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디까지 왔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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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3:7-14
‘7.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 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 로부터 난 의라 10.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 어떻게 해서 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 가노라 13.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 가노라.
도입
12월입니다. 사람들은 해마다 지금쯤 이면 시간 참 빨리 간다고 말합니다.어느덧 한 해의 마지막 달이 되었으니 말입니다.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이렇게 앞뒤 좌우로 서로 인사하겠습니다. “한해동안 수고하셨습니다” “앞으로도 달려갑시다” 사실 오늘 전하고자 하는 내용은 이 두가지 인사로 서로 격려하며 마무리 하면 좋겠습니다만 오늘 설교 주제가 물음표로 끝납니다. “우리는 어디까지 왔는가?” 이 질문 자체가 우리가 가야할 목표가 있는다는 의미를 포함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저와 여러분, 즉 그리스도인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저와 여러분이 가야할 믿음의 여정에서 그 마지막 목표를 바라볼 때 현재 우리의 위치는 현재 어디까지 왔는지 사도 바울의 서신서인 빌립보서를 통해서 오늘 같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오늘은 특별히 말씀을 한 구절 씩 살펴보며 강해하도록 하겠습니다. 같이 살펴보고 묵상할 때 하나님의 은혜가 저와 여러분에게 충만하게 임하시길 바랍니다.
본론
빌립보서 3장 7-14절의 오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위대한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 편지를 쓴 이유의 앞 뒤 맥락을 살펴보면 예수 그리스도가 이미 이루신 일 외에 다른 것을 기독교 신앙에 덧붙이려 하는 온갖 유형의 종교를 고발하는 것입니다. 1-6절 말씀이 그렇습니다. 이후 7-14절의 위대한 고백이 나옵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의 고백이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의 고백이기도 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바울이 위대한 사도이고 하나님의 큰 종이기에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었지 우리는 이러한 고백을 할 수 없다!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사도는 오늘의 고백이 자신만의 고백이 아니라 그리스도인 모두의 고백이 되어야 한다고 15-16절에서 ‘우리’라는 1인칭 복수를 쓰고 있습니다. 17절은 함께 나를 본받으라고 까지 합니다. 따라서 오늘 말씀은 사도만의 고백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고백이라는 것을 잘 이해 해야 합니다. 본문 7-8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12절 말씀을 읽어봐야 합니다. 그것은 시간의 흐름상 12절이 먼저 우리에게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같이 12절 말씀을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 가노라.
여기서 ‘잡힌 바’라고 표현된 단어는 원어로는 ‘카타람바노’라고 하는데 부정 과거 수동태 동사로서 쓰여서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지속적으로 계속되는 ‘잡힌 바’된 상태입니다. 우리는 모두는 그리스도 예수에게 붙잡힌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의 사람을 말합니다. 스스로 자기 관심의 대상을 붙잡고 살아 가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그 대상에게 붙잡힌 사람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입니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에게 붙잡혔습니다. 오늘 말씀은 바울이 그날을 기억하고 쓴 말씀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에게 강력하게 붙잡혀서 한눈을 팔 수가 없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저와 여러분을 꽉 붙잡고 계심을 믿습니다. 그 사랑으로 저와 여러분이 오늘 이 수요 예배의 자리에 나오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의 특징은 하나님의 사랑에 붙잡혀서 꼼짝 못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다루시고 무언가를 행하고 계시다는 것을 ,하나님이 자신의 삶에 간섭하고 계시다는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모든 일을 밝혀 다 알지는 못하지만 하나님이 섭리 가운데 우리의 삶을 이끌어 가신 다는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처음부터는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그 사실을 알고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을 내어 드리는 것입니다.
“처음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고 너무 좋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밥을 안 먹어도 예배만 드리면 그렇게 눈물이 나고 좋았습니다. 기도도 잘 못해서 그냥 예수님! 예수님! 이렇게 부르기만 해도 주님이 옆에 같이 계신 것 같은 임재를 경험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첫사랑의 시간은 지속되지 않았습니다. 교회에 나가고 성경을 읽어도 덤덤한 시기가 찾아 왔습니다. 결혼을 하고 자녀를 낳고 세상 일로 바빠지면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 임재를 경험했던 예배는 종교가 되고 생활의 한 부분이 됩니다.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이 다시 찾아 오셔서 회복을 주십니다. 이런 시간이 반복되면서 생각을 합니다. 신앙 생활을 유지하는 것이 나의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구나! 하나님의 사랑에 매여 있구나!”
