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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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6편
시편 6편
시편 6편은 보통 참회의 시로 알려져 있습니다. 6편의 상당 부분에서 참회의 언어들이 사용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자신의 죄로 인한 참회를 기도하고, 또한 그 죄로 인한 고난 가운데 하나님의 도움을 간구하는 6편은 탄식으로 시작하지만 확신으로 끝나는 시편입니다. 오늘도 믿음의 선배들이 고통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확신하며 불렀던 노래를 통하여 우리의 노래가 어떠해야 함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시편은 자신을 징벌하는 것에 대한 호소로부터 시작합니다. “여호와여 주의 분노로 나를 책망하지 마시오며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 책망하지 마시고, 징계하지 마시라는 부정적인 간구들을 하는 것을 통해서 6편의 저자가 고난을 받는 것이 하나님께서 징계하시는 것이라는 점을 알려줍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징계라는 점을 통해서 죄라는 말이 언급되고 있지는 않지만, 이 시편은 죄의 고백을 하고 있다는 점을 또한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를 참회의 시라고 한 것입니다.
1절에서의 간구는 하나님의 징계가 아주 없었으면 하고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1절에서의 간구는 자신이 죄인이기에 책망과 징계는 받아야 마땅하지만, 주의 분노와 주의 진노로 하지는 말아달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간구는 우리를 좀 당황하게 만듭니다. 책망과 징계가 아예 없는 것이 좋은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책망과 징계가 아주 없어지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보통인데 다윗은 그렇게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은 책망과 징계를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주의 분노와 주의 진노로는 하지 말아달라는 것입니다.
“책망하다”, “징계하다”라고 번역된 두 단어는 아버지가 아들을 훈계하고 교육할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훈계하고 교육하는 것은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이 단어를 사용해서 노래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책망하고 징계하는 것에는 사랑이 바탕이 되기 때문이라는 점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의 분노와 주의 진노로 책망과 징계를 하시면 자신이 영영 죽게 된다는 점을 알기 때문에, 자신이 책망과 징계를 받는 것은 마땅하지만, 주의 분노와 진노만큼은 참아달라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도 비슷한 간구를 기도했습니다. 예레미야 10장 24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여 나를 징계 하옵시되 너그러이 하시고 진노로 하지 마옵소서 주께서 내가 없어지게 하실까 두려워하나이다” 예레미야도 징계가 부당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징계를 하시되 진노로 하지 말아달라고 간청을 드립니다.
우리가 혹여 죄로 인해서 하나님의 책망과 징계를 받는다면, 그것을 없애달라고 기도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징계를 받는 것이라면, 그것은 존귀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 징계로 인해서 우리의 영혼이 부요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징계를 없애달라는 기도가 아니라, 징계를 하시되 분노와 진노 가운데 하시지 마시고, 하나님의 인자하심 가운데 징계와 책망을 해주시기를 기도하십시오.
2절에서는 이제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1절에서 부정적인 표현들이 사용되었다면 2절에서는 긍정적인 표현들이 사용됩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기를 간구하고, 그것의 구체적인 표현으로 “나를 고치소서”라고 기도를 합니다.
“은혜를 베푸소서”라고 번역된 문장은 이전 성경에서는 “긍휼히 여기소서”라고 번역되었습니다. 여기에 사용된 히브리어 단어가 “은혜를 베풀다. 긍휼히 여기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받을 자격이 없는 과분한 은혜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1절에서는 자신이 죄로 인해서 책망과 징계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고백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간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자신이 수척하기 때문에 은혜를 베풀어달라고 기도합니다. 수척하다는 표현은 병들어 기운이 없는 상태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뼈가 떨린다고도 표현을 했는데, 여기에서 뼈는 육체적인 구조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뼈가 떨린다는 표현은 몸이 흔들리는 고통스러운 상태를 말합니다.
