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9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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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강해(9편)
시편 9편
시편 9편의 머리말은 “다윗의 시 영장으로 뭇랍벤에 맞춘 노래”로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뭇랍벤”이라는 표현이 시편에서 딱 한 번만 사용이 되었는데, 정확히 어떠한 의미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단지 문자적으로 이해한다면, “아들의 죽음”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아들의 죽음이란 곡조에 따라” 부르는 노래라고 이해하기도 하고, 어떤 학자들은 우리 성경처럼 “뭇랍벤에 맞춘 노래”, 즉, 뭇랍벤이라는 악기에 맞춘 노래라고 이해하기도 합니다.
정확히 어떠한 의미인지를 알 수 없을 때에는 그것을 자기마음대로 해석하거나 지나친 추측으로 해석하려고 하면 문제가 발생합니다. 지금처럼 연구가 부족한 상황에서는 정확한 의미를 알 수 없습니다. 이럴 때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혜를 주셔서 알게 하실 때까지 겸손한 자세로 기다리는 것이 올바를 것입니다. 표제가 어떠한 의미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것이 시편 9편의 의미를 이해하는데 방해가 되지는 않습니다.
시인은 “내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오며”라면서 노래를 시작합니다. 시작부터 모든 마음으로 여호와께 감사한다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여호와께 찬양을 드리겠다는 강력한 결단을 드러냅니다. 1절과 2절에서 동사가 다섯 번 사용됩니다. “감사하다, 전하다, 기뻐하다, 즐거워하다, 찬송하다” 이 단어들은 모두가 미완료형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 말은 한 번의 노래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감사하고, 전하고,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찬송하겠다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 성경에는 생략되었는데, 각 동사에 “내가”라는 말을 사용해서, 자신이 그렇게
시인은 온 마음을 다해서 여호와께 감사하겠다고 말하면서 주의 모든 기사를 전하겠다고 또한 노래를 합니다. 개인적으로 감사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하신 일들과 세상에 하신 일들을 널리 알리겠다고 말합니다. 또한 하나님을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지존하신 주의 이름을 찬송하겠다고 말을 합니다.
시인이 이렇게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주체할 수 없는 마음을 표현하는 이유가 3절에 등장합니다. “내 원수들이 물러갈 때에 주 앞에서 넘어져 망함이니이다.”
시인이 기뻐하는 이유는 여호와께서 시인을 위해서 하신 일들 때문입니다. 원수를 멸하신 과거의 일들에서 감사와 찬송의 이유를 찾고 있습니다. 3절에서 “주 앞에서 넘어져 망함이니이다”라는 말은 주님의 임재로 인해서 원수들이 패배한 것을 의미합니다.
시인은 4절에서 하나님을 재판관으로 묘사합니다. “나의 의와 송사”는 “나의 의로운 송사”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시인을 위해서 의로운 재판관으로 개입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보좌에서 앉으셔서 의롭게 심판을 하십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위해서 변호하고 억울함을 말할 수 있습니다. 보통의 사람들이라면 그렇게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내가 스스로 나를 변호하겠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의 가르침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주께서 나를 위해 변호하신다”라고 말하도록 이끌어줍니다. 4절의 말씀을 통해서 시인이 원수를 이길 수 있었던 주된 원인이 주께서 나를 위해 변호하셨기 때문임을 보여줍니다.
지존하신 주, 지극히 높으신 주께서 나 같은 작은 자를 위해서 변호를 하신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줍니다. 이러한 사랑을 받는데 찬양하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재판관의 보좌에 앉으신 주님께서는 의롭게 심판을 하셔서, 억울함을 당한 시인을 위해 의로운 판단을 내려주셨습니다. 악인에게 벌을 내리고 의인에게는 의롭다함을 해주셨다는 것입니다.
