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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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5편
시편 15편
오늘 시편은 예배를 통해 하나님이 계신 곳에 들어가기 전에 예배자에게 요구되는 조건들을 살펴보는 지혜를 제공해 줍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이 시편을 제사를 드리기 전에 제사장이 회중들을 가르치는 시편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오직 믿음이라는 위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직 믿음이라는 복된 가르침을 아무렇게나 자기 마음대로 살아도 되고, 믿음이 있다고 고백만 하면 된다는 식으로 잘못 이해하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오직 믿음으로 사는 성도의 기준이 무엇인지를 알려주고, 그것을 향해 살아갈 것을 지시해줍니다. 오늘 시편 15편도 바로 그러한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한 구절씩 살피면서 예배자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절은 질문으로부터 시작을 합니다. 그런데 질문은 시를 지은 다윗이 어떤 사람에게 질문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즉, 이 질문의 답을 사람의 기준으로 들으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으로 듣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고자 한다면, 스스로에게 해야 할 질문이 1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질문은 하나님의 기준으로 답이 되어야 합니다.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주의 성산에 사는 자가 누구냐는 질문은 단순히 질문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장막과 성산이 머물고 사는 장소로 나오는데, 장막이나 성산은 성소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성소는 영원히 사는 장소가 아닙니다. 단지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그곳 가까이에서 살면서 섬기거나 예배하는 장소입니다. 즉, 여기에서 머문다와 산다는 단어들은 실제로 거주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예배하는 행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머무를 자, 사는 자”라는 표현은 둘 다 허락이라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이러한 의미들을 종합해보면, 하나님께 예배하도록 허락받을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으면, 아무도 예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2절에서부터 바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가르쳐줍니다.
2절과 3절에서 세 가지씩의 조건을 언급하고, 4절과 5절에서는 두 가지씩의 조건을 언급합니다. 총 10가지의 조건이 여기에서 제시가 되는데, 이는 마치 열 가지의 언약의 말씀인 십계명을 떠올리도록 합니다. 물론 오늘 본문에서의 10가지는 십계명과 차이가 있지만, 그 중심을 보면, 결국 십계명과 같은 맥락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조건은 정직하게 행하는 사람입니다. 여기에서 “정직하게”라는 단어는 “완벽한, 무죄한, 건전한, 약점이 없는”이란 의미가 있습니다. 첫 번째 조건에서부터 온전할 것을 기준으로 내세우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99세가 되었을 때 나타나셔서, 그에게 완전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창세기 17장 1절입니다.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하나님은 아브람이 자신 앞에서 완전하게 행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5장 48절에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약이든 신약이든 하나님의 요구는 우리에게 완전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결국, 시작부터 타락한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것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께서 보내실 구원자인 여자의 후손을 소망하도록 만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동시에 우리에게는 약속된 여자의 후손이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알고 있기에, 그분을 믿고, 그분을 의지하지 않고서는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리에 설 수 없음을 알려줍니다.
두 번째 조건은 공의를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공의라는 단어는 하나님의 기준에 따라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옳은 것을 말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 하나님의 율법에 계시된 그분의 기준을 따르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공의를 행하는 삶은 살아 있는 믿음의 증거가 됩니다.
세 번째 조건은 그의 마음에 있는 진실을 말하는 사람입니다. 우리 성경은 “그의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라고 번역을 해서, 마치 자신의 마음을 향해서 진실을 말하는 것처럼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원문은 마음에 가지고 있는 진실, 진리를 말하는 사람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말하는 것이 옳은 것이어야 하고, 사실에 맞아야 합니다. 단순히 진실을 말하는 정도가 아니라, 마음에 있는 진실을 말하는 사람입니다. 마음으로 옳다고 믿고 있고, 사실로 알고 있는 것을 진실되게 말하라는 것이죠. 교활함, 감춘 마음, 절반의 진실은 허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시편 12편 2절에 나오는 “아첨하는 입술과 두 마음으로 말하는 것”과는 분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한국교회 안에는 차별금지법이라는 것으로 인해서 가짜뉴스가 판을 치고 있습니다. 국회의원들이 올린 법안대로 하자면, 설교 때, 동성애를 비판하면, 잡혀간다거나, 처벌을 받는다는 식의 주장을 펼치면서 차별금지법은 기독교를 말살하고 공산주의 세상을 만드는 것이라는 이야기가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퍼진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법안을 잘 보면, 차별금지법이 적용되는 대상에는 종교단체는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법안의 이름이 말해주는 것처럼 차별을 금지하는 법안이지, 동성애를 옹호하는 법안은 아닙니다. 마땅히 사람은 차별을 받으면 안됩니다. 이 세상에 평등이라는 개념으로 사람들을 감동시키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고아와 과부의 하나님이신 분께서 죄인들의 친구, 세리와 창기들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그들과 식사를 나누며, 그들의 벗이 되어주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차별금지법은 오히려 기독교인들이 환영해야 할 요소들이 많이 있습니다.
