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하지만 낯선 계명(요일2: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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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함께 살펴볼 본문은 요한1서입니다. 제목에도 잘 나와 있듯, 요한서신은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을 쓴 사도 요한이 교회들에게 쓴 편지입니다. 요한은 교회들을 향하여 크게 두 가지 이야기를 하고 싶었기에 편지를 썼습니다. 첫 번째로는 그리스도인들과 죄에 대한 부분을 다루기 위함이었고 두 번째로 교회에 침투해 유혹하는 거짓 선지자들, 이단들에 대해 경고하기 위함이었습니다.
2024년을 시작하며 우리 교회의 표어는 예수 안에 거하고 또 열매를 맺어가는 삶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우리가 정말 예수 안에 거한다면 어떤 삶을 살고 또 어떤 열매를 맺어가야 할지에 대하여 말해주고 있습니다. 함께 한 절씩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길 소망합니다.

7-8절; 새로운 계명

7-8절에서 요한은 교회들을 향해 ‘새로운 계명을 쓴다‘라고 표현합니다. 이 새로운 계명은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3장 34절에서 언급하신 ‘서로 사랑하라’라는 계명이었습니다. 요한은 7절에서 이 계명이 전혀 낯선 것이 아닌 이미 알고 있는 말씀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8절에서 요한은 다시 새로운 계명을 쓴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무슨 말일까요?
제가 어릴 적, 저희 집에는 부모님께서 정해두신 몇 가지 규칙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게임은 한 시간만, 집에는 9시 전까지 들어오기, 핸드폰은 고등학생이 되고 나서부터라는 규칙들이 그것입니다. 처음에는 규칙들이 굉장히 불편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고, 지식이 자라면서 이 규칙들이 이해가 되었습니다. 한 시간을 넘기고 9시를 넘기면 무슨 큰 일이 일어나기 때문에 그런 규칙들을 정해놓은 것이 아니라 저의 몸과 마음의 건강을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선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어릴 때에 규칙들은 단순히 날 억압하는 ‘명령’으로 여겨졌다면 지금은 그 속에 숨어있는 부모님의 ‘사랑’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전에 이 규칙들이 저를 얽매이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 때의 저는 부모님의 마음을 이해하기보다는 내가 중요했던 어둠의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자라고 나서 부모님의 마음을 이해했을 때에, 그 규칙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나를 향한 부모님의 사랑이라는 큰 뜻을 깨달았을 때에 어둠이라고 느껴졌던 억압은 말씀처럼 따스한 사랑으로, 빛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요한이 이야기하고 있는 새 계명이 이와 같습니다. 유대인들은 모두 토라라고 하는 모세오경을 계명으로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보실 때에 이 계명은 새롭게 될 필요가 있어 보였습니다. 단순히 율법조문이나 법률의 항목들만 보고 있었을 뿐, 그 율법의 본질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율법이 제 기능을 하고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율법의 의미를 파악하기보다는 그저 하나님이 말씀하신 계명들을 지키는 데에만 집중했습니다. 안식일에 일하지 않는다는 핑계로 도움이 필요한 자들을 돕지 않거나 자신이 부정해지지 않기 위해 사회적 약자들을 그대로 두는 유대인들의 모습들이 그러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형제를 사랑하라’라는 새로운 계명을 주시며 율법의 의미를 알려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본질상 원수였던 우리를 죽기까지 사랑하여 주심으로 그 의미를 직접 실천하여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본래 뜻이 무엇인지 깨달은 우리는 분명 빛 가운데 거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읽고 또 나눌 때에 우리는 분명 익숙한 말씀이 낯설게 느껴지는 경험을 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과 좀 더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렇습니다. 우리의 본질은 어둠인데 하나님의 뜻이 참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어둠에 비추어지기에 그렇습니다. 24년 한 해 하나님 안에, 참 빛 가운데 거함으로 어둠이 지나가는 한 해가 되시길 소망합니다.

9-11절; 서로 사랑하라

9-11절에서 요한은 새 계명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정리해줍니다.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있고, 미워하면 어둠 가운데에 거하는 것이다.
말씀대로 서로 사랑하면 우리 속에 거리낄 것(걸림돌, 넘어지게 될 것)이 없습니다. 눈을 맞추는 것도, 인사를 건네는 일들에도 아무런 어려움이 없습니다. 그러나 미워하기 시작하면 피하게 됩니다. 요한은 미워하는 자는 어둠에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빛 가운데 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둠은 우리의 눈을 멀게 만들어서 우리로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게, 판단력을 흐리게 만듭니다. 눈이 멀면 두려워집니다. 극도로 예민해집니다.
요즈음 사랑이 사라지고 사랑 대신 미움이 대화의 주제가 되고 관계를 이어주는 연결고리가 되는 것을 봅니다. 관계에 있어서 눈이 멀어버린 시대 가운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하루가 다르게 실감합니다. 어찌할 바를 모르는 두려움에 혼자이기를 선택하는 사람들이, 표면적으로만 관계를 맺어가는 사람들이 많아집니다. 어둠 가운데에 있는 사람들의 여러 소식을 접하고 또 눈으로 볼 때마다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빛이신 예수님께서는 원수이신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는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신 예수님이 우리 안에 거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우리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가지 않고 누구든지 얼굴과 얼굴을 마주했을 때에 거리낌이 없는 사랑이 충만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요한의 시대나 우리의 시대나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 세상과 반대로 살아가는 것이 쉽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12-14절; 격려하다

