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밤이 없겠고

하나바이블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0 ratings
· 91 views
Notes
Transcript

완성된 하나님 나라

요한계시록 22:1–5 NKRV
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에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그들의 이마에 있으리라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요한계시록 22:20 NKRV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사랑합니다! 드림인 예배에 오신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여러분은 요즘 겨울이 되니까 낮의 해가 긴가? 아니면 짧은가? 여름에는 8시가 넘어야지 어두워지고 깜깜해지는데, 요즘은 5시만 넘어도 어둑해지는 것을 보면 겨울에는 해가 너무 짧다는 것을 느낀다. 해가 짧으니까 괜히 하루도 짧은 느낌이 드는 아쉬운 마음이 든다. 여러분은 ‘백야현상’이라고 아는가? 해가 24시간 동안 지지 않는 현상을 말한다.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라는 도시에서는 한여름에도 태양이 지평선 아래로 내려가지 않아 24시간 해가 지지 않는 도시가 있다. 반대로 우리는 지구 북반구에 살지만, 반대인 남반구에서는 봄부터 가을까지 해가 뜨지 않는 밤이 지속되는 극야현상이 있다고 한다. 여러분은 해가 지지 않는 밤이 없는 나라에 산다면 여러분은 어떨 것 같은가? 나였으면 시간이 많다고 느껴져서 삶이 여유로울 것 같은 느낌이 들 것 같다.
오늘 말씀을 보게 되면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장을 우리가 함께 읽었다. 요한계시록을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그리스도인이 주님을 위해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위로의 편지요, 재림에 때에 악한 세상을 어떻게 심판하시고, 박살내실지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하다. 그러면서 우리에게는 두렵고 무서운 편지가 아니라 100% 승리를 약속하는 예수님의 편지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글을 쓴 사도요한은 영광스럽고 영원한 다가오는 시대에 살게 될 하나님의 백성을 묘사하기 위해서 오늘 22장에서는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으로 쫒겨난 에덴동산이 회복될 것으로 이야기한다.
첫 절을 보게 되면 수정과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의 환상을 요한에게 보여주셨다. 크리스탈처럼 엄청나게 반짝거리고 아름다운 강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그 강의 물은 어느 정도로 생명력을 주는 물이냐면 사해바다(Dead Sea)를 아는가? 내가 이스라엘에 가보았는데, 수심이 420m이다. 그럼에도 엄청난 염분 때문에 몸이 자연스럽게 둥둥 떠다니게 된다. 그 사해의 물이 한방울이라도 눈에 들어가면 눈이 타들어가는 느낌과 함께 눈물이 엄청 쏟아져나오고 맑은 물을 찾게 된다. 우리 주님이 다시 오시는 때 나타나는 생명수는 사해바다도 생명이 다시 살 수 있을만큼의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곧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사람은 주님 다시 오실 때,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흘러나오는 생명을 주는 강을 근원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2절을 보게 되면 계속해서 주님 다시 오실 때의 모습을 이야기한다. 그때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다고 한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기 전에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으면서 영생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불순종으로 그동안 먹지 못했던 생명나무의 열매를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자에게 주신다는 것이다. 그 열매는 한달씩 12가지 종류로 열매를 맺고 새로운 수확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시는 것은 언제나 새롭고 늘 풍성하다는 것이다. 또 그 생명나무의 열매에는 영생이 있고, 뿐만 아니라 잎사귀에는 치유의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모든 나라를 치료하기 위해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영원한 나라에 치료가 왜 필요할까를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아플 걱정, 다칠 걱정할 필요가 없는 곳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 치료하는 잎은 결국 부족함을 전혀 느낄 수가 없는 육체적으로나 영적으로나 풍성하고 완벽한 삶이 곧 다가올 것이다.
3절에 다시 저주가 없을 것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을 때, 하나님의 명령대로 모든 만물이 움직이는 순종의 모습으로 완벽하게 회복될 것을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우리가 주목해야할 말씀이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는다고 말씀하신다. 우리의 삶의 중심이 누구로 향해 있는가? 진정으로 예수님으로 향하여 있는가? 우리가 반대로 생각하면 나의 삶의 기준과 중심이 어린 양이신 예수님이 아니라면 그것은 곧 저주의 인생이라는 것을 기억하라.
4절을 하나님의 얼굴을 볼 것이라고 한다. 아무리 율법을 직접 하나님께 받은 모세도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왜냐하면 완전하지 않은 육신을 입은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을 보게 되면 결과적으로 죽기 때문이다. 그래서 출애굽기에서 모세는 겨우 하나님의 뒷모습을 볼 수 있었다. 우리가 사극 영화나 드라마를 보게 되면 왕이 행차할 때 백성들의 반응은 어떤가? 고개를 빳빳하게 서서 바라보는가? 아니다. 완전히 엎드려 고개를 들지 못한다. 고개를 들게 되면 왕 주변의 군인들이 발길질을 하는 장면을 보게 된다. 만약에 그곳에 반역자나 흉악한 범죄자가 있었으면 왕이 행차할 때 그곳에 있을 수 있겠는가? 완전히 그 도시에서 쫒겨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셨다.
마태복음 5:8 NKRV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음이 깨끗한 사람만 하나님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게 될 때 이 땅의 죄악은 완전히 사라지고, 주님을 끝까지 믿음으로 기다린 자에게 영광스러운 부활체로 아담이 타락하기 전에 하나님과 교통했던 모습처럼 영원한 교제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이름이 믿음으로 살아간 모든 자들의 이마에 있을 것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성품을 상징한다. 이것은 곧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사람의 얼굴은 하늘 아버지와 닮은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친구나 연인, 부부가 시간이 지날수록 닮아가는 것처럼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도 이와 같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과 그를 닮아가는 일에 관심이 없기 떄문에 그들의 이마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아닌 짐승의 표가 붙어있다.
