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목표는 신앙의 전수입니다. (2024 0109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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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양 : 430장 주와 같이 길 가는 것
창세기 5:21–32 NKRV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므두셀라는 백팔십칠 세에 라멕을 낳았고 라멕을 낳은 후 칠백팔십이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는 구백육십구 세를 살고 죽었더라 라멕은 백팔십이 세에 아들을 낳고 이름을 노아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 라멕은 노아를 낳은 후 오백구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칠백칠십칠 세를 살고 죽었더라 노아는 오백 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
성경을 읽다보면 당황스러운 본문들을 마주할 때가 있다. 족보. 족보를 통해서 우리는 어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을까?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의 날 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우리의 혼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한다고 했는데, 이 족보, 이름들의 열거에는 어떤 은혜가 있을까?

5장의 위치

창조 -> 에덴동산 -> 아담과 하와(사람의 창조) -> 선악과 사건(죄가 들어옴) -> 가인과 아벨(죄의 결과)
이 사건들을 지나 5장이 나오게 된다. 5장의 마지막에는 노아를 소개하고, 6장에서부터 대홍수 내러티브로 이어지게 된다.

앞선 주제와 연관했을 때 : 죽음

아담과 하와의 선악과 사건 이후로 사람의 인생의 종말은 죽음이었다. 죄의 삯은 사망. 죄의 결과로서의 죽음은 4장의 아벨 이후로 처음 등장하게 된다. 그래서 이 족보에서 이름들의 열거, 특히 그들의 죽음은 이제 사람에게 실재하게 됐다. 그러나 희망적인 발견은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성취되고 이뤄지고 있다는 점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후손들을 계속 내고 있다.

뒷 주제와 연관했을 때 : 위로

5장에 이어서 나오는 6장은 대홍수로 말미암은 인간 족속의 멸절이다. 앞서 본 단순한 한 개인의 죽음이 아니라 전 인류의 멸망을 이야기한다. 한 개인으로 말미암아 들어온 죄는 한 사람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전 인류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폭주했다. 사람에게 죽음은 이렇게 처절하고 치명적이다. 인류에게는 비극적인 종말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5장의 마지막이 노아라는 인물로 끝맺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5장에서 다른 아버지들과 달리 그의 죽음은 5장에 기록되지 않았다. 심지어 그의 아들들의 이름까지 언급된다.)
노아의 이름은 안식과 위로라는 뜻의 나함을 어원으로 가진다. 창세기 5:29 “이름을 노아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 라멕은 노아의 이름을 통해 인류에게 “안식”과 “위로”가 있을 것임을 선포했다. 즉, 하나님의 사람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 하나님의 위로와 안식이 기다리고 있다. 인류가 비극적인 종말로만 끝나지 않을 것임을 알게 된다. 홍수 중에도 인류를 보존하는 노아의 역할은 그의 이름의 뜻대로 사는 사명이다.
이로써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의 죄를 담당하시고 죽음을 이기신 이유에 대해 알게 된다. 인류의 종말은 죽음이었고, 죽음만이 예비되어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예수를 통해 죽음을 넘어 하나님의 위로의 품으로 들어오길 원하셨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을 이기고 부활함으로 영원한 생명의 길을 우리에게 주셨다.

이름의 열거가 오늘 우리에게 주는 의미

5장의 족보, 이름들의 열거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창 5:1) 인간의 지속을 보여 준다. 또한 족보 전반에 걸쳐 발생한 죽음에서, 타락의 영향도 보여 준다. 이 장의 대부분은 하나의 공식을 따르고 있다. 이름과 그가 살았던 연수, 죽음. 그러나 그 공식이 깨지는 곳에서는 희망이 존재한다는 것도 보여 준다. 에녹은 죄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가 여전히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에녹은 하나님과 함께 걸었다”). 이 장면은 아담과 하와가 살았던 에덴동산을 떠올리게 한다. 아담과 하와는 최초의 인류로 하나님과 함께 동산을 거닐며 교제할 수 있었다. 죄가 들어오고 나서 사람은 하나님의 인기척에 놀라 숨을 정도로 하나님과 의 관계가 깨졌었다. 그리고 결국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 하나님과 함께 걷는 은혜가 사라졌다. 그러나 에녹이 하나님과 함께 걸었다는 기록으로 우리는 희망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참으심은 우리의 연약함과 부족함의 한계를 아득히 넘어선다. 또 노아가 탄생했을 때 라멕이 했던 연설은 그가 저주에서 “위로”(나함, nacham)를 구했음을 드러낸다. 창세기 5:29 “이름을 노아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
Douglas Mangum, Miles Custis와/과Wendy Widder, Genesis 1–11, Lexham Research Commentaries (Bellingham, WA: Lexham Press, 2012), 창 5:1–32.
그래서 이 5장은 통독하기에 아주 지루한 부분이 아니다. 죽음과, 위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영원한 생명을 이야기하는 아주 중요한 본문이 된다. 그래서!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목표는 신앙의 전수입니다.

우리는 아주 중요한 구절을 놓치면 안 된다. 족보라는 별 특별할 것 없을 것 같은 이 본문을 보면서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이 있다.
창세기 5:3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면서 자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던 것처럼, 첫 사람인 아담도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 (즉 하나님의 형상이 깃든) 그것대로 후손을 낳았다.
그래서 사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면서 받게 되는, 선악과를 따 먹은 죄로 말미암은 범죄의 결과로 여겨지는 출산, 해산의 고통은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과 같이, 하나님처럼 우리의 형상을 닮은 사람을 만드는 창조의 능력을 가지게 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의 후손들에게 잘 가르치고 일깨워줘야 하는 것은 너희가 그렇게 태어난, 우리의 형상을 닮은, 하나님의 형상이 깃든 존재라는 사실이다. 여기서부터 우리 신앙의 전수가 시작이 된다. 우리의 자녀가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도록 기도하고 가르치고 신앙을 잘 양육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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