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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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문화배경 사전 여호와와 결합된 표현들

여호와와 결합된 표현들(-結合-表現-, Combined expressions in Jehovah) ‘여호와’(יְהֹוָה, 예호와, 야웨)는 ‘스스로 있는 자’, ‘나는 나다’(I AM WHO I AM)는 뜻으로, 하나님의 영원하심과 자존(自存)하심, 그리고 원인이 없으신 절대 유일하신 존재임을 강조하는 그분의 고유한 성호(聖號)요 영광스러운 신명(神名)이다(창 2:4; 출 3:14–15; 6:3). 특히 이 용어는 자기 백성과 관계되는 구원이나 언약 성취 그리고 자신의 신실하심과 인자하심과 관련하여 주로 사용되고 있다. 이에 비해 ‘엘로힘’ 곧 ‘하나님’은 이방인을 포함한 모든 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창조주요 통치자(지배자)로서 그 절대적인 힘과 권위를 지니신 하나님이심을 나타내는 거룩한 호칭이다(대하 18:31). 구약성경에는 ‘여호와’와 결합된 여러 표현들이 등장한다.

① ‘여호와 닛시’(יְהֹוָה נִסִּי, 예호와 닛시) - ‘여호와는 나의 깃발’(The LORD is my Banner)이란 뜻. 모세가 아말렉 군대와 싸워 승리한 기념으로 세운 제단에 붙여진 이름으로(출 17:15), 이는 승리케 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찬양하는 이름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다. 사실, 깃발은 그 부대의 정체성을 확인시켜 주는 상징물이자 부대원들의 소속감을 고취시켜 주는 군용 장비이다. 또한 깃발은 군인들의 사기를 높여주고 진퇴(進退)와 나아갈 방향을 알려주는 푯대가 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전쟁터에서 여호와께서 나의 깃발이 된다는 것은 얼마나 큰 힘이 되고 든든한 일인지 모른다(시 20:5).

② ‘여호와 살롬’(יְהֹוָה שָׁלוָם, 예호와 솰롬) - ‘여호와는 평강이시다’(The LORD is Peace)는 뜻. 사사 기드온이 하나님과 자기 사이에 모든 일이 화평하게 된 것을 기념하여 오브라에 있는 제단에 붙인 이름이다(삿 6:24). 물론 이 평안의 주체는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③ ‘여호와 삼마’(יְהֹוָה שָׁמָּא, 예호와 샴마) - ‘여호와께서 거기에 계시다’(THE LORD IS THERE)는 뜻. 에스겔의 이상 중에 언급된 하늘 예루살렘에 붙여진 이름이다(겔 48:35). 비록 택한 백성이 범죄하여 포로로 끌려갔더라도 하나님은 그들을 떠나지 않으시고 그들과 함께하신다는 뜻이 담겨 있다. 결국 에스겔은 임마누엘 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상기시킴으로써 포로로 잡혀간 유다 백성에게 큰 소망과 위로를 주었다.

④ ‘여호와 이레’(יְהֹוָה יִרְאֶה, 예호와 이르에) - ‘여호와께서 준비(예비)하심’(The LORD Will Provide)이란 뜻.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을 좇아 믿음으로 이삭을 번제로 바치려고 준비한 곳에 붙여진 이름이다(창 22:14). 아브라함을 위해 숫양을 준비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어린 양 예수님을 준비해 두고 계셨다.

⑤ 이외에도 ‘여호와 로프에카’(‘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 출 15:26), ‘여호와 메카디쉬켐’(‘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 출 31:13), ‘여호와 체바오트’(‘만군의 여호와’, 삼상 1:3), ‘여호와 엘욘’(‘지존하신 여호와’, 시 7:17), ‘여호와 로이’(‘여호와는 나의 목자’, 시 23:1), ‘여호와 치드케누’(‘여호와 우리의 의(義)’, 렘 23:6; 33:16), ‘여호와 라파’(‘치료하는 여호와’, 출 15:26) 등이 있다.

