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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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7편
시편 17편
시편 17편은 다윗의 노래로 15절 같은 경우는 복음성가의 가사로도 활용되면서 많이 알려진 구절이기도 합니다. 다윗은 자신의 억울함을 말하고, 자신의 의로움을 말하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참되게 무엇으로 만족해야 하는지에 대한 결론으로 이 시편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 노래가 우리들에게는 어떠한 의미인지 한 구절씩 살피면서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다윗은 의의 호소를 말합니다. “여호와여 의의 호소를 들으소서” 다윗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자신의 무죄를 입증해 주시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어떤 번역에서는 “의의 여호와여 나의 호소를 들으소서”라고 번역하기도 했습니다. 사실 이렇게 해도 의미가 크게 달라지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성경과 같이 “의의 호소”라는 번역은 “여호와여 나의 의로운 호소를 들으소서”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윗의 상황은 누군가 비난과 공격을 하면서 다윗에게 죄가 있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에 억울한 다윗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하나님께 그의 무죄를 인정해 달라고 간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간구가 다윗은 모든 부분에서 죄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느 특수한 상황 가운데에서 다윗은 자신이 죄를 짓지 않았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고 그 부분에 대한 무죄를 입증해 주시기를 구하는 것이라고 이해하면 됩니다.
바리새인처럼 자신의 의를 뽐내고 있다거나, 절대적으로 자신의 무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의롭지 않은 고발을 당했기 때문에, 주님께서 자신의 무죄함을 알아주시고, 도와주시기를 다윗은 바라고 있습니다.
거짓되지 아니한 입술에서 나오는 자신의 기도에 귀를 기울여 달라는 간구는 그만큼 자신의 기도가 진실되고 정직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거짓된 입술로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 됩니다. 우리는 보통 이런 것을 위선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과 온갖 악독을 입술에 달고 사는 것은 서로 어울리지 않습니다. 단순히 어울리는 정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우습게 여기고, 가볍게 여기고, 하나님을 향한 찬양도 진실함이라는 것이 의심받게 되는 겁니다.
여러분의 입술이 거짓되지 않은 입술이 되기를 힘쓰십시오. 진실로 기도하고, 찬양하며 하나님 앞에 바로 서게 되기를 바라십시오.
2절에서 다윗은 주께서 판단해 주시고, 주님의 판단으로 공평함을 살펴주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다윗을 정죄하는 사람들로부터 받는 판단은 부당하고, 사실과 다르다는 것이 전제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에서 공평하게 판단해 주시기를 바라면서 자신이 진실한지를 시험해 주시기를 바라고, 동시에 원수의 거짓된 주장을 확인시켜 주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 원수들은 결국 거짓된 것들로 다윗을 해치려고 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죄가 없다는 것을 주장하면서 이미 하나님께 시험을 받았고, 그 시험에서 죄가 없다는 것을 확인받았음을 말합니다. 3절에서 동사가 세 개가 사용됩니다. “시험하시고, 오시어서, 감찰하셨으나” 이렇게 사용되었는데, 이는 하나님이 다윗을 얼마나 철저하게 확인하시고, 아시는지에 대해서 표현하는 것입니다.
“시험하시고”로 번역된 단어는 “금속을 녹여서 시험하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다른 불순물이 있는지 어떠한 것인지를 녹여서 금속을 시험하는 것처럼 다윗에게 온전함이 있는지, 선이 아닌 악은 없는지에 대한 시험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다윗은 금속이 뜨거운 불 속에서 녹는 것처럼, 삶 속에서 수많은 고난과 시험이 있었고, 그것을 통해서 자신의 무죄함을 입증했을 것입니다.
또한, “밤에 내게 오시어서”에서 “오시어서”로 번역된 단어는 “시험하다”는 의미가 있고, “감찰하셨으나”로 번역된 단어는 “방문하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밤에 다윗을 방문하셔서, 그를 시험하셨다는 것인데, 죄악이 가장 힘을 발휘하는 어두움의 시기인 밤중에도 하나님은 그에게서 잘못을 발견하지 못하셨습니다. 또한, 이것이 잠깐 살펴보셨다는 의미가 아니라, 밤새도록 시험하시고 살펴보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럼에도 흠을 찾지 못하셨습니다. 즉, 다윗은 이런 정도로 죄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험을 통해서 확인된 것은 다윗은 죄가 없다는 것인데,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다윗은 자신의 입으로도 죄를 짓지 않겠다는 결단을 합니다. 여기에서 입으로도 죄를 짓지 않겠다는 것은 진실됨과 연관된 것입니다. 이미 앞에서 자신은 거짓되지 아니한 입술로 기도를 드리니 그 기도에 귀를 기울여 달라고 하나님께 바랬습니다. 그런 다윗이 앞으로도 입으로 죄를 짓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은 계속해서 진실함을 지키겠다는 의미가 됩니다.