시인은 5-6절에서 하나님께서 과거에 하신 일들을 더 말합니다. 주께서는 이방 나라들을 책망하셨고, 악인을 멸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이름을 영원히 지우셨습니다. 또한 원수가 끊어져 영원히 멸망하셨고, 주님이 무너뜨린 성읍은 기억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습니다. “주께서 무너뜨린 성읍”에서 “무너뜨린”이란 표현은 뿌리째 뽑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방나라를 책망하신 것과 악인을 멸하신 것은 평행을 이루는 의미입니다. 이방나라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언약 밖의 나라를 의미합니다. 그러한 곳에 사는 사람들은 악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름조차 지워져서 기억될 수 없는 존재들이 됩니다. 오늘 본문 2절에서 주님의 이름은 찬송을 받지만, 원수들의 이름, 악인들의 이름, 이방나라의 이름은 기억되지 못하게 됩니다. 이름이 없어지는 것은 그 존재마저도 없어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시편을 반대로 생각한다면,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나라에 사는 의인들은 그들의 이름이 없어지지 않고, 계속해서 기억되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시인이 앞에서 주께서 하신 일들을 전파한다고 노래했는데, 3-6절까지의 내용은 주님의 원수들에 대해서 하신 일들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노래하는 것은 단순히 원수를 멸하시고, 그들의 이름을 지워버리신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에만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원수들의 이름이 사라진다는 사실은 곧장 원수의 자리에 있는 자들에게 돌이킬 것을 알려주는 교훈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거나 인정하지 않는 이방나라의 자리에 있는 악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통해서 기억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이방나라의 자리에 있는 악인들은 속히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주님의 구원하심을 바라며 나와야 합니다. 심판은 우리에게서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한 걸음 떨어진 곳에서 하나님의 처분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7-8절에서 다시 재판장이신 하나님에 대해서 노래를 합니다. 주님께서는 심판을 위한 보좌에 영원히 앉으실 것입니다. 과거에도 의로운 재판을 하신 분께서 미래에도 의로운 재판을 위해서 재판장의 보좌를 준비하셨습니다. 8절은 그러한 주님께서 공의와 정직으로 심판하실 것을 노래합니다.
5-6절의 내용만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심판은 멸망을 가져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불의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정의롭고 공정한 것입니다. 과거에도 공정하고 의롭게 심판하신 하나님께서는 미래에도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인간 재판장은 돈으로 매수가 되기도 하고, 잘못된 판단으로 의로운 판결을 내리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언제나 공의로우시고, 공정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의 판결은 어느 누구도 불만을 품을 수 없이 완벽합니다.
주님께서는 바로 그러한 재판을 위해서 자리를 준비하시고 계십니다.
시인이 이렇게 재판장의 모습으로 하나님을 노래한 후에 9-10절에서는 피난처이신 주님을 노래합니다. 하나님께서 의로우신 재판장이시기에 압제를 당하는 자들은 여호와께 피하면 됩니다. 그분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시기에 압제를 당하는 자들을 돌보실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을 압제 당하는 자의 요새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주님은 환난 때의 요새이십니다. 주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나라와 악인들의 이름은 멸하시지만, 주님을 찾고, 구하는 자에게는 요새가 되어주십니다.
10절에서는 바로 이러한 점을 강조하면서 노래를 합니다. “주님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
이름을 안다라는 것은 신뢰하고 의지하며 개인적인 관계를 갖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주님의 이름을 아는 것은 주님을 믿는다는 말과 같은 의미입니다. 주님의 이름을 아는 자들은 그분이 자기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않으시리라는 것을 깨닫고 그분을 의지할 것입니다. 그렇기에 세상에서의 압제와 환난은 오히려 하나님께서 요새이시며 의지할 분이시며 참된 보호자가 되신다는 사실을 알도록 도와줍니다. 그러니 환난 중에도 주님을 기뻐하며, 압제 가운데에서도 주님의 선하심을 의지할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이 가르치는 참된 믿음이 됩니다.
시편 9편에서 찬송하다라는 말은 계속해서 반복이 됩니다. 그런데 11절에서는 명령형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찬송하라는 명령과 함께 하나님께서 시온에 거하시는 여호와이시며, 피흘림을 심문하시는 이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시온에 거하시며 피흘림을 심문하시는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을 잊지 아니하십니다. 그렇기에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의 행사를 선포해야 합니다.
