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 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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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하시는 은혜
회복하시는 은혜
세상에는 영원히 지속되는 기쁨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상황이 바뀔 때 그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기뻐도 다른 상황을 만나게 되면 그 기쁨이 그 정도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물론 기쁜 일이지만 그렇게 기쁘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오늘 성경은 영원히 지속되는 기쁨이 있다고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1. 제자들을 인도하시는 보혜사 성령 (12~15절)
먼저 예수님은 지난번 본문에 이어 성령님에 대해 계속 이야기하시면서, 보혜사 성령이 오시면 지금 두려워하고 있는 제자들을 어떻게 도와주실지 말씀하십니다. 성령님은 제자들을 위협하는 세상을 책망하시고, 제자들에게는 위로와 평화를 주시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직 제자들이 알아야 할 것이 많지만 지금 말해주어도 그들이 알아들을 수 없기 때문에 말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 (12절)
여기서 ‘이를 것이 많다’는 말은 분명히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 그리고 성령님이 곧 오셔서 이루신 일들, 또 궁극적으로는 앞으로 예수님의 재림까지의 모든 일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을 다 말해주고 싶으시다는 겁니다. 당장 예수님이 돌아가시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해서 질문하기도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한다’는 말씀은, 지금은 감당하지 못하지만 나중에는 감당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나중에 진리의 성령이 오셔서 도와주시면 그때는 제자들이 알고 감당하게 될 것이라는 뜻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지금은 그들이 아직 감당할 수준이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감당하게 될 것이라고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13절)
예수님은 여기서 성령을 다시 한 번 ‘진리의 성령’이라고 부르시는데, 진리의 성령님은 제자들을 진리 가운데로 인도해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님은 예수님과 상관없이 따로 움직이며 활동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겁니다. 여기 보면 분명히 성령님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만 말한다고 하십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성자 하나님인 예수님을 통하여 들은바만 가서 전하는 분이시라는 겁니다. 그것이 성령님의 역할입니다.
여기서 성령님이 알려주실 ‘장래 일’은 결국 예수님의 재림을 포함해 종말에 일어날 일들입니다. 그것을 “너희에게” 즉 제자들에게, 곧 교회에게 말씀을 해주신다는 겁니다. 성경은 성령의 영감으로 쓰인 책인데, 성령님은 당신께서 주신 영감으로 기록된 성경을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그 말씀을 통해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세워질 수 있도록 해주십니다.
신앙생활에 있어 ‘내가 믿으면 뭐가 좋은가? 그것만 빼먹겠다.’ 하는 자세로 하면 신앙이 생길 수가 없고 생겨도 자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정말로 성령님을 의지해서 살아가면 그러한 자기 영광이 아니라 주님의 영광을 추구하게 됩니다.
우리가 철이 든다고 하는 게 뭡니까? 아이가 처음 배우는 단어를 보십시오. ‘내 거야!’ ‘나야!’입니다. 그런데 아이가 점점 커 가면서 철이 들면 어떻게 합니까? 아빠 엄마 생일 같은 때 그 동안 받은 용돈을 모아 놓았다가 슬그머니 선물을 내밉니다. 이게 철이 들기 시작하는 겁니다. 자기밖에 모르던 아이가 부모를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고, 더 나아가 친구나 다른 사람들을 생각해서 베풀 줄 알게 된 것이 철이 들어가는 증거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늘 ‘나는 받겠다, 받겠다, 받겠다’ 하는데, 은혜를 받는 것은 좋지만, 받았으면 너무 감사해서 베풀 줄 알기 시작하는 것이 신앙적으로 철이 드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 철이 드는 것은 하나님이 왜 나를 부르셔서 자녀로 삼으셨을까? 왜 나를 이곳에 두셨을까?’와 같은 것을 생각하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러다 보면 그저 나밖에 모르는 신앙생활이었는데 이제는 위를 바라보고 밖을 바라보기 시작하게 됩니다. ‘주님이 지금 나에게 원하시는 것이 뭘까?’를 생각하게 되고, 생각에만 머물지 않고 행동으로 이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이렇게 예배도 있는 겁니다. 항상 나밖에 모르던 수준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하고 이웃을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그것을 자꾸 연습하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렇게 살면 참 행복해집니다. 그래서 ‘주님의 뜻이 뭔가? 주님이 원하시는 게 뭔가? 나 개인의 삶을 볼 때 주님이 나를 통해 뭘 원하실까?’ 하고 생각해보니,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구나.’ 하여 그렇게 실천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겁니다.
