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3편

시편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0 ratings
· 220 views
Notes
Transcript
시편 13편
시편 13편
오늘 본문은 다윗의 시로 짧지만, 고통과 괴로움, 그리고 죽음이 덮쳐올 때,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을 통해서 회복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노래입니다. 우리의 일상은 괴로움과 고통이 끊이지 않지만, 참된 신자들은 그러한 것들을 통해서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고 찬송의 이유를 삼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어 시편 13편이 우리의 노래가 되도록 해주시기를 바라겠습니다.
1절과 2절에서 “어느 때까지”라는 표현이 4번 반복되어 사용되었습니다. 즉, 다윗은 한동안 고통을 겪고, 원수들에게 억압당했다는 것과 얼마인지 모를 기간 동안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원문으로 보면, 1절의 첫 부분은 불완전한 문장입니다. 이런 표현방식을 돈절법이라고 부르는데, 극단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입니다. 즉, 감정이 너무 격해서 차마 말을 다 잇지 못하는 것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이렇게 격한 감정으로 시작하는 것은 괴로움이 매우 심했고, 하나님께서 응답하시지 않는 상황에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괴로운 상황 가운데에서도 다윗이 믿음을 지키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다윗은 “어느 때까지니이까”라는 질문은 하지만, “왜”라는 질문은 하지 않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괴로운 일이 있을 때, 도대체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겼냐며 하나님께 불평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향해서 “왜”라고 질문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는 이런 일이 생기면 안 된다는 의미로 말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더 쉽게 말하면 이런 식의 말이 됩니다.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생겨야 합니까? 내가 무엇을 얼마나 잘못했다고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기는 것입니까?”
물론 괴로움이 크면 이런 질문을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질문은 성경이 한결같이 가르쳐주고 있는 선하신 하나님에 대한 불신으로부터 나오는 질문입니다. 그래서 문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선하시고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있다면 “왜”라는 질문보다 다윗처럼 “어느 때까지니이까”라고 말하게 됩니다.
다윗은 곧장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라고 말을 합니다. 상황상 하나님께서 다윗을 잊어버리신 것만 같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기억하신다고 말씀하시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돕기 위해서 행동하신다는 의미가 있고,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잊으신다고 말씀하실 때는 그분이 그를 도우러 오지 않으신다는 의미가 됩니다. 이러한 의미에 다윗은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숨기시겠나이까”라고 질문을 합니다. 주의 얼굴을 숨기신다는 표현은 은혜를 거두시는 것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1절에서의 표현만 보면, 하나님은 그를 잊으셨고, 그에게 은총을 거두셨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 어느 때까지냐고 질문하는 것은 지금의 괴로움이 하나님의 결정으로 인한 것이니 하나님의 결정을 또한 기다리는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신실한 신자는 사람들에게 잊히고 소외되는 것은 견딜 수 있어도, 하나님께 잊혀지는 것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지금 다윗의 외침은 하나님으로부터 잊혀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서 오는 것입니다. 즉, 이러한 외침은 경건한 믿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박윤선박사는 “이것은 성도에게 있어야 할 귀한 탄식”이라고 설명합니다. 박윤선박사는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이와 같은 탄식은 세상 영광이나 물질의 궁핍으로 인한 탄식이 아니라, 다만 영적으로 하나님을 사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러분이 괴로움을 겪게 될 때, 머릿속에서 별생각이 다 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잊으셨나? 하나님께서 나를 모른 척하시는 것인가? 하나님은 나를 알지 못하시나? 나는 하나님께 구원받지 못했나?” 이런 생각이 우리를 집어삼키게 되면, 우리는 절망으로 빠지게 됩니다. 이런 영적 침체를 경험한 신자들은 근심하며 슬픔 가운데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다윗도 2절에서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영혼이 번민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한다고 말합니다. 다윗은 고통을 벗어나기 위해서 노력도 했을 것입니다. 마음에 근심한다는 것은 괴로움을 벗어나기 위해서 스스로 노력했을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 어떠한 것도 해결책이 될 수 없기에 다윗은 다시 여호와 앞에 나아와 “어느 때까지니이까”라고 외치는 겁니다.
