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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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4편
시편 14편
시편 13편의 시작은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라고 외치면서 오랜 기간 침묵하시는 하나님께 질문하면서 자신의 고통을 고백하는 노래였습니다. 오늘 시편 14편은 13편과는 달리 어리석은 자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한다는 사실을 말하면서 시작합니다. 신자들은 하나님께서 일하시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에도 그분을 의지하면서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지를 기도하면서 도움을 구한다면, 불신자들은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이 보이더라도, 그분의 존재를 부정하는 어리석은 모습을 보입니다. 특별히 시편 14편에서는 전적타락이라는 중요한 교리적 진술도 등장하게 됩니다. 말씀을 하나씩 살피면서 전적타락을 말하는 시편이 어떻게 우리에게 은혜를 노래하게 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시편의 첫 시작은 어리석은 자를 말하면서 시작합니다. “어리석은 자”라는 말에는 관사가 없습니다. 즉 특정한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어리석은 사람 또는 바보의 테두리 안에 속하는 모든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어리석은 사람은 단순히 지적인 능력이 약한 사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리석은”에 해당하는 단어는 바보라는 의미도 있지만, 불신자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즉, 본문에서 말하는 어리석은 사람은 지식적인 부분이 아닌, 영적인 부분에서 어리석은 불신자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로 이해를 한다면, 성경에서의 어리석다는 평가를 받는 사람들을 보면, 지적으로는 대단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1절에서 어리석은 자의 특징을 계속 설명합니다. 그들은 마음으로 하나님이 없다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이 없다는 말은 무신론적인 생각, 즉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보다는 하나님을 무시해도 된다는 식의 의미입니다. 이런 생각은 거룩하지 않은 삶을 살겠다는 것과 연결됩니다.
더 자세히 표현한다면, 어리석은 자들은 하나님이 있다 하더라도, 자신의 삶에 어떠한 간섭도 하지 못할 것이며, 자신의 일상을 관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실제적인 무신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잠언 1장 7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지만, 어리석은 자는 여호와를 없다하면서 경외할 것을 포기해버립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당연히 미련한 자가 되어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는 것이 됩니다.
또한, 어리석은 자들은 부패했습니다. “부패하고”라고 번역된 단어는 망치다, 황폐하게 하다, 멸망시키다, 부패시키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 단어는 부패한 인간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에도 사용이 됩니다. 즉,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만큼 인간의 부패는 심각한 범죄라는 것을 알려주는 단어입니다.
이렇게 부패한 인간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고, 자신의 삶에서 하나님을 무시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면서 자신들이 짓는 죄로 인해서 찾아오는 심판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사람 안에 있는 양심은 전능하신 존재에 대한 심판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양심은 죄인을 정죄하고, 죄인은 그것을 피할 길을 찾게 됩니다. 그러면서 결국에는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면서, 자신 안에 있는 양심의 소리마저도 무시해버리는 것입니다. 양심의 소리를 외면하면서 심판이 찾아올 것을 부정하는 모습을 아무리 보일지라도, 그들은 바로 그 부패함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행실”로 번역된 단어는 일반 행위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앞에 부패했다는 의미와 함께 사용되면서 문맥상 악한 행실이 됩니다. 그러니 행실이 가증하다고 표현한 것은 악한 행위조차도 가증하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즉, 하나님을 무시하는 어리석은 사람은 악한 행동조차도 비뚤어지게 한다는 것입니다. 친구를 괴롭히는 것은 악한 행위입니다. 그런데 친구를 괴롭히면서 돈을 빼앗고, 집단으로 따돌림을 시킨다거나, 있지도 않은 일을 만들어서 친구를 이상한 사람으로 소문을 낸다면, 악한 행동조차도 더 비뚤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어떤 교회에서 제자훈련을 한다고, 교인들에게 변을 먹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교회가 한 일을 잘 보니, 제자훈련이라는 이름으로 목사에게 충성하도록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성도를 목사에게 충성하도록 만드는 것은 잘못된 행위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하겠다고 사람에게 똥을 먹인 것은 악한 행동조차도 비뚤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에 대한 최종적인 평가는 “선을 행하는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불신자도 무신론자도 착한 일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이 아닙니다. 그들이 선을 행하는 이유와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선이 아닙니다. 또한, 여기에서 사용된 “선”을 의미하는 단어는 단순히 착한 일의 의미보다, 언약적인 차원에서 선을 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언약이라는 측면을 놓고 하나님 앞에 선 인간을 평가해보십시오. 하나님께서 구원의 은혜를 내리시지 않는다면, 그 어느 누구나 언약이라는 측면에서 “선”을 행하는 자는 없습니다. 그러니 성경의 증언은 정확무오한 설명입니다.
