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0편

시편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0 ratings
· 228 views
Notes
Transcript
시편강해(10편)
시편 10편
시편 10편은 누가 지었는지에 대한 표제어가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10편은 저자가 누구인지 모른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많은 학자들은 시편 9편과 10편은 원래 하나의 시였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한글성경에서는 나타나지 않지만,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9편과 10편이 히브리어 알파벳을 순서로 시가 기록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볼 때, 둘은 하나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물론 중간에 빠진 알파벳 단어가 있어서, 이것이 과연 정확한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되기도 합니다. 또한 9편은 감사의 시이고, 10편은 탄식시로 분류가 되기 때문에 둘이 원래 하나의 시였다고 보는 것은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성경이 둘을 구분해서 기록한 것을 생각해볼 때, 우리는 하나의 시였을 가능성도 있지만, 성경의 구분을 따라서 두 개의 독립된 시로 생각해서 보면 되겠습니다.
시인은 노래를 시작하자마자 탄식을 합니다.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 시인이 이렇게 외치는 것을 보면, 환난을 당하고 있고, 무척이나 힘든 상황 가운데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시인의 첫 번째 외침은 자기의 힘든 상황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멀리 떨어져 계시고, 간섭하시지 않는 것 때문입니다.
사랑의 반대는 무관심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시인이 하나님께서 자신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계신 것처럼 느끼고, 무관심한 것처럼 느끼기에 더욱 괴로워합니다. 그러나 시인이 이렇게 탄식한다고 해서, 정말로 하나님이 무관심하신 분인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의 입장에서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이 보이지 않거나, 힘든 상황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께서 자신을 돌보시지 않는 것처럼 느끼기가 쉽습니다. 이러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바라는 어떠한 상태나 환경이 있고, 우리가 원하는 수준이 있는데, 그것을 만족시킬 때에는 마치 하나님께서 열심히 일하시는 것처럼 생각하고, 그렇지 않을 때에는 하나님께서 일하시지 않거나, 나를 사랑하시지 않는 것처럼 생각하는 지극히 연약한 인간의 수준 때문입니다.
더 쉽게 말한다면, 타락한 인간은 자기 입장에서만 하나님을 평가한다는 것입니다.
시인은 타락한 인간들의 개인주의적인 외침이 아니라, 공의로우신 하나님, 궁핍하고 가난한 자를 돌보시는 하나님이심을 알고 믿기에 그분께 답답한 현실을 탄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1절의 내용이나, 10편 초반의 내용만 보고 판단한다면, 시인은 보통의 인간들처럼 자기 수준에서 외치는 불만 정도로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10편 전체의 내용은 의로우신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있음을 노래하도록 합니다.
2절에서 악한 자는 교만하다는 특징이 있음을 말합니다. 그 특징으로 인해서 가련한 자, 즉 가난하고 억압받는 자들을 심히 압박합니다. 우리 성경에 “압박하오니”라고 번역된 단어는 “불태우다, 불같이 추적하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게다가 이 단어는 미완료형으로 써 있어서, 악한 자들이 지속적으로 불같이 추적하며 가난한 자들을 괴롭히는 상황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그들이 자기가 베푼 꾀에 빠지게 해달라고 간청을 합니다.
2절에서 악한 자가 교만하다는 특징이 있다면, 3절에서는 악인은 그 마음의 욕심을 자랑한다고 말합니다. 악인이 자랑하는 마음의 욕심은 선한 것이 분명히 아닙니다. 교만한 악인이 선한 욕심을 품을 수가 없습니다. 거룩함에 대한 욕심, 선을 행하려는 욕심, 사랑하려는 욕심, 봉사하려는 욕심이 아니라, 악인의 교만한 마음을 채우려는 욕심이 분명합니다. 그러한 것을 자랑한다는 것은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추하고 부끄러운지를 전혀 모른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3절에 “탐욕을 부리는 자는 여호와를 배반하여 멸시하나이다”라고 번역된 표현을 kjv성경은 “탐욕을 부리는 자를 축복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멸시하는 자니이다.”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여기에서 악인의 주된 특징이 또 나옵니다. 그들은 악을 행하는 사람을 향해서 정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악을 축복합니다. 게다가 그러한 것은 여호와께서 멸시하는 것인데도, 그들은 축복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일을 오히려 기뻐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악인들은 분명 자신들의 죄악된 모습도 자랑하며 기뻐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미움과 진노와 심판을 가져온다고 할지라도, 지금 당장 눈앞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전혀 개의치 않을 것입니다.