다윗은 원수가 자신을 치며 자랑한다고 말을 합니다. 우리 성경에 “치다”로 번역된 표현은 “~을 대항하여, ~위에”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위에”가 적합한데, 다윗은 대적들이 자신을 쳐서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다윗보다 인정받는 위치에 올랐기 때문에 자랑한다는 의미가 됩니다.
잊으시고, 얼굴을 숨기시고, 나로 하여금 번민하고 근심하며 원수가 자랑하는 것을 지켜봐야 하는 상황 속에서 “어느 때까지냐”고 질문하는 것은, 이 모든 것의 궁극적인 원인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믿는 것에서 나오는 질문입니다. 이것은 자신에게 벌어진 일을 원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일의 해결책이 하나님께 있음을 인정하고, 도와주시기를 바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윗은 자신의 절망적인 상황을 말한 이후에 하나님께 간구하는 내용을 노래합니다.
먼저는 자신을 생각해달라고 말합니다. “생각하사”로 번역된 단어는 “유심히 보다, 집중해서 보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자신을 꼼꼼히 봐달라는 의미인데,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시기에 굳이 꼼꼼히 볼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앞에서 잊으셨고, 얼굴을 숨기신 것 같은 상황에서 자신을 꼼꼼히 봐달라는 요청은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다윗은 “나의 눈을 밝히소서”라고 말을 합니다. 여기에서 눈을 밝혀달라는 것이 문자 그대로의 의미가 아니라, 때로 ‘교훈을 주다’는 의미로도 사용이 되지만, 여기에서는 육체적 힘과 영적 힘을 다시 살아나게 해달라는 의미로 사용이 되었습니다.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꿀을 찍어 먹고 눈이 밝아졌다는 표현과 비슷한 의미가 됩니다.
다윗은 자신을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눈을 밝혀달라는 요청을 한 이유를 설명하는데, 첫째는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하시지 않으시면, “사망의 잠을 잘지도 모른다”는 이유이고, 둘째는 4절에 기록되어 있는데, 2절에서 자신 위에 있던 원수들이 “내가 그를 이겼다”라고 말하고, 그것으로 대적들이 기뻐할지도 모른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응답하시지 않으면, 다윗은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될 것이고, 그것은 원수들의 기쁨이 됩니다. 그러한 상황이 되지 않기 위해서 다윗은 자신의 기도에 응답하시고, 자신에게 힘을 달라고 간청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거꾸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눈을 밝혀주시지 않으면, 죽음으로 끝날 것이고, 하나님이 죽음을 허락하면 자신의 대적이 승리를 선언할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 자비로우신 행동을 자신에게 베풀어 주실 것을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간절한 기도를 드리던 다윗은 갑자기 주의 사랑을 노래합니다. 지금까지 자신의 괴로움을 말하고, 원수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5절에서 다윗은 강력한 반의어로 시작을 합니다. 이 부분이 우리 성경에서는 생략되어 있는데, “그러나”라는 말과 함께 곧장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한다고 노래합니다.
사랑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헤세드”로 자기 백성에 대한 여호와의 신실하신 언약적 사랑을 의미합니다. 억압을 받는 상황과 원수들과 대적들이 둘러싼 상황에서 그보다 더 좋은 확신의 원천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보다 우리에게 더 큰 위로가 되는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주의 사랑을 의지한다고 노래하는 겁니다.
4절에서 원수들은 하나님의 사람인 다윗이 패배할 때 기뻐한다고 했는데, 여기에서는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에 기초한 하나님의 구원으로 인해서 다윗이 기뻐하게 됩니다. 원수들은 죽이는 것을 기뻐하고, 다윗은 하나님의 구원하심으로 기뻐합니다.
다윗이 주의 구원을 기뻐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눈을 주의 사랑으로 돌렸을 때였습니다. 만약에 자신의 상황에만 눈을 그대로 두고 있었다면, 절망 속에서 완전히 무너져 내려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과거 자신들의 조상들로부터 자신이 경험한 것까지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을 떠올리고, 의지하였을 때, 괴로움을 뛰어넘을 기쁨이 찾아왔습니다.
