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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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골로새서 1:24–29 (NKRV)
24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25 내가 교회의 일꾼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직분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26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27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28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29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시작기도
우리의 구원자되시는 주님 우리를 도와주시옵소서.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을 배우고 그안에서 살아가지만, 너무나 둔해서 배우기 어렵고 너무나 어리석어 쉽게 잊어버리고, 너무나 연약하여 올라가지 못합니다. 성장해야하지만 주저 앉아 있는 날이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의 마음에 은혜없는 날들과, 기도 없는 날들과, 사랑 없는 날들과, 성장하기를 게을러하는 날들과, 양심을 버린날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빛이 우리를 여전히 비추고 계시지만 우리는 여전히 어둠으로 향하려 합니다. 하나님 우리의 모든 것을 드러내는 빛으로 우리가 모든것을 하나님께 내어 놓고 나아가게 하여주시옵소서.
우리의 죄로 단단하게 뭉친 마음을 녹여주셔서 주님을 묵상하고 주님을 바라고 주님의 사랑에 호소하는 우리 교회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은혜를 더하고 자라나게 해 주시옵소서. 우리의 성품에 더 많은 결단과, 삶에 더 많은 향상과 헌신에 더 많은 열정과 우리의 열심에 더 많은 성실함이 있게 도와주시옵소서. 우리의 유일한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오늘의 말씀과 관련해서 신천지의 교리를 하나 말씀해드리고 가려고 합니다. 바른 가르침이 아닌 거짓 가르침은 얼마나 허술하고 그 실체는 별것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으실 겁니다. 저는 이제 청소년들에게 바르게 가르치고자 이것저것 자료를 많이 찾아보는 편인데요. 개혁주의 이단 연구가들의 글을 찾아보다가 신천지는 개역한글만 본다는 글을 읽었습니다.
이만희는 개역한글만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실제로 다른 번역성경은 보지 못하게 합니다.영어성경도 안되고, 히브리어나 헬라어 성경도 못보게 합니다. 이만희의 주장대로 하자면, 하늘에서 보내준 계시 그대로가 개역한글이라는 것입니다.
근데 사실 개역한글은 대한성서공회에서 번역한 것으로 표준어와 활자법이 많이 틀려서 개역개정으로 바뀌었습니다
다른 성경을 보지 못하게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다른 번역본과 비교하면 이만희의 엉터리 성경해석이 들통이 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천상의 피조물인 천사들 중에서는 그룹과 스랍등이 언급됩니다. 주로 복수형으로 나타나는데, 히브리어로 복수형은 "케루빔, 세라핌"이라는 단어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글 성경은 그룹과 스랍으로 음역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한글성경에서 페트로스가 베드로로 음역되고, 이집트가 애굽으로, 페르샤가 바샤로 음역되어 기록된 것과 같습니다.
또한 스랍은 이사야서에 주로 나타나며 정확하게 어떤 종류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사야가 하늘 성전에서 본 이상한 생물체들을 뜻하며, 그룹은 구약 전반에 걸쳐 나타나지만, 주로 에스겔서에 자주 나타나며, 날개가 달린 천상의 피조물로서 하나님 곁에서 지키는 천상의 존재들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근데말이죠. 이 신천지에서 낸 책자에서는 이 그룹을 조직, 단체를 뜻하는 그룹으로 계속해서 이해하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자신들만의 교리를 짜 맞추기 위해서 이런 말도 안되는 해석을 하는 것이죠. 어떤가요?
우리는 뭔가 웃기죠? 말도 안되고 왜 저러지? 이런 느낌이죠. 근데 우리가 분명하게 알아야 할것은 이 신천지라는 말도 안되는 교리를 가진, 거짓 교훈을 가진 이 집단은 여전히 우리 삶 깊숙히 들어와있고, 여전히 우리의 이웃을 꼬셔서 그 구덩이 속으로 끌어 가려고 엄청난 노력을 하고, 엄청난 열정으로 포교활동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거 아시나요? 신천지 포교 전략? 연애입니다. 연애 . 맞습니다. 사랑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연애를 통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나 비신자들을 유혹해서 사랑에 빠지게 만들고 신천지로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청소년들에게 우스개 소리로 가르쳤던 것이 혹시나, 너무나 괜찮은 여자가, 훈훈한 남자가 나를 좋아한다고 쫓아다니면 세수한번 하고 거울을 쳐다보고 정신차리라고 했습니다. 아니면, 유일한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바르게 설명할수 있냐고 물어보라고했습니다.
