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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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1편
시편 11편
시편 11편은 다윗의 시라고 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이 시편은 우리의 삶의 터전이 흔들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한 절씩 살피면서 이 시편의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다윗은 강한 믿음의 표현으로 노래를 시작합니다.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다.” 어떠한 상황에서 이런 말을 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지금 다윗은 하나님께 피했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시작부터 여호와께 피해서 여호와를 신뢰하고, 의지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다윗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뒤에 나오는 내용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인지 알 수는 없으나, 어떤 사람이 다윗에게 새같이 산으로 도망치라고 말을 합니다. 도망을 치라고 말한 사람은 진심에서 나온 충고였을지도 모릅니다. 지금 다윗은 위험한 상황에 있으니, 새가 살기 위해서 날개를 펄럭이면서 매우 급하게 도망을 치는 것처럼 산으로 도망을 치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진심에서 나온 말이라고 해도, 그 말은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다윗은 완전한 피난처가 되시는 하나님께 피해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새가 산으로 도망치듯이 도망가라는 말은 두려움에 떨면서 도망치라는 것인데, 이러한 모습은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다.”라고 말하는 믿음의 모습과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다윗에게 도망을 치라고 한 이유는 2절에서 더 설명이 됩니다. 악인이 활을 당기고 화살을 시위에 준비해서, 마음이 바른 자를 어두운 곳에서 쏘려고 합니다.
악인이라는 단어는 “악을 행하고 지금도 죄 가운데 살고 있으며 계속 악을 쫓아사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의미가 있기에 악인은 하나님 앞에 유죄이고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존재를 말합니다. 그러한 악인이 지금 하고있는 행위는 계속해서 활을 당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화살을 쏠 준비를 끝마쳤습니다. 그들이 노리고 있는 것은 마음이 바른 사람입니다. “바른”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의로운, 정직한”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시편 11편에서 마음이 바른 자는 다윗을 가리킵니다. 다윗에게 산으로 도망을 치라고 한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악인이 화살로 마음이 바른 자를 쏘려고 하기 때문에 어서 도망을 치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 악인은 어두운 곳에서 활을 쏘려고 합니다. 즉, 악인의 공격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이고, 그러한 공격은 더욱 치명적일 것입니다. 그러니 언제, 어디에서 화살이 날라올지 모르니 어서 급히 도망을 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미 여호와께 피해있기 때문에 그럴 이유가 없다고 노래합니다.
3절에서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하랴”고 질문이 나옵니다. 여기에서 “터”는 관습, 율법, 질서, 생활방식에 대한 비유적인 표현입니다. 즉, 의인은 율법과 질서가 무너지는 것을 막을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 터가 무너질 때는 도망쳐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똑같은 말로 대답할 수 있습니다. 나는 이미 여호와께 피하였다.
사람들은 위험이 찾아오면, 도망가라고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이 혼탁하고, 어지럽고, 질서와 권위가 무너지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들은 계속해서 도망치라고 말을 할지도 모릅니다. 그런 것은 그저 무시하고 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나라의 질서가 무너지고, 도덕과 윤리가 흔들리고, 가정이 파괴되며, 하나님의 말씀이 무시를 받게 될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사는 대한민국을 헬조선이라고 부르는 말이 있습니다. 지옥을 의미하는 영어단어 헬과 조선을 합친 말인데, 원래는 조선시대가 지옥과 같다는 의미로 사용을 했었습니다. 그러다가 오늘날도 지옥같은 조선시대와 다르지 않다는 의미로, 오늘의 대한민국을 헬조선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젊은 청년들이 대한민국을 헬조선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무척이나 많습니다. 사회 전반적으로 부패했고, 정의는 사라졌으며, 악인들이 큰 힘을 얻어서 잘 먹고, 잘 살기 때문입니다. 돈이 있고, 권력이 있는 사람은 죄를 지어도, 크게 처벌을 받지 않고, 힘이 없고, 가난한 사람은 배가 고파서 빵 하나를 훔쳐도 몇 년을 감옥에 갇혀야 합니다.