“피흘림을 심문하시는 이”라는 표현에서 “심문하시는 이”라는 단어는 “찾는 자”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 표현은 10절에서도 사용이 되었는데, 10절과 연결해서 이해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찾는 자를 결코 버리지 않으시는 분이시면서 동시에 그들에게 고난과 아픔을 가져다 주는 자들은 찾아서 복수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성경에서 “가난한”으로 번역된 단어는 “억압받는, 고통받는”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문맥상 “억압받는”이라는 의미가 더 어울립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시기에 “억압받는”자들에 대해서 관심이 많으시고, 또한 그들의 부르짖음을 외면하시지 않습니다. 주께서 이러하시다는 사실은 보통의 삶 가운데 “억압받는”일을 많이 경험하는 신자들에게 큰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또한 단순히 위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위로하시고, 원수를 갚아주시기까지 하십니다. 그러니 우리 주님을 향해서 찬송과 하신 일을 선포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릅니다.
시인은 지금까지 지난 과거에 있었던 하나님의 구원을 기억하고, 미래에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실 것을 확신함을 노래했습니다. 그렇기에 이제는 현재 자신이 당하는 고난 중에서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을 간청합니다.
13절에서는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라고 말함으로 하나님의 선하심에 의지를 합니다. 시인은 자신의 처지가 ‘사망의 문’에 가까이 있는 것처럼 말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망의 문에서 일으키시는 주님’이심을 신뢰하며 노래합니다. 주님께서 사망의 문에 있을지라도 일으켜 건져주실 것을 굳게 신뢰하는 시인은, 자신을 미워하는 자들에게서 받는 자신의 고통을 봐달라고 호소합니다.
이렇게 노래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공의로 심판을 하시는 분이시고, 압제를 당하는 자의 요새이시며, 피 흘림을 심문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자신을 돌보아 주신다면, 주의 찬송을 다 전하고, 딸 시온의 문에서 주의 구원을 기뻐할 것이라고 노래합니다.
자신을 앞에서는 ‘사망의 문’에 있는 것으로 묘사했던 시인은 자신을 하나님께서 구원해주시면, “딸 시온의 문”에서 주의 구원을 기뻐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딸 시온의 문”은 예루살렘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사망의 문에서 구원을 받은 자들은 시온의 문에서 찬송을 합니다.
신자는 13절에서처럼 하나님께 은혜와 자비를 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인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분명히 정해져 있습니다. 하나님을 찬송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심을 알 때마다, 주의 찬송을 다 전하고, 주의 구원을 기뻐해야 합니다.
시인은 자신을 구원해주실 것을 간청한 이후에, 다시금 악인들을 기다리고 있는 심판으로 되돌아가서 노래를 합니다. 특히 악인들이 했던 일들이 부메랑처럼 되돌아가서 악인들을 심판하는 도구가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웅덩이를 파는 것과 그물을 숨기는 것은 짐승을 잡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웅덩이도 파고, 그물도 숨겼다는 것은 악인들이 얼마나 열심히 시인을 괴롭히려고 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이 오히려 자신들을 빠뜨리고, 걸려들도록 만들게 됩니다.
16절 앞부분에 “여호와께서 자기를 알게 하사”은 심판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셨다는 의미가 됩니다. 악인들이 웅덩이와 그물을 준비했지만, 오히려 그것들이 자신들에게로 돌아가게 되고, 그러한 상황으로 인해서 여호와 하나님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파멸시키려는 행동은 오히려 자신을 파멸시키는 것이 되어버리고, 그렇게 정의를 행하신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됩니다.
16절 마지막에 괄호에 있는 표현은 정확한 의미를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힉가욘”이란 말은 문자적으로 “묵상하다”라는 의미가 있는 것으로 볼 때, 앞에서 노래한 내용을 묵상하며 생각하라는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시편에서 이러한 표현이 나오는 것은 우리에게 찬송이 아무런 생각없이 음에 맞춰서 가사를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내용을 묵상하면서 자신의 온 마음과 생각을 다해서 찬송해야 함을 알려줍니다.