자 이제, 오늘 성경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왜 이런 서론으로 오늘 설교를 시작했냐면, 바른 가르침, 바른 교훈을 아는 것은 예수님을 머리로 삼은 우리 교회와 그 교회의 몸 된 우리가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할 필수적인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바로 서있어야, 바른 교훈으로 잘 서있어야 우리가 하려는 모든 사역 가운데에 바른 복음이 전파되고, 그 바른 복음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퍼져서 온전하여지고, 강력한 복음의 통로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바울은 오늘 본문을 통해서 강력하게 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골로새서의 배경또한 오늘날과 같이 혼란 시대였습니다. 왜 오늘날과 같다고 표현했냐면, 목회데이터 연구소에 따르면 현재 우리 전체 교인의 약 8%가 이단신자라고 합니다. 100명중 8명이라는 것이죠. 적은수가 절대 아닙니다. 골로새서의 배경또한 이러한 다른 가르침을 가진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철학자라고 말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을 다른 복음에 끌어들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들의 말은 신비스럽고 지적이고 현대적이어서 혹할만 했습니다.
자 그럼, 이걸 우리에게 적용해보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24절 있죠? 사실 이 구절을 잘못 오해하면 바로 그냥 이상하게 되어버립니다. 바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는 말 때문인데요. 질문하나 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이 받으셔야할 고난이 남아있나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셨는데, 그거 말고 더 남은게 있냐는 의미로 받아 드릴수 있습니다.
바로 여기서 대답 잘못하면 이상하게 되는 겁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단번에 확실한 값을 치루셨다고 배웠습니다. 그 십자가의 속죄는 택함받은 백성의 죄를 단 한번에 구원하기에 충분했고 예수님은 십자가 고난으로 완벽하게 구원을 이루셨기에 더이상 남은 고난이 없습니다.
예를들어 이상한 사이비가 이 구절을 가지고 장난쳐서, 사실 예수님의 고난은 끝나지 않았고 남은 고난이 있는데, 자신에게만 특별히 계시가 내려져서 그 남은 고난을 이루기위한 제2의 메시야로 왔다. 이러면 바로 사이비 이단이 나오는 것이죠.
뭔가 자신이 특별한듯 자신만이 이 성경구절을 해석할수 있다고 말하는 것 그런사람들이 바로 오늘 골로새서의 교인들을 괴롭혔던 사람들이고 그 사람들은 여전히 이천년 후의 우리의 삶에도 존재한다는 것이고, 우리는 바로서서 그들에게 휘둘리지 않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서 그럼 왜 바울은 오늘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고 썼을까요? 여러가지 해석들이 있지만 저는 대부분의 개혁주의 주석가들이 주장하는 해석에 동의합니다. 이것은 바울이 우리 교회를 보는 시선에 대한 것입니다. 바울의 독특한 교회론으로 부터 나온 것이라는 것이죠.
