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103 수요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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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9:15–30 (NKRV)
15 라반이 야곱에게 이르되 네가 비록 내 생질이나 어찌 그저 내 일을 하겠느냐 네 품삯을 어떻게 할지 내게 말하라
16 라반에게 두 딸이 있으니 언니의 이름은 레아요 아우의 이름은 라헬이라
17 레아는 시력이 약하고 라헬은 곱고 아리따우니
18 야곱이 라헬을 더 사랑하므로 대답하되 내가 외삼촌의 작은 딸 라헬을 위하여 외삼촌에게 칠 년을 섬기리이다
19 라반이 이르되 그를 네게 주는 것이 타인에게 주는 것보다 나으니 나와 함께 있으라
20 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칠 년 동안 라반을 섬겼으나 그를 사랑하는 까닭에 칠 년을 며칠 같이 여겼더라
21 야곱이 라반에게 이르되 내 기한이 찼으니 내 아내를 내게 주소서 내가 그에게 들어가겠나이다
22 라반이 그 곳 사람을 다 모아 잔치하고
23 저녁에 그의 딸 레아를 야곱에게로 데려가매 야곱이 그에게로 들어가니라
24 라반이 또 그의 여종 실바를 그의 딸 레아에게 시녀로 주었더라
25 야곱이 아침에 보니 레아라 라반에게 이르되 외삼촌이 어찌하여 내게 이같이 행하셨나이까 내가 라헬을 위하여 외삼촌을 섬기지 아니하였나이까 외삼촌이 나를 속이심은 어찌됨이니이까
26 라반이 이르되 언니보다 아우를 먼저 주는 것은 우리 지방에서 하지 아니하는 바이라
27 이를 위하여 칠 일을 채우라 우리가 그도 네게 주리니 네가 또 나를 칠 년 동안 섬길지니라
28 야곱이 그대로 하여 그 칠 일을 채우매 라반이 딸 라헬도 그에게 아내로 주고
29 라반이 또 그의 여종 빌하를 그의 딸 라헬에게 주어 시녀가 되게 하매
30 야곱이 또한 라헬에게로 들어갔고 그가 레아보다 라헬을 더 사랑하여 다시 칠 년 동안 라반을 섬겼더라
거울치료라는 것이 있는데 원래 의학분야에서는 팔이나 다리 등 한쪽 부위가 마비되어 움직이지 않을때 팔, 다리 사이에 거울을 비추어 마비된 쪽 팔이 움지기는 것처럼 뇌가 인식하고 자극을 받게 하는 치료법입니다.
그런데 한국에서 거울치료는 좀 다른 의미로 사용되는데 “자신이 했던 일을 타인이 하는 것을 봄으로써 자신이 잘못된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 마치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고 잘못을 깨닫는 것과 같다는 의미에서 ‘거울치료’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야곱이 거울치료를 받는 것 같습니다. 이와 같은 야곱을 통해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무엇인지 오늘 말씀을 통해 알아가겠습니다.
야곱은 형 에서의 장자의 축복을 속여 받고 에서를 피해 외삼촌 라반의 집을 향해 떠났습니다. 그렇게 하란으로 가던중 꿈을 통해 야곱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그곳을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인 벧엘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렇게 부모를 통해 말로만 들었던 하나님을 직접 경험하게 되었으니 우리가 생각할 때 앞으로 만사가 형통하고 좋은 일들만 생길 것 같은데 실상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야곱은 외삼촌 라반의 집에 도착하였고 그렇게 한달동안 같이 지낸 후 라반이 야곱에게 말하길 “네가 비록 내 생질이나 어찌 그저 내 일을 하겠느냐 네 품삭을 어떻게 할지 내게 말하라” 아마 한달동안 살면서 야곱이 라반을 도와 이런 저런 일을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삼촌이 조카에게 “아무리 가족이라도 내 일을 거저 하는 것은 아니니 보수를 얼마나 주면 좋겠냐” 묻는 것입니다.
