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빛 되신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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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요한복음 1:5(신약 142쪽)
설교제목 : 우리의 빛 되신 예수님
5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반갑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늘 충만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시다시피 오늘은 귀한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오신 성탄일입니다. 우리 서로를 향해 이렇게 인사해 봅시다. 메리크리스마스!
감사합니다. 아마 여기에 모인 우리는 이미 여러 번의 성탄일 또는 크리스마스를 맞이한 경험이 있으실 겁니다. 제가 맞이한 특이한 크리스마스의 기억은 이렇습니다. 그때는 지금으로부터 딱 10년 전인 2013년12월 25일이었습니다. 그날은 참으로 뜨거운 크리마스였습니다. 이것은 비유적인 표현이 아닙니다.
저는 당시 호주 시드니의 한 식당가에서 열심히 일을하고 있었습니다. 호주는 우리와 계절이 반대입니다. 쉽게 말할면, 우리의 겨울에 호주는 여름이 됩니다. 그러니 호주의 크리스마스는 뜨겁습니다. 더군다나 당시는 호주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아서 정착금을 마련하느라 식당에서 열심히 일을 할 때라 크리스마스를 맞이하여 식당에 몰려든 손님을 맞이하느라 매우 분주하고 뜨거운 크리스마스를 보냈습니다. 이렇게 크리스마스가 뜨거울 수 있다는 것이 오늘까지도 당시를 회상하면서 이색적인 경험으로 다가옵니다.
그 외에도 제가 막 청소년이던 무렵에 새벽송을 돌던 기억이 이제는 특별한 추억으로 다가오곤 합니다. 그때 기억에 새벽 12시 땡하면 구역별로 나뉘어져서 별모양의 호롱을 들고 이집 저집을 돌며 찬송하고 한 푸대 가득히 간식을 받아와서는 밤새워 또래들과 어울렸던 기억이 있습니다. 요사이는 그러한 활동이 주변 이웃들에게 피해를 주기도 하고 또 다음날인 성탄예배에 지장을 주기도 해서 대체로 이를 자제하거나 행하지 않곤 합니다. 그래서 그것이 경험한 적이 없는 새로운 세대들에게는 일종의 로망으로 다가오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 청소년부 학생들도 이러한 요구를 했던 것으로 들었는데요. 그것에 관해 내부적으로 신앙교육에 좋지 않다고 판단하여 이를 행하지 않는 것으로 정했다 들었습니다.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그것이 저와 같이 이를 경험한 세대에게는 약간은 향수어린 성탄절의 정취로 다가오지만요. 과거를 회상해보면 그렇게 아름다운 기억이라 할 수 없는 것이요. 밤을 새워서 놀다가 막상 성탄예배는 졸다가 끝나버리는 상황이 되고 그날은 결국 그 졸음에 붙들려서 성탄의 의미를 되시길 겨를 없이 졸음과 피로에 하루를 흘려보내곤 했습니다. 문득 그것이 세상 사람들의 크리스마스와 같아 보여 염려되곤 합니다. 그래서 이번에 청소년부에 한 결정은 청소년들에게 아쉬움이 있더라도 잘 한 결정이라 여겨집니다.
이렇게 성탄절의 경험을 떠올리면서 저는 우리가 성탄의 의미를 어떻게 되새겨 보면 좋을지를 생각해 봅니다. 그러면서 제가 묵상한 성경구절은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의 말씀인데요. 다시금 같이 읽어보면 좋겠습니다. 요한복음 1장 5절의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1:5(신약 142쪽)
5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처음에 이 구절을 읽고 어리둥절했습니다.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를 우리가 주로 사용하는 개역개정판 성경말고요. 좀더 현대어로 된 새번역 성경을 통해서 보았습니다. 이렇게 나왔는데요.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요한복음 1:5(신약 142쪽)
5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니,
어둠이 그 빛을 이기지 못하였다.
이제 조금 더 명확해 졌으리라 여겨집니다. ‘어둠이 깨닫지 못했다’는 말은 ‘어둠이 빛을 이기지 못했다’는 말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빛이 비치니 어둠이 물러갔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그 빛’이라고 소개되는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성경 특별히 요한복음 예수님을 ‘빛’으로 소개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성탄의 사건이 빛이 비친 것에 비유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빛을 이해함을 통해 성탄의 의미를 이해해 볼 수 있습니다. 언뜻 생각에 이 빛은 여기 이 공간을 밝히고 있는 전등에서 나오는 빛과 같다고 여겨질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어둠을 밝히는 빛 말입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을 빛으로 비유하는 것은 단지 주변을 밝히는 것에 한정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어지는 성경구절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우리 9절과 10절의 말씀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9-10(신약 142쪽)
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방금 읽은 구절을 보면, ‘참 빛 곧 예수님이 세상 가운데 나타나셨는데, 세상은 그 분을 알아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보면, 빛으로 오신 예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밝게 빛나는 종류의 모습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구약성경 이사야 53장은 예수님의 오심을 예언하면서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다(사 53:2)’라고 얘기합니다. 그러니깐 예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눈부시게 빛나는 종류의 외형이나 실제 빛을 내뿜는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그렇다면 이 빛은 무엇일까요? 사실 그것은 우리가 읽은 성경구절 앞에 있습니다. 2절부터 4절까지의 말씀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2-4(신약 142쪽)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예수님의 빛은 간단하게 말하면 생명을 나타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빛은 눈에 보여지는 밝은 빛이 아니라, 우리를 살아 숨쉬게 하는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창세기 1장에 나오는 창조의 이야기는 흥미로운 점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첫째날 만드신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빛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넷째날 만드신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해, 달, 별입니다. 사실 이것은 이상한 얘기입니다. 우리의 상식에 비춰보면, 빛은 해가 있어야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창조의 순서는 빛이 먼저 있고 나중에 해가 만들어집니다. 이렇게 보면, 창조에 처음 만들어지는 빛 역시 우리가 생각하는 주변을 밝히는 빛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창조를 가능케하는 빛 곧 생명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우리의 빛 되신다는 것은 그분에게서 광채가 난다는 얘기아닙니다. 물론 그것도 꼭 틀린 얘기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변모되실 때에 빛나는 모습으로 변화되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지금 요한복음에서 빛이신 예수님을 말하는 것은 그렇게 광채나는 빛이 아니라,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빛으로 오신 예수님입니다. 이를 통해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본문이 이렇게 이해되어지는 것입니다.
앞서 새번역을 통해 소개해드린데로 빛이 비춰서 어둠이 물러간다는 얘기를 오늘 성경본문이 하는 것인데요.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이렇습니다. 생명의 빛이 그와 대조를 이루는 죽음의 어둠을 물리친다는 것입니다. 결국 빛이신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지가 이를 통해 명확해 집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그분을 말미암아 사망권세를 이기고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이렇게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이로부터 성탄의 의미가 나타납니다. 우리는 생명의 빛이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죽음의 어둠 가운데 건져졌습니다. 바로 성탄은 이렇게 우리에게 구원이 임한 날입니다. 바라건데, 오늘 이 성탄의 기쁨을 주님께 감사와 찬송으로 보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생명의 빛으로 오신 주님을 높여 찬양하는 귀하고 복된 하루가 되시기를 간절히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