다윗은 자신의 죄악으로 인해서 책망과 징계를 받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책망과 징계가 육체적인 질병으로까지 이어진 상태입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은혜 베푸시기를 구하면서 자신을 고쳐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3절에서는 자신의 영혼도 매우 떨리고 있음을 고백합니다. 앞에서 뼈가 떨린다는 말을 했는데, 여기에서는 자신의 영혼도 매우 떨리고 있음을 고백합니다. 다윗은 분명히 자신이 저지른 죄악이 하나님 앞에서 눈감고 넘길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죄악으로 인해서 책망과 징계를 받았고, 육체적인 연약함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죄악의 비참함으로 인해서 자신의 영혼이 매우 심하게 떨린다는 고백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죄악의 징계로 육체적인 질병이 찾아왔다면, 육체적인 질병은 영적인 쇠약함까지도 가지고 오기도 합니다. 2절에서는 뼈가 떨린다고만 표현되었지만, 3절에서는 영혼이 매우 떨린다고 표현을 합니다. 즉, 현재 더 크게 문제가 되는 것은 육체의 고통보다는 영혼의 고통이라는 사실이 강조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영혼의 고통을 강조한 다윗은 이제 여호와께 한탄이 섞인 질문을 토해냅니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다윗은 영혼과 육체의 고통으로 인해서 약해졌고, 두려워했습니다. 혹여 하나님께서 진노와 분노로 책망과 징계를 하실까 불안해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무서운 상황이 있습니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지금 다윗은 자신이 육체가 질병으로 고통을 받고, 영혼이 매우 고통을 받는 것보다 더 두려운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것입니다.
자신이 병들어 기운이 없고, 영혼이 떨리고 있는데, 이러한 상황 가운데에서 하나님께서 침묵을 계속 이어가신다면 자신이 버림받은 것만 같은 두려움에 더욱 빠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이 외친 말 속에는 아직도 소망을 품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이러한 질문은 다윗의 고통이 오랫동안 있었고, 마치 계속 될 것만 같은 염려가 있다는 것을 보이지만, 동시에 이러한 절망 가운데에서 응답하실 분은 여호와 하나님 외에는 없다는 사실을 또한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이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고 있기에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라는 질문에 앞서서 은혜를 구한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해주시기를 구하는 것도 은혜를 베푸실 하나님이심을 알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4절 원문에서는 “돌아와”에 해당하는 단어가 제일 앞에 있습니다. 이 순서에 맞게 읽는다면 “돌아오소서. 여호와여 나의 영혼을 건지소서”라고 읽을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돌아오소서”라는 간청이 있는데, 다윗은 자신이 범죄함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떠나신 것만 같이 느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침묵하시는 것도 그렇고, 자신이 병들어 고통에 있는 것도 그렇고, 뒤에 나오는 대적들로 어려움을 겪는 것으로도 하나님께서 자신을 떠나셨다고 느끼기에 충분합니다.
자신이 참회하는 가운데 있으니 더 이상 자신을 고통 속에 두시지 말고, 어서 돌아오셔서 자신의 영혼을 건져주시기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주의 사랑으로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기도하면서 자신이 지금 부르짖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을 더욱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사랑”으로 번역된 단어는 단순한 사랑이 아닌 언약적 사랑입니다. 보통은 성경에서 “인자”라고 번역된 단어입니다. 언약적 사랑은 하나님의 신실함에 기초합니다.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로 성취되기까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또한 오늘날에는 교회에 하신 언약을 이루시기까지 하나님은 계속해서 자신의 신실하심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언약적 사랑은 이렇게 신실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니 주의 사랑으로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간구할 수 있는 것도 다윗 자신의 어떠한 선함이 아닌 하나님께서 언약 가운데 보이신 신실하신 사랑을 힘입어 자신을 구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제 5절에서 다윗은 죽은 사람이 하나님을 기억하지도 못하고, 찬양하지도 못한다고 말하며 하나님의 이익에 호소하면서 그러니 자신을 고쳐 달라고 간청합니다.
“기억하다”는 말은 단순히 기억하는 것만을 의미할 수도 있지만, 성경에서는 종종 기억한 것에 기초해서 적극적인 행동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기억하셔서 아브라함의 조카 롯을 구원해주신 것과 같은 개념입니다.