라반의 이러한 태도는 오늘날 우리가 볼 때 조카를 생각하는 너무 좋은 삼촌 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라반이 야곱에게 하는 오늘날로 말하면 “연봉 협상”은 야곱을 우물가에서 처음 만났을 때 한 가족으로 인정하는 것을 번복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관습에 의하면 가족들은 결코 노동에 대한 대가를 받지 않았는데, 라반이 지금 야곱에게 노동의 댓가를 주겠다고 제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라반이 야곱을 정말 사랑하는 조카로 생각했다면 야곱이 새 가정을 시작할 수 있도록 도와 주었어야 합니다. 그런데 라반은 야곱과의 관계를 외삼촌과 조카의 관계가 아닌 주인과 종의 관계로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라반이 야곱에게 노동의 댓가를 지불하겠다는 제안은 호의가 아니라 라반의 물질적 욕심이 드러나는 제안인 것입니다.
라반의 이러한 제안에 야곱은 라헬을 좋아하고 있어 자신의 노동의 댓가로 라반의 둘째 딸인 라헬을 아내로 달라고 요구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면 7년을 라반을 위해 일하겠다고 약속합니다. 그런데 과거 메소포타미아 지역인 누지에서 발견된 문서에 의하면, 남자가 아내를 데려오며 처가에 지불하는 ‘몸값’ 은 보통 은 30-40세겔 정도였습니다. 당시 은 10세겔은 노동자의 1년 품삯이었습니다. 그리니깐 지금 야곱은 70세겔을 지불하는 것과 마찬가지 입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배를 더 낸 것입니다. 물론 야곱이 생각 할 때 라헬이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이러한 조건은 라반이 야곱을 착취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야곱의 입장에서는 외삼촌에게 공평한 협상을 요구할 만한 처지가 아닙니다. 그래서 라반은 이러한 야곱의 약점을 알고 악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외삼촌 라반은 야곱의 요구에 “자신의 딸을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보다 가족인 야곱에게 주는 것이 더 낫다”며 마치 야곱을 위하는냥 허락을 합니다.
성경 본문에 의하면 7년동안 야곱은 열심히 일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7년은 라헬을 사랑했기에 몇일처럼 여겨졌다고 기록하였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7년의 시간이 다 흐르고 야곱이 라반에게 라헬과 결혼 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하고 이에 라반은 동네 사람들을 다 불러모으며 아주 성대하게 결혼식을 치뤄줍니다. 야곱을 위한 잔치였기에 아마 야곱은 마을 사람들과 함께 거하게 취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늦은 밤 드디어 이제 장인이 된 라반이 꾸며 준 신방에 들어가 사랑하는 여인과 첫날밤을 보내게 됩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 일어나보니 우리 모두가 아는 것 처럼 야곱과 함께 첫날밤을 보낸 여인은 야곱이 그토록 사랑했던 라헬이 아니라, 그의 언니 레아 였습니다. 야곱의 입장에서는 하늘이 무너지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지금 일어난 일이 불가능 한 일이라 생각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 밤은 오늘날과 같은 밝은 조명이 없는 시대였고, 야곱은 거하게 술에 취해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 일을 가만히 보면 무엇이 생각나지 않습니까? 바로 야곱이 에서의 장자의 축복을 빼앗을때 눈이 어두운 아버지 이삭을 속인 것과같이 자신도 보이지 않는 상황속에서 속은 것입니다. 그때는 속이는 자였는데 이제는 속는 자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라반에게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25절 입니다.
창세기 29:25 (NKRV)
25 야곱이 아침에 보니 레아라 라반에게 이르되 외삼촌이 어찌하여 내게 이같이 행하셨나이까 내가 라헬을 위하여 외삼촌을 섬기지 아니하였나이까 외삼촌이 나를 속이심은 어찌됨이니이까
흥미로운 것은 야곱이 라반에게 항의하며 사용하는 “속이심”이라는 단어는 과거 에서가 야곱이 자기와 이삭에게 한 일을 설명 할 때 사용한 것과 동일한 단어 입니다.
