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까지 힘쓸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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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요한복음 13:1(신약 170쪽)
설교제목: 마지막까지 힘쓸 일
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반갑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늘 충만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 서로를 축복합시다.
‘잘 오셨습니다. 당신은 소중한 사람입니다.’
# 축복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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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12월이 되었습니다. 2023년도 마지막에 이른 것입니다. 저는 12월을 맞이하며 마지막에 관해 생각해봅니다. 가깝게는 이 설교문을 작성하며 오늘 예배를 잘 마치게 될지? 또 오늘 하루를 잘 마치게 될지를 생각하고요. 또 올 한 해를 돌아보면서 최선을 다해 잘 살아 냈는지, 후회는 없는지를 돌아봅니다. 멀게는 제 인생의 마지막을 떠올려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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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저는 주님의 심판대 앞에서 어떤 판정을 받게 될까요? ‘잘했다 충성된 종아’라고 칭찬받으면 좋으련만, ‘내게서 떠나가라 내가 너를 알지 못하노라’하고 책망받으면 끔찍할 것 같습니다. 어떻습니까? 우리 성도분들은 인생의 마지막 또 올해의 마지막 앞에서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하나님은 우리 각자에게 어떤 말씀을 해주실 것 같습니까? 바라건대, 그것이 칭찬과 축복의 말이길 기대해봅니다.
잠깐 준비한 영상을 보고 얘기를 나누면 좋겠습니다.
# 영상: 약 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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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신문기사에서 읽은 것입니다. 호주에서 말기 환자를 돌보는 호스피스 간호사 브로니 웨어(Bronnie Ware)가 2015년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글입니다. ‘시한부 환자가 마지막 순가 가장 후회하는 5가지’라는 제목의 글인데요. 후에 책으로도 나왔습니다. 그 내용의 핵심은 이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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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남의 눈치를 보고 척을 하며 살았다. 이는 가장 많은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한 후회였다. 자신의 삶이 아닌 다른 사람의 삶을 살아온 것을 마지막 순간에 깨달아 안타까워했다. 나 자신을 위해 진정한 삶을 살 수 있는 용기를 가지라고 조언했다.
2. 너무 일만하며 살았다. 사랑하는 가족과 좋은 시간을 보내는 대신 너무 일만 하며 인생을 낭비했다. 일 외에는 다른 것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해 다른 시도는 해보지도 않았다.
3. 나의 감정 표현에 용기가 부족했다.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못하고 감정을 억제한 것을 후회했다. 사랑한다는 말을 아끼지 말라고 당부했다.
4. 친구들과 자주 연락하지 못했다. 죽음을 앞두고 친구가 가장 그리웠으나 건강할 때는 친구의 소중함을 깨닫지 못했다. 친구와 함께 했던 시간들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귀한 시간이다.
5. 행복을 위해 살아보지 못했다. 행복은 선택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삶이 얼마나 유한한지 알게 되는 순간 행복이 무엇인지 알게 됐다. 당당하게 나 자신의 행복을 원하며 살아야 한다.
어떻습니까? 우리 성도분들은 이에 동의가 되십니까? 진정 내 삶의 마지막에 앞서 열거한 것들이 내게 소중한 것으로 다가올 것 같습니까?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우리의 삶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과연 그렇게 살아고 있는 것일까요?
사실 제가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들었던 불안감은 아마도 우리가 아니 내가 그렇게 살고 있지 못한 것 같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오늘도 열심히 주어진 삶의 시간을 살아갑니다. 그런데 내게 주어진 일을 하느라 바쁘다는 이유로 우리는 정작 삶에서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고 있지 않는지를 돌아보게 됩니다. 정말로 열심히 살아가는 우리이지만 과연 그 열심의 끝에서 우리는 후회하지 않고 만족스럽게 삶을 마칠 수 있을까요? 돌이켜볼 지점입니다.
저는 이러한 고민으로부터 생각합니다. 과연 성경은 우리에게 어떤 삶을 살라고 얘기해주고 있을까하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그 고민이 가닿은 곳이 바로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성경구절인 신약성경 요한복음 13장 1절의 말씀입니다. 다시 오늘 성경구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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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3:1(신약 170쪽)
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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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읽은 성경구절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이별을 준비하는 장면입니다. 우리가 읽은 성경구절은 그것을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때는 예수께서 잡히시기 전에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제자들과 마지막으로 식사하신 날입니다. 이른바 최후의 만찬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께서 살아 계신 동안 제자들과함께하신 마지막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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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주목해 볼 것은 이것입니다. 과연 예수님은 생의 마지막에 무엇을 하셨을까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구절은 이렇게 말해줍니다.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저는 이로부터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마지막까지 힘쓸 일은 바로 ‘사랑하는 일’임을 말입니다. 다시 말해보자면, 우리 삶이 신앙 안에서 후회없고 만족스럽게 살아가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일은 바로 사랑하는 일입니다.