물론 원래 아담이 타락하기 전에는 언약을 지킬 능력이 있었습니다. 아담은 충분히 언약을 지킬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자신의 위치를 지키지 않고, 사단의 거짓말에 넘어가 언약을 깨뜨렸습니다. 그리고 아담 이후의 모든 인간은 언약 앞에서 선을 행하지 못하는 완벽하게 타락하고 무능한 존재가 되어 버렸습니다.
1절에서 어리석은 자를 언급하고, 그에 대한 특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여기에 등장하는 어리석은 자와 똑같은 단어가 이사야 32장 6절에서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거기에서도 어리석은 자를 “그 마음에 불의를 품어 간사를 행하며 패역한 말로 여호와를 거스르며 주린 자의 속을 비게 하며 목마른 자에게 마실 것을 없어지게 하는 사람”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놓고 본다면, 성경에 등장하는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 앞에 불신자를 가리키는 것이고, 그의 행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기에 충분하다는 점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성경이 이렇게 설명하는 것을 보면, 어리석은 자를 향한 하나님의 판단과 심판은 확실하다는 점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2절에서 여호와께서 굽어살피신다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 표현은 비유적은 표현으로 그만큼 꼼꼼하게 살펴보신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굽어살피셔야만 인간들을 제대로 보실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이렇게 표현하는 것은 강조를 위한 것인데, 창세기 11장 5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만드는 것을 보시기 위해서 방문하신 기록이 나옵니다. 그때도 방문하시지 않으면 모르셨던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렇게 표현함으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속까지도 완벽하게 알고 계시고, 그들의 범죄에 대해서 변명할 가능성조차도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1절에서 나온 어리석은 자를 정하는 기준이 나오지 않지만, 2절에서 인간들을 굽어살피시는 모습을 통해서 어리석다는 평가가 나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평가는 인간적인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을 바탕으로 평가되고 있음을 알려줍니다. 이렇다는 것을 보면,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보느냐가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겠지만, 우리는 사람의 눈보다 하나님의 눈을 더 의식해야 하고, 사람이 좋게 평가하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좋게 평가해주시는 것을 더 즐거워하고, 바래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을 살펴보시는데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지를 보려고 하십니다. 여기에서 “지각이 있다”라고 번역된 단어는 “이해하다, 바라보다, 파악하다”는 단어로 특히 “현명하게 행동하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즉, 어리석은 것과 반대되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지혜가 있어서 현명하게 행동하는 어리석지 않은 사람을 찾으려는 것입니다. 또한, “찾다”라고 할 때, 사용된 단어는 “조사하다, 탐구하다, 찾아내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지각이 있다와 찾다는 단어의 의미들을 조합해보면,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는 현명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찾을 것이고, 반드시 하나님을 찾아낼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러한 사람이 있는지를 살펴보고 계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찾아보려고 했던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3절에 “치우쳐”로 번역된 단어는 “벗어나다, 떠나다”는 의미로 모든 사람이 진리에서 벗어났고, 하나님으로부터 떠났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사람들이 진리에서 떠났고, 하나님으로부터 떠났기 때문에 그들은 더러운 자가 되었습니다. 부패한 사람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일부 몇 사람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함께” 더러운 자가 되었습니다. 마치 모든 사람이 한 사람처럼 부패해 버렸습니다. 결국 선을 행하는 자는 없는데 하나도 없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굽어 살피시며 찾으려고 했으나, 하나도 찾지 못하는 비극이 벌어졌습니다.
