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날에 필요한 두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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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오늘은 2023년도의 52번째 주일 입니다.
올해의 마지막 주일 이라는 뜻입니다.
오늘 저녁에는 송구영신 예배가 예정 되어 있습니다. 한 해를 마무리 하는 감정은 각자 다르겠지만, 아쉬움과 소망이 교차하는 시간인 것만은 같을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끝이 있다는 것은 새로운 소망을 품을 수 있다는 관점에서 감사할 일 입니다. 끝이 있기에 시작이 있습니다. 이 끝을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며 잘 마무리하고 오늘 말씀을 통해 새 소망으로 시작 하시기를 축원 합니다.
오늘은 한해의 마지막을 맞으며 인류 구원사역의 마지막 날에,
우리가 주님 앞에 갖춰야 할 두 가지 덕목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무릇,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오늘 본문에는 두 가지 이야기가 등장 합니다.
그 중에 두번째 이야기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이야기 입니다.
누가복음 18:10 KRV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이 두 캐릭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우리의 생각 보다는 그 당시의 관점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먼저, 바리새인은 흔히, 예수님을 핍박하고 반대했던 무리들로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 유대사회에서는 존경받는 종교인 이자, 본이 되는 선생님들 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율법에 따라 정기적 자선을 배푸는 선한 사람의 대명사와 같은 사람들 이었습니다.
반면에, 세리는 로마 정부의 대리인으로서 백성에게 세금을 걷는 사람들 이었습니다. 거기다가 토색하고 횡령하는 일이 잦았지만, 로마 라는 뒷배가 든든히 있는 자들이라 미워했지만 어찌 할 수 없는 일종의 반민족 행위자로 낙인이 찍힌 사람들이었습니다. 주위의 평판은 안좋지만 경제적으로는 호의호식 하는 사람들로 인식되고 있었습니다.
본문의 바리새인의 기도에는 그 세리에 대한 적대감을 들어내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8:11 (KRV)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당시 사람들에게 누가 의인 이었을까요?
네, 당연히 세리 보다는 바리새인들이 선하고 의로운 사람으로 인식 되었을 것입니다. 거기다가 종교적인 위치 까지 더해져 이들의 이미지는 극단적인 대조를 이뤘을 것입니다.
이런 판단의 순간에 우리가 항상 가져야 할 자세는 바로 “하나님은 어떻게 생각 하실까?” 입니다.
오늘 본문의 예수님의 관점이 바로 하나님의 관점 입니다.
인간세계에서 종종 흑백논리나 몇 몇 가지 증거를 들어 전체를 판단하려는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가 발생 합니다.
바리새인은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 의롭다는 증거를 나열하면서 동시에 세리가 불의 하다는 증거를 제시 합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10절)
바리새인의 의는 다른 사람이 저지르고 있는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과 특히, 세리와 같지 않은 것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상식적이고 대중이 납득갈만한 주장 임에는 틀림 없습니다. 선을 행하고 악한 일을 행하지 않는 것은 분명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한 삶입니다. 현대 기독교인들이 분명 마음에 세겨야할 부분 입니다.
믿음이 있다, 또는 기독교인 이다 하면서 불의하고 악한 일을 버젓이 자행하는 양심에 화인 받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에 비하면 바리새인은 훌륭하다고 할 수 있는 것 아닐까요?
하지만, 바리새인의 주장은 맹점이 있는데, 바리새인의 선은 절대적 선이 아닌 상대적 선이었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의 선은 나보다 악하고 나보다 선행을 하지 않으며 악을 저지르는 상대가 있어야만 성립한다는 것입니다. 증오하고 미워할 존재가 필요한 선이라는 것입니다. 상대편은 악해야 하고 그래야 내가 선해지는 구조 입니다.
반대를 위한 반대이고 상대를 비난함으로서 내 존재감이 들어나는 아주 안좋은 형태의 선입니다.