물론 염려가 되는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아직 벌어지지도 않은 일을 가지고, 크게 부풀려서 사람들을 선동하는 것은 진실을 말해야 하는 성도의 모습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만약에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다면, 법안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잘 살펴보고, 그것이 정말로 교회를 해치는 것인지 아닌지를 분별한 다음에 이야기를 해도 늦지 않습니다. 한국교회에서 나름대로 인기 있는 사람이 있는데, 안드레아 윌리암스라는 영국 여자변호사가 있습니다. 이 분은 차별금지법으로 인해서 영국교회가 문을 닫고, 종교가 핍박을 받았다고 주장을 합니다. 이 분의 주장을 신뢰한 많은 교회가 이분을 강사로 모시고, 세미나를 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런데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영국교회는 차별금지법 때문에 무너진 것이 아니라, 신학이 해체되고, 알미니안과 자유주의가 교회에서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약화되었습니다.
진실을 말하지 않는 사람도 문제고, 그것이 사실인지 확인하지도 않고 강단에 세운 목사와 당회원들도 문제입니다. 좀 더 깊은 이야기가 되겠지만, 순수하게 그것이 정말로 문제라고 여기고 그런 주장을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정치적인 입장에 서서 자신과 반대되는 것을 반대하기 위해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바울은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라고 할 것은 “아니오”라고 말하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이 바로 이러한 자세입니다. 스펄전 목사는 이렇게도 말을 했습니다. “진실은 장미처럼 가시가 담겨 있지만, 선한 사람들은 이 진리를 가슴에 품고 살아간다.” 진실을 가까이해서 피해를 입더라도, 그 진실을 가까이 해야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진실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거짓에 속지 않도록 자신을 살피고, 자신의 마음에 있는 진실을 말하기를 힘쓰는 사람이 되십시오.
네 번째는 그의 혀로 남을 허물하지 않는 것입니다. 대화를 하는 중에 비방이 갑자기 나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것도 나쁘지만, 일부러 여기저기 의도를 가지고 퍼뜨리는 비방은 더욱 나쁜 것입니다. 대체로 비방은 사실이 아니거나 입증되지 않은 것이 많습니다.
우리는 연예인들이나 정치인들에 대한 비방이 심해서 명예를 훼손하는 일들이 있다는 것을 뉴스나 방송을 통해서 듣게 됩니다. 또한, 우리가 살아가는 삶 속에서도 비방이 끊이지 않는다는 것은 너무도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비방을 당하는 사람은 마음이 찢기고, 존재가 파괴를 당하거나 큰 해를 입게 됩니다. 잠언에서 비방을 심각하게 나쁜 죄로 다루는 것을 통해서도 하나님께서 남을 비방하는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섯 번째로 그의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악”이란 단어는 해를 주고 고통의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의인은 누구에게든 고통이나 괴로움을 가져오는 행동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고통을 가져오는 것이 모두가 악이 아닙니다. 부모가 자녀를 훈육할 때, 선생님이나 친구가 충고를 말할 때처럼, 고통을 가져오면서도 선을 향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악”이라고 테두리를 정해놨고, 그 안에서 고통을 가져오는 모든 행동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라는 명령이 바로 여기에 적용될 수 있습니다. 특히, 여기에서 “이웃”으로 번역된 단어는 “친구, 동료”를 의미하는 단어로 친밀한 관계를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친밀한 관계에 있는 사람에게 악을 행하는 것은 그 사람의 믿음을 저버리는 악한 행동이 됩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악을 행하는 것은 부모를 향한 자식의 믿음을 깨뜨리는 행동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돌보고, 자식은 부모를 의지하고, 형제와 자매는 서로를 사랑해주고, 교회 식구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를 돌보고, 이끌어주며, 함께 영육간에 성장하기를 힘써야 하는데, 그러한 관계 속에서 악을 행한다는 것은 매우 심각한 죄임이 분명합니다.