창세기 6장 12절에서 “하나님께서 보신즉 땅이 부패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부패함이었더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오늘 본문 3절의 말씀에서도 같은 상황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그 어느 누구도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4절에서 “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무지하냐”는 말씀으로 하나님께서 놀라신 것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을 행하는 자를 찾으려고 했으나 그런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무능하고, 언약 앞에서 온전하지 못한 죄인만 있습니다. 4절에 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무지하냐는 놀람의 외침은 그들에게 깨달음이 없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즉, 어리석은 자들의 문제는 정신적인 부족함이나 지식이 없음이 아닙니다. 그들은 깨달음이 없는 것입니다. 신학교 교수들 중에 예수님을 참되게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그들이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고, 성경에 대한 지식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은 가지고 있는 지식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깨달음을 얻지 못했고, 구원의 길에 대한 지식은 있어도, 그것이 자신에게 어떠한 의미인지를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은혜의 성령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마땅한 지식을 주시되, 그것이 머리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깨달음이 되어서 저와 여러분의 영혼이 살찌고, 하나님 앞에 온전해지며, 구원의 은혜가 참되게 효과를 발휘하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절에서 죄인들은 떡 먹듯이 하나님의 백성을 먹는다고 설명합니다. 사람이 떡을 먹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라, 일상적인 일입니다. 그런 일상적이고 당연한 일을 죄인들의 행위에 빗대어 설명하는 것은 악을 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먹는 것을 일상의 일로 하고 있다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해본다면, 성도가 일상의 삶에서 불신자들로 인해서 괴로움을 겪는 것은 우리가 밥을 먹는 것처럼 당연한 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악을 행하는 자들은 여호와를 부르지도 않습니다. 이것은 기도를 한다는 의미일 수도 있지만, 여호와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완전히 거부하는 모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호와를 찾지도 않는 자들이기 때문에 여호와의 성품을 알지도 못할 것입니다. 그렇기에 여호와께서 의로우신 분이시라는 사실도 모르고, 그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재판장이 되셔서 악인들을 심판하신다는 사실도 모르는 것입니다. 설사 그것을 알게 된다 하더라도, 스스로에게 하나님은 없다라고 하면서 외면해 버리는 어리석은 사람들일 뿐입니다.
그런데 5절에 보면, 어리석은 자들이 두려워한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의인들과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거기서”라는 특정한 장소가 등장을 합니다. 사실 이 단어는 “거기, 그곳, 그때”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거기는 악인이 의인을 공격하는 장소일수도 있고, 악인이 의인을 괴롭게 하는 그때일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가장 알맞은 의미는 악인들의 삶의 방식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없다고 하고, 하나님을 떠나 선을 행하지도 않고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히는 삶 자체를 거기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렇다면 그들이 두려워하고 두려워하는 곳은 악한 삶을 살아가는 인생 속에서 겪게 될 일입니다. 하나님이 의인들과 함께 하신다는 사실은 자신들과 같은 어리석은 사람들에게는 두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은 두려움이 클수록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부정할 것입니다. 그래야만 자신들의 마음이 편해지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이렇게 두려워하는 상황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마음에 두고 있다면, 악한 일을 멈추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6절을 보면, 어리석은 자들은 가난한 자의 계획을 부끄럽게 한다고 말씀합니다. 즉,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기보다 하나님이 의인들과 함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리석은 자, 악한 자들은 가난한 자의 계획을 부끄럽게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보게 되는 것은 여호와께서 가난한 자들의 피난처가 되신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에서 가난한 자는 의인으로 볼 수 있습니다. 5절과 연결해서 생각한다면, 악인들은 하나님이 의인과 함께 있는 것을 두려워하지만, 오히려 그 의인들인 가난한 자들의 계획을 부끄럽게 하려고만 합니다. 그들은 회개를 하기보다, 의인을 부끄럽게 하려고 노력합니다.
하나님이 없다는 어리석은 말을 하던 그들은 하나님께서 의인들과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마주 대할 때, 그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존재를 또한 부정하기 위해서 그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그들이 경험하는 것은 피난처 되시는 하나님뿐입니다.
