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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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편
시편 1편
시편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친히 주신 노래입니다. 시편에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계시에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지, 또한 우리가 하나님께 어떻게 기도해야 하고, 어떻게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주는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시편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계시에 반응하는 것으로 시편을 노래해야 합니다. 그리고 시편을 통해서 기도를 배우고, 실천에 옮겨야 합니다.
우리는 당분간 성경 각권을 설교할 때, 중간마다 시편을 설교하도록 하겠습니다. 상황을 봐서 시편을 연속으로 설교하기도 하고, 주제에 따라서 연속해야 할 부분들은 연속해서 시편을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오늘과 다음 주에는 시편 1편과 2편을 살필 것입니다. 시편 1편과 2편은 시편 전체의 서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1편과 2편을 연속해서 살피려고 합니다. 칼빈은 시편 1편의 핵심을 “하늘의 지혜 추구에 자신들의 마음을 쏟는 자들이 복이 있고, 하나님께 대한 속된 멸시자들은 비록 당분간은 자신들이 행복한 것으로 여길지 모르지만 마지막에 가서는 더없이 비참한 결말을 갖게 되고 만다”고 말합니다. 1편에서는 이렇게 의인과 악인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1절부터 전체를 살펴보겠습니다. 1절에서 우리는 시편의 처음 시작이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입을 열어서 가르치신 처음 말과 같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복이 있다”
시편의 맨 처음은 복이 있다는 선언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팔복을 말씀을 하셨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하게 하는 자,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 이런 사람들이 복이 있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시편 1편에서는 예수님의 말씀보다는 좀 더 간략하게 설명을 합니다. 1절에서는 부정적인 말들로 복 있는 사람을 설명합니다. 그리고 2절에서는 긍정적인 말로 복 있는 사람을 설명합니다.
1절에서 복이 있는 사람은, 세 가지를 하지 않습니다.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않습니다.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않습니다. 그리고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습니다.
악인은 원어적 의미로는 “불경건한 자”를 의미합니다. 복이 있는 사람은 불경건한 자의 꾀를 따르지 않습니다. “꾀”라는 단어는 “충고”를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경건하지 않은 사람의 충고를 따르지 않는 것이 복이 있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경건하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반역하고 제멋대로 살아가는 자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꾀, 충고는 어리석을 따름입니다. 죄인은 몰라서 또는 의도적으로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자들을 말합니다. 이들은 습관적으로 죄를 짓는 자들인데, 복이 있는 사람은 죄인의 길에 서지 않습니다. “길”이라는 단어는 “길”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삶의 방식”이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죄인의 길은 죄인의 삶의 방식을 의미합니다. 즉, 복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 습관적으로 죄를 짓는 삶의 방식에 서지 않습니다. 그리고 복이 있는 사람은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습니다. 오만한 자라는 말은 “타인을 멸시하고 경멸하고 냉소를 보이는 자”를 말합니다. “자리에 앉다”는 말은 거주를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복이 있는 사람은 타인을 멸시하고 경멸하는 사람의 집에서 자리를 펴고 함께 거주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오히려 그런 사람들을 멀리합니다.
