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떠나시는 것의 유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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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하시는 은혜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을 믿는 자로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기억하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과의 바른 관계를 잊어버리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바른 구실을 다할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잊어버리게 되면 하나님에 대하여 자신의 역할을 감당할 수 없게 됩니다.
오늘 본문이 그러한 사람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처럼 진리를 좆아 살려는 자들을 격려해주고 밀어주지는 못할망정, 영적 패혈증에 걸려 망각하고 미워하고 괴롭히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누구입니까? 놀랍게도 그들은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하는 유대인들이었고, 그것도 하나님을 너무 잘 알고 말씀을 너무 잘 알며 또 믿는다고 하는 유대 종교지도자들이었습니다.
1. 박해 받을 제자들을 위로하시는 예수님 (1-4절)
이제 예수님은 제자들이 하나님을 잘 모르는 세상인 그 유대인들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라고 한 번 더 말씀하시는데, 여기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그들이 어떤 식으로 미움과 박해를 받게 될 것인지를 묘사하십니다. 그것은 실족할 수 있을 만큼의 심한 박해이고(1), 또 출교라는 가혹한 처벌일 것이라고 하십니다(2). 심지어 ‘죽이는 자’가 있을 것인데, 그런 일은 생길 수도 있고 안 생길 수도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일어날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지금 해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할 때 그들은 자신들에게 닥친 고난이나 심지어 자신들의 죽음, 또 그 전에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 결코 하나님 나라의 실패가 아니며 예수님이 메시아가 아니신 증거도 아니라는 것을 믿을 수 있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하지 않게 하려 함이니” (1절)
예수님은 제자들이 실족하지 않게 하시려고 이 말씀을 한다고 하십니다. ‘실족하다’라는 말은 ‘넘어지다’, ‘죄에 빠지다’라는 뜻으로, 배교에 가까운 넘어짐을 말합니다. 실족한 사람의 대표적 인물이 바로 가룟 유다입니다. 그는 벌써 실족했습니다. 남이 걸어 넘어뜨린 게 아니라 스스로 배교했습니다.
그는 왜 실족했습니까?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예수님을 따라다니다가, 아직 다른 제자들은 그게 아닌 것을 모르고 끝까지 좇아가는데, 가룟 유다는 이미 눈치 채고 먼저 거기서 빠진 겁니다. 자기가 원하는 길을 예수님이 가지 않으신다는 것을 깨닫고는 다른 길로 떠나간 겁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출교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리라” (2절)
출교라는 것은 유대인들에게 사형이나 다름없는 아주 가혹한 형벌이었습니다. 예수 믿고 그리스도인이 되면 집안에서 쫓겨난다는 겁니다.
고대사회 유대인들에게 출교라는 것은 살 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어디론가 멀리 가야 하는데, 출신을 알아보면 다 발각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시 출교당하고 공동체에 머물러 살 수 있는 길은 없었습니다. 죽이지는 않더라도 모든 관계가 단절됩니다. 가족과의 관계가 단절되고, 친구 및 이웃과의 관계도 단절되고, 무엇보다 법적 권리를 다 잃어버리게 됩니다. 살고 있지만 죽은 사람 취급을 받는 것이 출교입니다.
심지어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증인인 제자들을 죽일 것인데, 그러고도 당당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2절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직역하면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을 말합니다. 그렇게 한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사도 바울 아닙니까? 사도행전을 보면, 그가 사울이라는 히브리식 이름으로 활동할 때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다 죽이는 데 자기의 인생을 걸었습니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쫓아가서 잡아다 가두었습니다. 스데반이 죽는 데에도 있었습니다.
사울은 하나님을 위해서 그런다고 생각하며 그렇게 했습니다. 열정을 가지고 하나님을 위해서 한다고 생각하며 그렇게 했습니다. 하나님이 오직 한 분이시라고 굳게 믿고 있던 유대인들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용납하는 것 자체가 불신앙이었고 타협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박해하며 하나님을 위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나와서 예배하는데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역사를 보면 교회가 타락했을 때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참된 신자들을 박해하던 사람들은 안 믿는 사람들이 아니라 오히려 교회였다는 겁니다. 믿는 사람들, 교회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언자적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쫓아내면서도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면서 예배당을 화려하게 꾸며 놓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아닙니다.