그리고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뭘까?’ 생각할 때 ‘영혼을 구원하여 제자를 만드는 것을 원하시는구나.’ 하고 깨달으며 나 자신도 제자로 성장하기 위해 애를 쓰고 특히 주님을 모르는 분들을 주님께 인도하기 위해서 영혼 구원을 위해 함께 협력해서 나아가는 겁니다. 이런 게 신앙이 철이 드는 것입니다.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하였노라” (14-15절)
예수님은 자신의 삶이 아버지 하나님께도 영광이 된다는 것을 이렇게 표현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아버지 하나님의 것을 말씀하시고, 성령님을 통해 예수님의 것을 제자들에게 알리시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질서라는 겁니다. 우리에게 알려주셔야 우리를 통해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서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주 단편적인 지식을 가지고 그게 전부인 것처럼 생각할 때 문제가 됩니다. 그래서 단어 하나를 쓸 때도 의미를 담아서 하는 게 필요합니다.
교회 예배나 찬양집회 등을 보면 인도자가 맨 앞에 ‘할렐루야’ 하면서 시작합니다. ‘할렐루야’는 좋은 말입니다. ‘주님을 찬양하라’는 명령어입니다. 그러니까 명령어이기 때문에 서두에 인사말로 쓰기에는 사실은 적절하지 않은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할 때 ‘할렐루야’ 하면 맞지만 인사말로 ‘할렐루야’ 하면 맞지 않는 겁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관용어처럼 쓰는 말이 되었기 때문에 ‘할렐루야’라고 합니다.
또 회중은 대개 ‘아멘’이라고 합니다. 무슨 말만 나오면 무조건 의미도 없이 ‘아멘’ 합니다. ‘아멘’이라는 말은 ‘맞습니다. 동의합니다. 나도 똑같은 마음입니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내가 진실로 진실로(진정으로 진정으로)”라고 하신 말이 바로 ‘아멘, 아멘’ 하신 겁니다.
우리는 의미를 갖고 말을 해야 합니다. 의미 없이 그냥 말하는 게 문제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눈 감고 낭떠러지 쪽으로 자동차를 운전해 달리는 것과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너무 맹목적인 것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이 모르면서 무조건 할렐루야, 아멘 하는 게 아니라, 뭔지를 좀 알고 깨닫고 그래서 질문을 해주기를 바라십니다. 그런데 자기 생각에 꽉 갇혀 있으면 질문이 없습니다. 자기 이익만 추구하는 사람은 질문하지 않습니다. 자기 인생에 벌어지는 일들이 뭔지 손익을 따지고 계산하느라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을 제대로 듣지 못하고, 그래서 질문이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영광스럽게 살아가는 하나님 나라가 하나님의 뜻인데, 자기들만 영광스럽게 살겠다는 것을 생각하고 있으니까 주님의 뜻을 제대로 깨닫지 못한 겁니다. 그러다 보니까 자신들의 기대(예수님을 따라다니면 한 자리를 차지하겠다는 것)가 무너졌을 때 다 도망가고 만 것입니다.
우리도 당장 먹고살아야 하고, 잘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러다가 초조와 불안이 생기면 제자들처럼 작은 위협에도 예수님을 부인하게 되고, 가룟 유다처럼 조그마한 유혹에도 넘어가 버리는 잘못된 결정을 할 때가 많아집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의 불안과 염려를 참된 평안으로 바꾸어주시고 진리의 길을 걸어 갈 수 있도록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성령님을 의지해서 매일매일 바르게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2. 조금 있으면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보리라 (16~19절)
이제 조금 있으면 예수님을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보리라는 말씀을 가지고 제자들 사이에 논쟁이 벌어집니다.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니, 제자 중에서 서로 말하되 우리에게 말씀하신바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며 또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하신 것이 무슨 말씀이냐 하고” (16-17절)
16~19절 사이에 7번이나 나오는 표현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조금 있으면’입니다. 앞에서 제자들이 차마 던지지 못한 질문은 예수님이 ‘어디로’ 가시는지에 대한 것이었는데, 여기서는 ‘언제’ 가시는지에 대한 것입니다.
여기서 제자들이 알고 싶은 것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17절에서 던진 질문입니다. 예수님은 아주 수수께끼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분명히 ‘조금 있으면’ 아버지께로 가시기 때문에 더 이상 자신을 볼 수 없을 것이라고 하셨는데, 또 동시에 ‘조금 있으면’ 자신을 보게 될 것이라고 하시니, 이것이 도대체 무슨 말씀인지 제자들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물론 우리는 그 답을 알고 있습니다. 조금 있으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부활하시고 또 승천하실 것이기 때문에 제자들은 더 이상 이 땅에서 육신으로는 예수님을 볼 수 없게 됩니다. 하지만 일차적으로는 부활하신 주님을 잠시 다시 볼 수 있게 될 것이고, 또 보혜사 성령님을 통해서 예수님을 다시 보게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결국 세상 마지막 날 재림하시는 예수님을 보게 됩니다.
