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전과 두 가지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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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정이 목표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동행하심이 목표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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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를 위한 기도>
사랑과 은혜가 많으신 삼위 하나님, 이 시간 저희들의 신년 첫 주일 예배를 드리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지난 2023년의 한 해를 감사로 잘 마무리하게 하시고, 또한 2024년에 새롭게 주실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이 시간 저희들의 연약함 믿음을 일으켜 주시고, 또한 동시에 교만하지 않게 하시며, 온전히 하나님만을 바라보게 하여 주옵소서. 저희들 스스로의 지혜와 스스로의 경건으로 하루를 살 수 없습니다. 오직 주님께서 성령의 충만함으로 저희의 삶을 인도하여 주옵소서.
이 시간 말씀을 통하여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아니하며, 참된 믿음으로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전진하는 저희들 되게하여 주옵소서. 말씀이 들리게 하시고, 삶의 자리 속에서 구체적으로 저희들의 행동을 지도하여 주옵소서.
이 시간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나아온 모든 지체들, 주님께서 기뻐하시고, 그 예물을 주의 나라와 사역을 위해 귀히 사용되게 하소서. 또한 이들의 필요를 주님께서 다 아시오니, 마음에 위로를 주시며, 소망을 주시고, 또한 지정의의 모든 필요와 물질들을 공급하여 주옵소서.
이 시간 말씀을 전하는 저와 듣는 이 모두 주님의 말씀만이 남게 하시고, 모든 영광 주님께서 받아주옵소서. 감사드리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1.주의를 끄는 단계
여러분 우리 청년부가 3년간, 24년 올해부터 26년까지 충만이라는 비전으로 함께 나아가기 소원합니다. 우리 안에 주님께서 주시는 부흥을 경험하고, 4부 예배에 이 예배당에 사람들이 가득히 차는 때를 위해 함께 기도하며 나아가길 소망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이와 같이 나를 채우시고, 또한 우리 공동체를 가득히 채우기를 소망합니다.
이러한 비전과 더불어 오늘 여러분들과 나누기 원하는 것은 300명이라는 구체적인 양적인 목표입니다. 물론 우리는 부흥을 꿈꾸며 300명을 외칩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살펴볼 말씀은 기드온의 300명의 본문을 통해서 살펴보기 원합니다. 이 본문 또한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충만히 나타났던 자리였고,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을 경험한 이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숫자가 더해져야하는 것이고, 이스라엘은 비록 숫자가 줄어드는 형태였지만, 그 안에서 우리가 추구할 영적인 원리는 동일합니다.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은 숫자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진정으로 자신을 찾는 자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2.문제제기/문제해결
Q1. 300명의 의미는 무엇인가.
사사기 6-8장 을 살피면 이스라엘 백성과 그들을 압제했던 미디안의 싸움은 4대 1의 싸움에서 500대 1의 싸움으로 바뀌어 갑니다. 미디안의 군대의 숫자는 변화가 없습니다. 약 13만 5천명입니다. 이에 반해서 이스라엘의 군사가 변하는 겁니다. 처음에 모인 숫자는 3만 2천명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이스라엘의 군대 숫자가 많다고 덜어내십니다.
이미 열세인데,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여기서 한편으로는 이 300명에 대해서 사람들의 의견이 분분합니다. 여러분들 중에서도 제게 이 300명의 기준이 무엇인지 묻는 지체들이 있었습니다. 뚜렷하고 명확한 기준은 없어 보입니다.
10명 중에 9명 정도는 기준이 중요하지 않다. 특별한 의미가 없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원래 저도 본문을 그렇게 바라보았습니다. 오늘 저는 사실 10명 중에 1명의 견해로서 본문을 해석해나가려고 합니다.
본문과 더 씨름할수록 특별한 기준이 없이 구분하신 것은 아니라고 여겨집니다. 가령 이런 겁니다. 이 3만 2천명이 모인 것도 그냥 모인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임재하셔서 모이게 된 숫자입니다.