1절에서 악인, 죄인, 오만한 자는 불신자나 또는 거짓된 신자의 모습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두가 하나님을 섬긴다는 고백 속에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 중에는 악인과 죄인과 오만한 자들이 섞여 있습니다. 그러니까 불신자들은 당연히 이런 사람들이고, 신자라고 하는 자들 중에서도 거짓된 신자들은 얼마든지 이런 모습을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2절에서는 바로 참 신자와 거짓된 신자를 구별할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이 드러납니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복이 있는 사람들이 악인과 죄인과 오만한 자와 구별될 수 있었던 것은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고 여호와의 율법을 밤낮으로 묵상하기 때문입니다. 악인의 꾀가 필요가 없는 것은 주님의 지혜가 담긴 율법이 있기 때문이고, 죄인의 삶의 방식을 살펴보지 않는 것은 율법을 통해서 죄인의 삶의 끝이 무엇인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것은 여호와의 율법을 통해서 오만함이 아니라 겸손함을 배우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해야 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에서는 “항상 기뻐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모든 삶 속에서 불평불만을 갖지 말고, 기뻐하면서 살라는 해석을 들었다면 잊으십시오. 우리가 기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기뻐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바로 율법입니다. 그러니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알게 되고, 그분의 하신 일을 알게 되고, 그분의 사랑과 은혜를 알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항상 기뻐하라는 것은 하나님 안에서 또한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기뻐하라는 말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봅시다. 신자여도 가족이 죽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죽음의 슬픔을 이길 수 있는 것은 부활의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죽음으로 슬프지만, 또한 하나님 안에서 부활의 소망으로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이 즐겁기 때문에 그것을 멀리하지 않고, 가까이 합니다. 그래서 2절에서는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라고 기록하였습니다. “묵상하다”는 말은 “부드럽게 소리내어 읽다”, “깊이 생각하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가지고, 부드럽게 소리내어 읽으면서 깊이 생각하는 것이 묵상하는 것입니다. 밤낮으로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려면, 기본적으로 주의 말씀을 암기해야 합니다. 그래서 낮에는 직장과 길과 생활 속에서, 밤에는 잠자리 위에서 주의 말씀을 계속해서 떠올리며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묵상을 하는 이유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완전히 이해하기 위함입니다. 물론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완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씩 알아가게 됩니다. 물론 깨달음의 근원은 성령님의 깨우치심에 근거하는 것입니다.
1-2절에서 악인과 복이 있는 사람을 비교한 후에, 3절에서는 복이 있는 사람을 비유로 설명합니다. 그리고 4-5절에서는 악인에 대한 비유와 최후가 어떠한지를 설명합니다.
3절에서 복이 있는 사람을 시냇가에 심은 나무라고 표현합니다. 원어는 좀 의미가 다릅니다. “수로에 옮겨 심은 나무”입니다. 이스라엘은 사막지대가 많습니다. 그래서 나무가 잘 자라기에는 물이 부족합니다. 그런데 수로를 파고 그 곁에 나무를 옮겨 심어 놓았다면, 물이 부족할 일이 없습니다. 게다가 “시냇가”라고 번역된 단어가 복수로 되어 있습니다. 즉, 수로가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가 있는 곳에 심겨졌다는 것입니다. 수로가 마르면, 다른 수로에서 물을 공급받으면 됩니다. 즉, 옮겨 심어진 나무는 물이 부족할 일이 전혀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복이 있는 사람을 나무로 표현을 했다면, 물도 어떤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앞에서 제가 수로가 하나가 아니라 복수로 쓰여졌고, 계속해서 물이 공급을 받을 수 있다고 말씀을 드렸는데, 2절에서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한다고 했습니다. 즉, 여호와의 율법도 계속해서 공급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나무는 사람이고, 물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물이 나무를 잘 자락 하듯이,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을 영적으로 성장하도록 합니다. 나무는 철을 따라서 자연적으로 열매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시냇가에 심겨졌으니, 좋은 과실이 맺히는 것은 당연한 이치가 됩니다.
즉, 복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고,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인데, 그런 사람은 나무가 수로 곁에 옮겨 심어져서 물을 잘 공급받고, 좋은 열매를 맺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으로 영적인 힘을 계속해서 공급받고, 그에 합당한 열매는 때가되면 맺게 되는 것입니다. 잎사귀가 마르지 않는다는 말은, 생명력이 넘치는 것을 표현한 말입니다. 나무에 병이 들면, 잎사귀가 마르고 힘을 잃습니다. 나무에 문제가 생기면 잎사귀가 제일 먼저 반응을 보입니다. 바로 그런 문제가 없는 상태, 생명력이 넘치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의 말씀으로 충만한 사람에게도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주의 말씀은 창조의 능력입니다. 창조의 능력은 모든 생명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즉, 주의 말씀은 우리에게 생명력이 넘치는 상태로 이끄는 것입니다.