현대 기독교인들이 직면한 딜레마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나의 선함의 기준을 타인의 불의함에 두는 순간, 우리는 또 한명의 원수를 만드는 것입니다.
반면에 ‘모두가 다 그렇게 살고 있으니, 나도 남들 처럼 살아도 문제 없다’ 라고 말하는 것은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 역할을 망각하는 생각 입니다.
우리의 선함의 잣대가 타인을 향해 있다면, 그 선은 절대 선이 될 수 없습니다. 상황에 따라 시대에 따라 흔들리는 선이고 악한 세상에서는 어느 정도 타협하고 살아가는 선이 되는 것입니다.
지난 번에 소개해드렸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의 이야기 처럼 자신은 공무원으로서 열심히 자신의 일을 했고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대해줬다. 단지, 내가 속한 곳이 나치정부였고 내 일이 사람들을 모아서 죽음의 가스실로 보내는 것이었을 뿐이라는 말은 죄의 평범성을 보여주었습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선하다’ ‘의롭다’ 라는 것은 하나님만이 판단하십니다.
주님은 말씀 하십니다.
마지막날에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누가복음 18:13 KRV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이것은 단순히 권선징악의 차원이 아닙니다.
맹자에 대한 영상을 하나 봤는데,
맹자는 성선설을 주장 했습니다.
인간은 본래 선하게 태어났다 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과 짐승을 나누는 기준을 7가지로 내세웠는데, 그것이 사단칠정(四端七情) 입니다.
사단칠정(四端七情)
사단
측은지심(惻隱之心) · 수오지심(羞惡之心) · 사양지심(辭讓之心) · 시비지심(是非之心
칠정
희(喜) · 노(怒) · 애(哀) · 구(懼) · 애(愛) · 오(惡) · 욕(欲)
측은지심(惻隱之心) · 수오지심(羞惡之心) · 사양지심(辭讓之心) · 시비지심(是非之心의 네 가지 마음(감정)으로서 각각 인(仁) · 의(義) · 예(禮) · 지(智)의 착한 본성[德]에서 발로되어 나오는 감정
예컨데, 우물에 빠진 아이를 보면 불쌍히 여기는 측은지심이 있다. 이런 인간의 선한 본성을 가지지 못한 사람을 인면수심 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이라면 본래 선하고 그렇지 않으면 사람의 탈을 쓴 짐승 이다 라는 주장 입니다.
정말 인간은 선하게 태어났을까요?
불교에서 말하는 의롭고 거룩한 단계를 열반이라고 하는데, 이 열반에 이르기 위해서 거쳐할 수양단계는
‘삼혜구족(三慧具足)→ 신기청정(身器淸淨)→ 오정심(五停心)→ 별상념주(別相念住)→ 총상념주(總相念住)→ 사선근(四善根)→ 견도(見道)→ 수도(修道)→ 무학도(無學道)’
무학도는 아라한을 말하는데,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는 단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저 수많은 단계를 수련하면 사람이 정말 의롭고 거룩하며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는 존재가 될까요?
성경적으로는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의 정수는 인간은 절망적 존재라는 것을 깨닫을 때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어떤 수련이나 깨달음으로도 해결될 수 없는 저주 속에 태어난 존재가 인간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으로 부터 기독교 신앙은 시작 됩니다.
인간은 아담의 죄를 유전 받은 죄의 후손 입니다. 그 죄의 문제는 예수님 이전까지 해결 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맹자의 주장은 상식적이고 사람들의 지지를 받고 정치적으로 타당할 수 있습니다. 불교의 수양이 마음을 다스리고 평안을 줄지 모릅니다. 하지만 진리는 아닙니다.
우리의 시작을 인정하는 것이 우리의 마지막을 맞는 가장 좋은 자세 입니다.
바로 세리의 기도가 그 좋은 마음 자세를 보여줍니다.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세리의 기도는 진실되고 간절하였습니다.
