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실만큼 가져가세요!

출애굽기 강해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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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출 16:17-21
제목: 드실 만큼만 가져가세요!
주제: 일용한 은혜와 복을 회복하는 것이 예배의 회복이다.
목적: 세상의 유희를 사모하지 않고 경건의 기쁨을 누리게 하소서.
평형깨기
식당에 가면 이런 문구가 있는 식당이 있습니다. “드실 만큼 가져가세요!” 이 문구는 두 가지 정도를 의미하고 있는데요, 정말 마음대로 가져가셔도 좋다고 하는 의미도 있고, 되도록 남기지 말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뷔페에서는 남기는 음식이 부담스러워서 “환경부담금”을 청구하기도 하죠.
환경부담금을 왜 내는지 알아봤더니, 국가법령정보센터에서는 “환경오염을 한 사람이 환경을 개선하기 위한 비용을 부담하게 하여 쾌적한 환경을 조성하는 것”에 목적이 있다고 합니다. 쉽게 말하자면 환경오염을 한 사람이 환경을 개선하는 것에 책임이 있다는 것이죠.
사실 국가에서 정하는 환경부담금은 사실 자동차에만 해당한다고 하는데, 어찌 되었든, 음식을 상습적으로 남기는 행위는 바람직하지는 않죠. 재정적으로도 손해를 입고 환경적으로도 피해를 입힐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4층 식당에도 “먹을 만큼 가져가세요”라는 카드가 붙여져 있죠? 먹을 만큼 가져가는 것은 기본 매너라는 것이죠.
여러분, 신앙에도 마치 이런 기본 매너가 있다면 어떨 것 같나요? 오늘 본문 보면 우리 하나님도 우리에게 똑같이 요구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먹을 만큼 가져가라”라는 것이죠. 여러분, 이 명령을 지키는 것이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지켜야 하는 기본 매너입니다.
갈등심화
오늘 본문의 배경을 잠깐 살펴봅시다. 이스라엘이 드디어 출애굽을 했습니다. 10가지 재앙의 기적, 홍해의 기적을 통해 이집트의 압제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런데 눈앞에 메마른 광야가 펼쳐져 있습니다. 먹을 음식도, 마실 물도 없습니다. 소망도 없습니다. 그러다가 마라의 쓴 물이 단 물로 바뀌는 기적도 경험했습니다.
하지만 언제까지 기적에만 의존할 수 있을까요? 기적은 언제 일어날지 모르잖아요. 불안정하잖아요.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안정적인 양식을 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만나”라는 음식을 매일 아침마다 공급해 주시는 기적을 행하시는 장면이 오늘 본문입니다.
그런데 만나가 거의 유일한 생명줄인데, 이왕이면 풍성히 공급해 주시면 좋지 않나요? 그런데 하나님은 “먹을 만큼만 가져가라”라고 명령하십니다. 딱 하루치 양식, 일용할 양식만 허락하신 거예요. 한 사람당 한 오멜, 2.2L만 허락하셨습니다. 만약에 다 먹고 배불러서 내일까지 남겨두게 되면, 아침에 모두 녹아 없어졌습니다. 100만원을 가져가든, 1000만원을 가져가든 모두 다 허락하셨어요. 하지만 내가 1000만원 중에서 오늘 하루 100만원만 썼다면, 다음 날에 900만원은 다 없어져 있는 거에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만나를 그들에게 넉넉하게 주시거나, 풍성하게 주시는 것을 허락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풍성하게, 넉넉하게 양식을 누리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 이런 말 교회에서 종종 듣지 않나요? “하나님께서 풍성하게 채워주셨다”, 이런 이야기, 간증 종종 들었죠?
하지만, 이쯤에서 여러분이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공급은요, 마냥 풍성하게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내일도, 모레도, 앞으로도 걱정 없을 정도로 풍성히 주어지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필요나 공급은, 모두 하루치, 일용할 만큼만 주십니다. 즉, 하나님의 공급에 제한이 있다는 거예요. 리미트가 있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복도 마찬가지입니다. 은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받는 복은 사실 하루치입니다. 왜냐하면 만나는 우리에게 주어진 복을 의미하거든요. 계시록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계2:1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즉 계시록에 따르면 승리하는 성도들, 예수님을 통해서 승리하는 성도들에게는 만나를 주신다고 하시죠. 이것은 복 그 자체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신약성경을 통해서 오늘 본문 말씀을 우리에게 적용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복은요, 물론 미래를 지향하고 준비하기 위한 복도 복일 수 있지만, 사실 진정한 복은, 진정한 은혜는, 하루치만, 일용할 만큼만 주신다는 거예요. 좀 충격적이지 않나요?