“또 말하되 조금 있으면이라 하신 말씀이 무슨 말씀이냐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거늘” (18절)
여기서 던지는 질문이 두 번째로 제자들이 알고 싶어 하는 의문점입니다. ‘조금 있으면’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가 하는 점입니다. 여기에 ‘조금 있으면’이라는 말이 두 번 나오는데, 조금 있으면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가신다는 것은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조금 있으면 예수님을 볼 것이라는 말은 일차적으로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 앞에 나타나실 것을 가리킵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것은 보혜사 성령님이 오시는 때까지를 의미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예수님이 세상 마지막 날 이 땅에 다시 오시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아주 긴 시간이지만 사도 베드로가 뭐라고 했습니까? ‘주님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벧후 3:8). 그 하나님께는 그렇게 긴 시간이 ‘조금 있으면’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예수께서 그 묻고자 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내 말이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므로 서로 문의하느냐” (19절)
예수님은 오늘 우리 안에도 질문이 일어나는 것을 절대 싫어하지 않으십니다. 안 믿거나 믿어보려 하는 분 또 금방 믿은 분들은 의문이 많고 질문이 많습니다. 그런데 괜히 질문했다가 싫어할까 봐 눈치를 보고 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1:1에 보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라고 하는데, 그 ‘말씀’이 헬라어 원어로 ‘로고스(Logos)’입니다. 그 말씀은 우리에게 주어진 말씀입니다. 성경을 보면 내용이 굉장히 많지 않습니까? 우리에게 문자로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로고스’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향해서 ‘저 예수’가 ‘나의 주 예수’가 되는 역사가 있을 때 변화가 일어납니다. 인간관계에서도 ‘그 사람’이 ‘나와 너’의 관계로서의 ‘당신’이 될 때 의미 있는 변화가 아닙니까? 주님도 ‘그분’이었는데 ‘나의 주님이십니다.’라고 될 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는 겁니다.
우리는 자신의 삶을 보면서 ‘이것이 그리스도인가? 내가 지금 사는 이게 그리스도인의 삶인가? 이게 예수 믿는 사람의 삶인가?’ 이 질문을 할 때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 질문에서부터 변화가 시작됩니다. 그래서 여러분, 자신의 삶을 보면서 질문해보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인인가? 이것이 신앙인인가? 지금 내 삶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괜찮은가?’ 매일 이런 질문을 하며 살 때 변질되지 않고 바른 믿음의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3. 근심이 기쁨으로 될 것이다 (20~22절)
열한 명의 제자들은 조금 있으면 주님을 볼 수 없기도 하고 보기도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당황했는데, 아마도 예수님이 어디 갔다가 다시 돌아오시는 정도로 생각했을 겁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20절)
사실 이 말씀은 ‘본다’는 게 무슨 뜻인지, ‘조금 있으면’이라는 것이 정확히 얼마 후인지를 가르쳐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것은 먼저 제자들의 마음을 헤아리며 주시는 대답입니다. 지금 좋아해야 할지 걱정해야 할지 모르는 제자들에게 근심과 기쁨이 둘 다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먼저, 예수님은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하신 때로부터 불과 몇 시간 후 십자가를 지실 텐데, 예수님의 십자가는 제자들을 곡하고 애통하게 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죽인 세상, 즉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기뻐할 것입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제자들의 모든 꿈이 깨지고, 종교지도자들은 강력한 종교적 경쟁자인 예수를 순조롭게 제거했다고 기뻐할 것입니다.
이런 일이 조금 있으면 예수님이 아버지 하나님께로 가실 때 벌어질 일입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낙심하고 두려워하며 다 도망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또한 여기서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하십니다. 그러니까 십자가는 결코 끝이 아니라는 겁니다. 십자가 죽음은 결코 끝이 아닙니다. 그리고 십자가는 결코 실패가 아닙니다. 십자가는 영광으로 가는 관문입니다. 십자가는 끝이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그리고 보혜사 성령님의 오심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직접 나타나 가르쳐주실 것이고, 또 40일 후에 하늘로 올라가시면 그 후 성령님이 오셔서 제자들을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해주시는데, 그때 그들의 근심이 기쁨으로 바뀌게 된다는 겁니다. 처음에는 알지 못하니까 그들의 무지가 근심을 가져다주었는데, 이제는 깨닫고 나니까 깨달음이 기쁨을 준다는 겁니다. 그때 세상의 기쁨은 오히려 근심으로 변하게 됩니다.
그런데 세상은 지금도 스스로 속고 속이고 있습니다. 사탄은 자신이 이미 패한 줄 알면서도 세상으로 하여금 끊임없이 속임수를 통해 작은 승리를 맛보게 합니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들도 자꾸 유혹을 당하고 넘어지도록 하고 있습니다. 사탄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사람들의 구원을 취소할 수 없으니까,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람들이 이 땅에서 아주 형편없이 살도록, 천국을 맛보지 못하도록 하는 전략을 쓰고 있습니다.
