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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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6편
시편 16편
시편 16편은 처음 시작은 마치 슬픔을 노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다음은 곧장 바꿀 수 없는 확신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다윗의 확신은 죽음에서조차 건져주시고 보호해 주실 것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말씀을 한 구절씩 살피면서 이 시편이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가 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다윗은 기도로 시작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주소서” 다윗의 외침은 마치 어떤 문제가 있거나, 어떤 슬픔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자신을 지켜달라고만 했지, 어떤 위험이나 괴로움이 있다는 말은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자신을 지켜달라고 한 이유를 주께 피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다윗이 왜 지켜달라고 하는지에 대한 이유가 자세히 나오지 않기 때문에 어떤 특별한 상황이라고 하기보다는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한 모든 상황에 적용할 수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피하나이다”로 번역된 단어는 새처럼 피난처를 찾는 것이나 동굴에 피신하는 것, 방패로 안전을 찾는 것과 같은 상황에서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분명 다윗은 피할 곳이 필요했고, 피할 곳을 하나님으로 정했다는 것입니다.
신자가 하나님께 보호를 요청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보호해주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약속은 전체 성경에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중에서 하나만 살핀다면, 요한복음 17장 11절에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라고 예수님의 기도가 나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백성들을 보호해달라고 기도를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하나님 앞에 반드시 올라가게 되고, 독생자의 특권으로 그 기도가 응답된다는 점을 생각할 때, 우리는 그러한 점들을 의지하여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2절에서 다윗은 자신이 자신의 주님이신 하나님 여호와께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다는 것과 주님만이 자신의 복이시기에 자신을 돌보실 것이라는 점을 확신하며 노래합니다. 특히 “나의 주님이시오니”라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살고 죽는 것이나 평안과 고난이라는 것들도 주님의 결정에 달려 있음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다윗의 이러한 표현은 자신에게 찾아오는 모든 것을 선하신 주님의 결정으로 보고, 선하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악을 행하실 것이 아니며, 반드시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하실 것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복”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일반적으로 복이라는 의미로 번역되지 않고, “선한 것”이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다윗은 자신에게 있어서 선한 것은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함으로, 자신이 누리는 선한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노래합니다. 결국 다윗에게 있어서 가장 큰 복은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으로 행복을 누린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3절에서 땅에 있는 성도들을 언급합니다. 성도라는 표현은 문자대로는 “거룩한 자”라는 의미로, 여기에서는 의로운 이스라엘 백성이나 예배하는 공동체를 가리킨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성도들을 존귀한 자들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귀하거나 크거나 높은 위치에 있는 존재를 묘사할 때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이렇듯 다윗은 바로 존귀한 성도들을 언급하면서 자신의 모든 즐거움이 그들에게 있다고 노래를 합니다.
다윗이 성도들을 존귀하다고 부르는 것이나, 자신의 즐거움이 그들에게 있다고 말하는 것은 그들과 교제를 하거나, 그들과 동일한 존재가 되기를 바라는 소망이 담겨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3절 자체로만 볼 때에는 다윗이 존귀한 성도들과 동일한 존재가 되기를 소망한다는 것이 분명해보이지 않지만, 4절과 연결해서 보면 좀 더 명확해집니다.
3절에서는 다윗이 가까이 하고 싶은 존귀한 성도들을 언급했다면, 4절에서는 다윗이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자들이 언급됩니다. 우리 성경에서는 “다른 신에게”라고 4절이 시작되는데, 원문에는 “신”이라는 표현이 있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문맥상 “다른”이라는 단어는 우상을 나타내고 있고, “다른”이라는 단어가 구약에서 하나님이라는 단어와 함께 63번 사용되면서 거짓 예배를 말할 때 사용되는 것을 생각하면, 생략되어 있지만, 우리 성경처럼 “다른 신에게”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자는 괴로움이 더해질 것입니다. 성경은 한결같이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을 선택한 결과가 괴로움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 괴로움은 근심, 고통, 상처, 염려라는 의미가 있어서,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인 고통과 앞으로 갖게 될 염려와 심판의 두려움까지 모두 포함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것들이 눈에 보이도록 다 주어진다는 의미는 아닐지라도, 다른 신을 섬기는 사람은 이러한 것이 반드시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또한, 다윗이 이 시편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죽음 이후를 말하는데, 그것과 연관해서 이해를 한다면, 다른 신을 섬기는 자는 이 세상에서도 괴로움이 더해질 것이고, 그가 죽은 이후에도 그 괴로움은 계속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우상숭배자들이 드리는 피의 전제를 드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것이 4절 중반에 나옵니다. “전제”라는 것은 신에게 영광을 돌리는 섬김의 표시로 이스라엘은 포도주를 부었지만, 이방 나라들은 피를 주로 부었습니다. 즉, 다른 신에게 전제를 드리는 것은 그들의 권세를 인정하고, 그들에게 영광을 돌리며, 그들을 높이는 행위가 되는 겁니다. 그렇기에 다윗은 그것을 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자신은 다른 신을 섬기지 않을 것을 말합니다.
