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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생을 알게 하려 함이라
영생을 알게 하려 함이라
오늘도 아침을 깨워 함께 말씀을 듣기 위해 나아온 모든 친구들 반갑습니다. 이제 고3데이의 순서도 오늘로서 막을 내리게 됩니다.
여러분들 이번 고3데이 어떠셨나요? 처음 1박2일로 진행을 하였는데, 어떤 것들을 얻었나요?
제가 어제 개회예배때 나누었던 것처럼 정말 여러분들에게 큰 위로가 되었나요? 그랬다면 정말 주님께서 함께하셨음을 느끼게 되네요.
아마 여기 계신 여러분들 모두 늦게까지 밤을 새시면서 공동체를 누리셨을 것이라 생각이 됩니다. 저도 간만에 여러분들과 함께하면서 말그대로 젊은 기운들을 느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그래서 그런지 크게 피곤하지는 않더라구요. 다 여러분들 덕택이라 생각됩니다.
그래도 여러분들은 지금 이시간 피곤하실 테니까요, 말씀을 짧게 나누고 여러분들을 놓아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매번 캠프때도 그렇고 항상 수양관에서 말씀을 전할 때에는 여러분들의 졸린 눈들을 마주하게 되는 것 같은데요, 저는 좋습니다. 여러분들의 피곤한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여러분들에게 들을 귀를 열어주실 것이라 믿기에, 믿음을 가지고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오늘 함께 나눌 말씀은 요한일서의 가장 마지막 말씀입니다. 어제 저녁 목사님께서 요한일서 가장 첫부분의 말씀을 전해주셨죠?
자 그럼 잠도깰겸 한번 이야기해봅시다. 목사님께서 어떤 말씀을 전해주셨나요? 우리가 빛 가운데 있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 고3친구들이 세상 속으로 나아가게 될 텐데, 주님의 공동체 안에서 함께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전해 주셨었죠.
사도 요한이 이 말씀을 기록한 것도 교회 공동체를 향한 요한의 사랑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제 목사님께서 말씀해주셨다시피 당시의 교회 가운데에 영지주의라는 이단들이 존재하는 상황이었고, 그것들로 인하여서 성도들이 고난과 두려움을 겪는 상황이었다라는 것이죠.
요한은 요한일서의 말씀을 나누면서 우리 교회공동체 가운데 필요한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진정한 사랑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구석구석에서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죠.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요한은 편지를 마무리하며 성도들에게 힘을 불어넣어줍니다.
바로 첫번째 구절인 13절을 통해서 이야기하는 것이죠.
요한이 편지를 쓰는 이유가 뭐라고 하고 있죠?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다.
다시 말해 뭐에요?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이 너희에게 있다면, 너희 가운데 영생이 존재함을 말하고 있다는 거에요.
영생이라는 것은 뭘 말하는 것이죠? 영원한 삶. 그 옛날 진시황이 그렇게 갈구했던 이터널 라이프이죠.
자.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제 걱정이 하나도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불로초를 먹지 않아도 믿음으로 영원히 살 수 있다는 거에요. 이제 돈 벌고 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 우리는 자유입니다!
정말 그런가요? 아니죠. 여기서 말하는 영생이란 바로 하나님 나라를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삶은 유한한 삶이죠. 죽음이 있으니까. 하지만 죽음 이후 예수께서 재림하셔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그 때에는 하나님과 함께 영원한 삶을 살 수가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요한은 성도들로 하여금 두려워하지 말 것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단들로 인하여서 자신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얻지 못하고 하나님 나라로 가지 못할 것을 걱정하고 있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을 온전히 믿고 있다면, 영생이 여러분들의 것임을 말한다는 거에요.
그러니 이단으로 인하여서 나의 구원이 탈락될 것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겠죠.
이것이 요한이 말하는 성도들에게 주어진 첫번째 특권입니다.