그 간절한 기도는 무엇인가 소망하는 것을 얻고자 하는 기도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단지,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와 절망을 깨닫고 죽을 수 밖에 없는 자신을 불쌍히 여겨 주시기를 구함에 있어 간절 했습니다.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
“…가슴을 치며 가로되…”
바리새인은 분명 의롭고자 노력한 사람 입니다. 유대교 율법서인 토라에는 613 가지의 율법이 있습니다. 불교수양 못지 않은 방대한 량의 수양과제가 있었고 실제로 그 삶에서 율법대로 살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누가복음 18:12 KRV
나는 이레에 두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7일에 한번 즉, 일주일에 한번 십일조를 하다.
하지만, 하나님은 누가 옳고 누가 불의하냐의 흑백논리가 아니라, “누가 더” 아닌, “누구든지”의 관점으로 사람을 대하십니다.
공평하신 하나님 이시기 때문 입니다.
그가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자는
그가 얼마나 수양을 했는지, 본래 선한 성품을 타고 났는지 아닌지, 613개의 계명을 얼마나 지켰는지와 상관 없이 하나님께서 의롭다 칭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고백에는 신학적으로는 자신의 죄를 고백한 자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예수를 주로 고백해야 한다는 개념도 포함 합니다.
하나님 앞에, 주님 앞에 가장 겸손한 모습으로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고백하는 자세를 마지막 날까지 인자의 날까지 가지고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마지막 날, 인자의 날에 우리가 가져야할 것 첫번째는 바로 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겸허하게 하나님 앞에 긍휼을 구하는 것입니다.
수양이나, 사상이나, 인간의 그 어떤 노력도 아닌, 하나님만이 인간을 의롭게 하여 살릴 수 있다 믿는 그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2.인자의 날에 믿음을 보겠느냐?

신앙의 연차가 오래 되면 될 수록, 제일 먼저 우리에게서 떠나는 것은 간절함 입니다.
인자의 날, 마지막 날은 다른 마지막과 다릅니다. 연말과 연시가 이어지는 것과 졸업과 입학 또는 입사가 이어지는 것과 달리, 그 날은 다음이 없습니다. 또 다른 시작이 없는 완전한 종말 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생은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의 연속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떤 마음자세로 인생을 사느냐는 당장 실질적인 변화나 결과를 나타내지 못해 보이지만 거의 모든 것이 마음 먹기에 따라 달라집니다.
지난 금요일, 반가운 손님이 우리 교회에 찾아 왔습니다. 브루노 라는 청년 입니다. 이 청년의 아내의 이름은 프리실라 입니다. 이 젊은 커플은 브라질 사람이고 모퉁이 사역 초반에 만난 사랑스러운 부부 입니다. 당시 이들은 직장과 건강, 비자 문제가 있었는데, 모퉁이 사역 멤버들과 함께 기도하면서 기적적으로 이 모든 문제를 다 해결받는 역사를 체험 했습니다. 최근에 영어를 말하는 교회를 나가기 시작했고 매일 기도하면서 평소 갖고 있던 멘탈적인 문제가 많이 해소되고 안정을 찾고 있고 최근 프리실라가 아이를 가졌다는 소식이 자신에게 큰 힘이 된다고 간증을 하였습니다. 자신이 현재 멘탈적으로 힘들고 어려운데,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이 부담이 될 수도 있지만 지난 성탄절 예배에서 들은 요셉과 마리아의 이야기가 자신에게 깨달음을 주었다고 합니다. 안좋은 상황으로 생각 할 수 있지만 오히려 하나님께서 나에게 힘을 주시기 위해 아기를 주셨구나 라고 생각하니, 힘이 낫고 감사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 사랑스러운 브라질 커플과 이 여정을 함께 하면서 저는 신앙생활은 결국은 상황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상황 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뜻을 발견 하는 것이라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습니다.