남은 고난이라는 것은, 예수님이 교회를 위하여 자기의 몸을 내주셨는데 그다음에 그 교회의 몸의 지체가 된 성도들이 그 교회의 몸을 완성하기 위해서 나름 수고하고 나름 거기에 드려야 될 노력과 수고가 있다는 걸 가르쳐주는 겁니다. 최후 승리는 정해져 있지만 여전히 우리의 삶에는 어려움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난을 받는 것은 예수님의 고난처럼 구속의 가치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를 살리시는 죽음이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누군가를 위해서 죽는다고 해도 그 사람을 사망의 권세에서 살릴수는 없을 것 입니다. 우리의 고난은 예수님의 고난과는 너무나 다릅니다. 그러나 우리의 고난이 그래도 머리로 계신 그리스도를 위해서 교회된 우리가 고난을 받는 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실천적인 의미를 꺼내야 합니다. 사실 방금 교회가 고난을 받는다고 했는데, 우리가 고난을 받는 상태인가요? 사실 우리는 개인적인 고난은 있고 그것이 너무 힘들고 벅차기도 하지만, 교회라는 이름으로 받는 고난에서는 아직은 자유롭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진짜 교회의 이름으로 죽임을 당하고 핍박을 당하는 우리 바로 옆의 북한의 교회부터, 저 멀리 선교지의 교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참 많이 반성했는데요. 그 이유는 24절의 시작에서 바울이 뭐라고 표현하냐면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이라고 표현합니다. 사실 별 의미없이 읽어가던 부분이었는데 생각해보니까 지금 바울은요 골로새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는데요. 사실 바울은 골로새 성도들을 본 적이 없다는 것은 알고 계실겁니다. 바울은 그곳에 교회가 개척되었다는 소식을 들었고, 그곳의 성도들이 어려움을 겪고있다는 소식에 편지를 씁니다. 근데 그들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 입니다. 자신의 교회만이 아니라, 다른 교회이지만 같은 몸으로 묶인 교회들을 위해서 그들이 겪는 고통을 내가 겪는 것처럼 아파하고 관심을 둔다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가 북한의 선교지의 아픔과 고통들을 몸으로 묶인 공동체로써 아파하고 내 몸처럼 돌보며 관심을 두고 있는지, 이슬람 문화권에서 지하교회에서 숨어지내며 교회라는 이름으로 여전히 죽임당하는 그 교회들의 아픔에 우리는 동참하고 있는지 돌아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점에서 사실 저는 우리교회가 건강하다고 생각합니다. 주보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우리교회는 많은 곳에 선교지와 낙도 등에 많은 관심을 두고 있다는 것이고, 그것은 오늘 본문에 빗대어 보면 아주 건강한 교회의 기준이라는 것이고 우리는 나름대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뤄가는 것에 열심히 동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1월 첫주에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멈추지 말자는 것입니다.
성장하자는 것입니다. 저는 이제 우리 교회에 온지 약 한달이 지났고, 매주 목사님 말씀을 들으면서 교회가 지향하고자 하는 방향을 이제 어느정도 감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의 메세지는 여러 중요한 핵심들이 있지만 교회 밖에 대한 관심도 큰 부분을 차지 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사랑으로 똘똘 뭉치고 정말 한 몸 같이 되고, 그 힘을 바탕으로 교회 울타리 밖을 돕는, 지역사회를 돕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고 그 은혜로 우리의 삶을 꾸려가지만, 우리 교회 안에서 아름다운 교제를 이루고 지내지만, 그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넘쳐 흘려서 이 교회 밖의 이웃에게도, 선교지에게도, 낙도와 오지에 흘러 넘치게 하자는 것입니다.
그 것들을 한 걸음 더 실천해 가는 24년 한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25절의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입니다. 이 의미는 바울의 복음이 핵심입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어떤 것을 더하거나 화려하게 각색하거나 한 복음이 아닙니다.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바울이 경험한 하나님의 복음은 다메섹 도상에서 만난 주님뿐이었습니다. 그 이외에 다른 것은 없었습니다.
이것이 유일하게 바울이 가진 권위이며 26,27절을 지나면서 나오는 풍성한 비밀의 영광인 복음이었습니다. 비밀은 예수님이 행하실 구속 사역이 예수님 이전에는 감추어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게 무슨 뜻인지 사람들이 이해하기가 매우 어려웠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사역을 마치신 다음에는 아 이거였구나라고 알게 되었다는 겁니다.
다음으로 바울은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에서 ‘각 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각 사람. 왜그럴까요? 각 사람이 세번이나 나옵니다.
