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2024 0110 시편 73:2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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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음녀 같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
가까이 첫번째 의미 : 물리적으로 가까이
가까이 첫번째 의미 : 물리적으로 가까이
한빛교회 새벽예배. 말씀. 날마다 말씀따라. 창세기 본문. 현재 6장의 홍수사건 앞에.
창세기는 말 그대로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음. 특별히 우리는 1장, 2장을 통해 하나님의 피조세계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확인.
그 창조된 세계에서 하나님과 가까이 교제하며 살아갔던 인간. 그런데 창세기 3 장에서 인간이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말미암아 죄가 들어오게 됨. 죄의 결과는 참혹하고, 처절했음. 왜?
교제가 가능했던 하나님과 멀어졌기 때문. 거룩하신 하나님께 가까이 간다는 것은 나도 거룩해야한다.
가까이 가기 위해서는 거룩해야 한다.
가까이 가기 위해서는 거룩해야 한다.
출애굽기 3:5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출애굽기 40:32 “그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와 제단에 가까이 갈 때에 씻었으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되니라”
가까이 간다는 것은 단순히 물리적으로 누군가의 옆으로 가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성경적으로 볼 때 하나님께 가까이 간다는 것은 이처럼 거룩을 요구한다. 깨끗함을 요구한다. 그래서 모세와 같이 하나님께서 특별히 허라하신 경우에만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었다. 이전에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함께 동산을 거닐며 가까이에서 교제했던 시간은 없다.
그럼 얼마나 씻어야 할까? 얼마나 거룩해지면 하나님 앞에 갈 수 있는 것일까? 하나님이 모세를 처음 미디안 광야에서 부르실 때,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까 ‘발에서 신을 벗어라’ 그러면 나한테 가까이 올 수 있다. 이것처럼 우리에게 가서 목욕탕에서 샤워를 두 번 하여라! 머리를 감을 땐, 꼭 엘라스틴을 써야 한다! 이러면 얼마나 편할까.
레위기 11:45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그런데. 우리가 거룩하려고 한들, 얼마나 거룩해질 수 있는가? 당장 오늘 하루도 거룩한 삶을 살아냈는가?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했는데, 가까이 하기 위해 우리는 또 무엇을 하고 있는가?
가까이 두번째 의미 : 먼저 다가오시는 희생
가까이 두번째 의미 : 먼저 다가오시는 희생
구약에서는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것이 물리적으로 거의 불가능함. 에덴동산 이후로는 특별한 사람들(에녹, 노아 등) 만이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기록. 모세 때처럼 하나님이 자신의 공간, 성막에 임재할 때에도 모두가 다 가까이 갈 수 없었음. 레위 족속, 제사장 족속들이 본인들 역시 깨끗한 정결예식을 거쳐야만 하나님의 임재앞에 갈 수 있었음.
모세와 아론과 그 아들들이 거기서 수족을 씻되
그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와 제단에 가까이 갈 때에 씻었으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되니라
아이고. 가까이 가기 참 어렵다.
가까이 가기 위해서는 희생해야 한다.
가까이 가기 위해서는 희생해야 한다.
그러면 오늘 우리 시대에 하나님을 가까이 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사람과 하나님 사이는 죄로 말미암아 가까이 갈 수 없게 됐다. 그 간극을 어떻게 뛰어넘어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을까? 우리는 가끔 오해함. 그 간극을 내가 뛰어넘을 수 있다고. 우리는 못함. 그 간극 앞에서 우리는 절망할 수 밖에 없음. 그 낭떠러지 앞에서 무릎꿇을 수 밖에 없음. 죄의 삯은 사망. 우리 인생의 결말, 종말은 죽음 뿐. 더 이상 그거 너머에 무슨 희망이 있음? 희망을 바라기 위해 하나님께 가까이 하고 싶은데,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되었다는 것.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 은혜가 있음.
이미 시편의 기자는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이야기하고 있다.