시인은 악인에 대해서 4절에서도 계속해서 설명합니다. 악인은 교만한 얼굴로 말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감찰하지 아니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찾지 않으신다고 말을 합니다. 시인은 그런 악인을 평가하기를 “그의 모든 생각에 하나님이 없다”고 말합니다.
악인이 교만한 모습을 계속 보일 수 있는 것이나, 찾는 이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그는 여호와를 배반하고 멸시하는 모습도 보이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입으로만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기에 나타나는 악한 모습으로 이어지는 것을 보여줍니다.
시인에게 악인의 형통은 고통스러운 문제입니다. 5절에 보면, 악인의 길은 언제든지 견고한 것처럼 보입니다. 게다가 주의 심판은 너무 높이 있습니다. 즉, 악인에게서 너무 멀리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설사 하나님이 계신다고 해도, 하나님의 심판은 악인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악인은 그의 모든 대적들을 멸시합니다.
그리고 악인들은 속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흔들리지 아니하며 대대로 환난과 저주를 당하지 아니하리라. 우리 성경에는 “저주”가 7절에 나오는데 원문으로는 6절과 연결해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악인은 심판 하시는 하나님이 계신다고 할지라도 너무 멀리 있고, 자신과는 전혀 상관이 없으니 자신에게 흔들리는 일도 없고, 계속해서 환난과 저주를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러한 생각은 죄를 짓고 사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마음 자세일 것입니다. 죄를 짓는 사람이 이 죄로 인해서 내가 환난과 저주를 당하고 삶이 이리 저리 흔들릴 것이라고 생각을 한다면, 그 죄로부터 떠날 것입니다. 그러나 죄를 짓는 사람은 그런 생각을 품으면서 죄를 짓지 않습니다. 그 순간의 탐욕과 욕망으로 인해서 자기가 얻고 누리고 즐길 것만 생각을 하지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악인의 입에는 거짓과 포악이 있고, 그의 혀 밑에는 죄와 악이 있습니다. 악인의 혀 밑에 죄와 악이 있다는 표현은 혀 밑에서 음식의 맛을 느낀다는 의미로, 죄와 악을 음식의 맛을 느끼는 것처럼 악인들의 기쁨과 즐거움의 근원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8절에서는 악인의 모습이 새롭게 표현됩니다. 악인들은 마을 구석진 곳에 앉아서 자신들에게 죄를 짓지 않은 사람을 죽이고, 약한 사람을 엿보면서 괴롭히려고 기다립니다. 마치 9절의 표현처럼 사자가 자기의 굴에 엎드려서 기다리는 것처럼 은밀한 곳에서 엎드려 약한 사람들을 잡으려고 기다리며 그물에 넣으려고 합니다.
이러한 묘사는 악인들이 어쩌다가 한 번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습관적으로 일상적으로 그리고 계획적으로 죄를 짓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0절의 앞에 구푸려 엎드리는 대상이 악인인지, 가련한 사람인지는 정확하지가 않습니다. 가련한 사람으로 보면, 악인의 포악으로 엎드리게 된 것이고, 악인으로 보면, 포악을 행하기 위해서 허리를 숙인 것이 됩니다. 70인역도 악인이 악을 행하기 위해서 숙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악인의 모습으로만 본다면, 허리를 구부린 사람을 악인으로 보기에 충분합니다. 어떤 해석이든지, 결국 가련한 자들은 악인들의 포악으로 넘어지게 됩니다.