그보다 훨씬 더 오래 전인 구약시대에도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라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선지자들을 잡아다 죽이고 핍박하고 고문했습니다. 예레미야가 그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고문당하고 감옥에 갇히고 죽음의 위협을 여러 번 받았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하면서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왜 그들은 잘못된 일을 하면서도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것이라고 그토록 확신하는 것입니까?
“그들이 이런 일을 할 것은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 (3절)
하나님 아버지를 아는 것과 예수님을 아는 것은 분리될 수가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은 믿겠는데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구원자라는 것은 못 믿겠습니다.’라고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참 신앙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정말 믿는 사람이라면 그 아들이신 성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안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도 믿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은 삼위일체이신데 세 분이 완벽한 공동체를 이루신다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다 믿는 것이 믿음이지, 이분은 믿는데 저분은 못 믿겠다고 하는 것은 참 믿음일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안다’는 것은 단순히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으로 아는 것, 관계적으로 아는 것, 체험적으로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진리는 제자들에게 참 평화와 기쁨을 주는 동시에(“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하리라”) 그들이 세상에서 고난을 받게 하는 원인도 된다는 것입니다. 진리가 우리에게 자유를 주는 동시에 진짜로 진리를 붙들고 사는 사람은 고난을 당하게 된다는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이 나중에 고난과 미움을 받게 될 때 ‘왜 우리에게 이런 고난을 주십니까?’ 하고 말하지 않고 예수님이 지금 하신 이 말씀을 기억하면서 ‘그때 말씀하신 것이 드디어 왔구나!’ 하면서 오히려 담대해지기를 원하셔서 이 말씀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말씀하십니다.
“오직 너희에게 이 말을 한 것은 너희로 그 때를 당하면 내가 너희에게 말한 이것을 기억나게 하려 함이요” (4a절)
세상을 사랑하는 길과 예수님을 사랑하는 길이라는 두 갈래 길이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사실은 매일 놓여 있습니다. 물론 궁극적으로 우리가 예수님의 길을 선택하고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받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다음에도 끊임없이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좁은 길과, 자기가 주인이 되어 그저 세상적인 삶을 살아가는 넓은 길이 주어져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이 결단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기로 결단해야 합니다. 한 번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았다고 끝이 아닙니다. 그때부터 시작입니다. 그런데 세상을 사랑하는 것과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은 각각 자기를 사랑하는 다른 방식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세상의 초청에 응답해서 그들이 나를 대접해주는 길을 걸어갈지, 아니면 예수님의 초청에 응답해서 예수님이 나를 사랑해주시는 길을 걸어갈지, 매일 선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 매순간 두 갈래 길 앞에 서 있습니다. 물론 주님은 우리가 주님의 길을 택하기 원하십니다. 또 그렇게 하도록 힘을 주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이 사랑 방식이 사실은 참다운 사랑이라고 이야기하십니다. 진정으로 인간다움을 이루는 길이라고 하십니다. 나도 살고 다른 사람도 살리는 길이라고 하십니다. 그 말씀을 믿고 따르는 것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영광을 보면서 십자가의 삶의 방식, 십자가 희생의 사랑의 방식만이 참다운 생명과 영광에 이르는 길이라고 믿는 것이 우리가 믿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제자들에게 ‘나를 따르면 세상에서 잘되는 것이 아니라 박해를 당하고 죽임을 당할 것이다.’라고 하시니까, 그럼 누가 그런 길을 따라가겠다고 선뜻 나서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도 제자들을 처음 부르신 순간에는 제자가 된다는 것이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하는 일인지에 대해서 다 가르쳐주지 않으셨습니다.
