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생명의 주

구원과 복음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0 ratings
· 94 views
Notes
Transcript

구원과 복음, 전도

행3:12-21
예수, 생명의 주
주제: 구원과 복음
‘이제 인생인가? 사는게 이런거야? 왜 이렇게 힘들어? 왜 이렇게 지루해? 왜 이렇게 허무해? 살만 하다 싶으면, 여기 터지고 저기 터지는 이게 인생이야? 죽지 못해 살고, 죽으면 허무하고, 이게 다 인생이란 말이야?’
인생의 이런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정답이 어디에 있을까요? 술을 마실 때에는 못 느끼고, 쾌락에 빠져 있을 때에는 느끼지 못하지만, 조금만 생각하면 바로 뼈 속까지 파고드는 이런 질문에 대한 영원한 정답이 어디에 있을까요?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1:2).
이것은 가지고 싶은 것을 다 가졌고, 하고 싶은 것을 다 해 본 사람의 배부른 소리라고 제쳐 놓아야 할까요? 솔로몬처럼 전무후무한 지혜와 재신과 쾌락을 누려본 사람의 헛소리라 던져 버려야 할까요? 어느 순간 찾아오는 허탈감에서 벗허나려는 갈망을 해갈시켜 줄 생수는 없을까요?
본문 19절에 “새롭게 되는 날”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영어성경(NIV)에는 ‘참신의 시간들’(times of refreshment)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참신’은 영어로 ‘다시 신선’(refreshment)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보통 언제 ‘다시 신선’해지는 것을 느낍니까?
분위기, 컨디션, 기분, 지성, 정신, 도덕, 영혼의 차원에서 참신을 말할 수 있습니다.
이사나 가구 재배치로 참신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운동 후 샤워를 통해 참신한 컨디션을 느낄 수 있습니다. 여행을 다녀온 후 참신한 기분을 맛볼 수 있습니다. 예리한 석학을 만나면 참신한 지성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군대 훈련을 받으면 참신한 정신을 얻을 수 있습니다. 진지한 종교생활을 통해 참신한 더덕을 맛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혼의 참신은 하나님께로 회심(回心)할 때 체험할 수 있습니다.
본문의 참신은 분위기, 컨디션, 기분, 지성, 정신, 도덕의 차원에서 새롭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의 참신은 영성의 차원에서 새롭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새롭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영성을 새롭게 하는 것이 인생 전체 다른 모든 것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영성의 참신은 인생 참신의 원천입니다.
영성의 참신은 본문 15절의 “생명의 주”를 만나 그분과 접속되어 그분과 늘 동행할 때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본문에서 말하는 “생명의 주”는 누구입니까? 본문이 말하는 “참신의 시간들”은 어떻게 체험할 수 있습니까?
참신의 시간들을 체험하면 마음이 꺾여 우울하거나 우울증에 빠지기는커녕 마음으로부터 ‘생수의 샘’에 솟구쳐서 대하(大河)를 이루어 흘러갈 것입니다. 마음에서 생수가 솟구쳐 생수의 대하로 흘러가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유대인들의 예수관
성전에 모였던 유대인들은 태생적 지체부자유자가 즉각 완치되는 것을 보고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랍”습니다(행3:10). 그들은 “크게 놀라며” 베드로와 요한에게 착 달라붙어 솔로몬 행각에 있는 베드로와 요한에게로 달려갔습니다(행3:11).
솔로몬 행각은 예루살렘 성전 동쪽 외곽 벽에 있는 행각입니다. 대리석 기둥들이 두 줄로 서 있고 그 위에 백향목 지붕이 덮여 있었습니다. 무리가 솔로몬 행각에 있는 베드로와 요한에게 몰려 온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는 하나님께서 급하고 강한 바람과 방언으로 무리의 관심을 끌어오셨습니다. 사도행전 3장에서는 태생적 지체부자유자의 치유기적을 통해 무리의 관심을 끌어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폭풍과 방언으로 관심을 이끄시든, 치유기적으로 관심을 이끄시든, 많은 사람들이 베드로가 전하는 복음 진리를 듣게 하신 것입니다.
⑴ 관심의 문
베드로는 치유기적 후에 설교했습니다. 베드로의 설교는 “경이 후 말씀”(a word after a wonder)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복음 진리를 확증해 주는 경이로운 기적 후에 바로 복음 진리의 말씀을 전한 것입니다.
베드로가 복음 진리의 말씀을 전할 때 태생적 지체부자유자의 치유기적을 목격한 사람들의 심리상태에서 출발했습니다.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40대 남성의 즉시 완치의 기적을 본 사람은 기겁할 정도로 놀랐습니다.
성전에 모인 무리가 왜 그리 놀랐을까요? 물론 나면서부터 40여년(행4:22) 걷지 못하고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사람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는 베드로의 명령에 벌떡 일어나 걸었기 때문입니다. 태생적 지체부자유자가 순간적으로 완치가 된다는 것은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았다고 하니, 더 놀라웠던 것입니다.