이렇게 복이 있는 사람은 결국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게 된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든 일이 형통한다는 말을 인간적인 성공으로 생각할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전혀 그런 해석과 상관이 없는 의미들이었습니다. 3절 마지막의 형통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의 형통으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하나님의 참된 백성은 외적 번영이 아닌 영적 번영을 더욱 원하는 것입니다. 바로 영적 번영이라는 의미에서의 모든 일이 형통한다는 말이라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복이 있는 사람에 대한 형통으로 끝나는 3절과 달리 4절에서는 시작부터 강하게 시작합니다.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너무나도 강력하게 악인들은 복이 있는 사람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복이 있는 사람을 시냇가에 심은 나무라고 표현한 것과 달리 악인들은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고 표현을 합니다. 곡식을 수확하고 타작을 한 후에 공중에 던져서 무거운 알곡은 땅에 떨어지고, 겨 조각들은 바람에 날리게 됩니다. 성경에서 바람은 심판을 상징할 때 자주 사용됩니다. 악인들은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게 되었을 때, 그 심판의 바람에 날리는 존재일 뿐입니다. 4절의 비유를 풀어서 설명하듯이 5절에서는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의인들의 회중에 모임에 들지 못한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주의 심판이 임하게 되면, 악인과 의인들은 구별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둘은 서로 섞이지 못하게 분리가 되고, 의인은 영원한 복으로, 악인은 영원한 심판으로 가게 됩니다. 5절은 악인의 최후의 상태를 확실히 언급하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6절에서는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을 비교하면서 1편의 노래를 마칩니다. 의인의 길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지만, 악인의 길은 망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성경에서는 “인정하다”라는 말로 번역했지만, 원어적 의미는 “알다”라는 의미입니다. 즉, 의인의 길은 하나님께서 알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안다는 말은 “사랑한다”는 의미와도 연결되는 단어입니다. 즉, 의인의 길은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길입니다. 그러나 악인의 길은 하나님의 사랑이 없고, 하나님께서 알지 못하시기 때문에 망하는 것입니다.
시편 1편은 우리에게 처참하고 심판이 확실한 악인의 길이 아닌 복이 있는 사람, 곧 의인의 길이 복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길이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시편 1편으로 근심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됩니다.
1절에서부터 우리는 복이 있는 사람의 길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만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악인들의 꾀가 넘치는 세상입니다. 죄인들의 길이 우리에게 오라고 손짓을 하고 있고, 오만한 사람들의 자리는 우리의 본성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합니다. 우리는 복이 있는 사람처럼 악인과 죄인과 오만한 사람들을 뿌리치고, 거절하면서 살아야 하는데, 이것이 전혀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경험상 알고 있습니다.
게다가 더욱 슬픈 것은 우리에게는 악인과 죄인과 오만한 자의 모습이 충분히 보인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경건하지 않은 모습이 있고, 습관적인 죄가 있고, 남을 경멸하고 멸시하는 교만한 모습이 있습니다. 이것은 어느 인간도 피해갈 수 없는 타락의 결과입니다. 결국, 아담 이후로 타락한 인간들은 모두가 복이 없는 사람에 속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모습이 나타나는 것은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지도 않고, 주야로 묵상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아니라, 바람에 날리는 겨와 같은 사람입니다. 결국 이 시편을 통해서 인간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길이 없다는 절망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타락 후부터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의 말씀들과 신약성경의 말씀들로 복이 있는 사람에 딱 맞는 사람을 알 수 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만이,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않으시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않으시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주의 율법을 즐거워하고 늘 묵상하셨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사셨습니다. 심지어 그 말씀을 따라서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진정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풍성한 과실을 맺으셨습니다. 하나님 앞에 온전한 의의 열매를 맺으셨고, 완벽한 순종의 열매를 맺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일에 있어서 형통함을 얻으셨습니다.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견디셨습니다. 자기 백성들을 위해서 심판을 받으셨고, 죽으셨고, 사흘만에 부활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이겨낼 수 있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없습니다.