첫번째가 있다는 것은 두번째가 있다는 것이겠죠? 이어지는 14절에 등장합니다.
요한은 우리 성도들이 담대할 수 있는 또다른 이유로 무엇을 들고 있느냐, 하나님께 무엇이든 구하면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 어때요? 엄청난 특권이죠? 이제 우리는 램프의 지니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구하면 다 들어주시니까요.
정말 그런가요? 그렇지 않죠. 들어주시는 것보다 그렇지 않은 것들이 더 많은 것 같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럼 말씀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말씀을 잘 보아야 합니다. 무엇을 구하되 어떻게 구해야 된다고 해요? 그의 뜻대로 구하면 들어주신다고 말하죠.
즉 우리의 모든 바람들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할 때, 하나님은 그것을 기쁨으로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이겠어요? 우리의 모든 삶이, 또 바라는 것들이 하나님의 계획 안에 이루어질 것을 바라는 것이 중요하겠죠.
이어지는 16절에서 요한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구하는 것을 들어주실 것이기에, 성도들에게 한가지 권면을 합니다.
어떤 권면을 하느냐, 다른 형제가 죄 범하는 것을 보면 구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기도로 구할 때, 하나님께서 그것을 듣고 계시기에, 범죄한 이들에게 생명을 주시며 구원하여 주신다라는 것이죠.
이것이 바로 요한이 말하는 공동체에게 주어진 책무일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모든 삶, 또한 주님께서 주시는 은혜가 어떻게 우리에게 주어지죠? 하나님께서 각자 각자에게 따로 부어주시나요? 그렇지 않죠. 어제도 이야기했지만, 공동체가운데 부어주신다는 거에요.
그러므로 우리는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서로를 향해 사랑으로 기도하며 도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삶에 비유해보면 어떤 거에요? 한번 상황을 상정해 봅시다. 시험 전날인데 같은 기숙사 방에 친구가 공부는 안하고 자고 있어요. 혹은 혼자 유튜브를 보고 있어요.
이때 여러분들은 어떻게 하실 것인가요?
아싸 한명 제꼈다 이렇게 해야할까요? 물론 세상에서는 그게 옳다고 말하겠죠. 하지만 우리는 믿는 성도로서 어떻게 해야겠어요?
사랑하는 나의 친구야 지금 잠에 취해있으면, 내일 어려움을 겪지 않을까? 나는 너가 나와 함께 기쁨을 누리기를 원한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너무 교과서적이겠지만, 이런 식으로 서로 죄의 길에 빠지는 형제들을 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한다는 것이죠.
근데 이 부분에서 요한이 단서로 단 것이 있어요. 사망에 이르는 죄를 지은 사람들은 구하지 말라는 것이죠.
아마 이 부분이 조금 의아할 수 있을텐데요, 여기서 요한이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 택함받지 못한 자들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항상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반드시 지옥으로 향하는 버림받은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과는 달리, 하나님을 믿지 않고 죄 가운데 거하는 이들은 지옥불에 떨어지게 된다는 것이죠.
우리가 사랑의 하나님을 항상 바라보고 집중하기 때문에, 마치 모든 사람을 구하실 것 같지만, 분명히 말씀은 버림받고 유기된 자들이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어떤 자들이겠어요? 모두 하나님을 대적하는 대적자들, 적그리스도들, 사단이겠죠.
근데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또 이런 생각이 들거에요. 내가 저런 버림받은 사람이면 어떻게 하지? 두려움이 생긴다는 거에요.
하지만 요한은 말씀에서 단호하게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우리 성도들은 그러한 범죄를 짓지 아니한다고 말이죠.
왜 그렇다고 하죠? 하나님께서 지키시기에 악한 무리가 우리를 절대로 만지지도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어지는 말들을 통해 성도들을 더욱 강하게 위로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했고, 우리를 제외한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했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각을 주시고,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죄로부터 자유할 수 있고, 그로 인해 구원을 받아 영생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요한은 편지의 마지막을 그러한 버림받은 자들로부터 멀리할 것을 권면합니다.