또한, 자신의 입술로 그 이름도 부르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그 이름이 누구인지 정확하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우상숭배자일수도 있고, 다른 신일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문맥상 다른 신일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다른 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도 충성이나 섬김의 행동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방 나라의 우상들 이름을 생각해 보십시오. 대표적인 것이 “바알”입니다. 바알은 “주님”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또, “몰렉”이라는 이방신도 있는데, 몰렉은 “왕”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즉, 바알이나 몰렉의 이름을 부르게 되면, 그대로 주님이나 왕이라고 권위를 붙여주는 꼴이 됩니다. 그러니 다윗은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다윗은 우상숭배자나 거짓된 신과 어떠한 관계도 맺지 않았고, 앞으로도 관계를 맺지 않을 것을 말합니다. 다윗은 이렇게 거짓된 신을 섬기지 않고, 오직 존귀한 성도들처럼 하나님만을 섬기고 예배하기를 원합니다. 거짓된 신을 예배하면 괴로움만 더할 뿐입니다. 그러나 참되신 하나님을 예배하면 하나님의 도우심과 보호하심을 간구할 수 있습니다.
거짓된 신을 섬기는 자들은 거짓된 신을 헛되게 섬기면서, 도움을 구합니다. 거짓 신으로부터 건강이나 부유함을 구하고, 형통함을 구할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이 노래한 것처럼 그들은 가짜 신을 섬기면서 괴로움만을 더할 뿐입니다.
그러나 5절에서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산업과 잔의 소득이시고 자신의 분깃을 지켜주신다고 노래합니다. “나의 산업”이라는 표현은 레위인들과 관련되어서 사용된 표현입니다. 이스라엘의 12지파는 다 땅을 분배받게 됩니다. 그러나 레위지파는 예외가 되어서 땅을 분배받을 때 빠지게 됩니다. 레위지파는 아무런 몫도 받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하나님이 그들의 분깃이 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땅에서 나오는 것들로 먹고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땅이 아닌 하나님이 자신의 산업 또는 분깃이라고 말하는 것은 레위인들이 살아가는 모든 것은 하나님이라는 원천으로부터 받게 된다는 것을 강조한 표현입니다.
이러한 개념을 적용한다면, 다윗이 여호와께서 자신의 산업이라고 말한 것은 자신의 삶에 필요한 모든 것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여호와를 의지할 때, 하나님은 자신을 의지하는 사람들에게 자기 자신을 주시며, 삶에서 그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십니다.
다윗은 여호와를 잔의 소득이라고도 표현합니다. 성경에서 잔이 상징하는 것은 사랑과 위로, 힘과 교제를 가리키고, 때로 운명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다윗이 여호와를 잔의 소득이라고 부른 것과 연결해서 생각해보면, 사랑과 위로와 힘과 교제의 소득이라는 것인데, 이것은 앞에서 자신의 모든 선한 것이 주님께로부터 나온다고 고백한 것과 연결이 됩니다.
다윗은 이렇게 하나님을 “나의 산업, 나의 잔의 소득”이라고 부르면서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분깃을 지키신다고 고백합니다. 분깃이라는 단어는 몫을 의미하면서 동시에 운명 또는 삶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즉, 자신에게 주신 몫을 하나님이 지켜주시고,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서 지켜주신다는 의미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주셨으니 그것을 지키고 돌봐주시는 것도 하나님께서 해주신다는 것을 고백하며 노래합니다.
다윗은 5절처럼 고백한 후에,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고, 자신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다고 노래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구역은 실제로도 아름다운 곳에 있는 아름다운 기업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단순히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 뿐만이 아니라, 자신에게 선한 것을 주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기에 그것은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과 상관없이 아름다운 것이 됩니다. 사람의 짧은 생각으로는 추하고 더럽다고 느껴질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높으신 생각과 시각에는 귀하고 복된 것일 수 있습니다.