우리 다들 아시죠? 우리 교회 성도님들의 성경에 대한 이해가 되게 높으시더라구요. 성경에서 의도적으로 어떤 단어를 반복한다는 것은 너무나 중요하다는 것이죠?
왜 이 반복을 했냐면, 당시의 미혹하는 자들,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 다른 교훈을 전하는 사람들이 썼던 전략이 ‘특별한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가르침’이 있다고 했기 때문이에요. 특별한 사람에게 해당되는 그 비밀을 특별히 전수 받아야 한다는 것이죠. 수많은 이단들이 아직도 사용하는 수법이지요.
하나님의 말씀은 각 사람, 즉, 온 세상을 향해 펼쳐진 메세지 입니다. 온 세상을 향해 펼쳐진 그 복음은 모든 사람에게 전할수 있다는 놀라운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이것은 온세상을 향해 펼쳐졌다는 의미와 다른 면에서 살펴볼 수 있는데요.
예를들면 혹시 과학을 좋아하는분 계신가요? 양자역학 이런거 말이죠. 그것이 너무나 유용하고 고급 지식이지만 우리를 가르칠수 있나요? 다시 말하면, 우리가 양자역학에 대한 책이 눈에 읽히나요?
아니면 제가 현대미술 전시한 곳을 지나가다가 본 적이 있는데요. 그 미술을 즐기고 그 지식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는 너무나 심오하고 감탄이 나오며 수십억의 가치를 가진 그림들인데, 저에게는 그냥 낙서 정도로 보이고 이해 할수 없는 영역이었죠.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모든 사람에게 전달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복음은, 이 비밀의 영광은 각 사람, 즉 온 세상을 향해 펼쳐있을 뿐 아니라, 각 사람에게 다 전달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도 복음을 듣고 회심할수 있습니다. 원주민도 복음을 듣고 회심할 수 있습니다. 지식인도 복음을 듣고 회심할 수 있습니다.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자랑스러운 점이고 복음은 모든 사람들을 위해 전달되어야 이유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우리가 전도를 해야하고 선교지에 관심을 쏟고 북한에 소망을 갖고, 어려운 이웃들에게 관심을 둬야하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복음 전파를 통해서 믿지 않는 자들의 구원을 이뤄가시기에 복음을 전하는 일을 제대로 하는 것이 교회를 위한 일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충분히 성숙하게 하는 것입니다. 지금 바울은 24절부터 교회 안의 거짓된 것들을 교훈 하면서 그것들을 통해서 완전하게, 참되게 성숙하게 만드려고 하는 것 입니다. 거짓 사역을 경고함으로써 골로새 교인들이 바른길을 재발견 하도록 돕고 있는 것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성장하는 것입니다. 저는 두 가지의 면의 성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교회 안에서의 성장이 있을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성장이란 오늘 바울이 교훈하는 것처럼 복음을 바르게 알아서 거짓 교훈에 적극적으로 대적하는 것입니다. 바르게 서는 것이죠. 그를 위해 교회에서는 양육의 체계가 잘 갖춰져있는데 적극적으로 활용하시기 바랍니다. 들었어도 또 들으시기 바랍니다.
아 들어도 또 들어도되나요? 잘모르겠지만 반복해서 공부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바른 복음으로 길가다가 이상한 눈빛을 가진 사람이 이렇게 물을때 “혹시 어머니 하나님을 아세요?” 혹은 “삼위일체의 비밀에 대해서 아세요?” 라고 할때
아주 당당하게 이렇게 되받아 치는 겁니다. “혹시 삼위 하나님의 두번째 위격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흘려 성취하신 구원을 들어보셨나요?” 그럼 그분들이 아 이 교인들 좀 치네, 좀 하네 하면서 포기할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목숨걸고 지키고 전하고자 했던 그 순수한 복음 그 자체를 담고있는 교회가 되길 소망합니다.
