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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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예배가 되는 성도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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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가 삶이 되도록 하자

한 목사님이 어느 교회에 부흥회를 인도하러 가셨습니다. 새벽예배를 인도하는데 한 할머니가 앞자리에 앉아서 찬송도 열심히 하고 말씀을 얼마나 잘 듣는지 중간 중간에 아멘도 우렁차게 했습니다. 예배를 마친 후 개인 기도 시간에는 또 얼마나 오래 기도하는지 맨 마지막에 나가셨습니다. 그래서 그 목사님은 크게 감동을 받고 자신의 교회에도 그런 분이 계시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날 새벽예배를 마치고 교인들이 다 가고 조용한데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래서 무슨 일인가 밖에 나가보니 바로 그 할머니가 동네 사람들과 싸우고 있었습니다. 왜 싸웠을까요? 나중에 자초지종을 알고보니 그 할머니께서 남의 집 담장에 열린 호박을 따다가 들켜서 싸움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봐서는 안될 장면을 본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떤 생각을 합니까? 이게 바른 신앙의 모습일까요? 여기서 잘했다고 말씀하실 분이 얼마나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모습을 보면서 누구도 잘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신앙생활은 교회 안에서 뿐만 아니라 교회 밖에서도 신앙인 답게 바로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가리켜 우리는 삶으로 예배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삶으로 예배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세상 속에 나가서도 우리가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어떤 자세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습니까? 주일 예배라도 잘 드립니까? 그렇다면 직장에서 가정에서는 어떤 예배자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가 읽은 로마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첫번째는 1-11장까지로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는가’를 다루고 있고 , 이어서 12-16장까지는 ‘구원받은 자가 어떤 자세로 살아가야 하는가’를 이야기 합니다.
오늘 본문 1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여기서 바울은 ‘그러므로 형제들아’라고 시작합니다. 여러분! 바울이 어떤 사람입니까? 하나님의 사도입니다. 석학이고요, 많이 배운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대단한 바울이 로마에 있는 성도들을 향해 형제들아~라고 부르며 자신과 동등한 사람들로 호칭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너희가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경험했다면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고 합니다.
여러분! 로마 교회 성도들이 어떤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경험했을까요? 오늘 우리는 또 어떤 자비하심을 경험한 사람들입니까. 로마서 1-11장을 통해 바울이 말한 자비하심을 우리는 입은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모두 아는바와 같이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죽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이 우리의 그리스도가 되신다는 것을 믿기만 하면 우리는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정말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아무런 잘한 것도 없는 우리를 위해 자기의 하나밖에 없는 사랑하는 아들을 우리를 위해 내어 주신 것 만큼 크신 자비하심이 어디에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하나님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자기의 모든 것을 내어 주시고, 죄인을 우리를 위해 끝까지 인내하시며면서까지 우리에게 자비를 나타내셨습니다.
1절에서 바울이 말하고자하는 바는 바로 하나님의 자비를 경험하였다면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몸은 ‘우리 자신의 존재와 전인격적인 삶’을 가리킵니다. 즉 ‘너희 몸을 드리라’는 말은 ‘너희 자신을 드리라’는 말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를 영원한 사망에서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경험했다면, 우리의 삶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마땅하다는 말입니다.
구약 시대의 제사는 흠이 없는 산 짐승을 죽여서 제물로 바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죽은 짐승을 가져와서 제물로 바치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죽어 있는 몸이 아니라, 살아 있는 동안에 우리 몸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이것이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입니다. ‘우리 몸을 산 제물로 드린다’는 말은 우리 삶 전체가 하나님을 기쁘게 한다는 뜻이요,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의 주인이 되셔야 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순종과 헌신의 삶이 산 제물이요, 그것이 곧 “영적 예배”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삶을 살고자 하는 합당한 모습이 없다면, 우리가 함께 모여 드리는 예배도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많은 신자들이 이러한 삶의 예배를 잊어버린 채, 정해진 시간에 모여 찬양과 기도를 드리고 설교를 듣고 축도로 마치는 것을 예배의 전부로 생각합니다. 어떤 교인들은 운동하러 가거나 낚시하러 가는 차 안에서 라디오나 인터넷을 통하여 “예배를 드렸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모습들은 예배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생겨난 것입니다.
여러분! 예배가 무엇입니까? 헬라어로 ‘예배’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프로스퀴네오’로 ‘존경을 나타내다’, ‘엎드려 절하다’, 혹은 ‘최상의 가치를 돌리다’라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볼때 예배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둘째는 ‘라트레이아’로, ‘예배’ 혹은 ‘섬김’이라는 의미입니다. 영어로 표현하면 ‘service’라는 단어에 해당됩니다.