시편 145:18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려고 할 때, 하나님도 우리에게 가까이 오심.
야고보서 4:8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할렐루야! 우리가 할 수 없는 그 지점, 그 때에.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가까이 오심. 이것은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인생의 종말은 죽음이라고 선언된 것을 완전히 깨부시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더 이상 거룩하려고 애 쓸 필요가 없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가까이 오셨다. 거룩한 그분이 우리에게 오시면 우리는 거룩해진다. 거룩의 전염성.
고린도전서 7:14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이제 거룩하니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까이 오시기 위해 무엇을 하셨나?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심. 가까이 오기 위해 자신이 희생을 기꺼이 담당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하심으로.
그래서! 누군가에게 가까이 간다는 것은 희생하기로 작정하는 것.
우리 현실을 봐도 그렇다. 누군가에게 다가갈 때, 그냥 다가가는가? 얼마전 새가족부 세미나를 인도했음. 새가족이 교회를 옴. 가까이 다가가는 것, 쉬운가? 얼마나 많은 나의 것을 내려놓고 가까이 가야 하는가? 내 곁을 내줘야 함. 자존심도 내려놓고 누군가를 받아들일 준비를 해야 함. 깊은 결단이 필요함. 마음의 준비 필요함.
하나님께 가까이 간다는 것의 의미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 그분이 십자가의 피흘리심으로 값을 치뤘다는 뜻. 그래서 우리는 그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가까이 하는 은혜를 누리면 됨.
히브리어 묵상 : 카라브-히크리브
히브리어 묵상 : 카라브-히크리브
오늘 이 설교는 한 단어, 가까이에서 시작됨. 히브리어로는 카라브.
카라브 - 가까이하다.
그런데 이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다른 동사 유형에서 뜻이 달라짐. 히브리어는 동사 유형이 7가지가 있음. 그 중에서 히필형으로 이 카라브 어근이 사용되면, 가까이한다는 뜻이 달라짐.
히크리브 -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까이 오시기 위해 카라브 하시기 위해 히크리브 희생하셨다. 어떻게?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우리에게 가까이 오시기 위해 자신을 단번에 드리셨음. 희생하셨음. 가까이 오는 것 자체가 희생을 의미.
신이 인간이 된다는 것이 벌써 엄청난 희생이 아니겠는가?
마찬가지로, 성도의 삶에서 하나님께 가까이(카라브-미트카레브)하고 싶은가? 그러면 우리도 하나님처럼 나의 어떤 것을 희생(히크리브)해야 한다. 하나님을 가까이 한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내 십자가를 지고 간다는 것은 내가 가진 것, 내가 사용할 수 있는 시간과 능력과 재능 등 하나님께 가까이 가기 위해 희생하는 것이다.
새가족부 세미나 시간에 이런 이야기. 교회 사역은, 하나님의 일은 봉사가 아니다. 봉사가 아니라 섬김이다. 내가 시간이 남아서? 내가 재능기부를 하려고? 교회 일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장 최고의 것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일은 우리를 희생하는 섬김이다.
너무나 감사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까이(카라브) 오기 위하여 당신이 먼저 희생(히크리브)하셨다. 예수님의 우리에게 오신 것은 하나님의 먼저 된 희생의 모습이다. 섬김의 모습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땅에 우리를 섬기러 왔다고 하셨음.
마태복음 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그분의 우리를 향한 섬김은 자신을 희생하여 우리를 살리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다.
가까이 세번째 의미 : 영적 싸움
가까이 세번째 의미 : 영적 싸움
그런데 그렇게 결단하면 우리는 영적 싸움에 직면하게 된다. 사단이 우리의 귀에, 마음에, 생각에 속삭인다. 교회 다니는 거 힘들지? 왜 그렇게 힘들게 살아. 오늘 너 힘들었잖아. 무슨 수요일 밤까지 와서 예배해. 너 재정상황 너도 잘 알잖아. 무슨 감동 있다고 그만큼이나 헌금해. 교회에 너말고 다른 사람 없어? 괜찮아 다른 사람이 봉사할거야. (봉사가 아니라 섬김). 주일에 늦게 일어났으면 그냥 온라인으로 예배 해. 대충해 대충. 피곤한데 무슨 새벽예배야. 무슨 교육부서 선생님이야. 무슨 찬양팀한다고 그래.