NICOT 잠언 Ⅰ 1. 하나님의 이름

1. 하나님의 이름

보스트룀에 의하면 하나님의 이름은 이 책의 94개 절에서 언급되며, 1–9장에서 대명사로 11회, 그리고 23장 11절과 24장 12절과 아마도 21장 12절에서 다른 호칭으로 사용된 것을 포함하면 총 915개 절 가운데 100–110개 절에 언급된 것으로 보인다. 하나님의 이름은 대부분 컬렉션 II (10:1–22:16) 에 집중되어 있다. 이 책은 하나님의 이름을 “여호와” (‘야웨’) 로 언급하며, 이 이름은 모두 87회 나타난다. 구약 성경 다른 곳에서 이 이름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자기 계시와 그들과 언약을 맺으실 때 사용된다. 잠언에서 이스라엘의 왕과 지혜자는 여호와라는 이름을 이런 의미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지혜는 이스라엘의 역사에 대해 언급하지 않지만, 역사와 무관한 것이 아니다. 치메를리는 하나님의 이름에 기초하여 이스라엘이 피조 세계에 들어와 그곳에서 발견한 영역을 여호와께 종속시켰다고 주장한다.

그의 다른 이름은 “하나님” (‘엘로힘’) 이다 (이 단어의 복수 형태는 그의 장엄함을 나타낸다). 이 이름은 다섯 번만 나오는데, 세 번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2:5; 3:4; 25:2). 두 번은 개인의 하나님으로 제시되며 (3:4; 30:9). 단수 형태로는 한 번 (30:5) 나온다. 이 포괄적 이름은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능력과 힘과 인간에 대한 초월성을 보여 주는 기능을 한다. 이 이름은 종종 그의 존재를 인생과 비교하기 위해 사용된다 (민 23:19). 지혜자는 자신을 이 하나님의 대변인으로 묘사한다.

매거진 re 2019년, Vols. 68–79 3. 주의 이름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3. 주의 이름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이처럼 하나님의 이름을 알면 알수록 하나님께서 얼마나 아름답고 탁월한 분이신지가 여실히 드러납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하나님은 엘(강한 존재)이시며, 여호와(스스로 존재하시는 영원한 지존자)이실 뿐 아니라, 자기 백성을 눈동자같이 지키시는(시 17:8) 목자, 세상만사에 절대주권을 가지고 섭리하시는 토기장이, 영원토록 불변하고 신실하신 반석이십니다. 이런 이름을 가진 하나님을 지성적으로 이해하고, 감정적으로 느낀 후, 체험적으로 경험하게 될 때 전인은 참된 감격에 휩싸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 안에 내포된 하나님의 탁월하심과 아름다우심을 경험할 때 필연적으로 나올 수밖에 없는 복된 고백은 바로 시편 기자가 경탄 가운데 고백하는 것처럼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라는 찬탄입니다.

이 모든 찬탄이 직접적으로 성취된 사건이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두 번째 위격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입니다. 빌립보서 2장 9–11절은 이를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엘이시고 여호와이신 성부 하나님께서는

매거진 re 2019년, Vols. 68–79 3. 주의 이름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자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에게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고, 모든 피조물들이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게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영광스러운 이름의 뜻은 예수의 이름으로 영광스럽게 압축되었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가진 예수 그리스도는 그 이름에 걸 맞는 삶을 겸비하고도 온전히 살아내셨습니다. 그러므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주의 이름을 기뻐하는 자이며, 그 이름 안에 내포된 하나님의 성품을 전인으로 누리며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4.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십계명 제3계명을 논하는 출애굽기 20장 7절은 다음과 같이 명합니다.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여호와는 그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경홀히 여기거나 소홀하게 취급하는 것을 뜻합니다. 위에서 살펴본 대로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을 반영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을 만홀히 여기거나 소홀히 사용한다는 의미는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이 만홀히 여김을 당하거나 경홀하게 사용되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그것은 신성 모독죄이기 때문에 성경은 “그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대교리문답 112문답에서는 이를 다음과 표현합니다.