유명 정치인의 아들이 뺑소니를 치고, 운전자를 바꿔치기를 해도, 감옥에 가지 않습니다. 정치인의 딸이 마약을 대량으로 가지고 들어왔는데도, 감옥에 갇히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법이라는 저울이 기울어져 있다는 사실을 너무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전광훈이라는 사람이 하나님의 이름을 앞세워 정부를 비난하고, 사람들을 빨갱이로 몰고 있는데도 유명한 목사들은 그것을 모른척하거나, 아니면 전광훈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십계명의 세 번째 계명이 철저하게 더럽혀지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처럼 여깁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의도적으로 무시를 받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시대와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다윗에게 도망치라는 사람들의 말처럼, 이러한 현실을 부정하고, 도망쳐버리면 될까요?
그런데 다윗은 4절에서 그에 대한 답변을 말합니다.
“여호와께서는 그의 성전에 계시고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그의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의 안목이 그들을 감찰하시도다”
여호와께서 성전에 계시고,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다는 선언은 모든 인간과 모든 세상에 대한 주권이 가장 높은 곳에, 그리고 가장 거룩한 곳에 계신 여호와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인해서 여호와를 신뢰할 수 있고, 여호와께 피하는 것으로 이미 충분합니다.
하나님께 주권이 있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주권을 가지신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일을 감찰하고 계십니다. 4절에서 하나님이 인간을 통촉하시고, 감찰하신다고 표현합니다. 통촉한다는 말은 주의 깊게 살펴본다는 의미이고, 감찰하신다는 것은 행동을 시험하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못 보시는 사람이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눈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은 하나님에 의해서 판단을 받게 됩니다. 4절 마지막에, 하나님께서 감찰하시는 대상을 원문에서는 “아담의 자손들”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즉, 아담이 하나님으로부터 지음을 받은 존재이기에, 하나님이 감찰하시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을 피할 수 없다는 점을 알려줍니다.
5절에서는 의인과 악인을 다루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언급을 합니다. 의인은 하나님께서 계속 감찰하십니다. 계속해서 시험하고 검증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즉, 여호와께서는 의인들에 관해서 믿음을 시험하십니다. 시험은 우리를 힘들게 만들기도 하지만, 그것으로 우리가 성장을 하기도 하고, 우리의 부족함을 깨닫게 되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에게 주시는 시험은 결국 살리게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그런데 악인에 대해서 하나님은 미워하신다고 시편은 노래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경에 “악인과 폭력을 좋아하는 자”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이는 폭력을 좋아하는 악인을 의미합니다. 악인은 폭력을 좋아하지만, 하나님은 그러한 악인을 미워하십니다.
악인이 좋아하는 폭력은 3절에서 언급하는 “터”를 무너뜨리게 하는 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악인을 미워하십니다. “미워하다”로 번역된 표현은 “증오하다. 가증히 여기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증오하고, 가증하게 여기기 때문에 하나님께 거부당하게 됩니다. 즉, 폭력을 좋아하는 악인은 하나님께서 증오하고, 가증히 여기셔서 거부되고 멀리하게 되는 존재가 됩니다.
의인은 시험을 받을지라도, 거부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악인은 하나님의 미움을 받아서 거부되는 존재가 됩니다. 그런데 단순히 거부되는 존재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6절은 악인들에 대한 심판을 말합니다. 악인들 위에 불과 유황의 비를 그물처럼 내리시고, 타는 듯한 바람이 그들의 잔에 채워져서 그들이 마실 거리가 되게 됩니다.
사람들은 의인들을 향해서 도망치라고 말을 할지 모르지만, 정작 도망쳐야 할 자들은 악인들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여호와께서 내리시는 그물로 꼼짝없이 갇히게 될 것입니다. 새처럼 산으로 도망쳐야 할 사람들은 악인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불과 유황의 비가 그물처럼 덮이기 전에 도망쳐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손을 벗어날 존재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결국, 악인들은 불과 유황이 그물처럼 내려서 도망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먹을 것은 타는 듯한 바람뿐입니다.
타는 듯한 바람은 아라비아 사막에서 불어오는 뜨겁고 건조한 바람을 가리킵니다. 당시 사람들은 이런 열풍을 신적 재앙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 신적 재앙이 잔에 채워져서 마셔지게 됩니다. 음료를 마시는 것은 목마름을 해결하기 위해서인데, 타는 듯한 바람을 마시는 악인들은 그것으로 인해서 더욱더 목마르게 될 것입니다.
악인들은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마시고, 의인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의 잔을 마시게 될 것입니다. 6절과 대조적으로 7절에서는 의인들에 대해서 노래를 합니다.