도저히 그 매여 있는 것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부터 우리의 신앙은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것 같습니다. 그 때부터 내려놓기 시작합니다. 순종이 시작됩니다. 주님은 결코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십자가에서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 모든 값을 지불하시고 우리를 소유하셨습니다. 그분은 자신의 소유된 백성을 절대 놓지 않으십니다. 아브라함이 그랬고,모세가 그랬으며 다윗과 바울 등 모든 성경의 인물들이 그런 과정을 지나감을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열심’이라고 박영선 목사님은 우리 에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그 사랑이 우리를 붙들고 있는 것을 알고 순종할 때까지 우리를 오랫동안 참으시고 기다리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의 열심으로 이루어 가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2023년 한해가 여러분에게 어떠하셨습니까? 하나님을 바라고 조금만 참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붙잡으십니다. 빌1:6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 하노라”
7.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본문 7절을 보면 하나님께 ‘붙잡힌 바’된 자신을 깨달은 그리스도인은 삶의 가치 전환이 일어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전에는 유익으로 여기던 것을 해로 여깁니다. 주목할 점은 이전에 해로 여기던 것을 하지 않는 차원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이전에 우리의 욕심과 욕망을 따라 술,도박,음란,사치 등의 죄악 된 모습들을 차츰 멀리 합니다. 그러나 7절은 우리가 죄 된 삶을 떠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전에 우리에게 유익하게 여겼던 것들을 해로 여긴다고 고백합니다. 세상에는 죄와 선이 아닌 가치 중립적인 요소들이 많이 있습니다. 성공, 부, 힘, 휴가, 명예, 지식, 지위, 학벌 이런 것들은 그 자체로는 중립적이고 그것이 어떻게 사용되어지는 것에 대한 가치 판단이 내려지는 것입니다. 사도는 그러한 것들을 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해로 여긴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그런 것들을 가진 자였습니다. 종교적으로 학문적으로 배운 자였고 이미 로마 시민이고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이고 엘리트였습니다. 그런데 그것들이 그리스도 예수를 알고 나서는 모두 무가치한 것으로 변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무엇때문에 그렇습니까? 다메섹 도상에서 빛으로 만나주신 하나님이 자신을 붙드심을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가진 것이 많으면 복음을 믿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는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 감 같이 어렵다는 주님의 말씀에 제자들이 놀랐습니다. 그러면 누가 구원을 받겠습니까? 라는 그들의 의문에 주님이 어떻게 말씀 하셨나요?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가치전환의 폭이 크면 클수록 힘듭니다. 십일조 드리는 것이 누가 더 어려울까요? 부자일까요? 가난한 이들일까요? 부자 든 가난한 자든 가치전환이 안된 사람이 어렵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은 자기 삶의 요소들을 예수 그리스도로 채워가는 사람 입니다.
그럼 이러한 가치전환의 핵심은 무엇일까요? 왜 우리는 우리에게 유익하던 것을 해로 여길까요? 8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 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8절 말씀을 보면 답이 나옵니다. 내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 입니다. 우리의 신앙, 믿음이 어디까지 왔는가? 라는 질문은 하나님을 아는 우리의 지식이 어디까지 이르렀는가? 라는 질문과 동일합니다. 우리는 처음 믿을 때와 비교하여 지금 얼마나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부요해 지셨는지요? 믿음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정비례 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성장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늘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말씀을 통해 성령님의 빛 비추는 역사로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저는 하나님을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제가 너무도 하나님에 대하여 무지함을 알게 됩니다. 저는 하나님은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너무도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게 됩니다. 저는 하나님을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너무도 자신의 무능력을 알게 됩니다”.
만약,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지식과 인식이 복주시는 하나님에 머물러 있으면 우리의 믿음과 신앙은 기복주의적 신앙에 머무르게 됩니다. 자기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만 바라고 기도 합니다. 그러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징계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어서야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하여 이해하고 자녀됨의 자리로 나아갑니다.
