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7:3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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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두 개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25-36절까지는 7장을 계속해서 예수께서 누구신가를 주제로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다루면서 45절부터 52절까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도 믿지 않는다는 것으로 마무리됩니다.
7장 초반부 ‘그 형제들까지도 예수를 믿지 아니’한다고 시작한 7장은 은밀하게 명절에 올라가신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이’ 모세를 들먹이면서 대적하는 모습을 보이거나 25절부터 ‘어떤 사람’이라고 불리는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은 상황에 맞춘듯 말합니다. 31절에서 무리들 역시 표적을 중심으로 예수를 인식하는 것을 살폈습니다. 우리가 이런 부류의 사람들을 다루면서 중요한 것은 ‘나는 아니다’라는 예외를 둔다는 것이죠. 그러나 살펴보면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반응도 1)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녔기 때문에 2) 설교를 많이 들어서 3) 요즘 교회에 대한 일반적으로 아는 식으로 말한다는 것입니다.
지난 주 시청했던 재미있는 영상 두 개를 함께 시청하고자 합니다.
https://www.facebook.com/share/r/g222qJXzpZztxgoG/?mibextid=roAVj8
먼저 어떤 가요? 믿는다는 것이 내가 원하는 것으로 기울여져 있다면 이런 결과는 불보듯 뻔한 것이죠. 문제가 되는 것은 요즘에 공감대를 형성한다고 틀린 것이 맞게 됩니까? 아니면 나는 그렇게 생각해라고 말하면 나의 감정도 소중하고 내가 생각하는 것도 이해받고 그렇게 되면 ‘답’하나 틀리는게 뭔 대수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다음 영상을 보겠습니다.
https://youtube.com/shorts/l0_tUkMvuQY?si=Bz0KQZTGDJUJS3Xv
그렇게 자신 또는 공동체가 맞다고 믿어버리면 결과는 되돌이킬 수 없죠. 그러니까 믿는다는 행동이 송구영신 예배 때 말씀처럼 데살로니가 교회가 했던 ‘믿음의 일’로 나타나야 하는 것이죠. 그런 면에서 믿음은 ‘검증’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제 ‘명절 끝날’인데데 예수께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하십니다. 상황을 좀 살펴야 하는 것은 왜 ‘목마른가’하는 것이죠. 4장에서 물을 길어야 하는 사마리아 여인의 목마른 삶도 기억나고, 6장에서 오병이어의 기적 그리고 물위를 걸으시는 예수께서 가르치신 내용도 기억납니다. 그때 ‘나는 떡이다’라고 하셨죠. 먹고 배부름 그것에 도취되어 배고품을 해결해주는 왕으로 떠받들고자 했을 때 영생 즉 구원받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먹는 것, 생명의 떡으로 연결시켰다면 오늘 본문은 ‘목마름’과 ‘생수’로 연결되고 있습니다.
명절이 ‘초막절’이라고 했습니다. 당시의 초막절에 매우 중요한 의식중 하나가 실로암 못에서 물을 길어다 성전 안으로 가져와 제사장에게 전달하고 그러는 사이에 수많은 인파와 축제의 분위기에 휩쌓이고 제사장은 재단 주변에 물을 붓는 행위를 통해 의식은 최고조로 달하게 되죠. 특히 마지막 날 즉 ‘큰 날’을 성회라고 하는데 이 때는 재단 주변을 7번을 돌며 명절의 절정에 이르게 됩니다.
이때에 시편113-118 의 찬송을 부르는데 114:8에 대표적으로 ‘그가 반석을 쳐서 못물이 되게 하시며 차돌로 샘물이 되게 하셨도다’, 116편에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는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으리로다’ 등 물을 긷고 성전으로 옮기며 재단 주위를 돌며 ‘큰 날’ 답게 성대한 의식이 치뤄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시각적으로 모든 사람이 마지막 날을 떠들석하게 하는 가운데 예수께서 ‘외친다’는 것이죠.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군중들은 이런 외치는 행위를 통해 ‘선지라’의 행위로 인식합니다. 마치 누군가 지하철에서 파란 색 또는 빨간 색 옷을 입고 인사를 한다면 당연히 우리가 그 사람을 ‘정치적 행위’로 보는 것처럼 말입니다.