성전에 모인 무리는 놀랄 뿐 아니라 죄책감에 빠져 있었습니다. 성전에 모인 군중과 성전을 지키면서 관리하는 성전 귀족(temple aristocracy)은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태생적 지체부자유자를 고쳤다고 했을 때, 자기들이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 질렀던 그 ‘예수’의 이름이 그만한 권세가 있는가 해서 가슴이 덜컹했습니다.
무리와 성전 귀족이 놀라면서 죄책감에 빠진 것은 평소 예수에 대한 ‘생각의 틀’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이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이유는 ‘뭐라고? 예수의 이름이라고?’라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의 예수관으로 보면 태생적 지체부자유자가 예수의 이름으로 즉시 완치되었다는 것은 당혹과 혼란과 죄책감을 낳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⑵ 생각의 틀
그들의 ‘생각의 틀’ 속에는 도대체 무엇이 들어 있었기에 그들이 그렇게도 놀라면서 가슴이 덜컹했을까요? 당시 유대인들은 예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습니까?
당시 유대인들은 불과 한 달 보름 전만 해도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라고 소리쳤던 사람들입니다(눅23:19).
유대인들은 예수가 각종 병을 고치고 중풍병자, 한센병자도 고친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예쑤가 죽은 사람도 살렸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오병이어로 남자만 5천 명을 먹이고, 12바구니에 남겼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마14:20). 예수가 바다 위로 걸어갔다는 것과 바람과 바다도 잠잠하게 했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가 귀신들을 쫓아내었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가 행한 기적들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예수는 선한 것이 날 수 없는 나사렛(요1:46)이란 한 시골 사람일 뿐이었습니다. 예수는 좋게 봐서 선한 선생님 정도, 예언자 중의 한 사람 정도였을 뿐입니다. 나쁘게 말하면 미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가 사람이면서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요10:30-33). 사람이면서 하나님이라고 하는 예수는 이단의 괴수이고 신성 모독자였습니다.
예수가 하나님께 기름을 부어 세우신 구원자라고 스스로 주장하기도 하고, 제자들이 그렇게 말하기도 했지만, 유대인들은 그것도 웃기는 소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자기들이 생각한 메시아는 로마 식민 정권으로부터 이스라엘을 해방시켜 초강대국으로 만들 영광스러운 메시아인데, 예수는 말구유에서 태어난 시골 출신의 초라하고 가난한 무주택자, 게다가 세리들과 죄인들의 친구였기 때문입니다(마11:19). 유대인들은 영광의 메시아를 기대하고 있는데 고난의 메시아로 살아가는 예수를 유대인들이 메시아로 인정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⑶ 영적 무지
유대인들은 ‘예수가 절대 메시아가 아니다. 예수는 신성모독자다’라고 보았기 때문에 결국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소리를 친 것입니다. 베드로는 신성모독자로 보고 십자가에서 처형한 유대인들을 놓고 이렇게 질책했습니다.
① 당신들은 예수를 십자가에서 처형당하도록 내주었습니다(행3:13).
② 당신들은 빌라도 총독 앞에서 예수 풀어주는 것을 거절했습니다(행3:13).
③ 당신들은 예수 대신에 살인자를 풀어주도록 요청했습니다(행3:14).
④ 당신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행3:15).
베드로는 유대인들이 몰라서 그렇게 했다는 것은 인정했습니다(행3:17). 그러나 예수를 몰라서 죽여도 그것은 무서운 죄입니다. “알지 못해서”라는 것이 결코 “죄가 없어서”라는 근거가 되지 않습니다. 그것이 죄에 대한 핑계가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죄 용서가 필요없다는 암시도 아닙니다. 그것은 다만 용서가 가능하다는 암시일 뿐입니다.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이 알지 못해서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것을 아시고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바울도 이 세상 통치자들과 백성들이 예수를 몰라서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것을 지적했습니다.
“이 지혜는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고전2:8)
사도 바울은 사탄이 이 세상 불신자들의 마음을 혼탁하게 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게 했다고 지적했습니다.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4:3-4)
여러분의 사랑하는 가족, 친척, 친구, 이웃, 동료 태신자가 아직도 예수를 믿지 않는다면, 그들이 예수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탄이 그들의 마음에 시커먼 커튼을 쳐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이심을 알지 못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예수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구원자 예수를 거절하고 믿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은 몰라서 믿지 않는 것이라 안타까운 것이지만, 그대로 핑계하지 못할 죄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이 예수가 구원자라는 복음 진리를 깨닫고 예수를 믿기만 하면 바로 용서받을 수 있는 죄입니다.
2. 생명: 개척과 시혜(施惠)
베드로는 예수를 몰라서 십자가에 못 박은 무리를 향해서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베드로는 솔로몬의 행각으로 달려온 놀란 “백성에게 말하되”라고 본문 12절에 기록되었습니다. 베드로의 설교가 12절부터 시작되는데, 베드로는 태생적 지체부자유자를 보고 놀라서 달려온 무리에게 설교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본문의 ‘말하되’는 헬라어 원문으로는 ‘대답하되’(아포크리노마이, answer)입니다.