가만 보면, 교회에 안 나오고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아도 그럭저럭 잘 살아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실제로도 ‘꼭 교회에 안 나가도 나는 행복하게 살고 있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교회를 안 나가니까 오히려 시간도 많아지고 삶이 더 나아졌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 것을 승리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예수님은 그런 것이 결코 진정한 승리가 아니라고 하십니다. 그것은 오히려 생명을 잃어버리는 길이라고 하십니다. 신앙생활을 안 하지만 열심히 노력하면 세상에서 성공할 수 있습니다. 온 천하를 얻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죽어서 세상을 떠나면 지금까지 이루어온 모든 것은 끝납니다. 아무것도 가져갈 수 없습니다. 그러니 쌓고 또 쌓고 또 쌓아도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예수님은 우리가 고난 중에서도 진리의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 선한 일 즉 주님이 맡겨주신 사명을 신실하게 감당하는 것이 참된 승리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이 참된 기쁨의 비결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이 주는 거짓 승리나 위장된 기쁨에 속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주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아니며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열매를 혹시 맺더라도 썩은 열매입니다. 썩은 열매를 엄청나게 거두었다고 자랑할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렇다면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주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겠습니다.
그렇다면 근심과 애통 후에 받는 기쁨은 어떤 것입니까?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기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고통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느니라” (21절)
예수님 당시 1세기 고대사회에 위생시설이 아주 열악했습니다. 아기를 낳다가 죽는 여자들도 많았고 아기들도 많았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해산 전에 얼마나 걱정이 되고 얼마나 불안하고 또 얼마나 두렵겠습니까? 아기를 낳는 고통도 두렵고, 동시에 제대로 된 아기가 나올지가 걱정됩니다. 그러나 해산 후에는 그 고통을 기억하지 않을 만큼 엄청난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기쁨이 평생 지속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처럼 엄청난 기쁨을 안겨다주며 태어난 아이가 자라면서 어떻습니까? 때로는 부모에게 고통과 근심을 안겨주기도 하고, 부모를 슬프게 하거나 화나게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 생명이 태어났을 때의 기쁨이 그 기쁨 그대로 평생 지속되지 못합니까? 왜 그 기쁨이 고통과 근심과 슬픔과 분노로 바뀌기도 합니까? 그것은 인간 생명의 불완전함과 유한함 때문입니다. 불완전하고 유한한 것은 일시적인 기쁨을 줄 수는 있지만, 결코 변함없고 지속적인 기쁨을 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계속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22절)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라는 말씀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실 것을 암시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애통하며 근심하던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그 생명으로 인하여 기뻐할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기쁨이 어느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기쁨이라고 하십니다. 다시 말해, 어떤 사람에 의해서도, 어떤 상황에 의해서도 없어지지 않으며 빼앗기지 않는 기쁨이고 영원한 기쁨이라는 뜻입니다.
어떻게 부활하신 예수님으로부터 비롯된 기쁨이 영원한 기쁨이 될 수 있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의 생명은 인간의 생명과 다르게 완전하고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완전하고 영원한 생명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의 생명이 바로 그런 생명이라는 겁니다. 인간은 언젠가 죽지만, 예수님은 영원히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성자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깨뜨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생명이야말로 참 생명이고 영원한 생명이며 완전한 생명입니다. 죽음 후에 부활을 통해 완전한 생명임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생명의 기쁨 또한 영원하고도 완전한 기쁨이 됩니다. 결코 빼앗기지 않는 기쁨,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 기쁨인 것입니다.
우리의 누리는 기쁨은 순간적으로는 좋지만 일시적일 뿐입니다.
여러분, 자신에게도 다시 질문해보십시오. ‘나는 언제 가장 기뻤는가?’ 그 기쁨이 얼마나 오래 지속되었습니까? 내게 기쁨을 주는 세상의 모든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언젠가 끝납니다. 아니, 끝나기 전에 상황에 따라 바뀝니다.
그러나 영원히 지속되는 기쁨이 있습니다. 바로 사랑의 기쁨이고, 또 영혼 구원의 기쁨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개인적으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애쓰며 나아가는 것이고, 또한 교회적으로는 영혼 구원하여 제자 만드는 일을 위해 힘쓰며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은 세상에서 줄 수 없는 기쁨을 맛보게 되며, 그 기쁨은 영원히 지속됩니다. 왜냐하면 영원한 가치를 가진 일이기 때문입니다. 보십시오. 우리가 하는 일 중에 영원한 가치를 가진 일이 얼마나 됩니까? 그런데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영혼 구원하여 제자 만드는 것은 영원한 가치를 가진 일로서,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 천국에 가도 거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그리고 영혼 구원하여 제자를 만드는 교회의 사명을 위해 최선을 다해 나아감으로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 기쁨을 영원히 누리는 우리 각 개인과 온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