또한 여러분들이 그러한 훈련으로 바르게 성장할때에 우리 교회에 약한자들을 지켜낼 수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 이 미혹하는 자들이 우리 교회에 들어와서 우리를 흔드려할지 모릅니다. 또한 미혹하는 자들 뿐만 아니라 믿음이 약한 우리 옆의 지체들이 삶의 문제에 고통받고 낙심해서 쓰러져 있을 때가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그때에 바른 교훈으로 잘 성장한 우리들이 그들을 엎고 가는 것입니다. 대신 밥먹여주고 씻겨주고 손 잡고 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교회 밖의 침입으로 부터 교회를 지켜내고, 교회 안의 연약한 자들을 지켜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완전한자로 세워지는 의미입니다.
두번째로는 그것을 바탕으로 우리의 관심을 우리 교회를 넘어서 나의 삶과 선교지로 옮기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는 서로 잘 참아주고 사랑다가 직장에서 가서는 마치 하나님 믿지 않는 사람처럼 행동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잠깐 이야기를 하면 사실 저도 신학대학원생, 전도사인것을 굳지 말하지 않을때가 있습니다. 합당한 이유도 있습니다. 먼저 합당한 이유는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이 신학대학원과 전도사라는 제도와 체계를 설명하기가 어려울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잘 이해 못하시기도 하구요.
근데 나쁜 이유에서 말하지 않을때도 있습니다. 언제일까요? 바로 갈등을 만들어야 하는 상황에서입니다. 갈등이 예상된다는 것이죠. 예를들면 환불할때입니다. 부당한 상황에서 화를 참고 그리스도인 답게 나이스하게 할말을 해야하는데
저도 모르게 ‘아니’라는 말이 먼저 나가는 것이죠. 우리 한국사람들은 싸울때 ‘아니’가 먼저 꼭 나가야하잖아요? 아니 그러니까라고 하면서 말이죠. 그래서 가끔 말 안했던것을 저도 회개합니다.
삶에서도 완전한 자로 충분히 성숙하기를 소망합니다. 삶의 모든 자리에서 그리스도인인것을 드러내고 선한 영향력으로 삶의 모습으로 본을 보여서 복음이 전파되는 통로가 되길 소망합니다. 24년에 성장하는 것입니다. 원래 내 앞에 차가 끼어들면 바로 미세 컨트롤해서 끼어들수 없게 만들어야하는데 이제 한두대 정도는 양보하는 것입니다.
음식 주문했을때, 잘못된 것이 나왔을때 바로 가서 따지고 환불 받고 더해서 보상까지 받아야 하는데, 그냥 한번 참고 먹어보는 것입니다. 그리고나서 그 선행들이 들어나게 되었을때, 그때 우리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가 올것인데 그때 그때!! 우리 교회에서 잘 배운 그 순수한 복음의 한마디를 딱 던지는 것이죠
저에게는 방황하던 대학시절 친한 친구들이 몇명있습니다. 저는 일부로 그들과 관계를 유지하고, 저의 믿는 삶의 모습을 보여주곤합니다. 왜냐면 언젠가 그들이 삶에서 고통을 만나고 어려움을 만나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저에게 하나님에 대해 물을때 그때 던질 복음의 한마디를 위해서 입니다.
저는 그 단 한번의 기회를 위해서 그들에게 대학교와는 완전히 다른 삶과 행동과 생각을 가진 저를 보여주려고 노력합니다. 직접적인 복음제시가 통하지 않는 친구들이기에 삶의 모습으로 은연중에 보여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아직은 부족하지만 그들이 체감할수 있을 정도로 애쓰고 노력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삶의 작은 모습까지 바뀌고 성장해야 28절에 ‘완전한’이라는 단어가 말이 되는 것이 아닐까요?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교회의 몸으로 묶인 저 먼 땅의 고통 받은 교회들의 고통을 우리의 고통처럼 생각하며 그들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서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됐을때 우리는 마지막 29절에서 표현한것 처럼 우리의 능력되신 이의 힘으로 힘을 다해서 수고 할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 옆에분들에게 이렇게 선포해보실까요?