⑴ 맞춤형 서론
복음서와 사도행전에 ‘대답하다’라는 단어가 이런 의미로 많이 사용되었습니다(마11:25; 12:38; 17:4; 22:1; 막10:24; 11:14; 14:48; 눅14:3; 요5:19; 행10:46). 그것은 질문에 대한 대답이 아니라도, 기적을 보고 놀라면서 혼란과 당혹에 죄책감에 빠진 무리에게 설명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설교는 설교의 서론으로 매우 적절합니다. 설교는 청중의 관심이나 질문이나 고민이나 소원 등 청중과 이미 관련된 것에서 출발하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설교의 서론은 건물로 따지면 현관과 같습니다. 베드로는 무리의 혼란과 당혹이라는 현관을 사용해서 설교라는 건물로 안내한 것입니다.
무리의 당혹감은 두 가지 질문 속에 숨어 있었습니다(행3:12).
첫째,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둘째,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무리가 왜 놀랐을까요? 예수께서 메시아 구원자임을 부인한 상태에서 볼 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태생적 지체부자유자가 즉시 완치된 것은 놀랍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세우신 사도들에게 예수께서 성령을 주셔서 예수가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메시아 구원자라는 것을 증언하게 하셨다는 것도 부인하고 있었기 때문에 놀란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가 누군지도 모르고 예수의 사도들이 뭘 어떻게 하는지도 모르는 무리에게 복음진리를 알려주는 설교를 했습니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베드로의 첫 설교, 즉 오순절 설교와 둘째 설교, 즉 태생적 지체부자유자 치유기적이 일어날 때 한 설교를 통해서 베드로가 강조한 것이 무엇입니까? 베드로의 첫 설교와 둘째 설교, 아니 사도행전 전체의 설교의 핵심적 강조점이 무엇입니까?
⑵ 핵심형 설교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과 부활로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 사명을 마치시고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것을 밝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이 세우신 메시아 구원자라는 것을 밝힌 것입니다. 태생적 지체부자유자가 즉시 완치된 기적도 예수가 메시아 구원자라는 것을 보여주는 표적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유대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다고 했습니다(행3:13). 베드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의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고 선포했습니다(출3:6. 15. 16; 왕상18:36; 대상29:18; 대하30:6; 마22:32; 행7:32). 유대인들은 예수에게 십자가 처형이라는 최악의 굴욕을 주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종 예수에게 최고의 영광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태생적 지체부자유자가 즉각 완치된 기적만 가지고 예수가 하나님이 세우신 메시아 구원자라는 것을 밝인 것이 아닙니다. 예수는 유대인들의 정신 혈관 속에 흐르고 있는 역사의식의 반영이고 성취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죽였지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라는 유대인들의 선조를 택하시고 인도하신 하나님께서는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다는 것이 바로 이런 뜻이 있습니다.
요셉의 경우와 예수의 경우가 이런 의미에서 유사합니다. 요셉은 형제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50:20).
베드로는 무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의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너희가 그를 넘겨주고 빌라도가 놓아 주기로 결의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거부하였으니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이를 거부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주기를 구하여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행3:13-15).
베드로는 예수가 유대인들의 국부(國父) 아브라함의 하나님께서 영화롭게 하신 메시아라는 것입니다. 예수는 유대인들의 국부 아브라함의 하나님께서 영화롭게 하신 메시아라는 것입니다.
예수는 유대인들의 역사의 뿌리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유대인들의 대통령 중의 대통령이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조상으로 모시고 그들이 섬긴 언약의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이런 의미에서 ‘언약의 자손’이라는 것을 대단한 자부심으로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조상들의 언약의 뿌리에 하나님께서 세우신 메시아 예수께서 계씬다는 것입니다(행3:26).
무엇보다 언약의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의 국부 아브라함에게 “땅 위의 모든 족속이 너의 씨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셨는데(행3:25), 바로 그 ‘아브라함의 씨’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무수한 후손(씨들이라는 복수) 말고 ‘아브라함의 씨’(스페르마, 단수)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통해서 천하 만민이 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죽인 예수가 그들의 국부 아브라함에게 언약의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천하 만민의 축복의 원천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역사로 보면 아브라함은 단군(단군이 역사적 인물이라면) 격입니다. 모세는 삼국시대의 광개토대왕이나 김유신 정도라고 할까요? 베드로는 예수가 유대인들의 국부 ‘아브라함의 씨’로 천하 만민의 축복의 원천일 뿐 아니라, 유대인들을 애굽에서 해방시킨 해방자 모세가 예언한 메시아 구원자라고 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나 같은 선지자 너희 형제 가운데서 하나를 세울 것”(행3:22)이라고 했는데, 모세가 말한 바로 ‘나 같은 선지자 하나’가 예수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그것도 모르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예수가 ‘아브라함의 씨’와 ‘모세 같은 한 선지자’일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모든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자기의 그리스도께서 고난 받으실 일을 미리 할게 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다고 선언했습니다(행3:18). 예수는 이스라엘의 해방자 모세뿐 아니라 그 후 모든 선지자들이 예언한 메시아라는 것입니다(행3:24).