5절을 보게 되면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다고 한다. 구약의 이사야도, 스가랴도 예언한 것은 해와 달의 빛이 하나님의 영광의 영원한 빛으로 대체되며 낮과 밤이 나뉘지 않고 계속해서 낮만 있을 것이고 말하였다. 그러니 내가 설교 첫 부분에서 백야현상이 영원히 나타날 것인데, 태양의 빛이 아니라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의 빛과 함께 주님을 끝까지 기다리는 자들에게만 비춰진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녀된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했던 모습으로 회복될 것으로 마무리 된다.
그러나 우리가 1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을 반대로 생각하면 매우 무서운 말씀이다. 지옥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단순히 불구덩이의 그런 지옥을 생각하지만, 진짜 지옥의 성경의 정의는 하나님의 은혜가 완전히 없는 곳이다. 우리는 현재 믿는 사람이든지 믿지 않는 사람이든지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주고 계신다. 공기, 햇빛, 물, 자연 등이 있다. 그러나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어린 양이신 예수님을 따라가지 않은 사람은 이 당연하게 여겼던 모든 것이 하나도 없는 곳으로 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그곳은 공기도 없을 뿐더러 햇빛과 물 한방울도 나오지 않는 곳이다.
예수님이 대표적인 천국과 지옥의 예시로 거지 나사로와 부자 이야기가 있다. 거지 나사로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으며 찢어지게 가난하게 살았지만, 그는 하나님을 믿음이 있었어서 아브라함의 품으로 돌아갔다. 부자는 엄청나게 호와스럽게 항상 명품을 휘두르며 살았다. 그는 믿음이 없이 살았기에 지옥으로 가게 되었는데, 거지 나사로는 아브라함 품에 안겨있는 모습을 보고 이렇게 말하였다. 나사로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자기에게 달라하였다. 그러나 지옥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도 도와줄 수도 없는 곳이었다. 그러자 부자는 자신의 형제가 다섯이 있는데 이렇게 고통받는 사실을 나사로를 부활시켜서 이 사실을 알게 하면 반드시 회개하고 돌아올 것이라고 말했지만, 아브라함의 대답이 기가막히다.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천국과 지옥을 경험한 누구라도 죽었다 다시 깨어나도 어느 누구의 말을 믿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현재 어떻게 살아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진짜 중요한 것은 영원의 삶이다. 노아의 홍수시대에도 마찬가지고, 소돔과 고모라 때도 마찬가지로 현재의 삶을 중요하게 생각하다가 그대로 심판과 멸망을 당하게 되었다. 우리는 연약해서 죄에 넘어질 수 있다. 우리가 그러한 상황 속에서 가장 놓치지 말아야할 것은 죄책감을 갖는 것이 아닌 하나님께 속히 회개하여 돌아와야한다. 주님의 때가 얼마 멀지 않았다.
요한계시록 22:7 NKRV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
요한계시록 22:20 NKRV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예수님께서 속히 오시겠다고 말씀하셨다. 여러분은 현재의 삶이 중요한가? 아니면 영원의 삶이 중요한가? 우리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와 땀을 흘려가며 기도하셨을 때, 우리는 단순히 십자가의 고통만을 두려워하여 이 잔을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고백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가장 두려웠던 것은 잔에 담긴 것이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진노가 가득하게 담겨진 잔이었다. 죄인들을 향해야헀던 진노가 예수님이 담당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죄의 형벌을 담당하는 그 순간에 하나님과 잠시 단절되는 것을 원치 않으셨던 것이고 그것을 가장 두려워하셨다. 하기 싫은데 억지로 한 것이 아니라 조금이라도 하나님과 떨어져있고 싶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렇게 순종하신 이유는 아버지의 뜻이기에, 어린 양의 모습으로 그 십자가의 길을 묵묵히 걸어나가셨던 것이다.
우리 또한 예수님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잠시 잠깐이라도 끊어지는 것을 두려워하셨던 것처럼, 우리 또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는 것을 날마다 두려워하기를 소망한다. 죄라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과의 단절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순간마다 하나님과 함께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느껴지면 바로 주님께 돌아와야한다. 왜냐하면 주님이 언제 오실지 모르기 때문에 늘 우리는 깨어서 기도하며 에배하는 것, 교회를 섬기는 것, 경건의 삶을 살아가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한다. 단순히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만 누릴 수 있는 것이 천국소망이 아니라, 오늘 이 땅에서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여 더욱 가까이하는 삶,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며 살아가는 사람은 이미 이 땅에서 천국을 누리는 사람이다.
이러한 자는 결국 어떤 고백을 하는가?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속히 오신다는 말씀에 ‘아 조금만 늦게 오셨으면.. 하고 싶은 것이 많은데..’가 아니라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아람어로 “마라나타!”라고 기쁨에 가득찬 고백을 하게 되는 것이다. 소돔과 고모라에서 롯의 아내가 세상에 미련이 있어서 뒤를 돌아볼 때 소금 기둥이 되어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된 것처럼 오늘 우리에게도 진정 나의 삶의 보좌, 중심이 세상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되어 천국을 누리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소망한다.
Related Media
See more
Related Sermons
See more
Earn an accredited degree from Redemption Seminary with Log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