본문에서 기억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위대한 일, 특히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기억하고, 그것을 전파하거나 찬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성경에는 “감사”로 번역된 단어는 “찬양”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기억하고 찬양할 존재로서 자신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하나님께 말씀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다윗은 자신의 탄식을 표현합니다. 자신이 탄식으로 피곤하여 밤마다 눈물로 침상을 띄우고 이불을 적신다고 말합니다. 자신이 피곤하다고 말한 이유는 지금 이렇게 영적으로 육적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상황이 오래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크게 과장된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눈물을 흘려서 침대가 뜰 정도가 되었고, 이불을 녹을 정도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우리 성경에는 “적신다”고 되어 있지만, 원문은 “녹아 내리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핵심은 다윗이 밤마다 큰 고통과 슬픔으로 울음이 멈출 날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7절에서는 자신의 눈이 근심으로 인해서 약해졌다고 말하며, 자신의 모든 대적으로 인해서 어두워졌다고 말합니다. 눈은 일반적으로도 건강을 측정하는 척도가 됩니다. 그래서 건강에 무슨 문제가 발생하면, 눈이 빨갛게 되거나, 노랗게 되거나, 눈에 총기가 사라지기도 합니다. 오랜 기간의 고통과 슬픔으로 인해서 눈이 약해지는 것은 당연한 결과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것만이 아니라 다른 이유도 말합니다. 자신의 모든 대적으로 인해서 어두워졌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고통을 받는 원인으로 자신의 모든 대적을 언급합니다. 물론 그 대적들은 자신의 범죄함으로 인한 하나님의 징계의 일부입니다. 그러하기에 대적들로 인해서 자신이 고통받고 있음을 더욱 더 기도하면서 그러니 이제 하나님께서 이 고통이 끝나게 해달라고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이제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에 응답하셨다는 확신을 가지고 외칩니다. “악을 행하는 너희는 다 나를 떠나라 여호와께서 내 울음소리를 들으셨도다” 다윗은 자신의 대적들에게 외칩니다. 떠날 수 있을 때 떠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자신이 우는 것을 들으셨다는 것입니다. 9절에서 이어서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8절 마지막에 자신의 울음소리를 들으셨다고 말하고 9절에서도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다는 같은 의미의 말을 반복해서 다윗이 말합니다. 이것은 자신의 기도가 확실히 하나님께 응답될 것이라는 확신을 표현한 것입니다. 9절 뒷부분에서 그러한 확신으로 자신의 기도, 즉 자신의 육체적, 영적 건강을 회복시켜주시고, 원수들로부터 구해주시기를 구한 기도와 함께 앞으로 다윗이 할 모든 간구를 응답해주실 것이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8절과 9절은 이미 응답하신 하나님께서 앞으로도 응답하실 것임을 확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6편의 결론으로 다윗은 자신의 모든 원수들이 부끄러움을 당하고 심히 떨며 물러갈 것이라고 말합니다. 6편의 맨 앞에 다윗이 주의 분노와 주의 진노를 두려워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만약에 자신이 하나님께 범죄한 것을 참회하지 않았다면, 원수들이 부끄러움을 당하고 심히 떨게 되는 것을 자신이 당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를 참회하지 않았다면, 자신은 영영히 멸망을 당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자신은 하나님의 은혜와 언약적 신실하신 사랑을 힘입어 용서를 받고 회복되었음을 확신하기에 자신이 아닌 대적들이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부끄러움을 당하다”라는 말은 기대하던 것과 반대로 나타날 때 느끼는 혼란이나 당혹함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대적들은 자신들의 기대와는 전혀 다르게, 오히려 자신들이 갑자기 멸망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와 자매 여러분! 우리가 비록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과 화목함을 누리는 넘치도록 큰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사탄의 간계나 우리 안에 있는 죄의 잔재들로 인해서 신앙의 길에서 실패하고 걸려 넘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때, 때로는 금방 일어나기도 하지만, 때로는 하나님의 책망과 징계를 넘치도록 받기까지 회복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책망하는 정도로 끝난다면 다행이지만, 하나님의 징계로 질병이나 실패나 가족이나 이웃들로 인한 비방과 모욕 또는 핍박까지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버리셨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징계가 있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장 8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계속해서 11절에서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책망과 징계가 있다면 오히려 감사하십시오.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바로 하나님의 자녀이니, 여러분을 자녀되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회개함으로 하나님 앞에 바로 서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범죄함으로 인해서 주의 분노와 진노를 받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 번에 영원한 화목제를 드리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자녀가 되기에 우리에게 거룩한 백성이 되도록 주께서는 책망과 징계를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다시금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의심하지 마십시오. 저와 여러분의 하나님은 우리가 눈물로 드리는 간구를 들으시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따라 응답하실 것입니다.
“하나님 나의 죄가 나로 하여금 병들게 만들고, 영혼이 떨리게 만들고 내 대적들이 나를 괴롭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께 간청드리오니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기도하는 이 죄인을 긍휼히 여겨주시옵소서. 사망 중에 주를 기억하며 주의 큰 일을 전파할 자가 없으며, 무덤에서 주께 찬양할 자가 없습니다. 그러니 이 못난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고 회복의 은혜를 내리시어 주를 기억하며 주를 노래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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