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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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
본문: 출애굽기 3:7-10
제목: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주제: 우리를 구원하시고 인도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누구보다도 인격적으로 우리를 대하신다.
목적: 인격적인 하나님을 만나 날마다 기도하는 아이들이 되게 하소서
평형깨기
프리드리히 니체라는 19세기의 유명한 철학자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많이 들어보셨을 겁니다. 여러분이 즐겨보는 드라마, 영화, 넷플릭스, 유튜브, SNS를 관통하는 세계관이 모두 이 한 사람 니체에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래서 만약에 여러분이 도대체 이 세상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며 살고 있는지를 이해하고 싶으면, 니체를, 지금 말고, 나중에 공부하면 됩니다.
어쨌든 니체는 목사님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굉장히 경건하게 자랐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병으로 일찍 죽고, 연이어 남동생도 병으로 죽습니다. 그때부터 니체는 많은 아픔과 우울증에 시달리며 살았다고 해요. 그러다가 그가 대학 시절 공부를 하면서 점점 기독교로부터 멀어지게 됩니다. 산업화와 자본주의의 폐해의 궁극적인 원인이 기독교에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의 우울증과 자본주의 사회의 원인이 기독교라는 겁니다. 그래서 그가 한 유명한 말이 “신은 죽었다”이죠.
이러한 배경에서 니체가 쓴 책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이라는 책입니다. 이 책에서는 자본주의와 도덕을 명분으로 인간을 피폐하게 만드는 기독교를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성에 주목합니다. 인간의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자는 거예요. 그러면 자유롭게 살 수 있다는 겁니다.
여러분, 이게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방식입니다. 교회를 다니지 않는 여러분의 친구들의 이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겁니다. 기독교를 믿으면 인간적으로 보이지가 않습니다. 하지 말라고 하는 게 너무 많아요. 술도 마시지 말고, 게임도 하지 말고, 거짓말도 하지 말고, 이렇게 너무 인간을 강압적으로 옥죈다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이 진심을 싹 감추고 기계적으로 윤리와 도덕을 실천하니까 사회가 좋아지기는커녕 인간성이 소멸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제1차, 제2차 세계대전입니다. 기독교를 잘 믿은 결과가 세계대전이냐? 사람들이 이렇게 질문하고 결국 기독교를 떠나게 되었죠. 이게 모두 니체의 영향입니다.
갈등심화
머리가 아프죠? 제가 왜 이 말씀을 드리는 걸까요? 왜냐하면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이 어떤 존재인지 알려주려고 하기 때문이에요.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은 인격적이지 않습니다. 조금 더 급진적으로 말해볼까요? 하나님은 인간적이지 않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인간이 아니십니다. 범죄하고 연약한 인간과 완전히 차원이 다르신 분이시죠.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께서 너무나 “인간적”이시라면, 믿을 수 있겠습니까?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벌써 여기서부터 세상이 알고 있는 하나님의 모습과 다릅니다.
오늘 본문이 이러한 본문입니다. 기억하세요. 오늘 본문 출애굽기 3장은 여러분의 머릿속에 박혀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요, 하나님께서 공식적으로 “비하”하신 첫 번째 사건입니다. 따라서 말해볼까요? “비하”
“비하”가 무엇이냐, 낮아짐입니다. 하나님의 낮아지심, 또는 하나님의 내려오심이에요. 물론 하나님의 낮아지심의 사역은 그전에도 나오지만, 하나님께서 공식적으로 선언하시고 사역하신 첫 번째 비하사역이 오늘 본문입니다.
하나님의 극복
오늘 말씀의 핵심 질문은 이겁니다. 하나님은 왜 비하하셨을까요? 비하의 목적과 그 이유를 오늘 살펴볼 겁니다.
첫 번째, 하나님께서 비하하신 이유는 우리의 고통을 함께 느끼기 위해서입니다.
7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보고”라고 말씀합니다. 그들의 근심을 그냥 본 것이 아니라 “분명히” 보셨습니다. 히브리어 원문에는 “라오 라이티”라고 나와 있습니다.
