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안 정복의 전초전(신 2:2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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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26-29절에서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먼저 화친을 제안했습니다. 처음부터 시혼과 싸우려 하지 않았습니다. 최대한 평화로운 방법으로 그 땅을 지나가려고 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보여줍니까? 아무리 하나님의 뜻이라고 해도 어떤 동의나 합의 없이 무례하게 강행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무조건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생각으로 일을 밀어붙이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는 것이지요.
오늘날 우리 사회를 보십시오! 국가의 권력기관이 독주하면 독재라고 이야기 합니다. 독재라는 어감 자체가 별로 좋지 않게 느껴져서요, 이 말을 듣는것 굉장히 싫어합니다. 반면에 국가에서 합의된 일들을 틀렸다고 시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무조건 자기들 말만 정당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런 목소리들을 들으며 사람들은 별나다가 이야기 하지요.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목사가 독주할 수 없도록 시스템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래서 어떤 중요한 결정은 공동의회나 제직회 당회에서 하도록 합니다. 하지만 이런 시스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이 이러하니까 무조건 밀어붙이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교회내에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자기 뜻대로 안해 준다고 물의를 일으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물론 그분들의 말이 다 틀린 것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교회의 일은 한 사람의 목소리가 커져서는 안됩니다. 대신에 서로 동의하고 합의하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교회에는 여러가지 의견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의견들 중에서 회의를 거쳐 채택된 내용에 대해서는 순종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그 내용이 무조건 맞다고 할 수 없지만, 다수의 의견이 동의를 했다면 일단 거기에 복종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교회가 제대로 돌아갈 수 있고, 서로간의 마음이 상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31-33절에서 이스라엘은 드디어 아모리 땅을 정복합니다. 불과 40여년전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그 땅을 정복하라고 할때는 싸우러 나가지 않다가, 하나님이 가지 말라고 하니까 가는 청개구리의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리고 결론은 아모리 사람들에게 크게 패배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며 싸우러 나가자, 아모리 사람의 나라 시혼을 정복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보여줍니까? 무슨 일에서든 전략을 세우기 전에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른다면 하나님이 이루시지만, 하나님의 뜻과 반대된다면 하나님을 상대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요즘 여러분들이 추진하는 일들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뜻에 합당합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뜻과 반대입니까?
30-36절에서 하나님은 시혼을 응징하시고 그 땅을 이스라엘에게 넘기셨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스라엘이 무기가 좋고 군대가 잘 훈련되어서 승리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 당시 이스라엘에게는 변변한 무기가 없었습니다. 제대로 된 군대가 없었습니다. 그냥 오늘날로 하면 오합지졸과 같은 사람들이 싸우러 나갔는데 승리했습니다. 여러분 헤스본이라는 나라에 시혼이라는 왕이 다스렸다는 것은 이 나라가 나름 규모와 체계를 지니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당연히 이 나라를 지키는 상비군들이 있었을 것이고, 나름의 체계도 잡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나라와 싸워서 이스라엘이 승리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하고밖에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전쟁에는 하나님이 계셨고,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들을 도우신다는 절대적인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만으로 이길 이유는 충분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헤스본 왕 시혼과 바산 왕 옥과의 전투는 두고두고 기억되는 의미있는 승리였습니다. 이것은 가나안 전쟁의 전초전으로 가나안 땅에서의 승리를 확신하게 해주는 승리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약속도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대적들도 변함없을 태지만, 우리만 변하면 됩니다. 불신에서 믿음으로, 불순종에서 순종으로 말입니다.
37절 이스라엘 백성은 아모리 사람 시혼의 땅을 점령했지만, 하나님이 금하신 암몬의 땅은 가까이 하지 않았습니다. “너희가 밟는 곳은 모두 주실 것이라”는 여호수아 일장 삼절 말씀의 약속은 하나님을 의지하여 땅을 밟기만 하면 밟는 만큼 다 주시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어디든’이 아니라 ‘정해진’ 곳이 있습니다. 아무리 힘이 있어도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신 땅은 절대로 넘봐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삶에는 절제와 양보가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앞에 교회에서 섬길때 목사님이 자주 하신 말씀이 예수 믿는 사람들은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살면 안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그만큼 절제와 양보의 삶이 중요하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힘이 있고, 부자로 살고, 능력이 있어도, 우리는 절제할 수 있어야 하고 양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의 힘과 권력과 재물을 자랑하지만, 예수 믿는 사람들은 그 모든 것을 가져도 절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요? 우리의 삶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방종과 우리의 무절제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고,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게 된다면 그 일은 해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사회적 책임을 강조합니다. 있다고 해서 펑펑 쓰고, 권력을 남용하면 고발하는 일들도 많습니다. 그래서인지 재벌들도 자기들의 부를 자랑하기 보다는, 서민들과 같은 음식을 먹고, 서민들이 즐기는 일들을 하는 것들을 많이 보여주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