“처음부터 이 말을 하지 아니한 것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었음이라” (4b절)
미리 알려주셨어도 제자들은 못 알아들었을 것이고 예수님의 말씀을 완전히 오해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대신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예수님이 함께하시면서 지켜주시고 가르쳐주셨습니다. 하지만 이제 곧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시고 하늘로 올라가시면, 제자들은 예수님 없이 자기들끼리 미움을 당하고 박해를 당하고 죽임을 당하는 상황을 만나게 됩니다. 그때 그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기억하면서 고난 앞에 두려워하거나 변절하지 않고 주님이 걸어가신 길, 그리고 많은 믿음의 조상들이 걸어갔던 길로 가겠다고 다짐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들은 그렇게 했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정말 놀라운 게,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부활하시고 하늘로 올라가신 후 얼마 안 되어서 그들이 성령을 받고 확 바뀌었습니다. 그 전에는 두려워서 벌벌 떨고 도망가고 심지어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 모여서 문을 잠그고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지?’ 하며 두려워하던 사람들이 당당히 예수님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죽인 종교지도자들이 그들을 잡아다가 때리고 위협하며 죽이겠다고 협박하는데도 ‘사람의 말을 듣는 것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옳다.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들이 매를 맞고 나오면서 기뻐했습니다. ‘야, 우리도 예수님 때문에 박해를 받는 수준으로 올라갔다. 기쁘다.’ 정말 그 부분을 읽을 때마다 큰 도전과 감동을 받습니다. 성령이 오신 다음 이 모든 일이 가능했습니다.
2. 왜 예수님이 떠나가시는 것이 유익인가 (5-7절)
예수님께는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습니다. 3년 반 동안 자신과 함께한 제자들이 아직도 예수님의 말씀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 마음을 예수님이 이렇게 표현하십니다.
“지금 내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 너희 중에서 나더러 어디로 가는지 묻는 자가 없고, 도리어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 (5-6절)
예수님은 자신이 이제 ‘나를 보내신 이’, 즉 아버지 하나님께로 간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제자들 중에 아무도 예수님이 어디로 가시는지 묻는 자가 없다고, 약간은 이상한 말씀을 하십니다. 사실 제자들은 앞에서 이미 이 질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13:36)라고 질문했고, 도마도 “주님, 우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겠습니까?”(14:5)라고 질문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자신은 아버지께로 가는데 지금은 따라올 수 없다고 하셨고, 도마에게는 예수님 자신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는 제자들이 그 뜻을 알지 못한 채 어디로 가시는지 물었지만, 지금은 어디로 가시는지를 알면서도 언급하지 않는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바로 앞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이 출교를 당하기도 하고, 심지어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런 일은 예수님이 먼저 당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이 말씀을 하실 때는 아직 돌아가셨을 때가 아니라 이제 몇 시간 후 잡혀 돌아가시게 되는데, 그러니까 여기서 예수님이 ‘간다’라고 하실 때 그것이 ‘내가 곧 죽는다.’라는 뜻입니다. 제자들은 그것을 알고도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 말씀을 듣고 제자들의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6). 그러니까 제자들은 자기들이 짐작하는 것, 즉 주님이 돌아가신다는 것이 사실일까 봐 두려워서 ‘정말 돌아가십니까?’라고 질문하지 않는 겁니다. 제자들에게는 아직도 예수님을 통해 자신의 욕망을 이루고 싶은 마음이 남아 있습니다. 끝까지 예수님이 왕이 되실 기대를 포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드디어 사형선고를 받고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에야 ‘아, 이제 틀렸구나.’ 하고 도망가게 됩니다. 그때까지 도망을 가지 않은 이유는 아직도 예수님이 왕이 되실까 봐, 그래서 붙어 있어야 자기가 그 밑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시고 40일 후에 하늘로 승천하시기 직전에 감람산(올리브 산)에서 그 유명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너희에게 내리시면, 너희는 능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에서, 그리고 마침내 땅 끝에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다.” (행 1:8, 새번역)
그런데 이 말씀을 하신 이유는 그들이 또 물어봤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하나님 나라를 이루실 때가 지금입니까? 부활의 능력을 보여주셨으니까 그 능력으로 이제 드디어 왕이 되시는 겁니까?’ 아직도 질문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밑에서 예수님이 왕이 되시면 한 자리를 하겠다는 것을 끝까지 포기를 못합니다. 그것을 다 내려놓고 주님이 정말 자기들을 위해 무엇을 기대하시는지를 알고 따르려는 마음이 그들에게 아직 없습니다.
예수님은 앞에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14:1) 하고 제자들을 위로해주시면서, 예수님의 가시는 것은 영원한 이별이 아니라 함께 거하실 곳을 마련하려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죽는 것도 이야기하셨지만 하늘에 올라가실 것도 이야기하셨습니다.