여섯 번째로 다른 사람을 비방하지 않는 사람을 말합니다. 여기에서 비방은 “비꼬는 비웃음, 멸시, 수치, 인신공격”을 의미합니다. 이웃을 향해서 비웃음과 멸시, 수치, 인신공격을 하는 것은 악을 행하는 것이고, 혀로 비방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 이웃이 그 대상입니다. 친밀하고 가까운 사람을 모욕하고 수치스럽게 만드는 것은 심각한 범죄입니다. 가까운 사람과 가벼운 농담은 할 수 있어도, 그것이 지나쳐서 사람들 앞에서 비웃음거리가 되게 한다거나, 모욕을 주는 식은 가까운 사이라는 관계를 깨뜨리게 됩니다.
3절에서 이웃이라는 단어가 두 번 사용되었는데, 원문에서는 두 단어가 각각 다른 단어입니다. 그러나 의미상으로는 가까운 관계인 것은 분명합니다. 이렇게 가까운 이웃에게 악을 행하거나 이웃을 비방하는 사람이라면, 이웃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는 더 큰 악도 행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악인을 하나님께서 받아주실 리가 없습니다.
일곱 번째는 4절에 기록된 것처럼 망령된 자를 멸시하고,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들을 존대하는 사람입니다. 이 기준은 영적 분별력과 관계가 있는 말씀입니다. “멸시하며”에 해당하는 단어는 “반대한다, 거절한다, 싫어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즉 망령된 사람을 반대하고, 거절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사람을 존대해야 합니다. “존대하며”라는 단어는 “무겁다, 영광스럽다, 존경하다”는 의미로 사람에게는 주로 높인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을 높이는 것은 그들과 교제하고 서로에게 좋은 영향을 주고 받는 것을 말합니다. 일곱 번째 기준은 누가 존경을 받고, 누가 거절되어야 하는지 영적 분별력을 가진 사람이어야 함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분별력이 없다면, 누구나 용납하는 관용의 모습은 가질 수 있어도, 진리가 가벼워지고, 거룩이 더럽혀지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일곱 번째 기준이 불신자를 가까이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믿지 않는 사람과 친구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을 믿음 안에서 높이며, 존경심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예를 들면, 최근에 기독교인들 사이에서도 혜민스님이라는 분의 강의와 책이 많이 읽히고 있습니다. 제가 이분 책을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강연하는 영상은 몇 번 본적이 있습니다. 좋은 말도 많이하고, 위로가 되기도 합니다. 만약에 가까이 살고 있다면, 좋은 말동무가 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혜민스님을 존경하고, 믿음의 도움을 받는 존재로 볼 수는 없습니다. 혜민스님이 아무리 주옥같은 명언을 말한다고 할지라도, 그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바라는 우리 아이들이 더 존중되고, 높임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자신이 속한 교회의 목사를 존경하지 못하면서, 타종교의 지도자를 존경한다는 것도 이에 알맞은 예가 될 것입니다. 타종교의 지도자는 우상숭배자입니다. 그런 사람은 필연적으로 하나님을 멸시하는 망령된 자의 위치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여러분의 귀한 존경을 주지 마십시오. 성도는 여호와를 두려워하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존경을 주고, 그런 사람을 가까이 하려고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는 사람의 조건 여덟 번째는 맹세한 것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우리 성경에서는 “그의 마음에 서원한 것은”이라고 되어 있지만, 서원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맹세”를 의미합니다. 서원도 맹세라는 의미가 있지만, 서원은 하나님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라면, 맹세는 사람 사이에서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마음에 맹세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지키는 사람을 말하는 것은 신실함과 약속을 지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어떤 약속을 했을 때, 그것이 큰 희생을 요구하거나 고통이 따른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지키려고 해야 합니다. 신자가 약속을 하고서 지키지 않는 것은 신자의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의 이름을 거짓되게 만드는 것이 됩니다.