롬 8:17,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는 말씀이 이해가 되기 시작합니다.또, 우주 만물을 섭리로 다스리는 하나님을 알게 될 때, 우리는 그 안에서 비로서 평안을 얻습니다.롬 8:28,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성육신과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을 만나게 되고 깨닫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붙잡히게 됩니다. 심판의 주,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알 때,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나아가게 됩니다.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 로부터 난 의라
9절에서 바울은 중요한 ‘칭의’에 대한 신학적 교리를 이야기 합니다. 사도는 내가 가진의는 율법에서 난 의가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율법은 행위를 말하며 나의 노력과 열정과 수고와 의지로 나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의로움의 정의는 “하나님의 성품에 따른 도덕적 요구를 만족시키는 법적으로 바른 상태”를 말합니다. 율법은 우리에게 그것을 온전히 지키는 것을 요구하는 것과 그것을 우리 힘으로는 충족 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율법이 불완전 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죄로 말미암아 율법의 요구를 충족할 수 없는 것입니다. 갈 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바울이 8절에서 말한 그리스도를 아는 가장 고상한 지식은 ‘칭의’를 말합니다. 바울이 이 비밀을 깨닫고는 이전에 유익하게 여기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게 됩니다 바울은 개인적으로 열정을 가지고 열심이 있는 사람입니다. 율법에도 열심이고 바리세인 이고 기독교를 핍박하기 위해 온 몸을 바치는 남다른 열정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직접 만나게 되기까지는 자신의 노력과 열정으로 구원을 이룰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것이 선이고 하나님을 위하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다 예수님을 만나면서 그것이 ‘하나님의 의’ 가 아니라 ‘자신의 의’ 라는 것을 벌견하게 됩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가집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이야기를 해보라고 하면 대부분 무언가를 하거나, 무언가를 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라고 이야기 합니다.인간적인 노력의 차원을 말합니다. 이것이 복음의 커다란 장벽입니다. 우리는 어떤 가요? 하나님은 우리 마음의 중심을 보게 됩니다. 갈 6:7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경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 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시든지 그대로 거두느니라”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시인하게 됩니다.우리는 사람을 속이고 자신을 속일 수는 있어도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누구든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서게 되면 자신의 죄를 바라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앞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라는 말씀은 진리입니다. 종교인 일수록 자신의 죄를 더 잘 감춥니다. 오랜 신앙생활을 할 수록 더욱 자신의 죄를 감추게 됩니다. 그러나 참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과 어떤 방법으로도 스스로 의롭게 될 수 없다는 것을 시인 하는 것입니다. 잠언 16:2,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 하시느니라’
요한일서1:10 ‘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롬 5:6-8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롬 5:6-8 ‘칭의’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잡힌 바 되는 근거가 됩니다. 그리고 우리 삶의 가치를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로 전환하는 계기가 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고상한 것입니다. 바울이 이 지식을 발견하게 되자 이전에 있던 모든 것들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고백을 합니다. 그는 당대의 석학이요 철학자요 오늘날도 그의 지성은 빛납니다. 그러나 그가 알던 지식도 하나님의 지혜와 복음의 비밀 앞에는 항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로마서 1:16, 로마서 4;5,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이상으로 살펴본 ‘칭의’는 바울이 말한 고상한 지식의 첫 부분 입니다. 시작입니다. 또 다른 지식이 있습니다. 그것이 10절, 11절입니다. 10-11절이 바울의 계속 경주를 다하고자 하는 목표이고 성도의 목표입니다. 무엇인가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류와 교제와 교통입니다. 주님을 더 알고자 하는 열망입니다.
10.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 어떻게 해서 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우리가 어디까지 왔는지를 알아보는 시금석이 되는 말씀입니다. 10절에 ‘알고자 하여’는 헬라어 ‘기노스코’ 로서 무엇에 대하여 감정이나 관찰을 통해 획득한 지식을 말합니다.
바울은
첫째는 부활의 권능을 알고자 합니다. 여기서 권능은 ‘두나미스’로 파워 힘입니다.그리고 부활은 다시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은 죽음을 전제로 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결코 우리 삶의 한 부분을 더하거나 부가적인 요소를 채워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종교는 삶의 한 방편이 될 수도 있고 교양 있는 생활일 수도 있고 여가일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삶의 한 부분을 비워서 채우는 것이 아니라 삶의 본질이 바뀌는 것을 말합니다. 이전에 삶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그리스도의 부활하심과 함께 살아나는 것입니다. 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의 고백이 그렇습니다. 부활의 권능은 그리스도와 함께 먼저 십자가에서 죽을 때 알게 되는 지식을 말합니다. 부활의 권능은 우리에게 ‘ 예수님 닮는 삶’을 열망하고 살아가게 할 능력을 부여합니다.