사사기 6:34 (NKRV)
여호와의 영이 기드온에게 임하시니 기드온이 나팔을 불매 아비에셀이 그의 뒤를 따라 부름을 받으니라
위의 말씀을 살펴보면, 여호와의 영이 임했고, 기드온이 나팔을 불자, 므낫세 지파 중에 아비에셀, 즉 기드온이 살던 고향 사람들이 먼저 반응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므낫세 전체에, 그리고 아셀과 스불론과 납달리도 반응합니다.
여호와의 영이 임해서 이렇게 사람들이 모였다면, 하나님의 일하심이 아닙니까? 아니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일하신다면, 수고롭게 할 것 없이 딱 300명만 부르면 되는거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을 먼저 감동시키시고, 사람들을 불러모아서 3만 2천명의 사람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후로 다시 덜어내시는 겁니다.
여기에서 그냥 사람을 덜어내시는 것이 목적이 아니겠다 이런 인식이 생긴 겁니다. 보다 선명한 목적이 있겠구나 말입니다.
무슨 목적일까요. 먼저 본문에서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사람들은 두려움이 없는 사람입니다.
사사기 7:3 (NKRV)
이제 너는 백성의 귀에 외쳐 이르기를 누구든지 두려워 떠는 자는 길르앗 산을 떠나 돌아가라 하라 하시니 이에 돌아간 백성이 이만 이천 명이요 남은 자가 만 명이었더라
여기서 두려워 떠는 사람은 떠나라고 말합니다. 신명기 20:8 “책임자들은 또 백성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두려워서 마음이 허약한 자가 있느냐 그는 집으로 돌아갈지니 그의 형제들의 마음도 그의 마음과 같이 낙심될까 하노라 하고” 두려움이 전염될 수 있기에, 돌려보내라고 말합니다.
율법과 같은 신명기에서도 두려움은 안된다는 겁니다. 삶의 기준이 되는 측면에서 두려움은 기준 미달이라는 겁니다. 싸우러 왔는데, 물러설 생각이나, 어떻게 생명을 보전할 것인가 생각한다면 결코 이길 수 없고, 오히려 방해가 된다는 겁니다. 이 기준에서 3만 2천명에서 무려 2만 2천명이 떠나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2/3 이상이 떠나간 것이죠.
3명이 모여있는데, 그 중에 2명이 떠난다고 해봅시다. 그럼에도 남아있는 1명은 대단한 겁니다. 굳은 결심 가운데 서 있는 사람들이지요. 그러나 상대적으로 남은 자들이 감당해야할 과업은 훨씬 더 큰 일이 되었습니다. 4대 1에서 13대 1의 싸움을 감당해야하게 되었습니다. 앞선 상황도 사실은 충분히 불리한 상황이었습니다. 왜 3명 중에 2명 이상이 떠나갔겠습니까.
그만큼 전황이 불리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숫자로도 열세인데, 미디안 군대는 낙타를 타고 싸웠습니다. 낙타가 굉장히 느릴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아주 빠릅니다. 말만큼이나 빠릅니다. 사막에는 낙타 경주가 있어요. 이곳에서 낙타의 속도를 보면 60~70km/h 속도를 냅니다. 도심을 달리는 자동차가 50km/h면 그보다 빠른거죠. 이렇게 1차적으로 덜어낸 사람들은 분명히 ‘두려움’과 ‘믿음’의 기준으로 나누셨다는 겁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기준은 ‘두려움’이 아니라, ‘믿음’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의지하는 자를 부르시고, 하나님의 구원의 무대를 관람할 수 있도록 세우신다는 겁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하나님께서 한번 더 숫자를 과감하게 줄이십니다. 무려 1만명에서 300명으로 줄여버립니다. 100명 중에 3명만 남는 겁니다. 3% 만 남기시는 겁니다. 아니 이전에 줄인 것은 두려움 때문에 보내셨다고 할 수 있지요. 그런데 이제 그나마 싸울만한 사람들만 남겼는데, 그 마저도 97%나 돌려보내는 겁니다. 이게 될 싸움입니까. 도저히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싸움이라는 것을 알려주시는 겁니다. 이 또한 다시금 믿음으로 싸워야하는 싸움임을 더욱 철저하게 알려주시는 겁니다. 1만명이 13만 5천명과 싸우면, 1인당 13-14명을 상대해야하지만, 300명으로 13만 3천명을 상대하는 것은 거의 1인당 500명을 상대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제는 정말 불가능한 싸움, 즉 하나님의 싸움 속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여기서는 믿음으로 참여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이 또한 믿음으로 참여하는 전쟁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면, 3%의 기준이 궁금하게 됩니다. 어떤 기준인걸까요?