모든 선지자들이 메시아를 예언할 때 영광스러운 메시아로 예언한 것이 아니라, 고난을 받으신 후에 영광을 받으실 메시아로 예언했다는 것입니다(사53). 유대인들은 그것도 모르고 영광의 메시아만 생각해서 진짜 메시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유대인 역사에서 민족의 시조인데, 역사적으로 대충 예수 이전 2,000년 대 인물입니다. 모세는 유대인들을 이집트에서 해방시킨 건국의 시조로 역사적으로는 대략 예수 이전 1,500년대 인물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는 유대인 역사에서 민족의 시조와 건국의 시조를 통해 하나님께서 구원자로 예언하신 대로 이 땅에 오셔서 구원을 이루신 분입니다. 예수는 2,000년 전 예언의 성취이고, 1,500년 전 예언의 성취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 전 2,000년 내내 모세부터 사무엘로 해서 모든 선지자들의 예언의 성취입니다. 성전에 모인 무리와 성전 귀족은 하나님께서 유대인의 역사 시작부터 핵심으로, 또 그 전체에서 세우신 구원자 메시아를 십자가에 죽인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가 유대인 역사의 뿌리로부터 핵심과 전체를 통해서 하나님이 세우신 메시아 구원자라는 것, 즉 과거를 통해서 예수가 메시아 구원자라는 것을 밝힌 것만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현재 태생적 지체부자유자를 즉각 완치하신 분이 예수라는 것도 밝혔습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말한 셈입니다.
“여러분이 십자가에 죽인 예수는 우리 선조들이 섬기던 언약의 하나님께서 세우신 생명의 주인입니다. 예수는 우리 이스라엘 역사의 뿌리입니다. 우리 이스라엘 역사의 주요 인물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예언하셨던 메시아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만민의 축복의 원천으로 예언하신 분, 모세를 통해서 모세 같은 한 선지자, 모든 선지자들을 통해서 예언하셨던, 고난을 통해서 영광으로 들어가신 메시아입니다.
예수는 과거의 역사를 통해 메시아로 증명될 뿐 아니라, 지금 현재의 기적을 통해 메시아로 증명되지 않았습니까? 여러분의 두 눈으로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던 사람이 예수의 이름으로 즉시 완치된 것을 보지 않았습니까? 이뿐 아닙니다. 예수는 과거의 역사, 현재의 기적, 그리고 미래의 만유회복을 통해 하나님이 세우신 메시아라는 것이 확실합니다.”
베드로는 21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 바 만물을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
“하늘이 그를 받아 둔다”는 말씀은 예수께서 하늘에 머무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를 죽은 자들로부터의 부활을 통해서 메시아로 영화롭게 하신 예수께서 지금 하늘에 머물러 계시다가 미래에 재림하셔서 만물을 회복시키신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선민 이스라엘의 뿌리이며 만민에게 복의 원천일 뿐 아니라 지금 기적을 행하신 분이시고 미래에 재림하셔서 하늘과 땅,우주와 인간 전체를 회복하실 메시아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구약 이스라엘 역사의 핵심과 과정과 목표가 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지적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건물로 보면, 역사의 초석이 그리스도입니다. 역사의 뼈대가 그리스도입니다. 역사의 완공이 그리스도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의 핵심이 그리스도라는 것은 이스라엘 역사만이 아닙니다. 인류의 역사 전체가 그리스도 중심입니다. 인류의 역사(history)는 하나님 ‘그분의 이야기’(His story)입니다. 인류 역사 전체의 초석이 그리스도(Christocentric)입니다. 인류 역사 전체의 뼈대가 그리스도입니다(Christomorphic). 인류 역사 전체의 목표가 그리스도(Christotelic)입니다.
역사 전체가 그리스도를 중점으로 해서 그리스도 이전(B.C.)과 그리스도 이후(A/D)로 나누어진다고 하지만, 그 정도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역사의 중점일 뿐 아니라, 역사의 시작과 역사의 과정과 역사의 목표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창조하심으로 역사가 시작되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과 심판으로 역사가 진행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최종 구원과 최종 심판으로 역사가 마감되지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역사의 주인으로 자신을 믿는 자들에게 ‘생명의 주’이십니다.
⑶ 생명 개척자
베드로는 예수께서 과거 선민 역사의 주인공, 현재 만민 시복의 원천, 미래 만물 회복의 구원자라는 것을 밝힌 후에 예수를 여러 가지 명칭으로 증언했습니다.