저는 이것이 신앙 안에서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통용되는 이야기가 될 수 있음을 생각합니다. 앞서 브로니 웨어의 이야기도 했는데요. 사람들이 죽음을 앞두고 후회하는 것은 결코 내가 어떤 성과를 내고 어떤 성취를 했느냐 못했느냐 하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가족과 친구 또 자신과의 관계에 있어서 온전해지는 것임을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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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관련해서 현재는 은퇴했지만 정신과 전문의로 약 50년간 활동하고 이화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친 이근후 박사님이 인터뷰에서 비슷한 얘기를 합니다. 자신의 연구는 아니지만, 오래된 연구를 통해서 알려진 것이라고 합니다. 임종을 앞둔 사람들에게 다시 태어나면 어떻게 살고 싶은지를 조사했다고 합니다. 그중에서 가장 많은 응답이 있었던 세 가지를 소개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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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는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 멋대로 살겠다는 것이 아니라, 창의적인 방식으로 살아가겠다는 것을 뜻합니다. 앞선 브로니 웨어의 이야기처럼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살고 싶다는 얘기라 할 수 있습니다.
둘째는 ‘풀고 싶다’는 것입니다. 살면서 맺힌 감정과 관계를 풀고 싶다는 것입니다. 맺혀 있던 상태로 오래 살다가 보니 풀어야 할 관계들 감정들이 해소되지 않고 죽음 마주하고 있는 것이 괴롭다는 것입니다. 해서 맺힌 감정들이 생겨날 때 즉시 풀어내고 싶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셋째는 ‘나누고 싶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경제적인 것 또는 물질적인 것만을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재능을 나누고 마음을 나누고 하는 모든 것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이것은 봉사를 뜻합니다.
이렇게 신앙의 영역 밖에서도 사람들은 죽음에 이르면서 세상이 추구하고 가르치는 방식을 반복하기를 원치 않아 보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부를 증대시키고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때때로 원수가 되는 삶의 방식이 죽음의 문턱에서 후회로 남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도 이러한 삶의 방식을 ‘어리석다’라고 이야기합니다. 다같이 신약성경 누가복음 12장 19절에서 21절의 말씀을 같이 보겠습니다. 앞의 화면을 보고 같이 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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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2:19-21
19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20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21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하나님은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그것을 나눌 줄 모르는 부자를 ‘어리석다’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해, 많은 것을 축적하고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의 방식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이미 앞서 답을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처럼 사랑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것이 어떤 삶이야는 것이죠. 사실 이것에 관해서는 참으로 다양하고 많은 이야기가 있을 것입니다. 성경 밖에서도 그에 관한 여러 이야기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구절에 기준을 두고 보자면 이렇습니다.
요한복음 13장은 앞서 말씀드린대로 세족식과 성만찬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저는 특별히 세족식의 장면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의 의미를 한 세가지 정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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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는 자기를 낮추는 것입니다.
본래 세족식은 하나의 예식이라기보다는 문화적인 관습이었습니다. 고대 근동의 환경을 고려할 때 자연스러운 손님접대 문화였습니다. 모래가 많은 그 지역에서는 당시 사람들이 주로 신는 샌들과 비슷한 형태의 신발을 싣고 다니다보면 모레가 들어가 발이 더러워졌습니다. 해서, 보통은 발을 씻거나 손을 씻을 물을 손님들을 위해 또 식구들을 위해 준비해 두었는데요. 손님을 접대할 경우에는 그 집의 하인이 발을 씻어 주는 것이 보통의 손님접대 문화였습니다.
그러니 발을 씻어준다는 것은 자기를 낮추는 행위인 것입니다. 한편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상황에 이른 것을 보면, 어느 누구도 자기를 낮추고 있지 않았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제자들 가운데 기꺼이 자신을 낮추시며 제자들의 발을 씻기십니다. 당시의 상황에서는 어처구니가 없는 상황입니다. 스승이 제자의 발을 씻기는 것은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처음에 이를 거부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를 통해 본을 보이고자 하셨습니다. 어쩌면 사랑하는 것은 이렇게 자기를 낮추는 일임을 말하고 싶으셨는지도 모릅니다. 생각해보면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상대를 위해 기꺼이 자기 희생과 자기 헌신을 하는 사람입니다. 자기 이익을 추구하고 자기중심적이면서 사랑한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지요. 저는 그런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아이를 대하는 엄마아빠의 모습이 그러했습니다. 다 큰 성인들이 아이와 같은 눈 높이에서 아이처럼 말하고 행동하며 아이의 기분과 마음을 상하지 않도록 애쓰는 장면에서 그런 모습을 봅니다. 이렇게 기꺼이 자기를 낮추는 것이 사랑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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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는 상대를 수용하는 것입니다.
제가 사실 얼마 전에 아버지 학교를 수료했습니다. 듣기로 아버지학교 역사상 결혼 전에 아버지 학교를 수료한 사람은 저 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생각해보니 자식도 없는 사람이 아버지학교를 가겠다고 한 것부터 이상하긴 했습니다. 그래도 나름 아버지로써 산다는 것에 관해 교육을 받는 것은 보람이 있었습니다. 그 교육 과정 중에 마지막 시간에 세족식이 있었습니다. 보통은 아내를 초대해서 하는 세족식입니다. 저는 아직 아내는 없지만, 미래의 아내를 초대하여 세족식을 했습니다. 마침 교육을 받는 교회에서 사역을 하고 있기도 하고 해서 말입니다.