사사기 7:4 (NKRV)
여호와께서 또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아직도 많으니 그들을 인도하여 물 가로 내려가라 거기서 내가 너를 위하여 그들을 시험하리라 내가 누구를 가리켜 네게 이르기를 이 사람이 너와 함께 가리라 하면 그는 너와 함께 갈 것이요 내가 누구를 가리켜 네게 이르기를 이 사람은 너와 함께 가지 말 것이니라 하면 그는 가지 말 것이니라 하신지라
여기서 말씀을 보면, “시험하리라”고 하시면서 줄게 하십니다. 여기서 시험한다는 것은 보통 은에서 찌꺼기를 제거하는 의미에서 많이 사용합니다. 그저 숫자를 줄인다는 의미도 있겠지만, 오히려 걸러내는 의미가 적절합니다. 그래서 다수의 영어번역에서는 이를 shit로 체로 거른다. 알맹이와 껍질을 분리하는 체로 걸러낸다는 의미를 많이 사용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2가지 양상으로 가르는 기준이 무엇이냐면, 물 마시는 양태로 구분합니다. 한 부류는 무릎을 꿇고 마시는 부류이고, 이 사람들이 9천 700명입니다. 그리고 손으로 물을 떠서 마시는 사람이 300명입니다. 물 마시는 양태로 사람을 가른다는 것은 조심스러운 일입니다. 꼭 행동으로 그 사람의 마음을 판단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전시에는 작은 행동도 판별의 기준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정말 집중하는 시기에는 사소한 일에도 행동이 달라집니다. 물을 마시는 가운데 경계가 약해지기 때문에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는 겁니다. 게다가 모든 사람이 동시에 물가에서 물을 마시는데 엎드려서 물을 마신다. 단체로는 굉장히 위험한 일인거죠. 만약 제가 지휘관이라면 이 시기에 경계심이 상당히 높아졌을 겁니다. 어떤 기습이 있을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당시 하롯 샘곁에 진을 치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과 모레 산 앞 골짜기에 진 치고 있던 미디안과의 거리는 약 8km 였습니다. 여기서 낙타를 탄 미디안 군대가 밀려오면, 불과 6-7분이면 도달하는 거리라고 합니다.
여기서 300명의 사람들은 손에 물을 떠서 마십니다. 반대로 9천 700명은 엎드려서 물을 마시는 거죠. 여기서 차이점이 느껴지십니까. 전쟁을 앞두고서 보다 경계심이 높은 사람이 300명의 사람이라고 여겨지는 겁니다. 1만 명의 3% 인원들입니다. 보다 생각이 깨어있는 사람들로 보입니다. 또 앞서 3만 2천명의 300명이면 1%도 안되는 인원들입니다. 단순히 나의 편의를 생각하면 엎드려서 마시면 되지만, 경계를 위해서, 특히나 전체를 위해서 경계하면서 마신다는 겁니다.
여기서 엎드린다.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성경에서 사용되는 의미는 모두 하나님께 사용되거나 아니면, 부정적인 의미를 가집니다. 여기서도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임전의 자세가 분명한 사람들을 세우고 계시다는 겁니다.
사실 이러한 ‘믿음’과 ‘두려움’, 특히나 적극적인 임전의 ‘믿음’이 사사기에서 주요한 주제입니다. 사사기에서는 대부분 점령한 약속의 땅에서 여전히 남아 있는 이방 민족의 뿌리를 뽑는 것이 이들의 사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실패하죠. 오히려 그들을 두려워하며 그들과 조약을 맺습니다. 사사기에는 계속해서 불순종으로 말미암은 이방민족의 침략-그리고 회개-구원-다시 불순종의 사이클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사사기 전체에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라고 말하는 것인데, 오늘 본문에서도 그러한 기준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들이 남다른 ‘믿음’의 소유자라는 것은 100명 중에서 99명이 돌아갔을 때에도, 자신들은 싸워야한다는 것을 받아들였다는 겁니다. 여기서 왜라고 질문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에 싸운다는 겁니다. 이 정도의 자세는 ‘다윗’과 같은 믿음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남들보다 2배 이상의 키를 가진 골라앗을 상대하는 다윗은 떨지 않았습니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 심지어 사울도 떨고 있을 때에, 다윗은 떨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나아갔습니다.
