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8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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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강해(8편)
시편 8편
시편 8편은 다윗의 시로 알려져 있는 찬양시입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시편 가운데 하나이기에 찬송에서도, 복음성가에서도 많이 불려지는 시편입니다. 시편 8편에서 어떠한 내용으로 하나님을 찬송하고 있는지를 잘 살펴서 우리의 진심이 담긴 고백의 노래가 되고, 우리 입술로 이 노래를 부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시인은 “여호와 우리 주”라고 하나님을 부르면서 시작합니다. 시편에서 자주 등장하는 표현인데, 거룩하신 이름인 여호와를 부르고, “우리 주”, 즉 우리의 주권자 또는 우리의 왕이라는 고백을 더합니다. 이러한 표현은 찬송의 타당한 이유를 제시합니다. 우리의 찬송을 받으실 분은 여호와이신데, 그분은 온 세상의 주인이십니다. 그래서 찬송을 받으셔야 마땅합니다.
시인은 주의 이름을 부른 후에 이렇게 말합니다.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여기에서 “아름다운지요”라고 번역된 표현은 원래 “장엄한, 고귀한 자”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시적인 표현으로 아름답다고 번역이 되었는데, 간단히 말하면, 영광스럽다는 것입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고, 생각만해도, 그 영광스러움에 마음을 빼앗깁니다. 주님의 이름은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아름답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아름답다고 생각하며 보는 것들은 주님의 이름의 아름다움에 비하면, 한 줌의 먼지와 같습니다.
주의 이름이 온 땅에 그리 아름답다는 것은, 주님의 복되신 이름의 영광이 온 땅을 가득 채운다는 것이기에 주님의 이름을 외치고, 부르는 것으로도 주님의 영광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시인은 온 땅에 주의 영광을 노래하고,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다”고 또한 노래를 합니다. 구조상 이 부분은 2절의 앞부분으로 옮겨서 이해를 하는 것이 좋습니다. 왜냐하면 1절과 9절이 같은 표현으로 처음과 마지막을 장식합니다. 그리고 시편에서 보통은 하늘을 먼저 언급하고 땅을 나중에 언급하는데, 8편에서는 땅이 먼저 나옵니다. 한글성경처럼 본다고 하면, 무엇인가 좀 어색한데,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를 2절 앞으로 보내서 읽으면, 시편에서 사용하는 방식도 어울리고, 1절과 9절의 수미쌍관구조, 샌드위치구조와도 잘 맞아 떨어집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영광이 하늘을 채웠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늘로도 하나님의 영광을 다 담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성경에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다고 되어 있는데, 이전 성경에는 “주의 영광을 하늘 위에 두셨나이다”로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영광을 두기에는 하늘조차도 작습니다. 온 땅에 주의 영광이 가득 채웠는데도 넘치도록 남아서 땅을 덮고 있는 하늘을 덮어야만 하나님의 영광을 둘 수 있음을 노래합니다.
땅과 하늘을 뛰어넘는 영광을 노래했는데, 갑자기 분위기가 바뀝니다. 한글 성경에는 “주의 대적”이 먼저 나오지만, 원문은 “어린아이들과 젖먹이들”이 먼저 나옵니다.
“어린 아이와 젖먹이들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셨습니다. 왜냐하면 주의 대적들 때문인데, 이는 원수와 보복자들을 잠잠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시인은 장엄하고 웅장하게 온 땅과 하늘의 하늘을 말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어린 아이와 젖먹이들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셨다는 말을 합니다.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입을 사용하신 이유가 주의 대적들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원수들과 보복자들을 잠잠하게 하시기 위해서 어린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셨다고 말합니다.
2절에서는 너무도 확실한 대조가 나옵니다. 주의 대적, 원수, 보복자 그리고 어린아이와 젖먹이. 주의 대적이나 원수, 그리고 보복자들은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이름을 인정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그들의 죄악된 행실은 맹렬하고, 힘이 넘칩니다.
이와 반대로, 어린아이와 젖먹이는 연약하고, 아무런 힘이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나약한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입에서 나오는 작은 소리로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을 증언합니다. 그들은 힘이 없을지 모르지만, 그들의 입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있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습니다.
스펄전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세상에서 학식 있는 바보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지만, 어린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소리는 그들보다 더 큰 소리로 하나님의 존재를 증언한다.” 하나님은 자신을 인정하는 약자들과 어린아이들을 통해서 자신의 능력을 세워가십니다. 그리고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 작은 소리일지라도, 그것들을 통해서 원수와 보복자들의 입을 잠잠하게 만듭니다. 소리는 작을지 모르지만,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능력이 있어서 원수들을 이긴다는 것입니다.
온 땅과 하늘을 뒤덮는 영광의 하나님께서는 강하고 능력이 있는 자들을 사용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약하고 힘이 없는 자들일지라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을 사용하셔서 자신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입니다.
약한 자들을 강하게, 사용하시어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더욱 빛나게 만드십니다.