112문: 제3계명에서 요구하시는 의무는 무엇입니까?

112답: 제3계명에서 요구하시는 의무는,

하나님의 이름과 칭호와 속성과 규례와 말씀과 성례와 기도와 맹세와

서약과 제비와 하시는 일과

그 외에 하나님 자신을 알리시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영광과 우리와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하여

거룩한 신앙고백과 책임 있는 대화로 생각과 묵상과 말과 글에서

거룩하고 경건하게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을 인정하고, 사랑하고, 받아들이는 신자라면, 하나님의 이름도 인정하고, 사랑하고, 겸비하게 수납하여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과 찬송을 올려 드리게 될 것입니다.

죄 용서: 시편 130편 강해 XII. 하나님의 이름은 용서를 확증한다

XII. 하나님의 이름은 용서를 확증한다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께 용서가 있다는 진리와 실재를 확증한다-또한 이것은 하나님의 본질의 속성들을 통해서도 동일하게 확증된다

1.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께 용서가 있다는 이 진리에 대한 또 다른 기초와 이 진리에 대한 오류가 없는 증거는 하나님이 이 문제에 있어서 자신에게 취하시는 특별한 이름과 칭호에서 나올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용서의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갖고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느헤미야 9장 17절에서 “엘로하 셀리호트”라고 불린다. 우리는 이 표현을 “당신은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는 하나님”이라고 번역하지만, 사실 “용서 혹은 화해의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이 표현은 하나님이 소유하고 있는 이름이며, 하나님은 자신을 묘사할 때 이 이름을 사용하시며, 그 이름을 통해 자신을 알리신다. 그리고 이 증거를 분명히 하기 위해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과 그 이름의 용도에 대해 몇 가지 생각해 봐야 한다.

1)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이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시는 수단임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통해 우리로 하여금 자신을 알고 자신을 소유하게 하신다. 하나님의 이름은 때때로 하나님의 본성이나 속성을 표현하는데, 하나님은 그 이름으로 자기 자신을 적절하게 표현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어떤 이름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무엇을 표현하든지, 우리는 그 이름을 통해 하나님을 발견할 것을 기대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신에 대해 잘못되거나 거짓된 이름을 주셔서 우리를 속이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이유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이름을 신뢰할 것을 요구하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틀림없이 이름대로 우리에게 드러나실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매우 자주 하나님의 이름에 의존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취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하나님의 이름을 찬미하면서 많은 것을 우리의 의무로 언급한다. 그런데 만약 하나님이 그렇게 하는 데서 속이고 있다면 이런 것들은 우리의 의무가 될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과거나 지금이나 미래나 하나님의 이름이 선포하고 있는 그대로 하나님이시다.