요한은 12-14절에서 공동체를 격려합니다. 공동체에는 나이대에 맞추어 자녀(아이)와 아비 청년으로 나뉘어 있었겠지만 이렇게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요한은 편지의 수신자들을 향해 보통 자녀들, 아이들이라 부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를 사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우리도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죄를 사함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두 번째로는 아비들입니다. 부모들은 자녀들을 가르치고 모범을 보여야 하는 존재들입니다. 우리들 또한 다음 세대를 향해 가르치고 본을 보일 의무를 가지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아비들입니다.
세 번째로 청년들입니다. 청년의 상징은 열정과 강함입니다. 전쟁에 나가서 싸우거나 일할 때에 움직이는 역할은 청년들이 감당합니다. 성경은 우리를 하나님의 일꾼들이요 용감한 군사로 부릅니다.
그렇다면 이 모든 구절은 모두에게 우리에게 하는 말입니다. 요한은 세상 앞에 부딪히고 또 그리스도 안에서 살기위해 고민하고 좌절하는 우리에게 이렇게 격려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받았다.’ 우리는 세상 앞에 무릎 꿇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하지만 그 모든 실수를 용서 받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입니다.
‘태초부터 계신 이를 우리가 알고 있다.’ 예수님께서 태초부터, 창조 전부터 계신 하나님이심을 우리가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엄청난 믿음의 고백입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악한 자들을 이겼다.’ 말씀이신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며 우리를 승리 가운데로 인도할 것이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15-17절;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

마지막으로 요한은 15-17절을 통해 그러므로 어둠이 아닌 빛 가운데에, 세상이 아닌 예수 안에 거하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세상을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으로 정리합니다. 당장의 필요와 보이는 것, 그리고 나를 높이는 것이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요한만큼 세상을 잘 나타내는 표현도 없다고 생각됩니다.
창세기에서 인간이 타락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보기도 좋고, 먹기도 좋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웠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셨을 때에도 마귀는 이 세상의 정욕을 앞세워 예수님을 시험했습니다. 우리도 세상 속에서 살아갈 때에 하나님 안에 거할 것인가, 세상에 거할 것인가에 대한 유혹을 수없이 경험하게 됩니다.
최근에 일제강점기가 배경이었던 드라마 한 편을 보았습니다. 일본 측 군인으로 활동하고 있었던 조카와 독립군으로 활동하고 있었던 숙부가 등장합니다. 조카는 추격 끝에 숙부를 검거하게 됩니다. 그리고 숙부를 향해 시대의 흐름을 읽고 좇아가야 합니다. 라고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숙부의 대답이 제게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숙부는 처형을 각오하고 조카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 시대의 흐름을 좇다가 역사의 흐름을 놓치게 되는 일이 있다. 시대는 언제나 잘못된 선택을 할 수 있다. 그 잘못된 선택은 역사에 의해서 평가받게 된다.
말씀을 이야기할 때에, 세상과 반대되는 이야기를 할 때, 헌신과 사랑을 이야기할 때에 조카의 말과 비슷한 말을 많이 듣게 됩니다. 어떻게 말씀대로 살면서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겠냐는 걱정 어린 말들을 듣는가하면 시대에 뒤떨어진다는 말들을 듣게 되기도 합니다. 이따금씩은 내가 정말 그런건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시대 뿐만 아니라 성경이 기록될 때를 포함한 많은 시대가 예수 안에 거하는 것이 잘못된 선택이라고 이야기해왔던 것을 봅니다. 하지만 역사는 무엇이라 기록합니까? 시대가 변해도 역사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시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시대의 흐름과 판도를 바꾼 주역들도 그리스도인들이었음을 보게 됩니다.
우리 교회가 그리고 저와 여러분, 우리의 믿음의 다음 세대들이 말씀 안에 거함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말미암아 세상을 이기고 사랑이 사라진 세상의 질서를 바로잡고 판도를 바꾸는 주역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결론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우리는 어둠이 아닌 빛 가운데에 거하는 사람들입니다. 율법 조문에 얽매이지 않고 참된 진리이신 예수 안에서 서로 사랑함으로 시대에 편승하는 것이 아닌 분별함으로 진리 외에 다른 것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미워하지 않고 사랑하는 일, 세상이 아닌 진리를 따르는 일은 편하다기 보다는 고통스러운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주 안에 거하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하는 우리의 매일의 삶은 시행착오의 연속이요, 곳곳에는 넘어져 생긴 흉터가 생겨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를 그 안으로 부르셨습니다. 요한의 격려처럼 우리를 부르신 예수의 이름 안에서 죄사함을 얻었고 예수의 능력으로 마침내 ‘승리’라는 달콤하고도 영광스러운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그 때에 우리의 흉터는 우리의 승리가 얼마나 값진 승리였는지, 우리의 삶을 인도하신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드러내는 영광스러운 흔적이 되어줄 것입니다.
율법의 참 의미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랑할 때에 그 안에 거하게 됩니다. 서로 사랑함으로 세상이 아닌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이를 부단히 노력할 때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맺어주시는 열매를 가득히 맺어내게 될 것입니다. 예수 안에 거하는, 열매를 가득 맺는 한 해가 그리고 우리의 평생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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