꼭 이들이 물을 마시는 행태로 판단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보다 다양한 문맥과 상황이 이들이 비상한 믿음으로 참전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A1. 부르심의 자리에는 믿음으로 나아가야 한다.
Q2. 하나님께서는 왜 자랑하지 말라고 하시는가?
Judges 7:2 NKRV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너를 따르는 백성이 너무 많은즉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을 넘겨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슬러 스스로 자랑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
그러나 동시에 두번째 교훈은 무엇이냐면, 끝까지 겸손해야한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의 손에 대적들을 넘기십니다. 그리고 300명의 손에 13만 5천명의 어마무시한 대적들을 넘기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래서 자랑하지 못하도록 숫자가 너무 많다. 너무 많다고 하시면서 이토록 많이 줄이신 겁니다. 그러나 1%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탁월함이 있기에 1%에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이것이 믿음을 끝까지 지키기 어려운 이유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기드온 또한 승리의 길 초입에 들어서고 있지만, 기드온의 이야기 결말은 비극적으로 끝납니다. 하나님께서 정말 지극히 연약한 자를 세우셔서 민족을 구원해 낸 영웅의 이야기가 될 수 있는데, 이 이토록 이야기가 비극적으로 끝날까요. 이스라엘의 구원의 과정도 자세히 묘사하지만, 그 이상으로 기드온의 비극도 자세히 조망합니다.
Judges 8:27 NKRV
기드온이 그 금으로 에봇 하나를 만들어 자기의 성읍 오브라에 두었더니 온 이스라엘이 그것을 음란하게 위하므로 그것이 기드온과 그의 집에 올무가 되니라
기드온의 문제는 나중에 탐욕으로 문제가 됩니다. 함께 싸운 사람들에게 탈취한 금 귀고리를 달라고 말합니다. 미디안 군대의 금 귀고리를 모두 모읍니다. 그리고 이를 녹여서 약 20kg의 금으로 된 옷을 만듭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기 집에 두었는데, 여기서 부터 길이 어그러집니다. 원래 기드온의 시작은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심과 동시에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섬기는 것, 즉 우상을 숭배하는 것을 정리하면서 시작됩니다. 그래서 기드온의 별칭 또한 ‘여룹바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기드온이 죽자 사람들은 다시 바알을 숭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인생의 그다지 의미없는 인생이 되었다는 것이 이러한 표현 속에 있습니다. 심지어 그의 아들 하나는 외가의 세력과 힘을 합쳐서, 기드온의 아들, 즉 자신의 형제 70명을 쳐죽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자신도 외가의 세력에 배신을 당해서 죽임을 당합니다. 완전한 비극입니다. 그의 집안 전체가 몰락해버리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과연 우리는 그 기드온이 승리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의 인생에서 승리를 경험했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을겁니다. 오히려 그는 비운의 상징이 되어버렸습니다.
A2. 자기 자랑은 자신을 무너뜨린다.
4. 구체화 하기
여기서 우리는 본문이 주는 어려움을 마주합니다. 분명 믿음으로 나아가야하는데, 여기에 어떤 특권 의식이 없어야 한다는 겁니다. 여기에서 내가 수고했고, 내가 칭찬받아 마땅하기에 내가 무엇인가를 취해야한다는 생각이 없어야 한다는 겁니다.
즉 믿음으로 적극적으로 나아가는데, 어떻게 동시에 겸손할 것인가를 묻는 겁니다. 차라리 믿음 생활을 적당히, 너무 열심히 말고 적당히 하는 것이 낫습니까?