죄 용서: 시편 130편 강해 2) 이름으로 자신을 계시하심

2) 이름으로 자신을 계시하심

이런 근거와 이유 때문에 하나님은 먼저 어떤 이름으로 알려지시고, 그 다음에 하나님이 특별한 방법으로 자신을 계시하신 사람들이 믿음으로 이 이름을 의지하고, 이 이름이 전달하고 상징하고 선포하고 있는 것을 성취한다. 그러므로 구약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나 성육신한 아들의 이름으로는 어떤 사람에게도 계시하지 않으셨는데, 그 이유는 이런 은혜가 구약에서 아직 성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 밖에 있는 것들이 완벽하게 되지 않게 하시려고 우리에게 더 좋은 것을 제공하지 않으셨다.” 그들은 하나님의 모든 복된 이름으로 하나님에 대한 완전한 계시를 부여받지 못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무리 선포되고 계시되었다 하더라도, 만약 하나님이 그것을 특별한 방법으로 언약에 따라 의지하게 하지 않으신다면 하나님의 어떤 이름을 신뢰하도록 우리를 부르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베엘 샤다이)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다.”고 말씀하셨다(출 2:3). ‘엘샤다이’와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두 이름은 전에 하나님의 백성 사이에서 알려졌음에 틀림이 없다. 우리는 아브라함이 처음 하나님을 예배할 때 아브라함이 ‘여호와’라는 이름을 사용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창세기 12장 7절은 “그가 여호와께 제단을 쌓았다.”고 말한다. 그 후에 모세는 이 이야기를 반복할 때마다 그 이름을 사용하고 있을 뿐 아니라, 빈번하게 사용하고 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여호와’라는 이름이 아니라 ‘엘샤다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나셨다고 말하고 있는가? 그 이유는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실 때 친히 주신 이름이기 때문이다(창 17:1). 하나님은 자신을 ‘엘샤다이’ 곧 전능한 하나님으로, 모든 것이 충족하신 하나님으로 표현하신다. 그리고 이삭이 야곱에게 언약의 복을 위해 기도할 때 이삭은 그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네게 복을 주시리라.” 이삭은 자신의 아버지 아브라함과 자신과 맺어진 언약과 관련해서 그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완전한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의 이름을 의지하기 위해 하나님이 그 이름을 자신의 이름으로 계시하셔야 할 뿐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그 이름을 통해 하나님 자신을 알고 자신의 이름이 지시하는 바에 따라 우리가 자신을 신뢰하게 하실 목적으로 그 이름을 우리에게 주셔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이 어떤 사람에게 특별한 방법과 특별한 이름으로 자기를 계시하셨을 때마다 해당되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그렇게 했다.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창 28:13). 이것은 하나님이 야곱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을 하나님 자신의 언약 안에서 신실하게 다루셨던 것처럼, 하나님이 야곱을 또한 그렇게 다루실 것임을 야곱에게 확신시키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벧엘의 하나님이라”(창 31:13)는 말씀은 “너에게 그곳에서 나타나 너를 복 주신 분이 계속해서 복을 주실 것이다.”라는 의미다. 그러나 동일한 야곱이 하나님의 또 다른 이름을 요구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은 야곱에게 대답하지 않으셨다. 이 점은 곧 야곱으로 하여금 하나님 자신이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던 것을 믿음으로 붙잡고 살라고 명령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여호와’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알리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특별히 그 이름으로 자신을 부르지 않으셨고 그들과 이 이름으로 언약을 맺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들은 약속이 성취되기 전에 자신들이 방황하고 도움이 필요한 상황 속에서 주어진 전능한 하나님이라는 이름에 의지해서 살았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자신의 약속을 성취하시고 자기의 언약에 따라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실 때, 하나님은 ‘여호와’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그들에게 계시하시고 그들과 언약을 갱신하신다. 그리고 이런 것으로 하나님은 자신이 약속을 성취하러 오셨다는 것을 확실히 선언하신다. 그들은 이제 자신들의 조상들이 방랑하던 상태에서 하나님에게 보호받을 것을 기대하며 전능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의지해 살았던 것처럼, 약속이 성취될 것을 기대하며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며 산다. 그러므로 이 이름은 유대 교회의 기초요, 신실하게 하나님을 믿었던 사람들의 믿음의 근거가 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유대인들이 그들의 조상들의 언약을 거절하고 그들의 불신앙으로 언약에서 떨어져 나왔을 때 전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잊어버렸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세상에 있는

죄 용서: 시편 130편 강해 2) 이름으로 자신을 계시하심

어떤 유대인도 하나님의 이름이 무엇이며, 하나님의 이름을 어떻게 발음하거나 언급해야 하는지 모른다. 나는 유대인과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의 자음과 모음에 이상한 신비가 있는 것처럼 행세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지만, 이런 것은 아무런 효력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 위에 세워지고 수립된 언약에서 떨어져 나갔을 때 하나님의 공정한 심판에 따라 그들의 눈이 어두워지고, 미신에 사로잡혀 그들이 더 이상 하나님의 이름을 언급하거나 입에 올릴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 진실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자신의 이름대로 자신을 우리에게 나타내실 것이라는 우리의 기대를 분명히 하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이 언약에서 주어진 대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필요하다.