하나님의 종(행3:13), 거룩하고 의로운 분(행3:14), 생명의 주(행3:15), 그리스도(히브리어로 메시아)(행3:18,20), 모세와 같은 한 선지자(행3:22), 아브라함의 한 씨(행3:25)
여기서 다른 모든 것을 종합해서 핵심적으로 지적하는 표현이 ‘생명의 주’입니다. ‘생명의 주’에서 ‘주’(헬라어 아르케고스)는 ‘개척자, 설립자, 왕’ 등의 뜻이 있습니다(히2:10; 12:2, 시36:9, 요일5:11,20; 요14:6). 영원자존자로 생명을 창조하고 유지하고 다스리는 – 주시기도 하시고 빼앗기도 하시는 – 왕과 주라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 자존자로서 태초에 천지와 인간을 창조하신 창조자이십니다(창1:1; 요1:1-3). 예수 그리스도는 상실된 생명을 회복하시는 분, 구원자이십니다(눅19:10).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회개하고 자신을 믿는 사람들은 구원하시고 끝까지 믿지 않는 사람들을 심판하시는 생명의 구원자/심판자이십니다(계20:1-15). 예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14:6).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고난의 종(사53)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대신 고난과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거룩하시고 의로우신 분으로서 아무 죄가 없지만, 자기 백성의 죄를 짊어지시고 스스로 죄로 삼음이 되심으로 자기 백성의 의가 되게 하셨습니다(고후5:21).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전하시는 ‘모세와 같은 한 선지자’로 하나님의 구원의 뜻만 전한 것이 아니라 구원을 자신의 삶과 고난과 죽음과 부활로 이루셨습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뜻대로 자기 백성의 구원을 이루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세우신 메시아/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께서는 ‘아브라함의 한 씨’로 천하 만민이 그를 믿음으로 구원의 복을 받게 해 주셨습니다.
베드로는 특별히 본문에서 예쑤께서 유대인들 선조들의 언약의 하나님의 뜻을 전하시는 선지자,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종, 하나님이 세우신 메시아.그리스도, 거룩하시고 의로우신 분, 한 마디로 ‘생명의 주’로서 천하 만민의 축복의 원천이 되셨다는 것을 밝혔습니다.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를 부활하게 하심으로 ‘생명의 주’로 증명하셨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르ㄹ‘생명의 주’로 대반전 시키셨습니다. 유대인들이 십자가로 욕보인 예수를 하나님께서는 부활로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이 신성 모독자로 죽인 예수를 하나님께서는 살리셨습니다. 유대인들이 죽도록 넘겨버린(deliver) 예수를 하나님께서는 구원자(Deliverer)로 세우셨습니다. 한 마디로 유대인들이 폄하한(humiliate) 예수를 하나님께서는 존대(exalt) 하셨습니다(시11:1; 행2:34-35).
베드로는 유대인들이 죽인 예수가 사실 유대인들의 역사 속에서 국부와 영웅이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버린 예수가 유대인 역사의 핵심이요 정점이요 지향점이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멸시한 예수가 모든 유대인 선지자들이 예언한 메시아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무엇보다 유대인들이 선조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께서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다는 것을 핵심적으로 강조했습니다.
“여러분이 십자가에서 죽인 예수는 우리 선조들이 섬기던 언약의 하나님께서 추천하신 분, 하나님께서 세우신 분, 하나님께서 영화롭게 하신 생명의 주인입니다! 우리의 역사가 그 증거, 지금의 치유기적이 그 증거, 예수의 부활이 그 가장 큰 증거입니다!”
3. 생명: 참신(斬新)의 체험
예수께서는 ‘참신의 시간들’(times of refreshment)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여기서 ‘갱신’의 헬라어 ‘아나프쉭시스’는 아주 희귀한 단어입니다. 이 단어가 신약성경 전체에서 딱 한 번 나오는데,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이 단어가 구약의 헬라어 번역본인 70인경에서도 출애굽기 8장 15절에 딱 한 번 나오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가 유대인 문헌인 <세드락의 묵시>(Apo. Sedrach 16:3)에서는 천국을 묘사하는 단어로 나옵니다.
⑴ 참신의 뜻
본문에서 ‘참신’은 서론에서 말씀드린 분위기의 갱신, 즉 기분이나 지성, 정신의 갱신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의 ‘참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갱신, 즉 ‘메시아적 참신, 구원의 결정적 시대’(messianic refreshment, the definitive age of salvation)를 말합니다(E. Schweizer, TDNT 9:644).
예수께서는 하나님께서 기름을 부어 세우신 구원자, 즉 메시아로서 한 때나 일시가 아니라 평생, 영원히 새 생명의 갱신, 참신, 쇄신, 회복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메시아 구원의 새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메시아 구원의 새 시대는 그 특징이 ‘갱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현세에 갱신을 시식(試食)하고 예수의 재림 때부터 내세에 만유 회복을 만끽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풍성한 생명을 주시고 체험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요10:10).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매일 매순간 생명수액을 공급하시고, 예수의 생명수액이 우리 속에서 약동하고 흘러가게 하시는 분이십니다(요15).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겉 사람이 날마다 노쇠해져도 우리의 속사람을 날마다 새롭게 하십니다(고후4:!6-18).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참신’은 참된 안식입니다(마11:28-30). 예수께서 주시는 ‘갱신’은 풍성한 생명입니다(요10:10). 예수께서 주시는 ‘갱신’은 진리와 함께 주시는 자유입니다(요8:32). 예수께서 주시는 ‘갱신’은 물댄 동산의 신선한 생명입니다(시1:1-3; 렘17:7-8; 사58:11).