3절에서 자신의 입과 관련되어 결단을 한 다윗은 4절에서 행위와 관련되어서 죄를 짓지 않았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다윗은 포악한 자의 길을 가지 않았는데, 스스로 삼가서 포악한 자의 길을 가지 않았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단순히 다윗이 혼자의 힘과 생각으로 그렇게 포악한 자의 길을 가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주의 입술의 말씀” 즉, 하나님의 말씀이 다윗에게 주어졌고, 그에 따른 인도하심이 있었기 때문에 다윗이 그것을 쫓아 죄를 짓지 않았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다윗은 자신이 포악한 자의 길을 가지 않은 다른 이유를 말하지 않습니다.
즉, 다윗이 선을 행할 수 있었고, 포악한 자의 길을 가지 않을 수 있도록 한 유일한 도움은 여호와의 말씀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곧 우리에게도 귀한 가르침을 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선을 행하는 것을 배울 수 없다면, 다른 곳에서도 배울 수 없습니다. 신앙서적을 읽고, 신앙 세미나를 다니거나, 부흥회를 쫓아다니는 것도 유익할 수 있으나, 그러한 것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도하지 않는다면, 결국 그것은 사람의 생각을 배우는 것이지, 하나님의 뜻을 알고, 주께 순종함을 배우는 것이 되지 못합니다.
다윗이 3절과 4절에 걸쳐서 자신의 행동에 죄가 없고, 입술로도 죄를 짓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은 다윗을 향한 거짓된 고소의 내용이 입과 행동으로 다윗이 죄를 지었다고 하는 것임을 알려 줍니다. 결국 다윗의 원수들은 그렇게 입과 행동으로 다윗이 죄를 지었다고 말하지만, 다윗 자신은 그렇지 않으니, 하나님께서 판단해 주시기를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강포한 자의 길을 가지 않았다고 말한 다윗은 5절에서는 자신의 걸음이 주의 길을 굳게 지켰다고 말합니다. 강포한 자의 길과 주의 길은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5절에서 특별한 언급이 없지만, 4절에서 주의 입술의 말씀으로 포악한 자의 길을 가지 않았다고 말한 점을 생각해보면, 주의 길을 굳게 지키고 실족하지 않은 것도 주의 입술의 말씀이 주어지고, 그것으로 인도함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응답해주실 것이기 때문에 부른다고 말하면서 그러니 자신에게 귀를 기울여 자신의 말을 들어달라고 요청합니다. “귀를 기울이다”는 것은 사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 어울리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귀를 기울여야 더 자세히 들으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속삭이듯이 기도를 해도, 마음 속으로 기도를 해도, 하나님께서는 다 듣고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귀를 기울여 들어달라는 이야기는 주의 깊게 들어달라는 의미입니다. 물론 그렇게 노력을 해야만 하나님께서 들으시는 것은 아니지만, 그만큼 자신의 기도에 집중해주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또한, “내 말을 들으소서”라는 것은 기도를 들어달라는 정도의 의미를 넘어서, 들으신 기도를 따라서 행동을 해달라는 요청입니다. “들으소서”에 해당하는 단어가 사람에게 사용될 때에는 듣다는 의미와 함께 순종하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즉, 이 단어는 듣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들은 것에 대해서 행동으로 옮기라는 의미를 포함합니다. 그러니 이러한 단어를 사용해서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어주시고, 적절한 행동까지 해주시기를 바라는 겁니다.