지금 물을 긷고 성전으로 옮기고 재단을 돌고 붓는 모든 행위는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열망하고 찬양하는 매우 중요한 의식을 하는 그때에 예수께서 외쳐 ‘내게로 와서’라고 했으니 생명의 빵을 이야기할 때보다 더 많은 사람들, 명절의 ‘큰 날’ 성회에서 집중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나를 믿는 자는’이라고 하시면서 예수님 자신이 ‘믿음의 대상’ 믿어야 할 분이라는 것은 즉 요한 사도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자기 메시지’라는 것입니다. 명절의 마지막 성전에서 여호와의 임재를 경험하고자 염원하는 이들의 거룩한 제사는 즉 하나님을 향한 것을, 동일하게 예수를 향하는 것, 나를 믿으라고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구약은 ‘물’의 이미지를 구원과 연결하고 성전의 하나님의 말씀 그리고 생명과 연결을 하는 상징을 갖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사야 12:3 “3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 라고 예언했습니다. 포로로 잡혀간 에스겔에게는 에스겔 47:1 “1 그가 나를 데리고 성전 문에 이르시니 성전의 앞면이 동쪽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 동쪽으로 흐르다가 성전 오른쪽 제단 남쪽으로 흘러 내리더라” 성전에서 나오는 물로 그렸고 요한계시록 22:1–2 “1 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2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 역시 생수를 중심으로 표현합니다. 시편 1:3 “3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고 하며 시냇가에 심은 나무의 형통함을 노래하기도 합니다.
유대인들은 물을 긷는 의식을 통해 메시아가 오시길 명절의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을 때 예수님은 그 자리에서 ‘내게로’ 라고 말씀하실 뿐만 아니라 ‘나를 믿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러한 선포 행위를 선지자의 선포로 받아 들였는데 예수님 역시 ‘성경에 이름과 같다’라고 말하는 것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라는 전제를 갖는 것처럼 성경의 권위 즉 약속의 말씀에 근거하시는 권위를 인정하시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는 것을 요한 사도는 ‘성령’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주석을 해 둡니다. 이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후의 사건이라고 말합니다. 요한 사도는 복음서를 시작하며 시종일관 ‘영광’을 거론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출애굽을 한 후 이스라엘 백성이 왕이신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으며 여호와 하나님은 모세에게 그리고 시내산에서 다시 성막으로 기꺼이 거하셨습니다. 그리고 신약의 예수님은 육신의 거하심으로 우리와 함께 거하신 사건이 ‘영광’이라는 의미를 담는 것입니다.
얼마전 성탄절에 이런 표현을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하늘에서는 영광 땅에서는 평화’ 예수께서 오시는 사건은 하나님께서 ‘거하는’ 사건입니다. 성경은 그것을 모세오경을 통해 보여주었으며 선지자의 글과 시편은 이러한 사실을 예언할 뿐만 아니라 찬송하다는 사실을 ‘성경에 이름과 같다’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40절 ‘이 사람이 참으로 그 선지자라 하며’ 그들은 예수님의 행위를 ‘참으로 그 선지자’로 말할 때 이는 모세의 예언이 성취되었다는 의미를 담고 또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라 하며’ 명절의 마지막 날 성회로 성전에서 치뤄지는 의식이 절정에 달할 때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그 선지자’, ‘그리스도’라는 저자 요한의 글의 목적이 성취되는 것을 보여 줍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갈릴리 사람으로 예수를 알았고 그들이 알고 있는 그리스도가 다윗의 시로 베들레헴에서 나온다는 정보를 들먹이며 예수를 오해했습니다. 믿음은 쟁론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렇다고해서 내가 원하는 것을 충족해준다거나 아는 것에 부합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성경에 이름과 같이’ 즉 성경이 이를 드러내고 드러나신 예수를 우리가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입니다.
앞서 목마름에 노였던 사마리아 여인이 바로 강력한 증거입니다. 그녀가 예수를 받아들인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고 반응했지만 6장 7장의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더한 표적을 경험했지만 예수님의 말씀과 해석 그리고 가르침을 경험했지만 예수님을 거부했습니다. 믿음의 내용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성경의 말씀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입니다.
45절 이하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믿지 않았고 오히려 아랫사람 즉 자신들이 로마로부터 허락된 자치권력하에 경비병을 이용해 예수를 잡아들이고자 했습니다. 하지막 오히려 분위기는 아랫사람들 조차 그들 표현처럼 미혹되고 말았습니다. 이들은 엘리트 그룹이요 특권을 누리는 자들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를 직접적으로 대적하는 자들이며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자들입니다. 저들은 49절에 ‘저주를 퍼붓습니다’ 당국자들 가운데 예수를 믿는 자들 즉 미혹되는 자들이 있었기 때문이고 요한 사도는 여기에서 3장에 나왔던 ‘니고데모’를 다시 언급합니다. 니고데모는 의미심장한 말을 합니다. 51절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심판하느냐’
니고데모는 3장에서 ‘밤에’ 예수를 찾아왔고 대화를 나눈 자입니다. 그의 변화 또는 어떤 식의 상황 설명은 없었지만 여전히 그는 자신의 그룹인 ‘바리새인’ 그룹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말은 예수를 옹호하는 듯 보입니다. 율법이 적용되어 심판하지도 않고 이미 ‘심판’하기로 한 상황은 지금 명절의 상황이 아니라 1년 반전에 안식일에 38년된 병자를 고친 사건으로 이미 율법을 어긴 자, 하나님과 동등하다고 주장하는 신성모독을 한 자를 죽이기로 한 그들의 ‘심판’의 잘못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공정하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주제입니다. 요즘 같은 시기에 ‘공정’이라는 단어의 해석을 서로다른 정치적 입장에서 해석하고 이러한 해석아 충돌하는 것을 오늘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도 경험합니다. 7장의 주제와도 같은 24절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외모로 판단하는 것, 눈에 보이는 것으로 그럴 것이라고 이미 확정적으로 말하고 판단하는 것은 시대가 지나도 여전히 인간 사회에 드러나는 부조리입니다. 인간 사회의 부조리는 인간이 갖는 본질에 가깝다고 말합니다. 여러분도 잘 아는 철학자 카뮈의 대표적인 용어가 부조리입니다. 카뮈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1위하는 것 중 하나인 ‘자살’을 보면서 인간의 부조리를 말합니다. ‘우리는 부조리한 세계에 처해 있다’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는 우리 속에서 이런 부조리를 생산해내고 있다는 것까지 나아가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부조리한 세상에 처한 인간의 슬픈 상황을 보았던 철학자입니다.