창세기 27:36 (NKRV)
36 에서가 이르되 그의 이름을 야곱이라 함이 합당하지 아니하니이까 그가 나를 속임이 이것이 두 번째니이다.
그러니 지금 과거 에서가 당했던 억울한 상황을 야곱이 동일하게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은 이 상황에서 무슨 생각을 하겠습니까? 과거 자신의 잘못이 떠오르지 않았겠습니까? 과거의 잘못으로 인해 자신이 지금 자신이 어려움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너무나도 억울한 야곱이 라반에게 따져보지만 별 소용이 없었습니다. 어찌되었던 레아를 아내를 맞이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라반은 이렇게 변명을 합니다. 그 지역풍습 상 언니가 결혼하기 전에 동생을 시집 보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에게 라헬의 몸값으로 다시 7년을 라반 자신을 위해 일 할 것을 요구합니다.
이러한 지역의 풍습이 진짜인지 아니면 라반이 거짓말을 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언니가 결혼하기 전에 동생이 결혼할 수 없다는 풍습이 사실일 지라도 라반은 미리 야곱에게 이야기 했어야 합니다. 하지만 라반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라반의 잘못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지금 야곱만 억울한 상황입니다. 울며 겨자 먹기라는 표현이 딱 맞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다시 7년동안 라반의 일을 도와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나서야 라헬과 결혼 할 수 있었습니다. 라반에게 속아 치른 레아와의 결혼식 잔치가 끝난 7일 후에 라헬과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이미 지난 7년의 종살이는 레아의 몸 값이 되어 버렸기 때문에 라헬의 몸값으로 앞으로 7년을 더 종살이를 해야 합니다. 전혀 사랑하지 않는 여자 때문에 앞으로 7년동안 종살이를 더 해야 하는 야곱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분명 자신에게 거짓말을 한 라반이 미웠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음모에 동조해 자신이 라헬인 척 신혼방에 있었던 레아도 싫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상황을 가만히 보면 과거 야곱이 장자의 축복을 가로챈 사건과 연결이 됩니다. 야곱은 아버지 이삭에게 ‘동생’을 ‘형’이라고 속였고, 지금 라반은 야곱에게 ‘언니'를 ‘동생’이라고 속였습니다. 그리고 라반이 야곱에게 한 말 ‘큰 아이를 두고 동생을 머저 주지 않는다’는 이 말은 야곱이 형의 축복을 가로챈 사건을 이야기 하는 것 같습니다.
과거 야곱은 속이는 자였지만 지금은 속는자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사건은 단순히 야곱이 라반에게 어려움을 당한다 정도로만 이해하기 보다는 과거의 야곱이 장자의 축복을 가로챈 사건과 연결해서 보아야 합니다.
심은대로 거둔다는 말이 있습니다. 지금 야곱의 상황이 딱 그렇습니다. 과거 자신의 잘못을 그대로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야곱이 이삭을 속여 형의 축복을 가로챈 것을 하나님께서는 결코 기뻐하시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결과가 좋으면 과정은 무시해도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결과만 성공을 하면 과정이 조금 정직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을 합니다. 세상은 그렇게 생각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말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우리는 결과 만큼이나 아니 결과보다 오히려 과정이 중요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섬길 때 거룩하지 않는 방법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아주 극단적인 예로 우리가 남의 것을 훔친 돈으로 헌금을 한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그 헌금을 기뻐하시겠습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역을 한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무조건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결과만큼 과정을 더 눈여겨 보시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결과보다 동기와 과정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십니다.
그런데 처음에 말씀드린 것 처럼 지금 야곱은 하나님을 떠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 입니다. 벧엘에서 분명히 하나님은 야곱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창세기 28:15
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지금 하나님이 야곱을 떠나서 야곱이 어려움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지금 야곱에게 과거의 잘못을 회개할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야곱은 자신이 라반을 통해 속을 때마다 자신이 속인 형 에서와 아버지 이삭이 떠올랐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지금이 야곱에게 있어 자신의 과거의 잘못을 회개할 기회를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거처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한 약속을 이루십니다.