이렇게 연약한 자들을 넘어뜨린 악인들은 다시 마음에 외칩니다. 하나님이 잊으셨고, 그의 얼굴을 가리셨다. 잊으셨다, 가리셨다는 표현은 하나님이 관심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악인은 하나님께서 영원히 보시지 않는다고 생각을 합니다. 이러한 표현은 결국 하나님이 없다고 여기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근현대역사에서 이러한 악인들을 너무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조선이 망하고, 일제강점기가 시작될 때, 나라를 팔고 같은 민족을 팔았던 친일파들에게 하나님의 정의는 없었습니다. 세계대전을 일으킨 장본인들에게도 자신들의 탐욕과 정욕만 생각했지, 하나님의 심판을 걱정하지는 않았습니다.
북한의 김일성, 김정일이나, 남한의 박정희, 전두환 같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며 국민들을 죽이고 탄압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정의와 심판은 자신들에게 미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악인은 그리 유명한 사람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 속에도 악인은 있습니다. 내 가족이 될수도 있고, 내 이웃이 될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곁에서 온갖 악을 행하면서도 자신이 죄를 짓는 것이라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고, 설령 자신이 하는 행동이 나쁜 일이라고 알면서도 그것을 즐거워하며, 혀 밑의 사탕처럼 여길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바로 그 지점에서 시인은 12절 이후로 방법을 보여줍니다. 시인은 악인의 모습에 탄식하다가 갑자기 하나님께 하나님의 백성을 도와달라는 기도를 합니다. 1절에서 시인은 현 상황이 마치 여호와께서 멀리 계시고 숨으신 것처럼 보인다는 문제를 말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그 상황을 바꿀 기도를 하나님께 드립니다.
하나님께 일어나시라고 말하는 것은 이제 행동을 시작하시라는 요청입니다. 또한 손을 드옵소서라고 말하는 것은 싸움을 위해 손을 드는 것을 의미합니다.
11절에서 악인은 하나님이 잊으셨다고 말했지만, 12절에 시인은 가난한 자들을 잊지 마시라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13절에서는 앞에서 악인이 했던 말을 다시금 반복하면서, 하나님께서 일어나시고 손을 드셔야 할 이유를 설명합니다. 시인이 직접적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13절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악인들의 말에 대해서 반응을 보이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라는 요청이 담겨져 있습니다.
시인은 계속해서 앞에서 하나님이 잊으셨고, 그의 얼굴을 가리셨고, 영원히 보지 아니하신다는 말을 반대해서 주님께서 보셨다고 말합니다. 악인이 무엇이라고 생각을 하고, 어떻게 느끼고 있든지 그것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설사 하나님께서 아무런 반응을 하시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보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십니다.
시인은 자신이 경험한 일들을 따라서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믿음을 따라서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서 말을 합니다. 악인에 대한 즉각적인 심판이 있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보셨고, 공의로운 심판은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것을 의지하여 노래하고 있습니다.
“외로운 자가 주를 의지하나이다”에서 악인들이 괴롭히던 외로운 자들이 의지할 대상은 오직 하나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주는 벌써부터 고아를 도우시는 이시니이다”라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이미 과거에 고아를 도우시는 분이셨음을 알려주는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회적으로 가장 약하고 연약한 고아를 이미 도우셨던 분이시기에, 현재 불행한 일을 당하는 자들도 외면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시인은 악인의 팔을 꺾어달라고 기도하고, 악인의 악을 더 이상 찾아낼 수 없을 때까지 찾아달라고 기도합니다. 팔을 꺾는다는 것은 그들의 힘을 깨뜨린다는 의미이고, 악을 더 이상 찾아낼 수 없을 때까지 찾아달라는 것은 악을 완전히 제거해달라는 의미입니다. 이 세상에 악을 완전히 제거하는 때는 신약성경의 가르침을 따르면, 최후의 심판 때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시인은 현재의 삶에서 그러한 일이 벌어지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에게는 두 가지의 개념이 모두 필요할 것입니다. 모든 악이 없어지기 위해서는 최후의 심판이 임해야 한다는 사실과 함께 우리가 사는 현재의 삶에서도 악이 없어지기를 소망하는 마음 말입니다. 분명 예수님께서 재림하셔야 이 세상의 모든 악이 없어질 것입니다. 사탄은 결박당해서 무저갱으로 떨어지게 될 것이고, 모든 악인들은 그들의 죄를 따라서 심판을 받게 되며, 이 세상의 악이 설 자리는 없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날만을 바라며 오늘의 악한 현실을 견뎌내야 한다면, 신자들에게 너무도 가혹할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최후의 날이 되어서야 일을 하시는 분이 아니시라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오늘날 우리가 사는 이 시간대에서도 하나님의 심판과 정의와 도우심이 있기를 소망하고, 그러한 일들로 악이 조금씩 사라짐을 바라는 것도 신자들이 마땅히 해야 할 기도입니다.