시인은 악인들이 스올로 돌아간다고 노래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사망의 문에서 시온의 문’으로 옮겨지지만, 악인들은 스올로 가게 됩니다. 모든 이방 나라들도 그렇게 스올로 가게 될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다시금, 악인의 자리, 이방 나라의 자리에서 속히 떠날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악인과 이방 나라는 생명이 없는 죽음의 자리로 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18절에서 “궁핍한 자가 항상 잊어버림을 당하지 아니함이여”라고 노래를 하면서 17절에 “하나님을 잊어버린 모든 이방 나라”와 대조를 이룹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모든 이방 나라들은 스올로 가게 되지만, 궁핍한 자는 잊어버림을 당하지 않고, 구원을 받게 됩니다. 18절에서 “궁핍한 자”와 “가난한 자”가 나오는데, 원문의 단어는 다른 단어들이지만, 본문에서는 결국 고난을 받는 사람들 도움이 필요한 자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 또는 힘이 없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잊어버리고, 모르실 것이라는 두려움을 갖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한결같이 가난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외면하시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결코 가난하고, 궁핍하며, 억압받는 자들을 잊지 않으십니다.
이제 시인은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원수들이 승리를 얻지 못하고 자신들이 인생뿐인 줄 알게 해달라고 간청합니다. 19절에서 “인생”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문자적으로는 “인간”을 의미하지만, 인간의 연약함과 유한함을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은 전능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과 비교가 됩니다. 이 표현은 20절에 다시금 사용되어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 나라들이 연약하고 유한하며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알게 해달라고 기도하며 시편 9편은 마칩니다.
시편 9편은 재판장이신 하나님을 노래하며, 억울함을 해결해주시는 분이심을 노래합니다. 그리고 압제와 환란을 당하는 자들의 요새가 되시는 하나님을 노래하며, 그분께서는 가난한 자를 잊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악인들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 나라들이 자기가 준비한 악한 일들로 인해서 웅덩이에 빠지고 그물에 걸릴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은 하나님 앞에 인생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를 강조하며 끝이 납니다.
우리는 연약한 자들을 돌보시는 하나님에 대한 말씀을 읽을 때, 감사함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그러한 말씀을 대할 때, 우리가 기억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어쩌면 내가 그 연약한 자들을 억압하고 웅덩이와 그물을 준비한 악인의 모습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시편 9편을 노래할 때, 우리는 우리를 너무도 쉽게 연약하고 가난한 자라고만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때로는 누군가를 억압하는 악인의 모습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9편 마지막의 말씀을 나의 삶에 적용할 필요가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누군가를 억압하거나 심지어 피흘리는 일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점을 기억해서 우리의 매일의 삶을 돌아보고, 우리가 한낱 인생일 뿐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시편 9편을 노래할 때, 여러분에게 참된 위로가 있기를 바랍니다. 모든 신자는 사회와 사람의 관계 속에서 악에 의해 억압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의인이 된 우리는 세상이 예수님을 미워하듯이 예수님 안에 살고 있는 우리들도 미워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로 의인이 된 신자는 언제나 악인들로 가득한 세상으로부터 억압과 핍박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시편 9편의 노래를 여러분의 입술과 마음의 노래가 되게 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변호자가 되시어, 의로운 송사를 담당해주실 것이며, 우리를 위해서 변호해주실 것입니다. 주의 이름을 알고, 주를 의지하는 자를 결단코 버리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기억한다면, 억압과 핍박 가운데에서도 언젠가 우리를 위해서 일어나실 하나님을 바라며, 그 시간을 이겨낼 수 있게 됩니다.
사랑하는 형제와 자매 여러분! 우리를 사망의 문에서 일으키시어, 시온의 문으로 옮기신 주님의 구원하심을 노래합시다. 그분은 억압과 고통 속에서 신음하는 우리를 기억하시며, 악인의 승리를 허락하시지 않는 분이십니다.
비록 고통과 핍박과 괴로움이 너무 커서 마치 하나님이 우리를 기억하시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지 몰라도, 그것은 연약한 인생인 우리의 한계일 뿐이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떠나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러한 한계를 경험하게 될 때, 더욱 우리의 마음을 주님께로 향하여, 주께서 은혜를 베푸시기를 간청하고, 노래하십시오.
주님은 성경 말씀에 기록된 내용을 결단코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일어나시고, 악인들을 멸하시며, 우리의 억울함과 피흘림을 보상해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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