7절에서 다윗은 언약적 사랑을 언급합니다. 다윗은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기이한 사랑을 나타내주시기를 바라면서 구원을 위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언약적 사랑과 연관되어 있음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언약적 사랑은 기이한 사랑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주님께 피하는 자를 구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진리를 7절에서 언급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피하다”는 단어는 여호와를 의지하는 것을 나타낼 때 흔히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일어나 치는 자들”에서 “일어나”로 번역된 단어는 “일어나 대항하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 즉 주께 피하는 자들을 반대하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이런 자들을 피해서 주님께 피하는 자들에게 주님은 피난처가 되어 주시고, 가난하고 약한 자들에게 부유함과 힘이 되어 주십니다. 이러한 것은 하나님의 인자하심, 사랑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기이합니다. 다윗이 자세히 설명하지 않지만, 구원의 방법이 기이하고, 구원의 때가 기이하고, 구원의 이유가 기이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을 베푸시는 것은 사람의 생각으로는 도무지 따라갈 수 없는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특히 우리는 언약의 하나님께서 언약 앞에 신실하지 못한 인간들을 향해서 끝까지 신실하심을 지키고 계신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인간들의 사랑이나 헌신, 순종과 상관없이 자신의 사랑에 기초하여 나타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은 도무지 이해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이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7절에서 사용된 단어와 표현들은 출애굽기 15:1-18절에서 사용된 것과 비슷하게 사용됩니다. 특히 15장 11-13절을 보면, 기이함, 주의 오른손, 인자하심이라는 표현들이 나옵니다. 이러한 점을 살필 때, 다윗은 모세가 불렀던 노래를 바탕으로 출애굽할 때 구원하신 그 구원을 기억하면서 자신의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8절에서 다윗은 자신을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아래에 감춰달라고 말합니다. 눈동자는 가장 조심스럽게 지켜야 할 것을 상징합니다. 주의 날개 그늘아래는 완전한 안전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표현들도 신 32장 10-11절에서 모세가 노래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광야 가운데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돌보신 것에서 사용한 표현입니다. 즉,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돌보신 그 하나님의 손길로 자신을 보호해 주시기를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다윗은 과거에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을 통해서 오늘날 자신에게 하나님께서 해주실 일들을 깨달은 것이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들이 기도를 할 때도 성경말씀에서 볼 수 있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따라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9절에서 다윗은 압제하는 악인과 목숨을 노리는 원수들을 언급합니다. “압제하는”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격렬하게 빼앗고 파괴하고 황폐하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목숨을 노린다”는 것은 “둘러싸다”는 의미로, 원수들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둘러싸서 공격하려는 상황을 의미합니다. 결국, 다윗은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도망갈 수 없는 상황이기에 그 원수들에게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전능하신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원수들을 묘사하는데, 그들의 마음은 기름에 잠겼고, 그들의 입은 교만하게 말한다고 표현합니다. 마음이 기름에 잠겼다는 것의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기가 어렵습니다. 때로 기름은 풍요로움을 의미하기도 하며, 비만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신명기 32장 15절에서는 “반역”을 의미하는 표현으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여수룬이 기름지매 발로 찼도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업신여겼도다”
이러한 의미를 적용해보면, 10절에서의 표현은 다윗의 원수들이 은혜 베푸신 하나님을 반역했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한, 마음이 기름에 잠겼다는 것이 반역을 의미한다면 이어서 나오는 교만과도 연결이 자연스럽게 됩니다. 반역하는 마음은 교만한 말로 표현되기 때문입니다. 즉, 그들을 기름지게 만드신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오히려 자신들의 입으로 교만을 말하면서 하나님의 존재를 지우려는 자들이 다윗의 원수들입니다.
10절에서 반역하는 자들로 설명된 다윗의 원수들은 하나님의 길을 따라서 걸어가는 백성들을 향해서 그들을 넘어뜨리려고도 합니다. 땅에 넘어뜨리려 한다는 표현은 단순히 넘어뜨리는 정도가 아니라, 죽여서 넘어뜨린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자신들은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을 쫓아서 사는 자들은 죽여 없애려고 하는 자들이라는 겁니다.
12절에서는 좀 더 잔인하게 사자처럼 찢으려고 한다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다윗의 원수들은 사자처럼 무자비하고, 은밀한 곳에서 공격하기 위해서 엎드린 젊은 사자와 같다고 표현합니다. 다윗은 이러한 위협으로 인해서 하나님이 도와주시고 보호해주실 것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상황만 놓고 보면, 매우 심각하고 위험한 상황입니다. 주님의 도움이 아니라면, 살아남지 못할 것만 같습니다.
13절에 다윗은 여호와께 일어나실 것을 요청합니다. 그리고 원수들을 대항하여 넘어뜨리시고 자신을 악인에게서 구원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여기에서도 “일어나다”는 단어가 사용되었는데, 7절에서 사용될 때에는 악인들이 여호와께 피하는 자들을 대항하여 일어나는 것이었는데, 지금은 하나님께서 바로 그 악인들을 대항하여 일어나시기를 기도합니다.
14절에서 다윗은 악인들에 대해서 다시 설명합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분깃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분명 여기에서 “그들”은 악인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주의 재물”로 배를 채우는 사람들입니다. 여기에서 “주의 재물”은 여호와께서 악인들을 위해서 쌓아두신 벌이라는 의미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되면, 주님이 쌓아두신 벌로 자신들의 배를 채우고, 자녀들에게도 벌의 댓가를 물려주는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이해를 해도 틀리지 않지만, “재물”을 일반은총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이해하면, 악인들은 주님이 베푸시는 일반적인 은혜로 자신들의 배를 채우고, 자녀로 만족하며 자녀의 자녀들에게 남은 재산을 물려주는 사람들입니다. 악인들은 하나님의 일반은혜로 배를 채우지만, 하나님의 특별은혜를 받는 백성들을 괴롭히는 자들입니다.