구원받은 성도는 하나님 나라에 이르기까지 영적인 싸움을 늘 맞닥뜨리게 된다. 이 싸움이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크라브.
카라브 -> 히크리브 -> 크라브
가까이 -> 희생 -> 싸움
그러나 이 싸움을 두려워하지 말라. 오늘 본문처럼. 하나님을 가까이. 그러면 희생이 따르고. 그러면 영적 싸움을 맞이할 것. 하지만, 그것이 두려워 주를 멀리하면 오히려 망한다. 보통 이런 영적싸움에 지게 되면, 교회 사역을 내려놓는다고 표현. 교회 잠시 쉰다고 함. 안 돼!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이 말씀을 믿어야 함. 피터지는 싸움 속에서 승리해야 함.
어제 로고스교회 담임목사님 부흥회 설교 중. 요한복음 21 장 베드로의 완벽한 실패. 그러나 예수님께서 다시 사명을 일깨워주시면서 기적같이 회복되는 것을 이야기. 우리는 신앙생활 실패할 수 있다. 아니 실패한다. 우리는 인간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를 다시 찾아와주시고 다시 일으켜 주시는 예수님을 기억해야 한다는 사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먼저 가까이 와주신것처럼 언제나 예수님은 우리가 실패한 그 자리에 먼저 찾아오셔서 계속해서 회복할 수 있게 힘주시고 능력주신다. 그 때 담임목사님의 묵상.
베드로를 처음 부르실 때, 그때도 물고기 못 잡음. 예수님은 그 때는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함. 아직 예수님을 모르던 때. 즉 깊은 곳은 내 생각, 내 경험, 내 이성, 판단, 논리를 뛰어넘는 저편, 신앙의 영역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 그렇다면, 오늘 예배에 나온 우리들은 이 깊은 곳에 물을 내려본 사람들. 그 영역에. 그 단계에 이미 경험한 사람들. 그런데 이 사람들도 실패할 수 있고 무너질 수 있고, 사명에 실패해서 다시 갈릴리로 돌아가, 사람을 낚는 어부에서 물고기 낚는 어부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 우리의 모습.
그러나 다시 부활한 주님이 베드로를 회복시키실 때는, 그때도 물고기 없음. 이번엔 어디에? 깊은 곳이 아니라 배의 오른 편에 그물을 내리라고 함. 성경에서 오른 편은 옳은 편이다. 존귀와 영광의 방향이다. 즉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옳은 것을 선택했던 그 일을 이야기한다. 깊은 곳에 그물을 내렸다면, 이제는 오른 편에 그물을 내려야 한다. 잘 드리던 예배가 오른쪽 맞는가? 원래 기쁘게 잘 섬기던 사역의 자리가 오른쪽 맞는가? 새벽에 일어나 자녀를 위해 가정을 위해 교회를 위해 기도하던 그 모습이 오른쪽 맞는가? 예수님은 그러한 싸움에 처한 우리에게 할 수 있어. 할 수 있어 다시 말해주신다.
시편 73:27–28 “무릇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음녀 같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
신앙은 언제나 역설의 은혜를 말한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어렵고 힘들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내게 은혜이다. 그 하나님을 누리고 사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는 은혜이다. 왜냐하면 한번 그 영적 싸움을 이기고 나면, 이제 그와 같은 싸움에서 다시 지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복은 다른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삶이 복이다. 다른 모든 것은 부차적일 뿐.
하나님을 가까이, 그의 희생을 기억하며, 예수님과 함께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