그러니 복이 있는 사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세상의 어떠한 사람도 복이 있는 사람이 스스로 될 자격이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그분과 연합함을 말합니다. 복이 있는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가 연합을 한다면 우리에게도 복이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 5절을 보십시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에만이 복이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1장 3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셨답니다. 즉,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의 상태를 잘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구원을 받기 전에는 악인이었고, 죄인이었고, 오만한 자였습니다. 또한 여호와의 율법을 기뻐하지도 않았고, 주야로 무시하면서 살았습니다. 우리에게는 임박한 심판만이 남아 있었고, 우리의 미래는 바람에 날리는 겨와 같을 따름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만복의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성령님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게 되고, 그분을 전심으로 믿고, 그분만을 의지하였더니, 우리에게 닥칠 심판은 사라지고, 이제 악인과 죄인과 오만한 자라는 친구들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목숨까지도 바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불러서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이전에는 우리를 괴롭게만 만들었던 여호와의 율법이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님의 달콤한 사랑이야기가 되고, 하나님의 놀라우신 이름을 알게 하는 편지가 됩니다. 이제 여호와의 율법은 우리를 기쁘게 만들고, 또한 우리는 그 말씀을 기쁨으로 대하게 됩니다. 벌레와 같은 나를 사랑하신다는 주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면서 세상이 줄 수 없는 위로를 얻게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마르지 않는 샘물이 되고, 생명력이 넘쳐서 성령의 열매로 주의 영광을 드러내도록 만듭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게 되고, 악인의 길에서 멸망을 받아 마땅한 존재가 아닌, 의인들의 모임, 즉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되게 됩니다. 성경은 복이 있는 사람을 악인과 비교하면서 노래합니다. 바로 그 복이 있는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또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가 됩니다.
설교 첫 부분에서 예수님의 팔복처럼 시편 1편이 복의 선언으로 시작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팔복에서의 선언도 사실상 우리들은 불가능한 일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의 성품과 하실 일과 관련이 있고, 성령님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되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상태를 말합니다. 시편 1편은 팔복처럼 예수 그리스도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서 복이 있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도 이 시편을 대할 때, 자신들이 결코 복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직면하게 되고, 아담 때로부터 전해 온 여자의 후손, 곧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구원자를 신뢰하고, 그분을 간절히 기다리면서 그분의 구원하심을 의지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구약의 백성들보다 더욱 명확하게 그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성경을 통해서 대하게 됩니다.
시편 1편은 복이 있는 사람으로 시작을 하지만, 사람이 노래의 대상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진정 복이 있는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노래하게 만들고, 또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복이 있는 사람이 되도록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을 찬양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이 시편을 노래할 때마다, 우리를 구원하셔서 그리스도 안에서 복을 받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우리에게 복의 근원이 되어주셔서 복이 있는 사람이 되도록 만드신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해야 합니다.
처음 시작에 시편 1편과 2편은 전체 시편의 서론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시편 1편은 복이 있는 사람으로 시작을 하고 2편 12절은 복이 있도다로 마칩니다.
복이라는 단어로 시편 1편은 시작해서 2편은 마무리를 짓습니다. 어떤 것이 우리에게 복이 되는 것입니까? 성경 전체의 가르침이 시편 1편과 2편에 요약되어 있습니다.
삼위 하나님이 우리의 복이십니다. 그분을 믿고 의지하며, 시편 2편 12절 말씀처럼 “여호와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습니다.”
한 주 동안 시편 1편과 2편을 묵상하십시오. 시간이 날 때마다, 생각이 날 때마다, 이 시편들을 되새기면서 주의 은혜를 생각하십시오. 그래서 시편이 노래하는 복이 있는 사람처럼 여호와의 말씀을 기뻐하고, 주야로 묵상하면서 더욱 기뻐하는 사람이 되시기를 바라십시오. 주님께서 우리 모두를 그리스도 안에서 복 있는 사람으로 불러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