오히려 이것은 믿음이 무엇인가를 제대로 정의하지 못하기에 이와 같은 상황들이 벌어진 겁니다. 믿음은 점이 아닙니다. 믿음은 선과 같습니다. 또 면과 같습니다. 오늘 믿는다고 해서 내일도 오늘과 같은 믿음이 보장되지는 않습니다.
믿음은 결과라기 보다는 과정입니다. 과정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오늘 가운데서 볼 수 있다는 것. 생생히 승리의 현장에 내가 서 있을 수 있다는 것. 그것 자체가 큰 의미이며, 우리에게 하나님의 일하심을 생생히 볼 수 있는 특권이자 선물을 받은 것과 같습니다.
마치 이런 것이지요. 대형 극장에서 뮤지컬을 보면, 멀리서 보기에 배우들의 이동, 얼굴 표정 등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아주 가까운 곳에서 봐야 생생하게 보이는 것이지요. 모두 같은 노래를 듣고, 무대의 움직임을 보지만, 그 생생함을 느끼는 정도가 다르다는 겁니다. 위대한 작품이고, 탁월한 작품일수록 가까이서 보는 묘미가 큽니다.
하물며 그림을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화가의 붓터치, 작품을 어떻게 만들어갔는지 누적된 흔적을 살펴보는 즐거움이 있어야 온전히 그 작품을 감상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이렇게 보면, 우리가 본문에서는 2가지 교훈이었던 것이 하나로 합쳐집니다. 믿음을 견지하되, 겸손한 믿음을 견지하는 것 이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진정한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참된 믿음은 단회적인 승리에 목숨을 걸고, 그 뒤에는 자기 살길과 자신의 이득만 채우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며, 승리 뒤에도 영적인 전쟁이 여전함을 알아야 합니다. 여룹바알의 이름과 같이 여전히 영적인 전쟁은 계속 이어짐을 알아야합니다. 그렇기에 동시에 겸손하며, 동시에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가 더욱 필요함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기에 믿음과 겸손은 서로 배치되거나 상반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현실 속에서는 마치 배치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훌륭한 목사님들도 은퇴와 말년 속에서는 자신들의 필요에 지나치게 국한되어 언론에 오르내리기도 합니다. 분명히 활발한 활동할 때에는 영적 거장처럼 보였습니다.
오늘 기드온도 동일합니다.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영적인 거장처럼 보였습니다. 300명으로 13만 5천명을 무찔렀다. 영적인 거장처럼 보이지요. 그러나 그에게서 하나님이 떠나시면 그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추락합니다. 결국은 하나님이 우리의 목적지가 되어야 합니다. 믿음 또한 하나님이 목적지가 되어야하고, 겸손 또한 하나님이 목적지가 되어야 합니다.
사도바울 또한 그랬습니다. 너무 자만하지 않도록 그에게는 육체의 가시가 있었습니다.
2 Corinthians 12:7 NKRV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바울은 영적인 신비를 깨달았습니다. 수 많은 교회들을 개척하고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그가 자만한다면, 그것은 모든 것을 허무하게 돌이키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바울에게 겸손하도록 육체의 가시를 주셨다고 말합니다. 간질이었다고 평가하기도 하고, 눈이 매우 안좋았다 등등 그의 연약한 부분들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바울은 다시금 오히려 내가 약하게 느껴지는 것이 은혜다라고 말합니다. 내가 오직 그리스도 예수만을 자랑하고, 나는 약함을 또한 자랑한다고 말합니다.
사실 기드온이 두렵고 약하다고 느껴질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표적을 보여주시며, 믿음을 세워주셨습니다. 300명으로 13만 5천명을 상대할 때에도, 이들을 능히 다뤄낼 수 있는 믿음을 주십니다.
그렇기에 믿음과 겸손은 하나입니다. :
하나님의 동행하심이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말씀-결단찬양-기도제목1-기도제목2-축도-송영
기도제목:
오직 주님만을 더욱 구하는 24년이 되게 하시고, 믿음으로 주님의 구원의 역사, 놀라운 일들을 소망하게 하시되, 동시에 겸손한 믿음이 되게 하옵소서. 절반의 믿음이 아닌, 온전한 믿음되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