⑵ 체험 통로: 전도
누가 ‘생명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갱신’을 체험할 수 있습니까?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 바 만물을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행3:19-21).
여기서 갱신을 체험하기 위해서 중요한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아주 단순하지만 놓치기 쉬운 점에 관심을 집중해야 합니다. 그것은 베드로가 말씀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12절에 어떻게 되어 있습니까?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베드로가 말하지 않으면 무리는 여전히 “알지 못하여서”(행3:17) 잘못 생각하고 잘못 행동하여 ‘생명의 주’를 죽이는 것 같은 일을 계속할 것입니다. 베드로가 말을 하지 않았다면, 무리는 여전히 사탄이 마음에 친 검은 코튼 때문에 예수께서 하나님이 세우신 구원자 메시아라는 진리를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예수가 하나님이 세우신 그리스도라는 진리에서 옵니다(롬10:17). 요즘은 복음을 전해도 사람들이 듣지 않기 때문에 말보다 삶이 더 중요하다는 말을 합니다. 맞습니다. 삶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삶이 아무리 중요해도 삶을 통해서는 진리를 듣지 못합니다. 삶을 통해서 진리의 삶을 보고 짐작은 할 수 있지만, 구원의 진리를 확실히 알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사랑의 삶을 통해서 복음 진리를 보여주면서 반드시 복음의 말을 통해서 복음 진리를 확실하게 전달해야 합니다.
본문 15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
베드로와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는 증인이었습니다. ‘증인’은 단순히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전하는 말에 목숨을 거는 사람입니다. ‘증인’(헬라어 마르투스)은 영어 순교자(martyr)의 어원입니다. 증인은 복음 전파에 삶을 걸 뿐 아니라 목숨을 거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다 전도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만, 전도를 하려고 할 때 우리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전도를 방해하는 심리적인 요소가 무엇입니까?
‘내가 전도하면서 상대를 불편하게 하면 어떻게 하나? 내가 전도하면서 내 체면이 깍이면 어떻게 하나? 내가 전도를 해서 따돌림을 당하면 어떻게 하나? 내가 전도해서 인간 별종으로 낙인 찍히면 어떻게 하나?’
대체적으로 이런 생각 때문에 전도를 망설이지 않습니까? 이것은 우리가 전도에 우리의 체면도 걸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전도에 우리의 평판도 걸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전도의 우리의 우정도 걸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전도에 우리이ㅡ 이권도 걸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전도해서 평판이나 체면이나 우정이나 이권을 잃을까 걱정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것 때문에 전도를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새로운 각오를 해야 합니다. 전도하다가 체면, 평판, 우정, 이권을 잃을 각오 정도가 아니라, 전도하다가 목숨까지 잃을 각오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전도에 목숨까지 걸고 ‘복음의 증인’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목숨을 건다고 목숨을 잃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순교의 제물로 받으시는 신자가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우리가 전도에 목숨까지 걸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믿는 예수께서 우리가 죽어도 우리를 살리시는 ‘부활의 주,’ ‘생명의 주’이시기 때문입니다.
본문 22-23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무엇이든지 그의 모든 말을 들을 것이라 누구든지 그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백성 중에서 멸망을 받으리라.”
이것은 이스라엘 건국의 시조 모세가 한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 자신과 같은 선지자, 즉 예수 그리스도를 세우실 것인데, 우리가 그분이 하시는 “모든 말”을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분의 말을 듣지 않으면 멸망을 받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분의 말씀을 듣느냐, 안 듣느냐 하는 것이 곧 죽느냐 사느냐 하는 것을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말을 듣지 않고 믿지 않으면 영원히 죽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믿으면 영원히 삽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말을 불신 가족, 친척, 이웃, 친구, 동료 태신자가 듣게 하려면 우리가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느냐, 안 전하느냐 하는 것은 사람을 실리느냐 죽이느냐를 결정합니다.
사도행전 4장 4절 말씀을 보십시오.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베드로가 복음을 말할 때에 들은 사람들 중에 여성 포함 1만 명이 회개하고 예수를 믿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반응입니까? 복음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고전1:24). 우리가 복음을 전하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고 하나님의 지혜가 가동됩니다.
박인숙 권사님의 <전도 여왕의 전도 레시피>(41면)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복음은 생명이다. 들을수록 힘이 나고 기쁘다. 나를 변화시킬 수 없다면 그것은 복음이 아니다. 반복적으로 나 자신에게 들리도록 선포할 때 성령께서 역사하신다. 내 안에서 차고 넘쳐야 다른 사람에게로 흘러 들어간다. 학(學)이 습(習)이 되어야 한다. 습(習)이란 한자를 보면, 새끼 새가 제 어미의 날개짓을 100번 넘게 반복해서 따라 함으로써 완전히 나는 걸 몸에 익힌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듯 복음도 몸에 익을 때까지 반복하는 것이 중요하다.”