또한 악인들은 자녀로 만족하는 자들이며, 남은 것을 자손에게 물려주는 자들로 그들의 관심은 이 세상에만 있습니다. 그래서 더 높고 영광스러운 것은 관심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백성들을 거짓으로 비방하고, 그들을 괴롭히며, 죽이려고 악을 행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17편 처음에서 자신의 의로움을 변호했고 마지막에서도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합니다. 그리고 의롭기 때문에 주의 얼굴을 보게 되고, 주의 형상으로 만족을 얻는다고 노래합니다. 다윗은 자신을 괴롭히던 원수들로부터 눈을 돌려 주의 얼굴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잠에서 깨어날 때, 하나님의 형상을 보는 것으로 만족을 누리게 됩니다. 이것은 악인이 자녀로 만족하는 것과 비교가 되는 말씀입니다.
일단 우리는 주의 얼굴을 본다는 것은 실제로 불가능하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분명 하나님께서는 출애굽기 33장 20절에서 아무도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의 얼굴”이라는 표현은 민수가 6장 22-27절에 기록된 제사장의 축복에서 사용되는데, “주의 얼굴”을 비추어서 은혜를 주시고, 주의 얼굴을 향하여 드셔서 평강을 주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즉, 주의 얼굴은 주님의 신적인 은혜를 가리키고, 그것을 본다는 것은 실제 얼굴이 아닌, 주님의 신적 은총을 본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의로운 삶을 살아가는 가운데 주님께서 베푸시는 신적인 은혜를 누리며 사는 것은 이 땅에 사는 신자들에게 허락된 하나님의 복입니다. 그런데 “깰 때에” 라는 표현의 해석에 따라서 의미가 달라지게 됩니다.
먼저 문자대로 잠에서 깨어날 때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괴로움과 고난 속에서 잠에 들지 모르지만, 주님의 얼굴을 보게 되고, 주님의 형상을 본 것으로 만족하며 일어나 하루를 살아간다는 의미가 됩니다.
이러한 해석도 전체 문맥에서 전혀 어색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깰 때에”라는 표현이 죽음에서 깨어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만약에 이런 의미로 이해를 한다면, 15절은 부활의 소망을 노래하는 것이 됩니다.
앞에서 다윗은 자신의 의로움이 인정받게 되기를 바랬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이 땅에서 자신을 괴롭히던 원수와 관련된 문제들이 해결되고, 잠시 누리는 일시적인 만족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부활을 통해서 주님 앞에 서게 된다면, 그것은 완전한 만족을 가져오게 됩니다.
“깰 때에”라는 단어에서 부활의 의미를 설명드린 것은 시편 16편의 마지막에 부활에 대한 교리가 담긴 말씀이 있었기 때문에, 16편과 17편이 부활이라는 주제로 이어져서 앞뒤로 배치된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14절에서 악인들은 이 세상의 것들과 자녀들로 만족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15절의 설명이 부활의 소망과 영원한 만족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면, 14절과 완벽하게 대조를 이루게 됩니다.
우리가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고, 죽음에서 부활해서 주의 형상으로 만족할 수 있는 것은 전체 성경의 가르침으로 알 수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비록 시편 17편이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가리키고 있지 않다고 해도, 15절의 말씀은 우리를 의롭게 만들고, 하나님 앞에 주의 형상을 볼 수 있는 거룩한 존재로 만드시는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도록 만듭니다.
하나님으로 인하여 의로움을 입은 백성들은 말씀을 순종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사모하고, 동시에 원수들을 물리쳐 주시기를 호소하며 살아갑니다.
다윗의 노래는 고난 가운데 있는 성도들에게 좋은 모범이 됩니다. 성도들은 다윗처럼 하나님께서 고난과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해 주시기를 간구하는 자리에 서야 하고, 주의 은혜와 말씀으로 순종의 자리에 서기를 소망해야 합니다.
또한, 주의 얼굴을 보기를 기뻐하고, 세상적인 것으로 만족하는 자가 아닌 영광스럽고, 귀한 하나님을 만나는 것으로 만족하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형제와 자매 여러분! 다윗의 기도가 즉각적으로 이뤄져서 원수가 다 사라지고 평안함이 찾아오면 좋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다윗을 포함한 모든 성도들은 죽는 그날까지 원수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신 것이 아니니, 우리는 불평과 불만으로 살아야 합니까?
아닙니다. 다윗이 노래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의 소원이 즉각적으로 이뤄지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참 소망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있음을 기억하고, 하나님으로 만족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부르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망과 심판과 죽음에서 건져주실 때, 주의 형상을 보게 하실 것이고, 주의 형상을 보는 것으로 만족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바람보다 더 크신 하나님의 형상을 사모하며 소망하는 여러분이 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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