어제 말했던 것처럼 어둠의 자리에서 멀어져 빛의 자리에 거해야 한다는 것이죠.
여러분들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여러분들은 곧 찾아올 2024년에 학교라는 터전에서 벗어나 성인으로서 새로운 삶의 자리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어쩌면 그것이 기대될 수도 있겠구요, 어쩌면 그것이 두려울 수도 있겠죠.
사실 이미 그 길을 걷고 있는 저의 입장에서는 여러분들에게 걱정이 앞서게 됩니다. 19절에서 말한 것처럼 온 세상이 악한 자들이고, 여러분들은 그 세상에 던져지기 때문이죠.
그래서 여러분들은 그 악한 이들로 인해 고통을 겪게 될 것입니다. 세상적인 유혹의 고통, 신앙적인 고난과 고민들이 반드시 여러분을 찾아올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그러한 걱정을 벗을 수 있는 것, 또 여러분들이 그러한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 그것은 바로 18절과 같이 하나님께로부터 난 우리는 하나님께서 지키시기에 악한 세력들이 우리를 건들지도 못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우리 모든 하임, 코람 공동체가 이것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들에게는 영생이 허락되어 있습니다.
비록 그 과정에서 고통과 근심들이 있을지 모르나, 하나님은 반드시 그 가운데서 우리에게 함께하시며 우리가 절대로 죄의 길로 빠지지 아니하도록 지켜주실 것입니다.
어쩌면 어떤 이들은 이렇게 이야기할지도 몰라요.
신앙이 있기 때문에 더 힘든 것이 아닌가. 신앙이 있으니까 자유롭게 살지도 못하고 더 힘들게 살아가는 것 같은데? 주님을 믿으면 자유한다더니 오히려 부자유한 것이 아닌가?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자유를 오해한 것이죠.
제가 예를 한번 들어볼게요. 우리 하늘고 친구들은 들은 이야기일텐데, 제게는 귀여운 조카가 있습니다. 한명은 두돌이 되었고, 한명은 100일이 지난지 얼마 안되었습니다.
큰 애는 이제 막 말도 잘하고 엄청 잘 걸어다닙니다. 걸어다니는 모습만 보아도 아주 귀엽습니다.
근데 걸어다니기만 하면 좋은데, 그냥 걸어다니지 않죠. 이곳저곳을 들쑤시며 뛰어다니죠.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다치게 되죠. 넘어지고, 박고 하면서 다치게 됩니다.
아이가 홀로 걸어다니면 그렇겠죠.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아이의 옆에 누가있죠? 부모가 있습니다.
부모님이 아이를 붙잡고 지켜보고 있다면, 그 아이가 동일하게 아무곳을 들쑤시며 다녀도, 부모님의 시선과 그 손이 그를 붙잡고 있기 때문에 아이는 자유로움에도 다치지 않게 되겠죠.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사람들이 말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한 그 자유는 물론 자유롭겠지만, 우리를 다치게 하고, 죄로 물들게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자유는 우리가 걸어가는 모든 자리를 지켜보시고 붙들어주시기에 우리는 오히려 더 자유롭게 걸어갈 수 있죠. 어디를 가든 우리가 다치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걸어갈 앞의 모든 길, 비젼, 꿈 가운데 하나님께서 함께하십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향한 굳센 믿음을 갖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귀한 공동체 안에서 거할 때, 우리는 어떠한 길을 걸어가든 자유함으로 길을 걸어갈 수 있고, 결과적으로는 주님이 주시는 영생까지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자리에 참여한 우리 모든 고3친구들, 여러분들의 삶 가운데서 두려움이 있나요?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우리를 지켜주시고 보호하실 주님과 함께함으로, 또 그 주님으로 함께 연결된 우리 공동체와 함께함으로 두려움에서 벗어나 자유를 누리시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