박인숙 권사님은 자신에게 복음을 전한 예까지 소개했습니다. 며느리가 유산을 했고, 아들이 회사를 그만두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때 ‘직장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만큼이나 어려운데...’ 하며 불길한 상상이 꼬리를 물고 두려움으로 다가왔습니다. “힘내. 주님이 인도해 주실거야.”라고 자신을 위로하면서도 불안의 폭풍우가 몰아치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런 상황에서 평소에 암송하던 말씀을 자신에게 복음으로 전했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
‘나는 너에게 어떤 존재니? 내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서 너의 주인이 되었는데, 네가 나를 주님이라고 하면서 네가 아들의 가정사로 근심하고 두려워하니?’
박인숙 권사님은 이런 주님의 음성을 듣고 얼른 주님 앞에 엎드려 믿음 없음을 고백하고 회개했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내 삶의 주인이 되셨다는 복음을 그대로 자신에게 선포한 것입니다.
우리도 베드로처럼 복음을 전해야 하는데, 복음을 잘 전하기 위해서 박권사님처럼 자기 자신에게 복음을 반복해서 전해야 합니다. 성경 전체가 복음입니다. 여러분이 성경 말씀을 설교나 공부나 훈련이나 독서나 묵상으로 배울 학(學)자로 배우셨다면, 그것을 익힐 습(習) 자로 익혀야 합니다. 들은 말씀을 자기에게 반복적으로 전하고, 가족에게 반복적으로 전해야 합니다. 자기가 배운 복음을 반복적으로 전하다 보면 복음으로 배운 ‘복음학’이 복음으로 익힌 ‘복음학습’이 됩니다. 배운 복음을 자꾸 반복해서 전하면서 복음이 학습이 되면서 복음의 효과적인 전도자가 됩니다.
⑶ 참신 체험: 회심
베드로가 일단 복음의 말씀을 전했다는 것이 중요하고, 그 다음에 베드로가 전한 말씀의 내용이 중요합니다. 베드로는 청중의 반응 면에서 회개를 강조했습니다.
베드로는 여기서 두 동사를 사용해서 참 회개를 강조했습니다(겔14:6; 마3:1-2; 4:17; 행2:38; 26:19-20). ‘회개하라’(헬, 메타노에오)와 돌아오라(헬, 에피스트레포)입니다. 회개(悔改)와 회귀(回歸)!
회개는 ‘마인드’(mind)를 바꾸는 것입니다. ‘생각의 틀’을 바꾸는 것입니다. ‘생각의 틀’을 바꾸면 단순히 지적인 생각만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지적으로 생각이 바뀌면 정적으로 느낌이 바뀌고 의지적으로 행동이 바뀌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예수를 반대하면 반(反)예수에서 예수를 영접하는 친(親) 예수로 바꾸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을 싫어하던 반신론, 무신론(無神論),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다고 하던 불가지론(不可知論)에서 ‘예수를 통해 자신을 보여주신 참 하나님은 존재하시고 나는 그분을 믿는다’는 기독교 유신론(有神論)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지금까지 예수는 신성모독자라는 ‘마인드’를 예수는 하나님이 정하신 구원자, 메시아라는 ‘마인드’로 바꾸는 것입니다.
‘예수는 나사렛 이단의 괴수야. 예수는 사기꾼이야. 예수는 미치광이야. 예수는 사람이면서 하나님이라고 한 신성 모독자야.’ 이렇게 생각하던 마인드를 이렇게 바꾸는 것입니다.
‘예수는 하나님이 세우신 메시아, 그리스도야. 우리 선조들의 언약의 하나님께서 우리의 국부 아브라함에게 만민의 시복의 통로로 약속하신 그 씨야. 하나님께서 모세와 같은 한 선지자를 세우시겠다고 하시던 그 선지자야. 하나님께서 모든 선지자들을 통해서 예언하신 메시아, 그리스도야. 예수는 메시아, 그리스도, 생명의 주야. 하나님께서 부활로 그것을 증명하셨어. 우리 두 눈으로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사람을 걷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기적을 조금 전에 목격했잖아.’
우리 입장에서는 ‘예수는 그저 유대인이야! 구원자는 무슨 구원?’이라고 생각하던 마인드를 ‘예수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기름을 부어 세우신 구원자애!’라고 생각하는 마인드로 바꾸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불신 가족, 친척, 친구, 이웃, 동료 태신자가 이렇게 ‘생각의 틀’을 바꾸도록 기도하고 사랑하고 복음 진리를 전해야 합니다.
회개는 이와 같이 ‘생각의 틀’을 바꿈으로 삶 전체의 주도적인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을 보여주신 하나님을 버리고 멀리하고 떠나간 삶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서서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는 삶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을 보여주신 참 하나님을 지적으로 인정하고, 정적으로 수용하고, 의지적으로 순종하는 삶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회개(悔改) 속에 회귀(回歸)가 들어 있습니다.