공의로운 판단이 사라진 시대가 부조리한 세상의 모습입니다. 예수를 부인하는 다양한 사람들을 7장에서 살피면서 그들의 눈은 현상세계 즉 눈으로 보는 세계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한 편으로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말하며 성전에서 다시오실 메시아를 열망하는 현상 넘어의 것을 믿는 말그대로 아이러니입니다. 그러한 한 복판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내게로 오라’ ‘마시라’ ‘나를 믿으라’는 외침은 2천년이 지나 이방인 중에서도 이방인인 우리에게 여전히 외쳐 이르시고 계십니다.
그런데도 앞서 보여드린 영상처럼 자신의 판단대로/ 느낌대로/ 원하는 대로/ 인생이라는 답을 써내려가려고 합니다. 우리는 요한 사도의 복음을 접하고 있지만 이후 바울은 다양한 형태로 오답을 쓴 자들이 누구이며 그들은 최종적인 심판에 이른다고 경고합니다. 마치 두 번째 영상처럼 그때는 돌이킬 수 없습니다.
특히 히브리서의 9장에서는 이러한 죄사함의 기능인 제사를 말하면서 예수께서 죽으심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상세하기 기술합니다. 그러면서 히브리서 9:27 “27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의 말씀을 하시는데 우리가 경고를 무시할 때 일어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피하려 하는 자들은 참으로 여러 핑계를 활용합니다. 아마 저와 여러분들도 무엇하나 ‘그렇습니다. 잘못했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말하기보다 ‘그래서 그랬다. 그렇게 알았다. 몰랐다’등 핑계에 가까운 표현에 익숙할 것입니다. 말로 그 순간을 모면하려는 것은 말할 줄 알 때부터 인간이 갖는 부조리의 시작입니다. 마치 레몬만 생각해도 입에서 침이도는 반사신경처럼 각자는 자기 좋은 것 즉 자기 이익을 기반해서 움직인다는 것이죠.
그래서 한때는 가르치는 것이 중요했고 매를 사용하여 가르치기도 했지만 이제는 그 누구도 가르칠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합법적인 선생님도 그저 자신의 과목외 어떤 인간다움도 가르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지식은 차고 넘치지만 사람다움은 오히려 찾아볼 수 없는 시대라는 것입니다. 교통 법규를 어긴 사람에게도, 길 거리에 침을 뺕고 쓰레기를 버려도 ‘네가 뭔데 그러냐, 경찰이냐’등 오히려 싸움만 일어납니다. 그래선지 이제는 서로가 고발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시대가 좋습니까? ‘너 그렇게 하면 안돼’라고 말해주는 것이 좋습니까? 아니면 고발할 꺼리를 찾아 민원신고 센터에 고발해서 벌금을 내도록 하는 시대가 좋습니까?
이제 예수님을 부정하는 자들은 오히려 예수를 고발해 죽이려고 합니다. 그들 스스로가 자기의 이익을 따라 움직인 결과는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는 결과로 나타납니다. 그들은 모세의 율법을 알고 있었지만 율법이 가리키는 예수님을 알면서도 거부했습니다. 오늘도 교회를 다니고 우리 스스로가 ‘나는 크리스천’이라고 말하면서도 자신이 믿는 바를 말하지도/ 알지도 못하면서 ‘주장’만 하는 믿음은 오답일뿐만 아니라 심판에 이릅니다. 다른 사람들이 이렇다 저렇다 할 필요는 없습니다. 먼저 자신을 살핀 후에 해도 늦지 않습니다. 같은 성경을 보아도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말하는 ‘성경’은 달랐다는 사실을 오늘 말씀에서 발견할 수 있다면 저와 여러분의 생각 또는 고집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서 정말로 생수의 강처럼 흘러 우리를 적시고 있는지 살펴 보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