀의 존재가 그와 같이 귀하다는 것을 뜻하는 말이겠지요. 저는 그것이 성경의 가르침과도 통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자녀가 귀한 것은요. 자녀가 부모를 위해서 무언가 특별한 일을 해 주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사실 빨가벗고 태어나 먹고 자고 싸기를 반복하는 자녀임에도 부모는 눈에 넣어도 안 아프다고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그와 같은 존재로 보고 계십니다. 우리가 특별한 무엇을 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존재 자체로 하나님은 ‘좋다’ 아니 ‘심히 좋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세상의 가치 평가에 우리가 기대어 사는 것입니다. 한번 자신의 값을 매겨보십시오. 얼마 정도 됩니까? 내가 가진 돈, 내가 가진 땅, 내가 가진 집, 내가 가진 차, 내가 받는 월급이 나의 가격입니까? 나의 가치를 그렇게 값 매겨도 괜찮습니까? 정말 내 가치는 겨우 그 정도에 불과합니까? 우리는 세상에 속고 있습니다. 당신의 가치는 결코 그렇게 작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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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우리의 목숨이 천하보다 귀하다(마 16:26)’고 가르칩니다. 또 성경은 ‘우리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한 존재(시 8:5)’라고 신에 조금 못 미치는 그만큼 특별한 존재라 얘기합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구절을 통해 우리는 본래부터 하나님이 심히 좋아하시는 존귀한 자임을 성경은 증언합니다.
< 3. 존귀한 자로 살아가십시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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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금이 비싼 이유를 아십니까? 저도 인터넷을 뒤져보다가 알게 된 것인데요. 금은 초신성이라고 불리는 거대한 별이 폭발하면서 핵융합 과정에서 발생하는 금속이라고 합니다. 쉽게 말하면, 지구는 스스로 금을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태양보다 큰 별이 폭발해야 금이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금은 우주에 떠도는 먼지 같은 금이 지구의 중력으로 떨어져서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아주 단순하게 말해서 금이 비싼 이유는 그 수가 적기 때문입니다.
한편 가치라는 것은 그 숫자의 많고 적음에 관계되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적을수록 가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가 존귀한 이유 중 하나가 이것임을 생각합니다. 인간이라는 집단을 놓고 보면, 우리 숫자는 결코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개인이라는 존재를 놓고 보면 우리 각자는 유일무이한 존재임이 틀림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각각 개성을 부여해 주셔서 우리는 서로 다른 취향과 생각을 하고 살아갑니다. 심지어 쌍둥이와 같이 외형이 닮은 존재도 서로 좋아하는 것이 다르고 자신만의 세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아주 귀하고 특별한 존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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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가장 비싸게 팔린 그림을 아십니까? 이 또한 인터넷의 도움을 받아서 알게 되었습니다. 1505년 무렵에 그려진 ‘살바토르 문디’ 우리말로 ‘구세주’라는 작품입니다. 2017년 11월 15일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4억 5천만 달러, 우리 돈으로 약 4,800억 원에 팔린 그림입니다. 저는 이 그림이 왜 이렇게 비싸게 팔렸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제가 추측하고 그나마 이해되는 것은 이렇습니다. 이 ‘살바토르 문디’라는 작품을 그린 화가가 그 유명한 ‘레오나르도 다빈치’였습니다.
가치를 판가름하는 또 다른 기준은 그것을 누가 만들었느냐에 있습니다. 우리가 존귀한 이유 중 하나가 또 이것임을 생각합니다. 우리를 만드신 분이 다름 아닌 신 곧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어떤 작품도 신을 능가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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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성경 구절은 ‘하나님이 지으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 바로 이 세상이 또 우리가 세상 그 어떤 위대한 이보다 뛰어난 신의 작품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옆 사람에게 말해줍시다. ‘당신은 신의 작품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제가 계속해서 우리의 가치를 논하고 있는데요. 우리는 세상의 기준에 속아서 우리의 가치를 잃어버리고 산다는 것입니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프던 자식은 이제는 근심과 염려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세상의 기준에 못 미칠까 전전긍긍하며 전심전력으로 쏟아부었지만, 아직도 턱없이 높은 세상의 기준과 벽에 부딪혀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약해진 나의 육체는 앞으로 살아갈 날은 길어 보이는데, 모아둔 재산은 없어 위태롭기만 합니다. 이러한 미래의 불안이 나를 위축시키고 자신을 보잘것없고 초라하다 여기게 만듭니다.
정녕 그것이 우리의 가치입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의 기준 아래 낮게 평가받고 우리의 가치는 훼손당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진짜 우리의 가치는 우리가 존귀하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성경 말씀은 우리에게 그것을 일깨워줍니다. 우리가 대단한 업적을 이뤄서가 않았습니다, 우리가 엄청난 스팩을 쌓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애쓰고 수고하지도 아무런 활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만들고서 심히 좋다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본래부터 존귀한 존재로 태어났습니다.
이제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우리의 가치로 살아갈 것인지, 아니면 세상이 우리에게 부여한 가치로 살아갈 것인지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만이 우리를 귀하다 여겨주는 것입니다. 그분께 속하여 있을 때 우리는 존귀한 자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더 이상 세상의 기준과 가치에 매여서 자신의 가치를 훼손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다시 옆 사람에게 얘기해 주십시오. ‘당신은 존귀한 사람입니다.’
제가 오늘 설교를 준비하는 마음은 이랬습니다. 이 시간 이 예배의 자리에 나오신 분들을 위로하고 싶었습니다. 아마 이곳에 모인 분들은 참으로 열심히 살아가는 분들일 겁니다. 주일 한번 나오기도 힘든 예배를 주중에 또 이렇게 나오는 수고를 아끼지 않으니 말입니다. 분명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남다름 열심을 나타내는 것일 겁니다.
저는 그분들께 말하고 싶었습니다. 혹시라도 이렇게 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미워하거나 벌하시지 않을까 걱정하고 염려한다면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당신을 만드신 순간부터 당신을 귀히 여기셨습니다. 심지어 당신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도 하나님은 마치 부모가 그 자식을 귀히 여기듯 우리를 존귀하다고 여겨주십니다.
물론 그렇다고 수요일 예배에 나오지 말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우리가 이 예배를 참여할 때,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아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은 결코 세상의 기준으로 당신을 평가하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당신이 주님의 길에 서 있다면 당신을 ‘귀하다, 말씀하십니다.’ 오늘 그것이 주님의 위로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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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다시 묻습니다. ‘얼마짜리로 사시렵니까?’ 이제 그 질문에 스스로 답해 보십시오. 바라건대 저는 우리 성도분들께서 하나님의 가치 기준을 따라 살아가길 간절히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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