그들을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으시고, 더 이상 몸으로 함께 하지 못하시지만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셔서 영원토록 그들과 함께 계시게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또한 무엇보다도 보혜사 성령이 예수님이 하신 모든 말씀을 생각나게 하심으로써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주실 것이니 마음에 근심하지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여전히 마음에 근심이 가득합니다. 마음 한편에 의심이 있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근심으로 꽉 차 있습니다. 정말 ‘근심 충만’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불신앙과 무지에서 생긴 근심으로 가득한 그들에게 평안과 격려를 줄 수 있는 말씀을 다시 해주십니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7절)
지금 예수님은 제자들이 생각하던 왕이 아니시라고 하십니다. 그들이 바라는 하나님 나라, 사실은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자기들이 떵떵거리며 위에서 군림하는 나라, 예수님이 왕이시고 자기들은 위에서 떵떵거리는 그런 잘못된 하나님 나라의 개념을 완전히 깨뜨리시며 뒤엎버리고 계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왕은 어떻게 왕위에 오를 수 있는가 하면, 죽고 부활함으로 된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나라는 유대인들만의 나라가 아니며 정치적인 나라가 아님을 말씀하십니다. 빌라도 앞에서도 ‘내 나라는 이 땅에 속한 것이 아니다.’라고 하셨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하나님이 이때로부터 약 2천 년 전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언약의 축복대로 모든 시대와 민족을 다스리시는 왕이 되실 것입니다. 이미 그런 왕이 되신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단지 자신을 따르는 소수의 제자들에게만 영광을 주는 나라가 아니라, 죄 아래에서 사망의 노예로 사는 전 인류를 구원하시고 자유를 얻게 하는 나라를 세우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이 있어야 하고, 그래서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신 후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보내주실 보혜사 성령님이 오셔야 가능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을 소위 ‘성부의 시대’라고 부르고, 예수님이 오셔서 복음서의 시대를 ‘성자의 시대’, 그리고 예수님이 가신 후 성령님이 오신 때부터 ‘성령의 시대’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육신의 예수님이 떠나시고 영이신 보혜사 성령님이 오시면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주님이 제자들 가운데 임재하시면서 다른 방식으로 다스리실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이것을 너무나 잘 이해합니다. 우리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아직 그것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지금까지처럼 예수님이 직접 제자들을 훈련하시는 것은 아니지만, 성령님을 통해서 그들을 가르치시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소수의 제자(12명)만 특별히 훈련시키셨지만, 앞으로는 성령님이 교회를 통하여 시대와 지역을 넘어 수많은 백성들을 가르치시며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여기서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하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3년 반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제자들의 관심의 대상이 무엇이었습니까? 예수님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한 자신의 성공이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얻는 유익을 보고 예수님을 따라다닌 것이지, 예수님 자체만 보고 따라다닌 게 아닙니다. 그랬기 때문에 자기들의 기대가 무너지려는 순간 근심으로 가득하게 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우리도 똑같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지금 신앙생활을 하는 목적이 뭡니까? 우리가 왜 도대체 신앙생활을 하고, 여러분은 왜 이 주일 아침 황금 시간에 교회에 오셔서 예배를 드리십니까? 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가? 지금 내가 신앙생활을 하는 목적과 예수님이 나를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것이 서로 다르다면 그 결과가 뭡니까? 우리도 제자들처럼 근심하고 두려워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근심하고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는데 왜 그렇게 근심합니까? 왜 그렇게 두려워합니까? 왜 그렇게 불안해합니까? 주님이 원하시는 것과 내가 원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은 아닌지, 우리가 진지하게 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신앙생활에서 나는 정말로 무엇을 원하는가? 이것을 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혹시라도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또 주님 그 자체가 아니라, 주님을 통해 얻는 어떤 유익 같은 것을 추구하고 있다면, 빨리 마음을 바꿔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근심과 불안이 없어지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을 한다고 해도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 해결책으로 주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 (마 6:33, 새)
‘먼저’, 즉 다른 것을 다 관두라는 게 아니라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우선순위를 잘 두라는 겁니다. 그러면 네가 바라고 원하는 모든 게 따라온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부터 먼저 추구하면 아무것도 되지 않습니다. 혹시 온 천하를 얻더라도 생명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3. 세상을 책망하시는 보혜사 성령님 (8~11절)
이제 예수님은 성령이 오시면 구체적으로 어떤 점에서 제자들에게 유익이 되는지 설명하십니다. 먼저 8~11절에서는 성령이 세상을 책망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사실 이 부분은 신약학자들이 요한복음에서 가장 해석하기 어렵다고 하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먼저 보혜사라는 것은 원래 법정에서 활동하는 존재이므로, 성령님이 세상을 법정에 세운 법조인의 역할을 하실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보혜사가 우리에게는 변호인 역할을 하시지만, 세상을 향해서는 검사의 역할, 즉 책망하고 꾸짖는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8절)
보혜사는 세상의 죄를 드러내시고, 그릇된 의의 기준을 책망하시고, 잘못된 심판을 고소하신다는 겁니다. 여기서 ‘세상’은 일차적으로 예수님을 반대하다가 죽이는 유대인들을 가리킵니다. 하지만 더 나아가서, 언제든지 하나님 나라를 대적하는 모든 불신앙의 세상을 포함합니다.