참된 회개를 하면 참 하나님께로 방향을 틀어 돌아옵니다(눅1:16-17; 행9:35; 11:21; 14:15; 15:19; 26:18,20; 고후3:16; 살전1:9; 벧전2:25; 고후7:9-10).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가 아버지의 유산을 받아 탕진하고 인생을 망가뜨린 후에 아버지께로 돌아오는 것과 같이, 하나님께로 방향을 틀어 회귀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설교를 들은 유대인들이 오순절에는 남자 3천 명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을 보여주신 하나님께로 회귀하는 회개를 했습니다. 생태적 지체부자유자의 치유기적을 보고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남자 5천 명- 오순절의 3천 명이 5천 명으로 늘어난 것인지 여부는 불확실- 이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께로 회귀하는 회개를 했습니다. 남자만 5천 명이면 여자까지 합하면 최소한 1만 명이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께로 회귀하는 회개를 했습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태생적 지체부자유자를 즉시 완치시킨 기적보다 더 놀라운 기적은 1만여 명이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예수를 믿게 된 것입니다. 전자는 외면적인 기적이지만, 후자는 내면적인 기적입니다. 전자는 질병에서 건강으로 이전(移轉)한 기적이지만, 후자는 지옥에서 천국으로 이전한 기적입니다. 전자는 일시적인 효과의 기적이지만, 후자는 영원한 효과의 기적입니다.
베드로는 ‘회개하라! 돌아오라!’고 촉구하면서 예수의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회개를 하면 하나님께서 현재 ‘갱신의 시간들’을 주실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 신선한 생명, 갱신된 생명, 쇄신된 생명, 풍성한 생명, 안식의 생명, 자유의 생명,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베드로는 지금 천국에 머물러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앞으로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다시 보내실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으로 보내시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면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고 하신 말씀을 현실로 이루게 됩니다(계21:5). 인간의 완전한 회복과 함께 인간이 상실한 낙원의 회복,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지구와 만물과 우주의 회복이 이루어집니다.
회개하고 돌이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고 따르면 현세에서 개인의 회복과 재임 때에 만유의 회복을 체험합니다.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날마다 새롭게’ 하시는 개인의 회복을 시식하듯 체험하고 있지만, 완전한 회복은 체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현세의 삶은 사람과 환경이 사람의 죄와 고통에 연관되어 고통과 고뇌를 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면 죄와 고통과 사망이 전혀 없는 완전한 개인 회복과 완벽한 만유 회복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이ㅏ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롬8:18-25).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회개를 하면 죄를 용서받는 복을 받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가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천국 법정에서 ‘무죄!’ 선언을 받습니다(시51:9; 눅11:46; 사43:25; 민14:18; 시65:3; 85:2; 86:5; 130:3-4; 행5:31; 10:43; 엡1:7; 히10:4. 씻어주심. 골2:14; 롬6:4-5; 골2:14; 롬8:1).
ghlrog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악에서 돌이켜 의롭게 사는 복을 받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천국 법정에서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의롭다!”는 선언을 받고 ‘의롭게’ 살아가는 복을 받습니다(롬3:22-24).
베드로는 생태적 지체부자유자를 즉시 완치하는 치유 기적 후에 바로 ‘생명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경이(驚異)’ 후에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람들이 보고 놀란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보고 놀란 사람들이 ‘생명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도록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청중의 금방 쪄낸 찐빵 같은 따끈한 관심을 설교의 문으로 삼고 ‘생명의 주’라는 건물로 청중이 들어가게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인 역사에서 민족의 시조 아브라함의 ‘씨,’ 천하 만민이 그를 통해서 복을 받는 복의 통로라는 것은 전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스라엘 건국의 기조 모세와 같은 한 선지자로서 누구든지 그분의 말을 들으면 살고, 안 들으면 죽는다는 것을 전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인 역사에서 민족의 효시와 건국의 효시로부터 시작해서 역사 전체의 핵심이라는 것을 모든 선지자들의 예언을 통해서 전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인 역사의 효시와 진행의 핵심일 뿐 아니라 우리 개인과 가정과 교회와 민족의 시작과 진행의 핵심입니다. ‘생명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 듣고 믿고 따르면 현세의 ‘참신’과 내세의 만유회복을 체험합니다.
‘이게 인생이야? 사는게 이런 거야? 왜 이렇게 힘들어? 왜 이렇게 지루해? 왜 이렇게 허무해? 죽지 못해 살고, 죽으면 허무하고, 이게 다 인생이란 밀이야?’
인생의 이런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정답이 생명의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계속 믿고 따르면 ‘이게 인생이야?’라는 권태와 허무의 탄식이 ‘이게 인생이야!’라는 참신과 감격의 환호로 바뀝니다.
‘생명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반복해서 자기와 가족에게 전하고 또 전해야 합니다. ‘생명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면 전할수록 ‘참신의 생명’을 체험합니다. ‘생명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으면 들을수록 ‘참신의 생명’을 체험합니다. ‘생명의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류가 상실한 낙원을 회복하는 천국 낙원의 맛을 현세에 시식하고 내세에 만끽합니다. ‘생명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전함으로 천국의 맛을 지금부터 맛보기 시작해서 내세에 완벽하게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Related Media
See more
Related Sermons
See more
Earn an accredited degree from Redemption Seminary with Log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