3) 그리스도 안에 확증되는 하나님의 모든 은혜로운 이름

하나님이 자신에 대해 주신 모든 은혜로운 이름과 칭호와 하나님이 소유하고 계신 자신에 대한 모든 명예로운 묘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믿는 많은 사람에게 확증이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신의 모든 이름을 선포하신 것처럼(요 17:6), 하나님의 이런저런 약속이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약속이 그 안에서 예와 아멘이 된다. 그러므로 옛날에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주신 모든 특별한 약속은 이 약속이 주어진 특별한 경우에 특별히 역할을 하며, 각각의 하나님 이름이 아브라함과 이삭에게는 ‘엘샤다이’, 모세와 백성에게는 ‘여호와’라고 주어졌던 것처럼 각각의 정황에 맞게 구원과 신뢰를 줄 수 있게 주어져 특별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제 모든 특별한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경우에 모든 신자에게 해당되며, 하나님의 모든 이름은 그 이름이 어떤 것이든 어느 때고 신자들이 의지하고 신뢰할 수 있는 신자들의 것이 되었다. 그러므로 여호수아가 가나안에 들어갈 때 여호수아를 격려해서 그 땅을 정복하도록 하기 위해 여호수아에게 주어졌던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너를 버리지 않겠다.”는 특별한 약속은 어느 때든 사용할 수 있도록 사도에 의해 모든 신자에게 적용되었다(히 13:5). 그러므로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모든 이름은 마치 이 이름이 특별한 방법으로 우리와 언약이 맺어질 때 주어진 것처럼 이제 우리에게 속하는데, 이는 모든 언약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비준되고 확증되기 때문이다(고후 6:18, 7:1). 이 점은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을 용서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확증한다.

4) 용서는 하나님의 특권

하나님은 “용서의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특별한 방법으로 자신의 이름으로 받아들이셔서, 이 이름으로 자신을 구분하시고 알리신다. 하나님은 용서의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다른 어떤 능력과 선이 도달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자신에게 적용시키신다. 사도는 “많은 주와 많은 신이 있다.”고 말한다(고전 8:5). 어떤 것들은 주로, 어떤 것들은 신으로 불리고 있다. 그러면 어떻게 참된 하나님과 이런 명목상의 신들을 구분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은 이 이름으로 이렇게 하신다. 하나님은 용서의 하나님이시다. 미가 7장 18절은 “허물을 용서하시는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라고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특권이다. 여기서 어느 누구도 하나님과 동일하거나 같거나 하나님과 함께 나눌 수 있는 존재는 없다. “용서의 하나님으로 불릴 수 있는 주와 같은 하나님이 누가 있겠는가?” 민족들의 허영도 그들에게 이런 칭호를 줄 수 없다. 그들에게는 그들의 권력 아래 새롭게 하는 자비와 용서의 소나기가 없다. 천사들도 성도들도 형상들도 교황들도 죄를 용서할 수 없다. 이 이름으로 하나님은 자신을 이들 모두와 구분하고 계신다.

5) 하나님의 이름은 그분의 영예와 영광을 드러냄

이 이름으로 알려진 것은 이 세상에 있는 하나님의 위대한 영광이다.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자 했을 때 하나님은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출 33:18–20). 하나님의 얼굴 혹은 하나님의 존재의 은혜로운 위엄과 하나님의 본질적인 영광은 이 세상 어느 누구에게도 보일 수 없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 하나님을 볼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 자신의 영광스러운 나타나심을 보고 묵상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뒷모습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자신의 작품들과 섭리들을 통해 우리를 지나가시면서 자신의 속성의 탁월함의 그림자를 보이신다. 모세는 이런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러면

죄 용서: 시편 130편 강해 5) 하나님의 이름은 그분의 영예와 영광을 드러냄

그런 것은 무엇을 통해 표현되었는가? 하나님의 이런 이름의 계시와 선포를 통해 표현되었다. 출애굽기 34장 6절, 7절은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인자를 천 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시리라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을 선포하는 이런 이름을 통해 하나님의 위대한 영광이 알려지고 높임을 받고 경외함을 받으며 믿어진다. 하나님의 이름의 계시와 선포가 우리를 속일 수 있을까? 우리가 이런 것을 신뢰하는 데서, 하나님이 자신의 이름으로 선포하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을 발견하기를 기대하는 데서 우리가 속을 수 있을까? 그럴 수 없다.