두번째는 고난에 참여함 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고난에 참여하는 자입니다. 누구든지 세상에서 의롭게 살고자 하는 자들은 고난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딤후 3:12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의인은 세상에서 고난을 받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악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고난은 성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의인으로 살면서도 고난을 받지만 그뿐 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성도들의 고난에도 동참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도 우리 몸에 채우는 존재입니다. 골1:24,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세번째는 그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다. 바울은 죄에 대하여 세상에 대하여, 하나님께 속하지 않는 모든 것에 대하여 죽은 자가 되겠다고 선언 합니다. 고전 15: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 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주님은 스스로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스스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일체의 순종함으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죽음심을 본받아 따라가는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을 좋아하고 따르면 그 사람의 행동을 본 받게 되어 있습니다. 11절 말씀에 마지막으로 부활에 이루기 위해서 우리는 이것들을 합니다. 이것은 장사의 원리입니다. 우리가 세상 가운데 살면서 고난에 참여하고 주님에게 붙잡혀서 세상의 가치관을 버리고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을 따라 살아가는 삶의 이유가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 예수의 날에 주님 앞에 평가받고 온전함을 이루어 주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 위해서 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짧은 시간을 드려서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펴본 빌립보서 3장 9-11절을 바울의 로마서 6-8장의 요약본입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칭의를 거쳐서 성화를 거쳐서 영화에 이르게 됩니다. 누구나 이 과정을 거쳐 갑니다.롬 8:29-30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 가노라
12절은 처음에 언급했지만 몇가지 오해가 있으면 안됩니다. 바울이 여기서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라는 말을 구원의 미완성으로 해석하면 안됩니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이 이미 완성하셨습니다. 구원에 이루는데 우리의 믿음이 기여한 바도 없습니다. 우리는 구원의 방편으로 믿음을 이야기합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믿는 것이 구원을 이루는 요소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구원을 이미 이루어 놓으셨고 이미 이루어 놓은 구원을 우리의 믿음을 통해 부여 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온전히 이루 없다 함도 아니고’도 또한 구원의 불확실성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교리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은 이토록 중요합니다. 구원의 조건으로 우리의 어떠한 노력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물로, 은혜로 구원을 얻은 진실된 그리스도인은 그 이후의 삶에서 성화의 노력에 자발적으로 참여하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 우리는 죄 지을 자유 밖에는 없던 신세에서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은 구원 받은 신자들은 성령의 도우심을 따라 죄짓지 않을 자유를 회복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이 열심으로 우리에게 이루어 가시는 일에 우리의 열심을 더하게 됩니다.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고 나아갑니다. 마틴 로이드 목사는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명백한 역설이 존재합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이지만,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행하지 않으면 우리도 행할 수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지만 새생명을 받은 우리도 감당해야 할 우리의 몫이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왜 이런 방법을 쓰실 까요? 왜 전도의 미련한 것을 사용하여 복음을 세상에 전하시는 가요? 그것은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뜻을 알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과 계획을 다 알 수는 없지만 우리는 순종 할 수 있습니다. 선하신 하나님을 맛보아 알기 때문입니다.
13.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3절 말씀에서 ‘오직 한 일’에 대해서만 설명을 하고 넘어 가겠습니다. 여기서 한 일은 내가 그동안 주를 믿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해온 일들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한’은 원어로 ‘하나’를 말합니다. 따라서 ‘오직 한일’은 하나의 것, 하나의 목표를 말하고 사도 바울의 열망과 목표였던 10-11절 말씀을 의미합니다. 즉 부활의 권능과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주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뒤를 돌아보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과거의 경험하여 의존해서 살려 하다가 혼란에 빠지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습니다.자기 경험에서 무언가를 끌어 오려고 합니다. 마치 수입없이 과거의 자산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과거에 무슨 일을 했던, 나의 과거의 지식이 무엇이든, 지위와 명예와 권력과 부가 무엇이든 그것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만 바라봅니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인은 ‘오직 한일’ 한가지 목표를 바라보고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잡으려고’라는 단어는 원어로는 ‘손을 내뻗는다’ 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최대한 길이를 확장하여 뻗는다는 뜻의 단어입니다. 그리스 올림픽 경기에 결승선에 도달하여 손과 몸을 쭉 뻗어서 들어오려고 애쓰는 것을 설명할 때 이 단어를 씁니다.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것을 말합니다.
14.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 가노라
마지막 14절을 살펴보겠습니다. 푯대를 항하여는 10-11절의 목표를 말합니다. 부활의 권능에 참여하는 것, 그리스도와 성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을 향해서 달려가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부르심의 상을 주시는 하나님만 바라보고 나아가야 합니다. 달려가다는 헬라어 원어로 ‘디오코’인데 박해하다, 따라가다,힘쓰다. 추구하다 로 번역 됩니다. 바울은 이전에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자신의 열심으로 자신의 의를 위해서 열심을 가지고 박해하고 달려 가다가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깨닫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다시 달음질을 향해 나아갑니다. 집중합니다. 고전9:24,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 하라, 딤후4:7-8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 도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디까지 왔습니까? 분명한 것은 우리 중 어느 누구도 아직 목표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목표는 주의 장성한 분량까지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닮는 작은 예수의 삶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전히 달려가야 합니다. 2024년도에도 우리 모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 가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