다윗의 고백을 생각해본다면, 사람의 시선으로 자신의 상황을 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선으로 우리의 상황을 평가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경험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의 시선으로 자신의 상황을 돌아보게 되면, 불평과 불만, 억울함과 괴로움만 가득합니다. 나보다 더 잘 사는 사람, 나보다 건강한 사람, 나보다 잘난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내가 가진 집, 차, 직장, 가족을 생각하고, 다른 이들이 가진 것과 비교하면, 초라해질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나에게 주어진 것이 지금의 상황에서 나에게 가장 최고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들의 생각과 다릅니다. 하나님의 길은 우리보다 높습니다. 이러한 점을 생각하며, 우리를 사랑으로 돌보시는 하나님을 생각한다면, 우리에게 주신 것이 우리들에게 가장 알맞은 것이고, 가장 좋은 것이 됩니다. 이러한 만족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이는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6절에서 다윗이 노래하는 것처럼 만족의 노래를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굳건한 믿음 안에서 가능하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다윗은 7절에서 여호와를 송축한다는 흔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표현은 성경에서 자주 사용되는데, 하나님의 성품과 역사를 온 세계에 알리는 찬양에서 사용이 됩니다.
여호와를 송축한다는 이유는 자신을 훈계하셨고, 교훈하셨기 때문입니다. 보통 훈계는 사람의 기분을 좋지 않게 만듭니다. 하지만 다윗은 여호와의 훈계를 기분 나쁘게 생각하기보다, 오히려 그것을 찬송의 이유로 삼고 있습니다. 잠언 13장 10절에서 “교만에서는 다툼만 일어날 뿐이라 권면을 듣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고 말씀했는데, 다윗은 여호와의 권면, 즉 훈계를 즐거이 듣는 지혜가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훈계하시는 것을 즐겁게 들으며, 자신의 잘못을 고치고 바른 길로 인도함을 받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는 것이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신자들은 바로 이러한 모습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성경을 읽는다고 하면서도 성경에 기록된 훈계를 가볍게 여기거나, 그것을 읽기만 하고, 마음에 새기지 않는 것은 말씀을 바르게 읽은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을 마음판에 새기고, 자신의 삶을 살피면서 잘못은 버리고, 바른 것은 더욱 온전히 순종하려는 모습을 가진 자는 그 훈계를 통해서 믿음 안에서 자라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어서 찬송의 자리로까지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양심”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심장 또는 콩팥”을 의미하는 단어로 사람의 내장을 의미하면서 동시에 사람의 중심이나 마음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여기에서는 마음을 의미하기에 양심이라고 번역했는데, 하나님의 훈계를 머리로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받아들였고, 받아들인 훈계를 가지고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는 의미가 됩니다.
8절에서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는 하나님을 앞에 두고 섬긴다는 의미도 있지만, 하나님을 계속해서 묵상한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항상 깊게 묵상하기 때문에, 그의 모든 생각과 행동에서도 하나님을 묵상하는 가운데 우선순위를 두고, 하나님을 위하여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먹든지 마시든지 주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는 말씀처럼 모든 것을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또한, 오른쪽에 계시다는 표현은 보호를 의미하는데, 오른쪽은 보통 힘, 도움, 영광의 자리를 나타냅니다. 전쟁에서 왼쪽 팔로 방패를 들고, 오른손으로 무기를 들고 싸우는 것이 일반적인데, 오른손에 무기를 들고 있기 때문에 방어가 약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약점이 될 수 있는 오른쪽에 계시기 때문에 방패가 되어 주시고, 어떠한 공격도 막아낼 수 있다는 의미가 됩니다. 이것은 역경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역경이 와도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시니 안전하다는 확신을 갖는 것을 말합니다.
8절과 같이 여호와께서 안전히 보호해주시기 때문에 기쁨과 즐거움이라는 감정으로 자발적인 찬양이 터져 나옵니다. 9절에서 나의 마음이 기쁘다는 것은 내적인 행복을 의미하고, 그러한 행복으로 인해서 나의 영이 즐거워하기에 찬송이 되는 것입니다.
9절 마지막에 “살리니”로 번역된 단어는 “눕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원문대로 읽으면, 내 육체도 안전히 눕는다고 읽을 수 있습니다. 즉, 여호와의 보호하심으로 인해서 육체가 안전히, 평안히 누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더 깊은 의미에서 하나님의 도우심과 보호하심을 노래합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죽도록 버려두시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주님께 속한 거룩한 자, 즉 언약의 백성을 하나님께서는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입니다.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를 원문대로 직역하면, “주의 거룩한 자가 부패를 보도록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가 됩니다. 이를 문자대로 이해하면, 죽어서 시체가 썩는 일이 없게 된다는 의미가 됩니다.