시인은 2절에서 강한 대조를 사용한 후에 3절과 4절에서도 이어서 대조를 사용합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손가락으로 만드신 하늘과 달과 별들을 보게 됩니다. 저녁 하늘과 달과 별들은 우리를 압도합니다. 끝을 알 수 없는 어둠 속에서 달과 별들을 빛을 냅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시대에는 별들을 보기가 어렵습니다. 하늘의 공해도 심하고, 저녁에 도시에서 나오는 불빛 때문에도 별들을 보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 시대에는 3절의 감동이 그대로 전해지기가 어려울 수 있지만, 저녁 하늘에 은하수가 깔리고, 하늘의 별들이 빛을 발하며, 달이 환하게 저녁을 밝히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러면 다시 1절의 노래로 돌아가게 됩니다.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아름답고, 주의 영광이 하늘 위를 덮고 있다고 노래하게 됩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셨다고 노래합니다. 영이신 하나님이시니 손가락이 실제로 있지는 않겠지만, 시인의 의도는 예술가가 손가락에 온 힘과 정신을 집중해서 작품을 만드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하늘과 달과 별들을 그렇게 만드셨다고 노래하는 것입니다. 밤하늘에 관한 것만 노래한다고 해서 그것들만 그렇게 만드신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으로 하셨다는 것이 대충하시거나, 정성스럽게 만들지 않았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것은 마치 손가락으로 한땀 한땀 온갖 정성을 다하여 만드신 것과 같습니다. 주님의 뛰어나고 놀라운 솜씨가 모든 피조물들에게 새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대조가 또 등장합니다. 밤하늘의 웅장함과 주님의 솜씨를 노래한 후에 사람에 대한 말을 합니다. 온 우주를 만드시는 놀라우신 하나님께서 왜 사람에게 집중을 하시는 것일까? 이것이 4절에서 나온 질문입니다.
하늘과 달과 별들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위대함을 생각했는데, 또한 밤하늘의 넓고 깊음을 통해서 인간이란 존재가 얼마나 작고 나약한 존재인지를 알게 되었는데, 그런 인간을 하나님께서는 생각하시고 돌보고 계십니다.
끝없는 우주를 만드시는 하나님께서는 아주 작은 사람을 생각하시고, 돌보십니다. 우리 성경에 “생각하시며”로 번역된 표현은 “기억하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온 우주를 다스리시며 돌보시는 분이신데, 그 가운데 아주 작고 나약한 사람을 기억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우리 성경에 ‘돌보시나이까’로 번역된 단어는 “방문하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사람들을 기억하시고 친히 방문하시며 돌보아 주시는 분이심을 노래합니다.
밤하늘의 깊음과 높음과 넓음을 지으신 분이 유한하고, 연약한 인간을 기억하고 돌보신다는 말씀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은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그 어느 하나 관심이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러한 관심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알게 해주면서 동시에 두려움에 빠지게 만들기도 합니다.
내게 죄악 중에 있을 때, 하나님의 대적처럼, 원수처럼, 보복자처럼 행동하거나 생각할 때에도 하나님은 나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돌보고 계시는 중에우리는 때로 나를 돌보시는 하나님을 대적하여 죄를 짓습니다.
내가 죄를 지을 때는 마치 아무도 나의 죄를 보지 못하는 것처럼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의 죄악은 하나님의 눈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항상 기억하시며 찾아오셔서 돌보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돌보심을 노래한 후에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해서 하신 일을 더 노래합니다.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성경은 “사람을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셨다”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개역한글 성경은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셨다”라고 번역하여서 사람이 천사보다 조금 못한 존재로 이해되도록 했습니다. 이러한 번역은 히브리어를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의 번역을 따른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번역은 사람을 하나님에 비교하는 것이 너무 불경건해 보여서 바꾼 것으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천사라고 번역했던 단어는 “엘로힘”입니다. 이 단어에 천사라는 의미가 있기는 하지만, 통상적으로 하나님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게다가 5절 마지막에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운다는 표현은 천사보다 조금 못한 존재에게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사람을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만들었다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얼마나 놀라운 존재로 만드셨는지에 집중합니다. “조금”이라는 표현은 정말로 작은 차이를 나타낼 때도 사용되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은 바로 이런 영광스러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단순히 하나님의 형상을 흉내내는 정도도 아니고,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인정해주는 정도도 아닙니다.
칼빈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아담이 지음 받았다는 것에서 “완전함을 부여받았다”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아담은 올바른 이해력을 충분히 소유했고, 이성의 경계 안에서 감정을 지녔으며, 모든 분별력을 서로 올바로 연결했고, 자신에게 주어진 놀라운 은사들을 통해서 자신을 창조하신 분의 탁월함을 드러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탁월함을 드러내는 존재임이 분명합니다. 시인은 그것을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만들어졌다고 노래한 것입니다. 또한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다는 표현은 왕에게 적용되는 표현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왕으로 부르셨다는 말입니다. 게다가 그 부르심은 한 번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관을 씌우셨나이다”에서 “씌우셨다”라는 단어가 미완료형으로 사용되어서, 계속해서 진행되는 일이라고 묘사합니다.