아홉 번째는 돈을 빌려주는 것에 관한 기준을 언급합니다. 이자를 받으려고 돈을 꾸어 주지 않는 사람이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무조건 이자를 받지 말라는 의미로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신명기 23장 20절을 보면, 타국인에게는 돈을 꾸어주고 이자를 받아도 된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바로 이어서 형제에게 돈을 꾸어주면 이자를 받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이러한 말씀과 연관해서 시편 15편에서 언급한 아홉 번째 기준을 생각한다면, 여기에서 금지하는 것은 다른 사람 특히 형제에게 부담이 되도록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거나 궁핍한 사람이 살 수 없도록 하거나 굴욕을 당하도록 하는 것을 제한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돈이 필요해서 도움을 구하는 형제가 있다면, 그들을 도울 수 있는 성도들은 이자를 받지 말고 도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형제가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는 그것을 도울 수 있는 기회로 삼아야지, 그것을 이용해서 재산을 늘리려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열 번째는 뇌물을 받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뇌물을 받고 무죄한 사람을 해치는 사람은 의로우신 재판관이신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해 성소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받을 기대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뇌물을 받는 것은 결국 부자를 편애하는 것이 되고, 법정에서 거짓을 말하는 것이 됩니다. 성경은 뇌물을 받는 것을 매우 심각하게 금지하고 있습니다. 뇌물과 관련된 많은 말씀 중에서도 신명기 27장 25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무죄한 자를 죽이려고 뇌물을 받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저주를 선언할만큼 뇌물을 받는 것은 하나님 앞에 심각한 범죄라는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10개의 기준을 언급한 이후에 5절의 마지막에 결론으로 10가지의 기준에 해당하는 사람은 영원히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은 안정된 삶을 의미합니다. 주의 장막에, 주의 성산에 사는 자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영원히 흔들리지 않을 것을 약속하며 답을 마치고 있습니다. 즉, 주님의 장막에 머무를 수 있는 사람, 주의 성산에 사는 사람은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 삶을 살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어떠한 환난과 고난이 오고, 핍박이 몰려와도 하나님께서 용납하시는 사람은 흔들림 없이 주의 장막과 주의 성산에 머무르게 됩니다. 즉,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예배자는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예배자의 자리에서 예배하며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에서 흔들림이 없다는 것이 우리에게 어떠한 고난이나 풍파가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한 것은 이 땅에 사는 동안 끊이지 않고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로 인해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예배하는 성도들은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이후로, 장소로서의 성소는 특별한 의미를 가지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시편 15편에서 가리키는 성소는 예배하는 자리를 가리키기 때문에 여전히 우리에게 의미가 있는 말씀이 됩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이 성전이라는 말씀을 생각해본다면, 여전히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구별된 삶을 살 것을 요구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사야 6장 1-2절을 보면, 천사들도 하나님을 모시고 섰을 때, 날개로 자신들의 얼굴과 발을 가리면서 섬기는 모습을 보입니다. 너무나도 영광스럽고 거룩하신 분을 섬기는데 있어서 최대한의 겸손을 보이는 것입니다. 천사들도 이렇게 하나님을 섬긴다고 한다면, 사람이 하나님을 경배하고 예배한다고 할 때, 예배하는 것을 너무도 쉽게 생각하고, 예배의 자리에 나오는 것은 경건하지 못한 생각일 뿐입니다.
하나님께 나와 예배하기 위해서 합당한 준비를 하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15편을 간단히 말한다면, 하나님께 예배함으로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 사람은 마음에 하나님의 율법을 새기고, 그것을 행하며 사는 사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준비는 언제나 흠이 있고, 하나님 앞에 합당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은 완벽할 것을 말씀하지만, 우리는 선을 행하는데 있어서 결코 완벽하지 못한 존재들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오직 흠이 없이 합당한 삶과 순종을 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 온전한 예배를 드리신 참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지 않고서는 우리들의 예배는 언제나 부족하고, 온전하지 못하며, 더러움만 가득할 뿐입니다.
오늘 살펴본 10가지의 조건들도 생각해 보십시오. 그 어느 것 하나, 우리를 정죄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10가지의 조건에 모두 걸릴 뿐입니다. 우리가 부족하게나마 말씀을 따라서 사는 모습을 보일 수는 있어도, 완벽하게 순종하는 모습은 우리에게서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구원을 위해서 예수님을 믿고 의지해야 하지만, 구원 이후에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예배를 드리는 삶을 위해서도 예수님을 믿고 의지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형제와 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실 수 있습니까? 시편 15편 1절의 질문이 여러분에게 주어진다면, 어떻게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질문을 받게 될 때, 예수님을 믿는다면, 여러분은 10가지의 조건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로부터 받는 의로 다 지켰다고 고백할 수 있고, 그리스도를 힘입어 날마다 거룩한 백성으로 참된 예배자로 자라가고 있다고 답할 수 있습니다.
만약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면, 10가지의 조건에 다 걸리게 될 것이고, 영원히 흔들리며, 저주받은 인생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속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되어, 참되게 예배하는 영광스러운 자리에 서기를 소망하십시오.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부름을 받은 모든 자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영원히 흔들리지 않을 것이며, 그분을 힘입어 하나님께 예배하는 영광을 얻을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가 저와 여러분에게 허락되어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 인생으로 하나님께 예배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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