그 여정에는 간절함이 있어야 하는 구나!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또 다른 이야기는 어려운 상황을 벗어나고자 간절히 메달리던 한 여인의 이야기 입니다. 억울한 일을 당한 한 과부가 있습니다. 그녀가 당한 억울한 일이 무엇인지는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억울한 일을 만날때, 옆에서 잘 도와주고 그 마음을 이해하고 어떻게 라도 도와주는 사람이 있으면 그나마라도 버티고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여인은 세상적으로 말해 불운했습니다. 하필이면 불의한 재판관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 재판관이 어떤 사람인가 하니,
누가복음 18:2 KRV
가라사대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관이 있는데
높은 지위가 있고 사람도 무시하고 거기다가 하나님을 무시하는 사람이었다고 설명합니다.
잘해주는 것까지도 바라지 않고 단지 법데로 의롭게만 해줘도 훌륭한 재판관 인데, 이사람은 정반대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여인 주변에는 이 재판관 말고는 그녀를 도울 사람이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누가복음 18:3 KRV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자주” 찾아 갔습니다.
간절히 호소 하였습니다.
당연히 불의한 재판관은 들은척도 안합니다. 그런데, 역시 불의한 사람의 사고 방식으로 생각을 합니다.
누가복음 18:4–5 KRV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그 여인이 너무 자주 찾아 오니까 단지, 귀찮아서, 번거롭게 하므로 그녀의 원한을 풀어 주기로 합니다.
결국은 한 여인의 간절함이 불의한 재판관을 움직인 것입니다.
주께서 이 이야기를 끝내시며 말씀 하십니다.
누가복음 18:6–7 KRV
주께서 또 가라사대 불의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저런 불의한 사람도 그녀의 간절함에 마음을 바꾸는데, 하나님 아버지는 어떻겠느냐?
간절함의 특징은 ?
말로 끝나지 않는다.
“자주” 찾아가고 끊임 없이 간청 하는 것입니다.
만약 내 자식이 불의한 정권에 의해 누명을 쓰고 어딘가 잡혀가서 고문을 당하고 있다면 집에서 머리싸메고 누워만 있을 부모가 어디 있습니까? 사방팔방 뛰어 다니며 수소문 하고 탄원 하지 않겠습니까? 자식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지하철이나 버스정류장을 돌아다니며 눈물로 전단지를 뿌리고 있는 사람의 마음에는 간절함이 있습니다.
불안한 마음은 아무것도 못하게 하지만
간절함 마음은 무엇이든 하게 합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주님이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신 것은 “간절함” 그리고 그 따른 행동 입니다.
누가복음 18:8 (KRV)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8절은 난해 구절 중에 하나 입니다.
이 간절함과 마지막날의 믿음을 보겠는가? 하는 질문이 언듯 보기에는 굉장히 이질적이기 때문 입니다.
하지만 이 두개념에는 큰 연관성이 있습니다.
마지막 날이 이르기 까지는 우리에게는 수 많은 기회가 주어집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잘하고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사명이 무엇인지 분별하여 헌실 할 기회를 많이 주십니다. 하지만 그날이 되면 더 이상은 믿음을 보일 기회는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오시기 전까지 간절히 소망하고 간절히 헌신 하라는 것입니다.
“인가가 올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그 때에는 믿음을 평가 받을 기회가 없다. 이제 다 끝났다. 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까지 내가 어떻게 살았는가?의 결과만 평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날이 되면, 더 이상의 믿음을 보일 기회는 없습니다.
그리스의 철학자 헤라 클레이 토스는
“같은 강물에 두번 발을 담글 수 없다” 라고 말했습니다.
흘러 가는 강물이 다 같은 강물 같지만 사실은 좀전에 본 그 강물은 이미 저멀리 흘러 갔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난 한해 어려움과 많은 유혹 중에도 신앙을 지키며 여기 까지 오신 것에 대해 우리 주님은 대견하게 여기실 것입니다. 칭찬 하실 줄로 믿습니다.