여기서 그냥 아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아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시나요? 그 고통을 몸소 체험하셨음을 뜻합니다. 분명히 아는 것은 그 고통을 몸소 겪으셨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고통을 느끼실 수 있을까요? 원래 하나님은 고통을 느낄 수 없는 존재입니다. 고통을 느끼면 하나님은 더 이상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냥 인간에 불과하게 되죠.
하지만 하나님은 인간의 고통을 취하기로 결정하십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취한 방식은 단순히 우리를 건져내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그 고통을 느끼고 경험하신다는 거예요.
왜?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의 아버지이자 목자가 되어주고 계셨다는 사실을 알려주시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 전에, 하나님은 이미 우리의 아버지, 우리의 목자가 되어주고 계셨다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함이에요. 이것이 아브라함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그저 하나의 신에 불과했다면 그냥 손으로 몇 번 까딱까딱 하면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으셨을 겁니다. 하나님은 충분히 그러실 능력이 있으세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통을 함께 겪으신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을 모르고 있었을 때에도, 하나님은 이미 우리의 아버지이시라서, 목자이시라서, 우리가 아프고 힘들 때마다 함께 아파하고 계셨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기 위함이에요. 마치 자기 자녀가 아프면 같이 아파하는 부모님처럼 말이죠. 심지어 하나님 당신의 신성을 내려놓으시면서까지, 인간성을 취하시면서까지 이러한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계십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에 대해서 충분히 알지 못합니다. 일상으로 돌아가면 우리는 하나님을 서운하게 하는 행동들만 하고 있을 겁니다. 아직 중학생인 여러분 중에서 하나님을 잘 모르는 분들이 많을 수도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멀게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말씀을 통해 이 사실 한 가지를 꼭 기억하세요. 하나님은 여러분이 겪고 있는 고통과 신음을 같이 겪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아플 때 하나님도 아파하세요. 하나님 당신의 영광도 버리고, 신성도 내려놓은 채, 인간성을 취하셔서 함께 고통을 느끼고 계세요. 우리의 부르짖음을 듣고 계세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자 우리의 왕이시자 목자이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이렇게 고통을 느끼시면서 무기력한 모습만 보여주시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우리와 고통을 함께 느끼신 목적이 있으시겠죠.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비하하신 두 번째 이유입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이 비하하신 이유는 우리를 하나님의 나라로 데려가시기 위함입니다. 본문 8절 읽어보겠습니다.
8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
여기서 눈여겨 보아야 할 동사 3개가 나옵니다. 내려가다, 인도하다, 데려가다. 하나님의 사역은 크게 이렇게 3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내려가시고, 애굽에서 인도하시고, 가나안으로 데려가십니다.
보통은 우리가 구원을 생각할 때 이집트에서 나오는 것, 인도하여내는 것만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러면 우리는 구원을 제대로 이해한 것이 아니에요. 절반만 이해하고 있는 겁니다. 기억하세요. 하나님의 구원은 “어떤 것으로부터(from)”의 구원 뿐만 아니라 “어떤 것을 향한(to)” 구원도 같이 이해되어야 합니다. 이 두 가지 측면 모두 놓쳐서는 안돼요.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비하하신 이유는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인도하여내시는 것뿐만 아니라, 가나안으로 데려가시기 위함입니다. 우리에게 적용하자면, 단순히 우리를 죄로부터 해방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로 우리를 데려가시기 위함입니다.
여러분, 만약 이집트로부터의 해방만 이루어졌다면 그것은 진정한 구원일까요? 아니요, 그것은 그냥 유기하는 것과 똑같아요. 만약 가나안 땅으로의 인도하심이 없었다면 그들은 이집트에서 나와서 광야에 그냥 버려졌어야만 했을 겁니다. 여러분, 이게 구원인가요? 이건 그냥 투기이에요.
하지만 하나님께서 내려오신 이유는 우리를 가나안 땅으로 직접 데려가 주시기 위함입니다. 직접 이 땅에 내려오셔서 우리와 인격적인 교제를 통해서, 우리가 어디로 갈지 가르쳐주시면서,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기를 원하세요.