우리가 수련회 때 받은 은혜를 간직하자고 말하잖아요. 사실 수련회 때 받은 은혜는 하루치에요. 계속 못가요. 물론 좋았던 기억, 은혜받은 기억은 죽을 때까지 길이길이 남을 겁니다. 그래서 좋아요. 수련회 때 생각하면 다시 신앙생활 열심히 하고 싶어해요. 그런데 이런 효과가 오래 못 간다는 거예요. 하루면 녹아 없어집니다. 감정만 조금 남아있을 뿐 정말 말씀의 은혜, 성령님을 경험한 그 순간의 은혜가 계속 머물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가 “풍성하게 받았다”라고 고백하거나 그런 간증을 할 때는 오늘 우리가 일용할 만큼 받았다는 것을 그렇게 표현하는 것일 뿐이죠.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하루치의 은혜만 주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아까 말했듯이 신앙생활에서도 매너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매너일까요? 바로, 하나님을 무시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극복
우리가 하나님께 대해서 매너 없는 대표적인 행동이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께 시선을 두며 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에는 관심이 많아요. 하나님이 주시는 복에는 관심이 많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에도 능력에도 관심이 많고요, 하나님이 주시는 물질의 축복에도 우리는 관심이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정작 하나님 그 자체에 시선을 두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저는 사춘기 시절에 어머니 속을 많이 썩인 철부지입니다. 특히 사춘기 시절에는 저도 방에서 나오지를 않았습니다. 계속 방에만 있었어요. 지금도 그러는 것 같은데, 어쨌든 그랬습니다. 제가 방에만 있으면 항상 어머니가 부르셨어요. 나와서 밥 먹어라, 간식 먹어라, 라고 하시면서 저를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저는 바쁘다고 항상 방 안에만 있었죠. 그래서 밥을 먹을 때도 어머니가 제 방 안으로 밥을 넣어주고 그러셨습니다. 마치 교도소 사식 넣어주듯이 밥을 넣어주고, 간식도 넣어주고 그러셨어요.
그런데 이런 생활이 너무 반복되니까 하루는 어머니가 이렇게 저를 혼내셨습니다. “내가 사식 넣어주는 사람이니? 너는 엄마를 뭘로 생각하니?” 이 말을 들었을 때 살짝 충격을 받았습니다. 저는 부모님을 통해 받는 혜택을 사랑했지, 부모님 자체를 사랑하지 않고 있었음을 깨달았던 거예요.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을 뭘로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에게 복을 주시는 분? 은혜를 주시는 분? 모두 맞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곰곰이 생각해야 할 것은,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냐는 겁니다. 하나님이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을 사랑하고 있지는 않나요?
성적이 올라가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한다고 해봅시다. 그런데 하나님이 성적을 올리지 않으시면 어떻게 할 건가요? 돈을 많이 벌게 해달라고 기도해요. 그런데 하나님이 그렇게 안 해주시면 어쩌죠? 이러면 우리는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을 사용하는 것이 됩니다.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 하나님에 관한 것은 사랑하지만, 하나님 자체를 사랑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이유는 우리를 너무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믿으시죠? 우리가 누리고 있는 모든 환경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받기만 하고 있다면, 하나님은 얼마나 서운해하실지 생각해 보셨나요?
따라서 우리가 진정한 예배자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 그 자체를 사랑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복음선포
우리가 하나님을 서운하게 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될까요? 우리의 시선을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아닌 하나님 자체에 시선을 두는 것,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될까요? 오늘 본문 말씀을 봅시다.
17 이스라엘 자손이 그같이 하였더니 그 거둔 것이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나
18 오멜로 되어 본즉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거두었더라
19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아무든지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두지 말라 하였으나
20 그들이 모세에게 순종하지 아니하고 더러는 아침까지 두었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노하니라
21 무리가 아침마다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거두었고 햇볕이 뜨겁게 쬐면 그것이 스러졌더라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만나를 공평하게 주셨다는 것을 알 수 있죠. 그리고 주말을 제외하고 딱 하루치만 주셨습니다.
한번 생각해 봅시다. 내가 미워하는 사람도 똑같은 양의 만나를 가져갔어요. 저 사람은 하나님을 그다지 사랑하지 않는 것 같은데도 똑같은 복을 받았어요. 그러면 여러분은 어떨 것 같나요?
이것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면,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에게도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질문하겠죠. 아니, 어떻게 하나님을 믿지 않는 저 사람들도 사랑하십니까?
그럴 때 하나님이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요나 4:10-11절입니다.
10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11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구약시대에 요나라는 선지자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난 걸 보고 요나는 싫어했습니다! 하나님께 이렇게 하소연합니다. 아니, 저렇게 하나님을 대적하는 저들을 하나님께서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내가 다시스로 도망간 것 아닙니까? 왜 이렇게 저들을 사랑하시는 것입니까? 그러자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너가 키우지 않은 박넝쿨도 너가 아끼는데, 나를 대적하는 니느웨 사람들을 내가 안 사랑하겠니?”