종합하면 예배는 먼저 하나님께 최고의 존경과 경외감을 표현하는 행위이며 동시에 신자들 상호간의 ‘코이노니아’를 포함합니다. ‘코이노니아’는 다양한 의미로 쓰이는 단어이지만, 일반적으로는 ‘섬김과 교제’를 말하며, 더 구체적으로 정의하면 ‘하나님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나눔과 친교와 협력’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예배는 하나님께 대한 순종의 표현이요, 믿음의 표현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순종과 믿음의 표현은 함께 모여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행위를 통하여 나타납니다. 한 마디로 순종과 믿음의 표현이 삶을 통하여 드러나는 것이 살아 있는 예배입니다. 이것이 바로 1절에서 의미하는 ‘산 제사요’, ‘영적 예배’ 입니다. 또 ‘영적 예배’라는 말에서 ‘영적’이라는 단어는 ‘합리적인’ 또는 ‘이성적인’이란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12장 1절에서의 ‘영적 예배’는 전 인격적인 몸의 희생을 의미합니다. ‘영적 예배’를 영어성경 kJV는 ‘합당한 예배’로, NIV 는 ‘영적 행위의 예배’로 번역합니다. 이러한 예배에서 가장 기본은 무엇입니까? 순종과 믿음의 행위입니다. 바로 이런 차원에서, 너희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산 제물로 드리는 것이 영적 행위의 예배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히브리서 기자는 찬송의 제사를 드리는 것과 선을 행하고 서로 나누는 삶이 바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사라고 말합니다.
그러다보니 어떤 성도들은 ‘왜 꼭 모여서 예배를 드려야만 하느냐’며 각자 알아서 예배를 드리면 된다는 식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예배란 내 방식대로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란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과 믿음의 표현이요, 섬김과 헌신의 표현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주일 예배가 우리 삶의 기초가 되어 나머지 6일간을 예배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구약 시대에 드려진 공동체적 제사는 우리에게 여전히 중요한 예배 원리와 교훈을 줍니다.
어떤 책을 보니 이런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어느 엄마가 있었습니다. 그 엄마는 아이들이 많아서 이것저것 챙기느라 주일 예배에 자주 늦곤 했습니다. 그러자 하루는 남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아이들을 학교에 보낼 때는 늦지 않으면서 왜 주일 예배에 갈 때는 항상 늦어?”
이것은 단순히 주일 예배 시간에 늦지 않는 문제가 아니라 예배에 대한 마음의 자세와 태도에 관한 문제입니다. 어느 누가 자기보다 높은 분을 만나러 가는 자리에 약속 시간보다 늦게 가서 떳떳하게 그분과 대면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자세와 태도는 더욱 용납이 안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을 경배하러 가면서 예배의 약속을 너무나 가볍게 여기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곤 합니다. 이러한 마음 가짐에 대해서 우리는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주일 하루의 온전한 예배를 통하여 받는 은혜는 6일간의 온전한 예배의 삶으로 이끌어 주는 원동력입니다. 이러한 공동체적 예배와 한 주간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예배하는 삶의 예배는 결코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주일이나 혹은 다른 날에 드리는 공동체적 예배는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영적 에너지를 제공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일상 생활 속에서 예배적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고, 그러한 우리의 삶은 영적인 예배가 됩니다. 그런 생활속에서 하나님을 의식하고 경외하면서 정직하고 겸손하게 살아가고, 또 이웃에게 친절과 사랑을 베풀면서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영적 예배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우리가 예배의 정신과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믿음과 순종의 삶을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영적인 예배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신자의 믿음과 순종의 삶이 영적인 예배라고 1절에서 먼저 규정한 후에, 이와 관련된 구체적인 생활에 대해서 2절부터 15장까지 말합니다. 바울은 영적 예배자의 삶을 위하여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2절에서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영적인 예배자가 될 수 있습니다. 2절 를 보십시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영적 예배자가 되기 원한다면 세 가지 명령을 행해야 합니다.
먼저 이세대를 본받지 말아야 합니다. “이 세대”라는 말은 “이 세상”을 가리킵니다. 즉 이 세상의 풍조를 본받지 말라는 거십니다. 여러분 본받는다는게 무슨 말입니까? 그것을 본으로 삼지 말라는 것입니다. 즉 영적 예배는 이 세대를 본받지 않은 것으로 부터 시작됩니다.
제가 과거에 배낭여행을 다닐때 이름만 대면 알만한 교회에서 온 청년팀을 만난적이 있었습니다. 이동 경로가 비슷해서 계속 동선이 겹치게 되었는데요, 참 많이 부끄러웠습니다. 일단 주변에 만나는 한국 사람들이 도와 주어도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이 잘못했는데도 미안하단 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요, 함 밤중에 숙소에서 기타치고 찬양하고 통성기도한다고 숙소를 온통 소란스럽게 만들었습니다. 결국 그것을 듣던 한 불신자가 세상에서 하는 온갖 욕을 늘어놓더니 이불을 덮어쓰고 잠을 청합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어떻게 저떻게 해서 그 선교팀을 제외한 한국인 3명이 밥을 함께 먹었는데, 알고 보니 한 사람은 기독교인이었습니다. 자기는 해외에 나가면 절대 교회 다닌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교회에서 해외에 단체로 나오면 얼마나 민폐를 끼치고 소음을 만드는지 부끄러워 죽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목사님 설교집을 보다가보니 이런 글이 있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의 감람산에는 감람나무가 거의 없다고 합니다. 그나마 몇 그루 남아 있는 것을 철책을 쳐서 보호하고 있는데, 성지 순례를 간 한국인들이, 예수님께서 감람산에서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셨다고 하는 그곳에 세워진 ‘눈물의 교회’예배당의 감람나무 가지를 다 꺽어가는 바람에 나무에 가지가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과연 불신자들을 어떻게 생각할까요? 가는 곳마다 통성으로 기도하고, 할렐루야를 외치면 뭐합니까? 과연 그 모습을 보면서 어느 불신자가 예수 한 번 믿어볼까하는 생각을 하겠습니까? 남이야 어떻게 생각하든 내 기분만 좋으면 되고, 내 이기심만 충족되면 되고, 내 욕망만 채워지면 된다는, 지극히 이기적인 이 세상의 모습과 무엇이 다릅니까?