그러므로 여러분, 만약 우리가 예수님을 단순히 믿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다면 그것은 엄미랗게 말하면 구원받은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데 기쁨이 가득하지 않을 때가 있어요. 예수님을 믿는 것은 우리에게 손해만 안기는 것 같아요. 그래서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믿지만 예수님을 믿는 것의 유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나라로 나아가셔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의 완성이에요. 하나님 나라로 나아갈 때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가 이루어집니다. 나를 죽음에서부터 건지신 구원에 만족하면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일상에서 기쁨과 감사는 사라질 수밖에 없어요. 이건 그냥 미신입니다.
하지만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를 가나안 땅으로, 하나님 나라로 데려가시는 하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면 일상이 무엇이 되냐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되는 거예요. 매일매일이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추억으로 가득하게 됩니다. 어떠한 믿음을 가질 때? 오늘 하루도 내가 하나님 나라로 나아가기 위한 과정이구나, 하나님께서 오늘 하루를 통해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시는구나라는 믿음을 가질 때, 오늘 하루가 내게 유익하게 되는 겁니다.
복음선포
하나님의 비하가 아주 선명하게 이루어진 사건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사건이죠. 요한복음 1:14절입니다.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사건, 육신의 몸을 입으심, 이걸 “성육신”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고통을 헤아리시기 위해서 이 땅에서 우리와 함께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의 모든 죄를 씻어주셨습니다. 여러분 믿으십니까?
그러나 여기서 멈추면 안됩니다. 여기서 만족하게 된다면 우리의 일상은 달라지지 않을 거예요. 오늘 출애굽기 본문에 의하면,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씻어주시는 사역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우리를 인도해주시는 사역도 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비록 지금은 예수님께서 하늘 위로 승천하셨지만, 예수님이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셔서 우리를 인도하고 계십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요? 그게 바로 성령님입니다. 요한복음 16:13절 함께 읽겠습니다.
13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여러분, 성령님은 예수님의 영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지금 비록 승천하셨지만, 성령님이 우리 안에 내주하신다면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신다고 고백할 수 있는 거예요. 예수님은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고 계십니다. 따라서 성령님은 우리를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세요.
여러분, 일상이 고되고, 삶은 여전히 광야와 같아도 성령님께서 우리를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일상이 달라지고, 광야가 기쁨으로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모든 삶이 감사로 바뀌게 될 겁니다.
비전제시
말씀을 정리합니다. 하나님께서 비하하신 이유 두 가지를 알아봤습니다. 우리의 고통을 경험하시기 위해, 그리고 우리를 하나님 나라로 데려가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비하는 곧 성육신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인간성을 입으신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아니십니다. 그러나 우리를 위해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인격적인 아버지로, 목자로 우리와 함께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이러한 은혜의 상징이 하나님의 비하, 즉 성육신입니다. 성육신은 단순히 2천년 전에만 일어난 사건이 아닙니다. 출애굽기에도 성육신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성령님을 통해서 성육신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광을 포기하시고, 인간성을 입지 않으셨다면, 이 모든 은혜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같이 인간성을 입으신 것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고통을 헤아리시고, 우리를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이 기독교가 인간성을 배제했다고 비판하는 것은 성경을 잘 모르고 하는 비판입니다. 성경을 제대로 아는 기독교인이라면, 산업화에만 몰두하거나, 강압적인 분위기를 연출하지 않습니다. 니체는 그의 우울증을 같이 겪고 계시는 하나님을 만나지 않았습니다. 시대의 아픔을 같이 아파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성경을 조금만 면밀히 읽었더라도 기독교를 이렇게까지 증오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여러분의 고민과 고통을 아시는 인격적인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경을 면밀히 읽고, 기도하는 삶을 사셔야 합니다. 기도하셔야 해요. 기도하지 않으면 성경의 하나님은 내 머릿속에만 있게 됩니다. 기도를 통해서 내 고통을 헤아리시고 나를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고 계시는 성령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는 삶을 사세요. 그렇다면 일상이 달라집니다. 광야에 있더라도 기쁨이 넘치게 됩니다. 이것을 성령 충만한 삶이라고 하는 겁니다. 너무 궁금하지 않나요? 기대가 되지 않나요? 이런 의미에서 수련회에 꼭 참석하시기 바랍니다.
이번 한 주 성령님과 인격적인 교제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