여러분, 하나님은 악인들도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정말 사랑하지 못할 것만 같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사랑할만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사랑일 수 있지만, 정말 사랑할 수 없는 부분을 사랑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에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세요? 내가 정말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는 겁니다. 죄인이라서 그래요. 거룩하신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나를 사랑하실 수 없어요. 하지만 하나님은 저희를 사랑하십니다.
하지만 이 니느웨 백성들이 계속 회개했을까요? 아니요, 그렇게 오래가지 못했어요. 미가 선지자 시대 때, 딱 100년 후에 이들은 다시 타락했습니다.
여러분, 악인들과 의인들의 다른 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악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보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서 주어진 효과들만 바라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니까 너를 잘되게 하시겠지, 복을 더 주시겠지, 능력을 더 주시겠지, 이렇게만 생각하는 것이죠.
물론 하나님은 능력을 주실 것이고 보호해 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한 효과만 추구하는 신앙생활은 절대 오래가지 못하고 다시 타락하기 쉬워요. 더 큰 것을 요구하기 시작하고, 더 많은 것을 바라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의인들은 어떠하냐면, 날마다 하나님의 사랑을 섭취한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사랑에 의한 효과, 하나님에 관한 것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신뢰하는 거예요. 이미 오늘 하루 충분히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고 있다, 하나님이 지금 나의 일상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빛을 충만히 비춰주고 계신다는 믿음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거예요.
우리에게 너무 부족한 것이 많고, 필요가 많고, 힘들고 어렵고, 광야와 같을지라도, 우리가 만나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만나를 공급해주시는 하나님, 아니 이미 만나보다 더 좋은 걸 우리에게 주고 계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거예요. 나의 환경이 달라지지 않았어도, 나의 연약함이 해결되지 않았어도, 광야가 계속 이어질지라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시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는 믿음이 필요하다는 거예요.
[마7:11]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그러면 더 좋은 것을 주고 계신다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 나의 일상이 너무 진부한데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있는가? 바로 말씀입니다. 신명기 8:3절 읽어봅시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이스라엘이 만나를 저장하지 못하도록 막으시는 이유는, 그들을 책임지시고 인도해주시는 하나님, 그분의 말씀 자체를 신뢰하라는 의미가 담겨있는 겁니다. 만나를 저장하게 되면 하나님이 아닌 만나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먹을 만큼 가져가는 사람입니다. 먹을 만큼 가져가라는 것은 쪼잔하게 남기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정말 풍성히 가져가라는 뜻이에요. 그러나 나의 욕망이나 욕심이 앞서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바로 “먹을 만큼 가져가세요”라는 겁니다. 우리의 욕망이 앞서서 만나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만나보다 더 좋은 걸 매일 일용할 만큼 주시고 계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말씀을 섭취하며 일상의 예배를 회복해야 해요. 매일이 주일같아야 합니다. 일상에서 말씀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회복하고 예배를 회복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누리고 있는 모든 삶의 양식이 우리에게 얼마나 풍성하고 충분한 것인지 기쁨과 감사가 되살아나게 될 겁니다.
비전제시
말씀을 정리합니다. 하나님의 관한 것, 하나님의 효과를 바라는 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배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관한 것, 하나님의 효과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그분 자체를 갈망하고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기본 매너입니다.
그리고 이 매너를 회복하는 방법은 바로 매일 하나님의 사랑을 섭취하는 겁니다. 악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도 그것이 오래가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매일 하나님의 사랑을 섭취하면 감사와 기쁨이 영원토록 갑니다. 이건 매일 말씀과 기도를 통해 회복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바이블타임이 좋은 게 있다면 매일 감사제목을 3가지 쓰게 되어있다는 거예요. 악인과 그리스도인의 대표적인 차이가 바로 감사입니다. 감사하지 못하는 상황에도 감사하는 사람이 바로 이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라는 표시이에요. 우리가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게 하시려고, 하나님 자체만 바라보게 하시려고 우리에게 일상의 감사를 회복하게 하시려고 일용할 은혜의 양식을 주신다는 것을 신뢰해야 합니다. 이게 주기도문으로 우리가 매주 고백하는 “일용하 양식”의 의미이에요.
이러한 차원에서 우리 교회가 19일부터 제자RE 예배회복운동을 진행합니다. 일상의 예배를 회복하고 교회의 예배 회복을 위한 운동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은 예배자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참된 예배자로 회복되기 위한 운동을 진행하니까 많이 참여하세요.
이번 한주도 일상의 감사와 예배를 회복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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