이제 시편은 결론으로 향합니다. 시인은 자신이 현재 느끼고 경험하는 악한 상황이 해결되지 않았다 할지라도, 여호와께서는 영원무궁하신 왕이심을 고백하며, 의로우신 왕께서 이 악한 상황을 해결해주실 것을 확신합니다.
16절에서 이방 나라들이 주의 땅에서 멸망하였다고 과거형으로 번역하였는데, 70인역에서는 미래형으로 번역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것은 주님의 심판이 확실하다는 것을 강조한 표현으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즉, 하나님을 향해서 적대적인 태도와 모습을 가진 악인들은 주님의 통치를 거스를 수 없고, 이미 멸망한 것과 같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표현은 당장 악인들로 인한 괴로움이 해결되지 않은 신자들에게 미래에 하나님께서 하실 일들을 소망하며 주의 통치를 더욱더 바라도록 만들어줍니다.
게다가 시인은 하나님에 대한 흔들림 없는 확신을 노래하면서 시편 10편을 마칩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다고 확신합니다. 그리고 마음을 견고하게 하시는 분이시다고 노래하며,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 고아와 압제 당하는 자를 위하여 심판하시며 세상에 속한 자인 악인이 다시는 위협하지 못하게 하실 것을 노래합니다.
시편의 결론은 세상에 속한 악인들이 하나님이 없다, 하나님이 멀리 계시다. 눈을 가리셨다는 표현과는 달리 절대적인 왕이시고, 왕권을 나타내셔서 악인들을 심판하실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10편에서는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무신론의 개념이 등장을 합니다. 악인들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믿지 않고, 설사 있다고 생각할지라도 자신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믿는 자들이나 또는 약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괴롭히기를 망설이지 않고 행합니다.
신자들은 그러한 사람들로 인해서 고통을 당하고, 괴로움을 당하기가 일반적입니다. 신자들이 괴로움을 당할 때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정답이겠습니까? 과거 유대교의 한 분파는 눈은 눈으로 피는 피로 갚아준다는 생각을 따라서, 하나님께서 행하실 심판을 자신들이 직접 행동으로 옮기는 과격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힘이 있는 사람이거나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라면, 신자는 자신의 힘을 올바르게 사용하여서 악을 억제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신자들은 보통 약자에 속했습니다. 그래서 믿음 가운데 핍박을 받고, 진리를 따르다가 괴롭힘을 당하거나 부당한 일을 당하기가 일수였습니다.
신자들을 향해서 그러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이라는 온세상의 왕을 부정하고, 존재를 믿지 않는 불신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시편 10편의 노래가 신자들의 노래로 얼마나 적합한지를 보게 됩니다. 악인들이 현재 자신들이 누리는 권세와 힘과 상황을 따라서 우리들을 괴롭히거나 하나님이 없다고 말한다 할지라도 그들에게 찾아오는 것은 영원무궁하신 왕이신 하나님의 피할 수 없는 심판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와 자매 여러분! 우리들이 경험하는 일들과 만나게 되는 현실은 마치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처럼 보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의 시각입니다. 신자들의 눈은 당장에 보이지 않지만, 성경에 분명히 계시된 말씀을 따라서 하나님의 정의가 실행될 것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리라고 기도하라고 알려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알려주신 기도를 따라서 하나님의 뜻이 이 땅 가운데 이뤄질 것을 소망하면서 기도하십시오.
악인은 반드시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심판이 확실하다는 사실을 노래하면서 하나님의 정의를 기다리고, 또한 악인의 자리에 있던 우리를 의인의 자리로 옮겨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또한 노래해야 할 것입니다.
Related Media
See more
Related Sermons
See more
Earn an accredited degree from Redemption Seminary with Log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