10절 말씀은 크게 두 가지의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먼저 다윗의 입장에서 이해를 해본다면, 이것은 자신이 죽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죽어도 무덤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교제가 죽음을 넘어서까지 계속 이어질 것임을 가리킵니다. 많은 학자들은 다니엘 12장 1-3절을 제외하고는 구약에서는 내세 교리를 분명하게 가르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10절의 말씀은 스올, 즉 무덤을 넘어서 있는 영원한 것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노래하는 다윗의 입장이 아닌 예언적인 말씀의 입장에서도 이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문자대로 적용이 가능한데,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이 말씀이 문자대로 성취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분명히 죽으셨고, 무덤에 묻히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그 몸이 썩지 않으셨습니다. 즉, 부활하신 예수님께 이 말씀이 적용이 가능합니다. 이 부분은 조금 뒤에 다시 설명하겠습니다.
다윗은 11절에서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라고 노래합니다. 생명의 길은 다윗이 스스로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여주실 때 찾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주께서 생명의 길을 자신에게 보여주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분명 인간은 스스로 생명의 길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그런데 11절은 하나님의 은혜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가르쳐줍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속에서는 충만한 기쁨이 있습니다. 하나님에게서 생명의 길이 나오고, 그것을 허락하시기에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충만한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분명 1절에서 하나님께 자신을 지켜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다윗은 분명 도움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노래의 마지막을 기쁨과 영원한 즐거움을 말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현재의 상황에서 위기를 맞이하거나 고난과 괴로움을 만날 수도 있겠지만, 장차 하나님을 통해 얻게 될 영원한 즐거움을 바라보면서 소망하는 것을 찬송의 이유로 삼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바울은 로마서 8장 18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바울도 다윗처럼 하나님을 통해 얻게 될 영원한 영광을 바라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위대한 신앙의 선배들이 이렇게 노래하고 고백하는 것은 곧 신자에게 고난은 하나님을 통해 얻게 될 영원한 생명과 영광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님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시편 16편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인생은 죽음과 함께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분명한 희망과 주님께서 주시는 복은 현재의 삶에서부터 영원까지 이어진다는 확신을 노래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앞에서 잠깐 언급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사도행전 2장 25-28절에서 시편 16편 8-11절을 인용합니다. 찾아서 함께 읽어봅시다. 베드로는 분명 시편 16편 8-11절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었음을 말했습니다. 시편 16편을 노래한 다윗은 죽어서 무덤에 있으니 이 말씀에 직접적으로 맞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을 선지자라고 말하면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미리 말하고 노래하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사도행전 13장 35절에서 시편 16편 10절을 인용하면서 그리스도에게 적용하고 있습니다. 위대한 두 사도의 가르침을 따라서 8절에서부터 11절까지의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된 말씀으로 읽어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는 항상 여호와 하나님을 으뜸으로 모시고 순종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른쪽에 계시며 그를 흔들림 없이 지키셨습니다. 그러하기에 예수 그리스도는 군대와 천부장과 유대인의 아랫사람들이 잡아서 결박하며 죄인처럼 끌고 다닐 때에도, 대제사장이 예수님을 죄인처럼 조사할 때도, 빌라도 앞에 서셔서 질문을 받을 때에도 하나님만을 의지하면서 흔들림이 없으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에도 자신의 영혼을 아버지에게 의탁한다고 말씀하시며, 끝까지 아버지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의지하였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영혼은 스올에 버려지지도 않으셨고, 그 육체가 썩지도 않으셨습니다. 죽음에서 부활하셔서 생명의 길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증명했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부활의 영광을 보여주시며, 충만한 기쁨과 영원한 즐거움으로 초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와 자매 여러분! 다윗처럼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십시오. 우상숭배의 자리에 서지 마시고, 거짓된 신들을 섬기는 미련하고 죄된 행동에서 벗어나십시오. 그것은 괴로움을 더할 뿐이며, 어떠한 구원도, 어떠한 선도 얻을 수 없으며, 오직 괴로움만 더할 뿐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오른쪽에 서셔서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을 섬기는 자는 다릅니다. 그리스도의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않으시고, 예수님을 썩지 않도록 생명으로 살리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도 동일한 복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그러니 헛된 것에 여러분의 시간과 영혼을 낭비하지 마시고, 오직 참되신 하나님만을 바라보십시오.
성령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은혜를 베푸시면, 여러분은 주님께서 베푸시는 생명의 길을 발견하게 될 것이고, 그 안에서 충만한 기쁨과 영원한 즐거움이 있음을 보게 되며, 하나님 안에서 사는 즐거움으로 참된 만족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삼위 하나님께서 다윗의 노래가 저와 여러분의 노래가 되게 하시고, 우리의 영혼의 고백이 되게 하시어, 우리들로 참된 기쁨을 누리고, 찬송의 자리로 나아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