다윗은 6절에서 여호와를 찬송하겠다고 말을 합니다. 그 이유가 주께서 자신에게 은덕을 베푸셨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은덕을 베푸신 것은 완료형으로 이미 끝났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찬송하겠다고 할 때는 미완료형으로 아직 끝난 것이 아니라, 계속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는 이미 완전하게 주어졌기 때문에 다윗이 처한 현재의 상황에서도, 앞으로 찾아올 미래의 상황에서도 언약적 사랑에 바탕을 둔 은혜는 완전합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신자의 찬송은 끝나지 않고 계속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유명한 하박국 선지자의 노래를 알고 있습니다. “무화과 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하박국 선지자가 이렇게 노래할 수 있는 것도 과거에 보이셨던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기에, 비록 지금은 절망적인 상황이어도, 여호와 한 분만으로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다윗의 노래는 “어느 때까지니이까”라고 말하면서 탄식했지만, 주의 사랑을 통해 은혜 베푸심을 찬송함으로 끝마치고 있습니다. 다윗의 태도가 이렇게 바뀔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신 언약적 사랑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진실로 나를 영원히 잊으셨다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선지자의 입술을 통해서 전해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이사야 49장 14-15절을 찾아서 함께 읽어봅시다.
오직 시온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였거니와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백성들은 포로로 잡혀가고, 영원할 것만 같았던 이스라엘은 이방 나라들로 인해서 멸망하게 되었을 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잊으셨다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엄마가 자식을 잊어버리지 않는 것처럼, 혹여 엄마가 자식을 잊어버려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들을 결단코 잊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로마서 8장에 기록된 사도 바울의 편지와도 비슷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교회를 향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바울의 말은 어떠한 것도, 어떠한 상황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8장 39절에서 한 번 더 은혜를 말합니다.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사도 바울도, 다윗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언급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그냥 하나님의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자기 자신을 아낌없이 버리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것은 아무것도, 어느 누구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문제입니까? 바로 우리들의 시선이 어디에 가 있느냐가 문제입니다.
여러분이 때로는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라고 불평하는 것처럼 말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불평을 끌어낸 상황과 처지보다 더 큰 주의 사랑을 바라볼 때, 우리는 바로 그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회복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성경에 “어느 때까지니이까”라고 질문하고 그에 대한 답을 하나님께 들은 것이 기록된 말씀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6장 9절에서 11절인데, 순교자들이 하나님께 소리를 외쳐 말합니다.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여기에서는 왜 심판을 하시지 않으시냐고 질문하는 것입니다. 어서 심판을 해주셔서 우리의 원수를 갚아달라는 요청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에 대한 답을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직 잠시 동안 쉬되 그들의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당하여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나님의 대답은 순교자가 더 생기기까지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생각을 해본다면, 우리의 괴로움이나, 우리의 원수들로부터 오는 고통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그러나 언젠가 그것에 대한 수고를 갚아 주시고, 원수를 갚아 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붙잡고 기다리는 겁니다. 그냥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바라보면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달콤한지, 얼마나 아름다운지, 얼마나 귀한지를 묵상하기를 힘써보십시오. 아낌없이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의 사랑, 원수였던 우리를 양자의 신분이 되도록 이끄신 성령님의 사랑,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하늘 영광을 버리고, 자기 자신을 내어주신 예수님의 사랑.
삼위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절망 속에서도 구원의 확신을 말할 수 있게 하고, 슬픔 속에서도 기쁨을 노래할 수 있도록 이끕니다.
사랑하는 형제와 자매 여러분! 저는 여러분이 겪는 고통과 괴로움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영혼이 얼마나 극심하게 힘들고 어려운지 다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저나 여러분의 고통과 힘든 상황이 아무리 크고 대단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랑 앞에서는 초라할 뿐입니다. 주의 크신 사랑을 보십시오. 그리고 주의 사랑을 의지하십시오.
여러분이 고난과 괴로움과 원수들을 만날 때, 여러분의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시고,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언약을 믿음으로 굳게 붙잡을 때, 삼위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세상이 알지 못하는 놀라운 위로와 평안과 기쁨을 허락해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겪는 모든 일들 가운데 우리를 사랑하시는 삼위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더욱 믿음에 굳게 서시고, 삼위 하나님을 갈망하며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여러분이 어느 순간이든 눈을 들어 주의 사랑을 의지할 때, 우리보다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깨닫게 될 겁니다.
Related Media
See more
Related Sermons
See more
Earn an accredited degree from Redemption Seminary with Log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