이제 다음 달에 결혼을 앞두고 있지만, 미래의 아내의 발을 씻길 일은 없었습니다. 그러니 만남 이후 첨음으로 발을 씻긴 것이지요. 저는 아버지학교의 세족식 분위기에 이끌려 거기서 시키는데로 따라서 열심히 했습니다. 양말을 벗기고 신기는 일은 생각보다 어려웠지만 그 외는 나름 시키는대로 잘 한 것 같습니다. 오늘 설교를 준비하면서 세족식에 관한 이야기가 있어서 물어 보았습니다. 그때 발을 씻겨줄 어떤 느낌이나 어떤 생각을 받았냐고 말입니다.
그리고 흥미로운 응답을 받았습니다. 발이 너무 더러워서 물이 더러워지면 어떨까를 걱정했다고 했습니다. 참 다행히도 그날 조명을 어둡게 해서 물색깔을 볼 수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또 어떤 느낌을 받았는지 물었는데, 자신이 수용받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발을 씻어주는 과정이 자신이 받아들여지는 것으로 느껴졌다는 것입니다. 미쳐 생각을 못했던 응답이었는데, 한편 그랬겠다는 생각이 저도 들었습니다.
사실, 저는 일전에 미래의 아내에게서 세족식을 받았었던 적이 있습니다. 물론 세족식을 하려고 한 것은 아닌데, 몸이 아파서 고생하고 있을 때에 발 씻김을 당한 적이 있습니다. 처음엔 당황스러웠습니다. 사실 제 발이 각질도 일고 해서 그렇게 아름다운 상태가 아니었으니 말입니다. 그럼에도 아랑곳 앉고 발을 씻어주는 미래의 아내에게 감동이 되었습니다. 또 그때 저도 그런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더러운 발까지 수용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귀한가하고 말입니다.
예수님이 세족식을 했던 장면으로 다시 돌아가 봅시다. 예수님은 그의 12제자와 함께 모여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속에 가룟 유다라는 제자가 자신을 팔아 넘길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이 그의 발을 씻기지 않으셨을까요? 만약 그랬다면, 성만찬을 하기 전에 가룟 유다가 뛰처나갔겠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모든 제자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심지어 자신을 배반할 가룟 유다의 발까지 말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발 씻김을 받은 제자들은 예수님이 잡히시자 마자 뿔뿔히 흩어지니 사실 예수님은 자신을 버릴 모든 이들을 위해 기꺼이 발을 씻기시며 수용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느껴지십니까? 내가 사랑받을 만한 존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심지어 배신당할 것마져 각오하고 우리를 품어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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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셋째로 내가 먼저 베푸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대로 원래는 고대 근동의 문화가 어떻게 세족식이 될 수 있었을까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면서 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이 먼저 자신을 낮추시고 제자들을 수용하시기로 결정함에 따라 세족식이 진행될 수 있었습니다. 곧 먼저 베푸는 이를 통해 사랑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세족식을 마치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본이 되기 위해 행하였노라고 말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제자인 우리가 예수님의 본을 따라 행해야 함을 말해줍니다. 곧 예수님이 보이신 사랑을 우리가 동일하게 베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사랑은 내가 받은 만큼 주는 사랑이 아닙니다. 내가 받기 위해 주는 사랑도 아닙니다. 문득 예수님의 발은 누가 씻겼을까 의문이 듭니다.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으니 알 수 없습니다. 어쩌면 예수님의 발은 스스로 씻으셨을지도 모릅니다. 분명 예수님은 발 씻음을 받기 위해 제자들의 발을 씻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사랑은 내가 먼저 낮아지고 내가 먼저 베푸는 사랑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생각해보면 그것이 참 사랑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아내와 남편 자녀를 사랑함에 우리는 받은 만큼 주겠다고 하지 않습니다. 기브 앤 테이크는 거래할 때나 사용되는 것이지 사랑에는 맞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역시 먼저 사랑하는 본이 될 것을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어쩌면 손해보는 장사일지도 모릅니다. 줄 줄만 알지 통 받을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저는 우리가 먼저 사랑할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이니 말입니다.
12월을 맞이하면서 저는 우리의 마지막을 생각해 보길 바랬습니다. 우리는 잘 살고 있습니까? 우리의 삶은 이대로 괜찮습니까? 진정 우리에게 소중한 것을 성경은 ‘사랑하는 삶’으로 가르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에 걸맞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마지막 순간에 후회할 일만 잔뜩 남겨두는 것은 아닙니까? 바라건대 저는 우리가 이제는 주님이 보여주신 사랑을 본 받아 먼저 사랑하고 상대를 수용하며 자기를 낮출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그와 같은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해달라고 함께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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