즉, 피조물들을 다스리는 왕의 위치에 앉게 된 것이 인간들에게 계속해서 주어진 일입니다. 보잘 것 없는 인간이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지음을 받은 존재라는 것과 하나님의 왕적인 영광과 위엄을 인간에게 허락하셔서 하나님을 대신하여 온 세상을 다스리는 자로 만드신다는 사실이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과 계획을 알게 합니다.
6절은 이러한 사실을 다시금 강조합니다. 주님께서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사람의 발 아래 두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온 땅과 하늘 위에 가득 차 있는 것을 노래했을 때, 우리는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초라한 존재인지를 보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인간을 정말로 초라한 존재로만 지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지으셨고, 왕의 권세를 주셔서 피조물들을 다스리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은 사람이 다스려야 할 것들입니다.
7절과 8절에서는 인간에게 맡기신 통치의 권세가 어디까지인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구체적으로 동물들을 다스리는 일을 담당합니다.
4절에서부터 8절까지 시인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얼마나 놀라운 존재로 만드셨고, 대해주셨는지를 생각했습니다. 분명 인간은 놀랍고 대단한 존재입니다. 영광스러운 하나님을 생각할 때, 인간은 너무도 연약하고 보잘 것 없는 존재였는데, 그러한 인간을 기억하시고 돌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지으셨고,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인간은 놀랍고 대단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에까지 오게 되자, 시인은 모든 것을 없었던 것처럼 다시 처음의 노래로 돌아갑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인간이 통치의 권세와 특권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또한 우리가 하나님보다 조금 못한 존재로 지음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은혜로우심과 사랑하심 등 하나님의 성품을 따라서 된 일입니다. 결국 우리가 누리는 영광스러움이나 권세의 본질을 온전히 깨닫게 되면,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리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 본문을 살필 때, 매우 불편한 부분이 있습니다. 인간은 분명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지음 받았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워주셨지만, 사람들에게서 실제로 나타나는 모습은 하나님보다 조금이 아니라 비교 자체가 죄가 될만큼 처참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고, 만물을 다스려야 할 위치에 있지만, 하나님의 형상을 버리고, 동물의 형상처럼 행동하며, 만물을 다스리기보다는 만물의 지배를 받고, 만물을 숭배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타락한 인간의 현실로 비추어 본다면, 시편 8편의 말씀은 도저히 경험될 수 없는 노래와 찬송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시편 8편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회복되었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신자들에게서 회복될 내용입니다.
예수님을 보고 성전에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외치는 어린아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을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보고 화를 낼 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하게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
온 세상에 대적들이 가득차고 악이 넘쳐나도,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믿은 아이들의 입을 통해서 대적들을 부끄럽게 만드셨습니다. 신자들이 사는 세상에서 신자들도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처럼 나약하고 힘이 없을지 모르지만, 신자들을 기억하셔서 돌보시는 삼위 하나님을 통하여 신자들은 연약한 중에도 주님을 찬미하고, 감사하며, 주님을 기뻐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모습은 대적들을 부끄럽게 만들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만들었으나, 타락한 인간은 그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서 짐승보다도 더 못한 존재처럼 행동을 합니다. 그런 인간들을 구원하시려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영화와 존귀의 관을 벗어버리고, 인간의 몸으로 오셨습니다. 더럽혀진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시기 위해서 자기를 하나님보다 못한 인간의 몸까지 낮추셨습니다.
또한 모든 만물을 다스리고 발 아래 두시는 것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일입니다. 에베소서 1장 22절을 보면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타락하기 전의 아담이 하나님보다 조금 못한 존재로 지음을 받았다는 사실에 놀랍니다. 그러나 그런 존재가 온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반역하고, 불순종하여 타락하였다는 사실에 더욱 놀랍니다. 그러나 우리를 더욱 놀랍게 하는 것은, 그렇게 아담과 함께 타락해서 자기 죄와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께서 생명으로 살리시고, 우리를 아담이 처음 가진 상태보다 더 영광스러운 존재로 부르시고, 이끄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시편 8편의 말씀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회복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 다시금 허락되어 우리의 입술을 열고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라고 외치고 노래하게 만듭니다.
사랑하는 형제와 자매 여러분! 우리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지으신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십시오. 그분은 우리를 기억하시고 친히 오셔서 돌보시는 분이십니다. 또한 우리가 죄와 허물로 죽었을 때는 성자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낮고 천한 자리로 오셨고, 죄가 없으신 분이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시고, 의로우신 분이 죄인들로 인해서 고통받으셨습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고, 의지하며, 그분의 이름이 온 땅에 영광스럽고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 있음을 노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입술을 열어 여러분을 기억하시며 돌보시며, 관을 씌우시며 높이시는 하나님을 찬양하십시오.
그분은 죽음과 저주의 자리에 있는 우리를 생명과 영광의 자리로 옮기셨습니다.
온 우주를 지으신 손가락으로 우리를 가리키시며 항상 기억하시고 돌보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백성들이라면 주의 이름을 높이기를 쉬지 말아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