이제 시인은 결론을 노래합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이 시온에서 나오기를 원합니다. 구원의 원천으로 시온을 언급합니다. 시온은 예루살렘을 나타내는 이름이면서 여호와께서 백성 가운데 거하시는 장소를 의미합니다. 즉, 이스라엘의 구원이 다른 장소나 다른 존재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중심으로 생각하는 예루살렘에서 그들과 함께 계시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오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나오기를 원하도다”에서 “나오기를”이라고 번역한 단어는 “주다”라는 의미입니다. 원문에는 “원하도다”라는 말은 없습니다. 원문의 의미를 살려서 읽으면, “시온에서 이스라엘의 구원을 그가 주실 것이다”라고 읽을 수 있습니다.
구원은 우리가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현명하게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되질 못합니다. 아담의 후손인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서 그저 어리석은 사람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다면, 의인들을 괴롭히고, 하나님의 백성을 떡 먹듯이 삼키려는 악인일 뿐입니다.
기본으로 인간이 다 이러한 상황이기 때문에 우리가 스스로 구원을 얻는다는 말은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성경의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구원을 주실 것을 바라는 자세로 구원의 하나님을 소망하고 은혜가 내려지기를 기다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또한, 가난한 자들은 피난처가 되시는 하나님을 기다리고, 그분께서 정하신 때에 악인들의 손에서부터 자신들을 구원해주실 것을 기다리는 자세를 결론인 7절에서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즉 하나님의 백성은 고난과 부끄러움을 세상으로부터 악한 자와 어리석은 자로부터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앞으로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구원으로 백성들을 돌이키시고, 그들을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실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모든 시대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백성들은 구원자가 오기를 간절히 기다립니다. 구원을 위해서 오시기를 기다리고, 주신 구원을 온전케 하시기 위해서 오시기를 기다립니다. 성도가 육체로 사는 날 동안에는 악인들로부터 오는 괴로움은 피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이 확실한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들을 잡아 먹고, 부끄럽게 만들고, 악을 저지르고도 그것을 죄로 여기지 않는 부패한 세상에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악인들을 멸하시고 백성들을 기쁨으로 인도하실 날을 간절히 바라며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를 참으시고 부끄러움을 신경 쓰시지 않으신 것은 그분 앞에 있는 기쁨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7절 마지막에 구원이 임할 때, 야곱이 즐거워하고 이스라엘이 기뻐한다는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와 자매 여러분! 우리들은 과거에 어리석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만약에 여러분 중에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가 있다면, 여전히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자신이 어리석음과 부패함 속에서 죽어가고 있고, 심판이 찾아오고 있다는 사실을 온전히 알지 못하는 죄인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의 은혜를 주시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을 영원토록 구원하실 때, 영광스런 자리에 있지 못하고, 저주와 심판의 자리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속히 죄를 버리고, 어리석은 모습을 던져 버리고, 하나님을 경외하기를 소망하십시오. 자신에게 죄가 있음을 깨닫고,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복음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구원의 모든 복이 임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해주시는 일이니, 하나님께서 은혜 베푸시기를 또한 간절히 바라십시오.
이미 구원을 받아 어리석은 자의 자리에서 떠나 하나님의 백성이 된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삶에 끊이지 않는 고난과 괴로움과 세상의 악함으로 오는 어려움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선을 돌려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고, 시온으로부터 구원을 주시는 삼위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우리를 죄와 허물에서부터 구원해주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괴로움을 굽어 살피시어 모두 아시기에, 우리들을 정하신 때에 온전한 구원에 이르게 하시고, 우리로 기쁨을 누리게 하실 것을 소망하십시오.
십자가를 참으시고 부끄러움을 신경 쓰시지 않으신 예수님처럼, 고난을 참고 세상으로부터 오는 부끄러움을 신경 쓰지 마십시오. 우리 앞에 하나님께서 주실 기쁨을 바라보십시오.
성경이 가르치는 믿음의 삶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참된 기쁨을 쫓는 것입니다. 참된 믿음은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고, 하나님을 기뻐하며, 하나님이 하실 일을 찬송의 이유로 삼으며, 하나님의 이름에만 영광을 돌리는 모습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우리의 형편을 아시는 주님께서 우리의 괴로움을 속히 물리치시고, 우리로 기쁨의 찬송을 부르게 하실 것을 소망하며 살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