여러분 우리의 삶이 거룩한 산 제물이 되기 원한다면 우리는 이 세대를 본받지 않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보는 것에 영향을 받습니다. 이 세상의 세태에 본받지 않도록 우리는 세상과 반대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두번재로,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 중에 “예수 믿고 변화되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 변화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바꿔 먹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할는 변화는 조금 다릅니다. 오늘 본문에서 쓰이는 변화라는 것을 영어로 보면 그냥 겉모습만 변하는 change가 아니라, 본질이 바뀌는 ‘transformation’입니다. 그러니까, 겉모습만 바뀐는 변화를 오늘 본문은 말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안팎으로 완전히 변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그것은 마음을 새롭게 할 때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마음을 새롭게 할 수 있습니까? 그냥 우리가 결단하고 이렇게 살겠다고 하면 되는 걸까요? 아니요, 그것으론 불가능합니다. 방법은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바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면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면 새롭게 바뀝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으면 겉으로 change할 수는 있겠지만, transformation할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 출애굽 사건을 한 번 기억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가지 않았습니다. 구름 기둥과 불기둥이 인도하는 곳으로만 그들은 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좋고 안전한 곳으로만 인도하지 않았습니다. 때로는 시내산과 같은 척박한 산으로, 광야와 같은 사람이 살수 없는 곳으로 인도했습니다. 왜 이곳으로 인도했을까요? 이곳에서 바라볼 것은 세상의 문명이나, 세상의 재물이나, 세상의 성공이 아니라 오로리 하나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키시며 그들을 하나님만 바라보도록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왜요? 애굽은 죄악의 도시이자 벗어버려야 할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나안 땅은 새로운 약속의 땅이자 새롭게 가꾸어야 할 땅이었기에, 하나님은 새롭게 훈련된 이스라엘 백성들과 그 땅에서 시작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바라볼때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바라보려면 말씀을 떠나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말씀을 통해 하나님과 동행하고, 말씀을 통해, 애굽을 버리고, 말씀을 통해 가나안을 향하고, 말씀을 통해 가나안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 하나님이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단순히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라고 구체적으로 이야기 합니다. 우선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선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자신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간다고 하면서 나쁜 계획을 세우고 악한 방법을 취하고 부정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만큼 모순되는 일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선하시기 때문입니다. 두번째로, 하나님의 뜻은 그 속에 하나님의 기뻐하심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어디에 있든, 지금 하고 있는 일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라고 한다면, 그 속에 하나님의 기뻐하심이 깃들어 있는지, 행여 그것이 내 욕심과 이기심이 아닌지를 따져봐야 합니다. 세번째로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온전합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일이라면, 대충대충 그 일을 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이 온전하시기 때문에 그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손에 의해 만들어지는 제품에는 불량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하지만 영어 성경을 보면 2절은 두개의 명령문으로 되어 있습니다. 특별히 영어성경 NIV는 2절을 이렇게 번역합니다. “너희가 선하시고 받으실 만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위해서 이 세상을 따르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써 변화를 받으라”
여러분, 우리 자신을 어떻게 제물로 드릴 수 있을까요? 우리의 육체적인 힘을 우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도록 내어 놓습니다. 또한 우리의 생각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각을 하나님의 생각에 맞추는 것입니다. 나아가 우리의 의지와 계획까지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따르는 것입니다.
거룩한 산 제물은 우리 자신이 하나님을 위해 구별되고 하나님을 섬기는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권면합니다.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무슨 말입니까? 믿음으로 구원받은 우리는 불의의 무리가 아니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려져야 합니다. 우리 자신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게 될 때,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매일의 삶속에서 하나님게 참되고 합당한 예배를 드릴 수 있을까요? 2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삶으로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먼저 우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안에 들어온 세상의 가치관을 거절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치관이 무엇입니까? 가치를 바라보는 관점으로 무엇이 나에게 중요한 것이고 무엇이 소중하지 않은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 만들어진 가치관은 나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고 만든 것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을 만나면서 그들이 무심코 던진 한 마디가 우리의 가치관이 될때가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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