우리 다 같이 이 점을 생각하자. 그러면 우리는 이들이 우리가 주장하고 있는 진리에 대한 또 다른 안정된 기초를 우리에게 제공하고, 죄를 지은 영혼들로 하여금 용서받기 위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격려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하나님에게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이름 외에 다른 이름이 없으며, 하나님을 다른 이름으로 알거나 부르는 것은 합법적인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부르시는 모습 그대로다. 하나님의 이름은 곧 하나님 자신의 본성을 나타낸다.

또한 하나님의 모든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언약으로 맺어지며 신뢰하도록 우리에게 제시된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름은 “용서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은 그 이름으로 기억된다. 이 이름으로 하나님은 자신과 다른 모든 것을 구분하시며, 자신의 영예와 자신의 특별한 영광을 나타내는 주요 칭호로 표현하신다. 그러므로 이 이름에 따라 믿는 모든 사람은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에게 용서가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믿음의 본질 1 & 2 - 청교도 대작 시리즈 Chapter 6: 하나님의 이름,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 여호와

– 출애굽기 34장 6~7절에서 자비를 선언할 때 여호와라는 이름을 사용한 취지.

– 여호와라는 이름은 하나님의 무한한 본질을 가리키기 때문에 하나님 안에 있는 모든 자비의 주체임을 나타냄. 여호와라는 이름은 자비와 은혜라는 별칭과 가장 잘 어울리고 가장 적절하게 결합함.

– 여호와와 자비를 하나로 결합한 것에서 신앙의 지주(支柱)가 파생됨.

지금까지는 출애굽기 34장에서 선포된 하나님의 자비라는 속성은 신앙의 위대한 대상이며 지주라는 사실을 설명했다. 이제 이 장에서는 하나님의 선언 그 자체를 다루겠다. 즉, 하나님 자신의 손으로 그린 그림을 언어가 허용하는 한 설명하고자 한다. 다윗과 선지자들은 마치 친구들의 모습을 메달에 새겨 가슴에 매달고 다니는 것처럼 하나님의 선언을 작은 메달로 새겨 자신들의 품에 간직하고 다녔다.

이 선언은 성경 전체에서 가장 고상한 주제이며 따라서 가장 풍성한 본문에 대해 하나님이 직접 설교한, 가장 달콤한 설교(suavissima concio)다. 그리고 하나님의 본성에 대한 가장 유명하고 상징적인 묘사(maxime insignis naturae Dei descrptio)다.

존 프레스톤(John Presston, 1587~1628)은 이 묘사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지극히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뛰어나게 펼쳐 보여 주었다. 그러나 프레스톤의 관점은 사람들의 영혼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반면에 이제 제시할 나의 관점은 그 선언을 믿음의 기초 및 뒷받침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선포는 하나님의 영광 등의 다른 목적에도 충분히 기여하지만 하나님의 본래적이고 일차적인 목적은 사람들을 믿음으로 이끄는 것이다.