때론 신앙생활은 불편함을 주기도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더 성장하라는 권면을 지속적으로 듣다보면 부담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님은 우리가 바리새인의 기도 처럼 되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바리새인의 기도는 자기위안과 만족을 줄지 몰라도 그곳에는 하나님을 향한 간절함이 없습니다.
세리의 기도 처럼 자신의 절망을 깨닫고 그 죄의 늪에서 구할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임을 고백하는 자가 소망이 있습니다.
또한 주님은 2024년도에도 여러분이 풍성한 평안을 누리시길 원하십니다. 주님 안에 기쁘고 행복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더 나은 새해로 하나님과 더 친밀하게 교제하는 한 해가 되길 간절히 원하고 계십니다.
한편으로 한래를 마무리 하는 입장에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평가해야 합니다.
내가 얼마나 나를 위해 살았는가?
아니면, 교회를 위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헌신 하였는가? 라는 평가가 지금은 또다른 2024년 이라는 기회가 주어지지만 그 날에는 더 이상 없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시작이고 헌신은 열매 라는 것입니다.
지난 금요일 함께 은혜받았던 시37:3-6
시편 37:3–6 KRV
여호와를 의뢰하여 선을 행하라 땅에 거하여 그의 성실로 식물을 삼을지어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
이 문장들에게는 공통적으로 조건부가 앞에 나옵니다.
선을 행하라 여호와를 의뢰하여…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여호와를 기뻐하면…
길을 이루시고
길을 맡기면, 의지하면…
인간의 제일 되는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여기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 하는 것”
이 인생의 목적 맞게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사람은
절대 자기가 원하는 방식을 고수 하지 않습니다.
여호와를 의뢰하고 길을 맡기고 의지 합니다.
이제, 새해가 도래하면, 하나님은 수많은 기회를 우리에게 매일의 삶속에서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간절히 찾을 기회를 주실 것입니다. 또한 그 간절함의 결과로 실천할 기회를 주실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 교회에 직면한 수많은 문제들을 우리에게 보여주실 것입니다.
교회 학교를 부흥시켜주셨지만 교사가 턱없이 부족하여 프로그램을 기획하거나 실행할 수 없는 상황을
이제 그 아이들이 성장하면 올라갈 학생부가 세워져야 하고
언제든 청년들이 찾아오면 함께 예배하고 해외 생활의 어려움을 이길 힘을 줄 청년부를 세우는 일도 시급 합니다.
지역사회에 아이를 외롭게 키우고 있는 엄마들을 위한 플레이 그룹에서 봉사하실 동역자를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외에도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게 원하시는 그 영혼 구원의 사역에 자원하는 일꾼을 지금도 부르고 있습니다.
추수할 영혼은 많은데, 일꾼이 없다 하신 주님의 마음을 느끼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그날은 도적같이 임하고 그 때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 입니다. 지혜로운 열처녀 처럼 기름을 준비하고 주님이 오시는 날을 고대하며 자원하여 헌신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비록, 내가 불의한 재판관을 만나든, 아니면 어려운 환경이든, 나이가 많아 늙었든, 병으로 아파하든, 간절함으로 하나님께 구해야 할줄로 믿습니다.

결론

한해의 마지막 주일,
우리는 주님께 어떤 마음으로 서야 할까요?
나의 의를 내서우고 내가 이룬 업적을 내세우며 바리새인 처럼 서야 할까요?
“하나님 저는 죄인 입니다.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나님 너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소서”
“하나님을 기뻐하고 하나님의 뜻이 이땅에 이루어지기를 소원 합니다”
나의 뜻이 아닌 나의 방식이 아닌,
하나님을 위한 삶을 살게 하소서
저 넓은 세상에 추수할 곡식을 향해 나아가게 하소서 라고
기도하시는 마지막 주일 하루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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