보혜사 성령님이 오셔서 세상을 책망하시고 허물을 드러내시는 영역이 여기서 3가지로 제시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 가지 문제를 하나씩 설명하십니다.
첫째, 성령은 죄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십니다.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9절)
성령님은 세상이 죄를 짓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시고 책망하시고 고소하십니다. 죄가 무엇입니까? 다름 아니라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이 땅에 왕으로 오셨고, 다시 오실 그날까지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다스리시는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는 것이 죄라고 정의하십니다.
세상은 이제 서로 기분만 나쁘게 하지 않으면, 상호 간에 합의만 하면 거의 무슨 일이든 가능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돈 있고 힘 있는 사람들은 허술한 법망을 피해서 처벌받지 않고, 돈 없는 사람들은 죄인이 되는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도 나왔는데, 늘 힘 있는 자들이 죄와 죄 아닌 것을 결정하는 것이 이 세상의 원리입니다.
지금은 여러 방면에서 소수자들이 차별을 금지한다는 이유로 다수자들의 권리를 오히려 제한하는 역차별도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역차별이라고 하면 또 비난을 받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죄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고, 그분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믿는다고 하면서도 따르지 않는 게 큰 죄인데, 예수님의 말씀이 인간이 인간으로서, 제자가 제자로서,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 수 있게 하는 유일한 기준임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죄라는 뜻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죄는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며 살지 않고 자기가 주인으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시고 성령님이 오시면 이제 세상은 예수님을 죽인 자신들이 얼마나 큰 죄를 지었는지 깨닫게 됩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을 믿는 제자들은 정죄 받게 될 세상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 당장은 자기들이 이기는 것 같고 기세등등하지만, 결국 마지막 심판주는 주님이시기 때문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육신의 목숨을 잃는 것보다 더 두려운 것은 자신이 죄인인 줄도 모르는 채 세속의 영광만을 추구하다가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영원한 죽음에 처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인정하는 사람이 되는 것, 그 인간됨을 일상에서 이루며 사는 것, 나도 살고 다른 사람도 살리면서 사는 것, 심지어 내 생명을 내어주면서까지 다른 사람을 사랑하며 살리는 것, 한마디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사는 것이 우리 인생의 목적입니다.
둘째, 성령은 의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십니다.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10절)
여기서 ‘의’는 요한복음 전체에서 여기에만 나온 단어입니다. 세상은 자신들만의 정의의 기준을 따라서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고소할 증거가 없었는데도, 거짓 증언을 할 자들을 고용하면서까지 예수님을 죽이려 했습니다. 그런데 증인들의 말도 안 맞으니까 나중에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라고 하고 ‘그렇다.’라고 하셨을 때, 사실 자신의 자백으로는 사형이 안 되는데 ‘더 이상 무슨 증인이 필요하냐?’ 하면서 빌라도에게 처형시켜달라고 끌고 갔습니다. 그들에게는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협하는 예수를 제거하는 것이 정의였습니다.