야곱은 그의 의도와 관계없이 뜻하지 않게 두명의 아내를 얻었고 이후 레아와 라헬의 종인 실바와 빌하까지 첩으로 얻었습니다. 두명의 아내와 두명의 첩이 있으니 야곱은 엄청 행복 했을거라 생각이 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30장에 자녀로 인해 레아와 라헬이 얼마나 야곱을 괴롭히는지 모릅니다. 야곱은 레아와 라헬 사이에서 많은 갈등과 심적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을 통해 열두명의 아들을 낳았고 그들은 장차 이스라엘 민족의 열두 지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야곱 자신은 전혀 의도하지 않은 것이지만 하나님이 야곱의 복잡한 가정사마저 언약을 이루어 가는 도구로 삼으셨습니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방법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반드시 이루십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애굽에서 종노릇하고 있는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시겠다는 뜻이 세우셨습니다. 모세는 믿지 못했고 이스라엘 민족은 믿지 못하였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애굽에서 구원하셨습니다. 홍해 앞에 선 이스라엘 백성은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모세를 향해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며” 원망까지 하였습니다. 그도그럴 것이 자신들 앞에는 홍해로 막혀있었고 뒤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잡으려고 애굽의 군대가 달려오고 있으니 인간의 눈으로 보면 끝난 것 아닙니까? 누가 거기서 소망을 보고 희망을 보겠습니까? 그런데 믿음의 눈을 가진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모세였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출애굽기 14:13-14
출애굽기 14:13–14 (NKRV)
13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14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그러자 하나님께서 일하시는데 그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방법인 홍해를 갈라 길을 만들어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십니다. 하나님이 뜻을 정하셨으면 그 뜻은 반드시 일어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불평과 불만을 터트리기 전에 우리를 위해 싸우시는 그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다만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땅에 들어가기에 앞서 광야의 시간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훈련시키십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의 시간을 통해 훈련시키시는 이유는 가나안 땅에 들어 갈 수 있는 상태로 만들기 위해서 입니다. 이스라엘 뿐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잘 알 고 있는 바울도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곧바로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니라 3년의 시간을 광야에서 보내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광야에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자로 광야에서 훈련시키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잘 못생각하는 것이 사람의 믿음으로 다시말해 사람의 능력으로 하나님께서 뜻을 이루신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사람은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한에서만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역할을 담당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성도된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와 섭리를 함부로 판단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뜻하신대로 하나님께서 계획하신대로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대로 하나님께서 이루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준비된 자만을 사용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쓰시겠다 계획하시면 만들어 쓰시는 분이십니다.
벧엘에서 분명 하나님은 야곱에게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창세기 28:13-14
창세기 28:13–14 (NKRV)
13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14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나님께서 야곱을 선택하셨고 하나님께서 야곱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의 조상이 되게 하신다고 약속하셨기에 야곱을 사용하셔서 그 뜻을 끝내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이 의도하지 않는 상황속에서도 하나님은 열두명의 아들을 허락하셨고 끝내 그 아들들을 통해 이스라엘을 완성하십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연약하면 연약한대로, 아프면 아픈대로, 힘들면 힘든대로, 죽을 것 같으면 죽을 것 같은 그대로 주님 앞에 나와 주님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자격없는 나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자격 없는 나를 사랑하사 나를 구원하신 그 주님을 바라보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자격없는 나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내 안에서 나에게 끊임없이 기회를 주시고 손 잡아주시는 그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때로 우리가 이해 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할지라도 오직 주님의 인도하심과 섭리를 믿고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거룩한 백성, 성도의 삶을 사시길 주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사랑의 주님 오늘도 말씀을 통해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저희가 어떤 상황 어떤 환경일지라도 주님앞에 나와 주님을 바라보는 것을 포기하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자격없는 나의 모습을 보고 낙심하고 실망하는 것이 아니라, 자격 없음에도 불구하고 내 안에서 역사하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오늘도 맡겨주신 자리에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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