여호와께서는 의로우신 분이셔서 의로운 일을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정직한 자들은 하나님의 얼굴을 보게 될 것이라고 노래를 합니다. 여기에서 정직한 자로 번역된 표현은 2절에서 악인들이 화살로 노리던 마음이 바른 자와 같은 단어입니다. 즉, 악인들은 어두운 곳에서 마름이 바른 자를 노리고 그들을 향해서 화살을 쏠지 모르지만, 그 마음이 바른 자들은 결국 하나님의 얼굴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보게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혜를 얻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의인은 그들을 변호하고 구해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결론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기에 시편 11편이 성도들에게 전하는 의미는 아주 간단합니다.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우리는 답할 수 있습니다. 거룩한 성전에서, 하늘 보좌에서 우리를 살피시고, 돌보시는 하나님이 계시니 우리는 그 여호와 하나님께 피하여 구원을 얻고, 우리의 중심이 무너진다 하다라도, 우리에게 얼굴을 보게 해주실 하나님이 계시니, 끝까지 그분을 바라보며 살면 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삼일이 지나서 부활하실 것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을 때, 베드로는 그렇게 되지 마시고, 그러한 일이 주님께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6장 23절입니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예수님은 죽음을 말씀하시고, 베드로는 피할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시면서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오직 아버지 하나님을 의지할 것을 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시편 11편은 악인의 공격으로 율법과 질서가 파괴되고, 무너지려고 할 때, 의인들은 하늘로부터 다스리고 심판하시는 주권적인 하나님에 대한 믿음 안에서 굳게 서야 한다는 점을 알려줍니다.
무질서, 힘 있는 자들의 악함, 의인들에 대한 공격 등이 우리 사회에 넘쳐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절망하지 않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주권적이신 분이시고, 그 절대 주권으로, 의인은 사랑하시고, 악인은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날이 당장 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악인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심판의 날까지 악인들은 잠시 허용될 것입니다. 비록 당장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지는 않을지라도, 그래서 악인들이 여전히 당당하게 살아간다 할지라도, 우리는 악인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계심을 의지하고, 그들로 인해서 두려움에 빠지기보다, 굳센 믿음 안에서 하나님께 피하고, 오직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살아가야 함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미련하게 참고 기다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의인들은 믿음으로 머무르면서 부패하고 악한 사회,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사회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의를 행하며, 공의와 정의가 바로 세워지도록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해야 합니다.
정치, 경제,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고 사십시오. 신자들이 하늘을 소망하며 살아야 하지만, 여전히 이 땅에 속해 있기에, 이 땅의 사는 하나님의 백성답게 하나님의 법도를 세우고, 의를 행하며, 질서를 바로 잡는 일을 노력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일을 사랑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주인되시고, 우리의 사랑이 되시는 하나님께서 의로운 일을 사랑하신다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백성으로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의로운 일을 행하기를 노력해야 합니다.
지금까지의 역사를 보면, 세상의 터는 여러 번 무너지곤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살피시고, 돌보아주시기에, 이 세상은 아주 없어지지 않고, 계속해서 보존되고, 세워져 왔습니다.
오늘날도 무질서와 혼돈과 혼란함이 가득 차 있지만, 앞으로 우리가 살아갈 날들은 더욱 그러할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성경이 노래하듯, 우리는 우리를 감찰하시고, 돌보아주시며,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악인들의 공격에 두려움이 생길 수도 있겠지만, 그것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 하나님께 피하려고 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세상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에 대해서 불신할 것입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었는데도, 예수를 믿는 것으로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거짓말을 말하면서, 다른 곳으로 피하라고 우리를 유혹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무너지지 않는 터 위에 서 있고, 예수 그리스도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며, 하나님과 화목하게 됩니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에게 피하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우리를 정직한 자가 되도록 만드시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에게 피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의 얼굴을 볼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와 자매 여러분! 우리의 삶은 악인들의 공격이 끊임없이 이어질 것입니다. 그럴 때 새처럼 도망치는 모습을 보이지 마시고, 다윗처럼 자신과 세상을 향해서 외치십시오. “나는 여호와께 피하였다. 나를 위해서 자기 자신을 버리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피하였다.” 주께서 우리의 원수들을 심판하시고, 우리에게 하나님의 얼굴을 보이시며 은혜를 더욱 풍성히 베풀어 주실 때가 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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