빌라도 역시 예수님에게서 죽일 만한 죄목을 찾지 못했지만, 체제 안정과 자신의 정치적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서 극악한 정치범들에게만 내리는 십자가형을 선고했습니다. 이 일이 종교 지도자들의 시기 때문인 것도 알고 있었고, 정치적인 사안이 아니라 종교적인 문제인 것도 알고 있었고, 그러면서도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 예수님을 제거했습니다. 그것이 그가 말하는 정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의 정의를 인정하셨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게 자기 지위를 지키려던 빌라도는 불과 몇 년 후 로마의 호출을 받고 자살하여 비참하게 끝났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율법의 이름으로 죽임 당하신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아버지 하나님께로 가신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은 무죄임을 하나님 아버지께서 선포하셨다는 뜻입니다.
십자가가 예수님의 죄 사함의 사건이라면, 부활은 예수님의 무죄를 증명하는 사건입니다. 그리고 그분을 의지해서 우리도 그렇게 된다는 것을 약속해주시는 사건입니다. 성령님은 세상의 ‘정의’가 불의이고, 예수님의 ‘정의’가 참된 정의임을 드러내신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이 주장하는 정의의 기준 때문에 고난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못해서 고난을 받으면 안 되지만, 순종하며 잘 사는데도 고난을 받는다면 기뻐할 일입니다. 그리고 결국 심판하시는 분은 주님이심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셋째, 성령은 세상이 내린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십니다.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 (11절)
이 말씀 역시 예수님이 십자가를 염두에 두신 것입니다. 이제 세상은 예수님을 재판해서 사형에 처할 것입니다. 그것도 십자가에 그럴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도 모르고, 그분이 하나님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죽일 것입니다. 이미 가룟 유다는 그들에게 동조해서 생명을 떠나 죽음의 길로 갔습니다.
그들은 예수의 십자가 죽음이 그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 하나님의 저주의 형벌이 집행되었다고 보았습니다. 그들은 외모로 판단하고, 공의롭게 판단하지 않았습니다(7:24). 그들은 거짓말쟁이이며 거짓의 아비인 사탄에게 이용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들이 승리를 확인하고 환호했던 바로 그 십자가의 자리가 ‘이 세상의 임금’인 사탄이 심판을 받는 자리였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의 임금이 쫓겨나리라” (12:31)
이제 모든 세대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죽인 이 세상의 심판이 도리어 그들에게 심판을 가져다줄 가장 끔찍한 죄라는 사실을 성령님이 드러내시게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제자들은 비록 예수님처럼 세상에서 심판을 받아 출교를 당하고, 옥에 갇히고, 심지어 죽임을 당한다 하더라도, 결코 자신들이 하나님께 버림을 받아 심판을 당하는 것이 아님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성령님이 오셔서 성령 받고 변화된 제자들이 사도가 되어 복음을 전하다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했지만, 이 말씀을 기억하고 순교의 자리까지 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정말로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대상은 우리의 몸을 죽일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영혼을 죽이실 수 있는 하나님이셔야 합니다. 천하를 얻기 위해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 편에 서지 말고, 천하보다 소중한 생명을 위해 주님을 끝까지 인정하는 증인으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하나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보다 크시고 세상의 왕보다 크시다는 사실을 제자들과 교회들에게 알려주시게 됩니다. 그래서 서로 물어뜯고 짓밟고 넘어뜨리고 속이고 죽이는 이 세상과 달리 교회가 서로 사랑할 때(13:35), 서로 하나가 될 때(17:21), 세상의 죄와 불의가 폭로되고 그들이 책망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예수님이 세상에게 미움을 받으셨고, 제자들과 교회도 세상에게 미움을 받으며 고난을 당하게 됩니다. 세상에 굴복하며 세상의 가치관에 따라 나아가게 되면 교회는 핍박 없이 죽겠지만, 세상에 저항할 때 교회는 핍박을 당해 죽게 될 것입니다. 사실 교회는 예수님처럼 죽어야 사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어떻게 죽느냐에 따라 진짜로 살기도 하고 진짜로 사라지기도 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신실하게 살아가면 때로는 세상의 인정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죄를 드러내고 계속 그 방향으로 나아가면 미움과 핍박을 당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어떠한 위협에도 굴복하지 않으며 주님이 가신 좁은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을 통해 이 세상에서 소망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소망을 주고, 그럼으로써 성령님의 사역에 동참하여 쓰임 받는, 성령 충만한 주님의 제자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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