수고하셨습니다. 그리고 더 수고하세요. 우리는 교회를 위해서 수고해야 합니다. 성장하기 위해서, 완전한 자로 세움받기 위해서 수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른 복음을 지키기 위해서 수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들이 합쳐져서 교회를 세우고 교회를 지키고, 우리 교회뿐만 아니라 모든 교회를 위한 관심을 갖게 되고 삶의 작은 부분까지도 완전하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근데 29절에 보면 우리가 힘을 다해서 수고해야하는데, 그 힘이 당연히 내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하잖아요?
근데 제가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이것저것 자료를 참고하다가 이 능력의 핵심이 오늘 골로새서 1:11 에 언급됐다는 것을 알게되었습니다.
11 그의 영광의 힘을 따라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뭐라시나요? 이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르게 작용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지금 바울이 열심으로 말하는대로 바른 복음을 지키고 외부로부터 지키고 약한자들을 위해 지키고 관심을 교회 밖으로 돌리고 이 수고를 해야하는데,
이 수고에서 나타날 가장 큰 능력은 교리를 잘 이해하는 머리가 아니고, 약한자를 지키게하는 강한 담력이나, 논리적인 말솜씨나, 육체적인 힘을 가진 능력이 아니라 바로 견딤과 오래 참음의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성장할수록 우리는 더 견딜수 있게 되는 것을 확신합니다. 성장할수록 우리는 더 오래 참을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서로를 오래 참아줌으로 완전한 자로 세워지는 우리가 되는것을 너무나 소망합니다.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하는데요. 애석하게도. 왜 애석하게도라고 표현했냐면 참는 것과 견디는 것을 좋아할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예전에 저는 저 사람하고 천국에서 같이살면 억울할거같다는 생각을 저는 해본적이 있습니다. . 근데 그런사람뿐만 아니라 그런 상황들을, 그런 관계들을 오래 참고 견디는 것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근데 이게 너무나도 신기한것은 우리가 성장할때에 이 오래 참음과 견디는 능력은 ‘기꺼이’라는 태도가 된다는 것입니다. 참아주는것에 우리는 더이상 거리낌을 느끼지 않을 것 입니다. 견디는 것도 기쁘게 거리낌을 느끼지 않을 것 입니다.
기꺼이’라는 태도는 ‘넉넉함이라는 태도로 바꿔 말할수 있습니다. 성장할수록 기꺼이 참아주고 기꺼이 견디는 모습이 되어간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안에 기꺼이의 태도와 넉넉히의 태도가 넘쳐나서 바른 복음 속에서 완전한 자로 세워지는 우리 교회와 성도님들이 되셔서, 선한 영향력을 세계에 미칠 수있는 거룩한 성도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마무리 기도
사랑의 하나님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을 우리가 듣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성장하게 해 주시옵소서. 이 성장을 먼저 이뤄서 우리 교회를 바로 세우고, 건강하고 하나님을 아는 바른 지식으로, 뜨거운 마음으로, 눈물과 섬김으로 그리고 겸손함으로 바로서게 해주시옵소서. 그래서 교회안에 연약한자, 영 육간에 병들고 힘든 마음을 가진 옆의 성도를 잡아줘서 같이 성장 할 수 있는 교회가 되게 해주소서. 또한 이 성장을 넘어서 우리 교회 주변에 아직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고통속에 신음하고 있는 주변의 이웃에게 까지 전달되어서 그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게 해주시옵소서. 우리교회가 앞둔 모든 사역과 교육부서의 모든 겨울 사역에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붙들어주사, 그 모든 사역 가운데, 그 모든 관계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만이 남게 해 주시옵소서. 그 시간들을 통해서 우리의 자라나는 아이들과 청년들이 하나님 앞에 귀하게 쓰임 받는 자녀로 성장할 수 있도록 해주시옵소서. 그들의 정체성은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자녀임을 잊지 않고 살아가게 도와주시옵소서. 오직 겸손함과 온유함으로 하나님 앞에 서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