출애굽기 34장의 선포가 가진 목적을 하나님의 영광에 두든지 사람들의 믿음에 두든지 어느 쪽으로든 결론을 내리게 할 사례가 있다. 다윗은 그 선포를 직접 자기에게 훨씬 탁월하게 적용한 두 개의 시편을 지었다. 하나는 시편 86편이다. 다른 많은 시편도 기도이지만 특히 86편은 다윗의 기도라고 할 만하다. 다른 하나는 다윗의 찬양이라고 하는 시편 145편이다. 이 두 시편은 다른 어떤 시편과 달리 이처럼 명예로운 제목이 붙어 있다. 시편 86편의 첫 마디가 ‘테피라’(תּפִלָּה), 즉 다윗의 ‘기도’이고 시편 145편의 첫 마디는 ‘테히라’(תְּהִלָּה), 즉 다윗의 ‘찬양’이다. 이 두 시편 각각에서 다윗은 바로 출애굽기에 있는 그 선포의 말씀을 엄숙하게 반복한다. 먼저, 시편 86편에서는 죄악과 비참 때문에 곤경에서 자신의 믿음을 뒷받침해 주는 지주로 그 말씀을 사용한다. 3절, 4절, 6절, 7절에서 그 말씀을 사용하고 다시 16절과 17절에서는 그 말씀을 근거로 삼아 곤경에 처한 상태에서 (믿음을 발휘하는) 기도의 형태로 자비를 베풀어 주길 탄원한다. 시편 145편에서는 그 말씀을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본성과 탁월하심들에 대한 찬양으로 삽입한다. 사람들의 아들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고 찬양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다윗은 시편 103편에서도 유사한 목적으로 그 말씀을 반복한다. 프레스톤은 시편 103편을 택해 자신의 관점을 정당화했는데, 필자는 시편 86편을 택해 목적을 정당화하겠다. 하지만 각각의 경우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자비와 관련된 부분만을 발췌해 사용하고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와 같은 위협적 부분을 생략한다. 그래서 나도 내가 추구하는 유일한 주제, 즉 출애굽기에서 선포한 하나님의 자비만을 다루겠다.

이 장을 말씀 자체가 보여 주는 대로 두 개의 절로 구분하겠다.

1. 자신에 대해 이렇게 선포한 그는 누구인가? 어떤 이름인가? ‘여호와’라는 이름을 두 번 반복하고 거기에 ‘엘’, 즉 ‘강한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덧붙였다.

2. 그는 어떤 하나님이신가? 이 점을 하나님에게 속하는 몇 가지 완전성들, 즉 하나님은 강하다, 자비롭다, 은혜롭다 등과 같이 우리가 대개 속성이라고 부르는 것을 통해 표현한다.

I. 그는 누구인가? 여호와.

하나님을 나타내는 고유명사 가운데 ‘하나님’ 혹은 ‘주’(라고 우리가 번역하는)를 의미하는 가장 확연한 단어가 셋이 있다. 이 세 단어가 전부 모세에게 계시됐다.

1. ‘에히에’(אהְיֶה, 나는 있다): 출애굽기 3장 14절에서 맨 처음 언급됐다.

2. ‘여호와’: 출애굽기 6장 3절.

3. 여호와의 축약형 ‘야’(יָהּ):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출 15:2).

믿음의 본질 1 & 2 - 청교도 대작 시리즈 Chapter 6: 하나님의 이름, 여호와

이 세 단어가 하나님의 이름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들이며, 실질적으로는 단 하나의 똑같은 대상을 가리킨다.

(1) 그중에서도 특히, ‘여호와’라는 명사가 가장 중요하며, 오직 하나님에게만 사용하는 고유명사이고, 피조물에게는 결코 내준 적도 내줄 수도 없는 이름이다. “여호와라 이름하신 주만 온 세계의 지존자로 알게 하소서”(시 83:18). 그리고 ‘야’라는 축약형 단어는 하나님을 특별히 높이는 이름이다. “하나님께 노래하며 그의 이름을 찬양하라 하늘을 타고 광야에 행하시던 이를 위해 대로를 수축하라 그의 이름은 여호와(원문에는 ‘야’)이시니……”(시 63:4).

(2) 이 세 단어 모두 하나님은 존재하신다는, 즉 존재로 충만한 존재, 모든 존재의 근원이라는 뜻이다. 이 모든 단어는 절대적 본질, 홀로 스스로 존재함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다른 모든 이름 가운데서 ‘여호와’라는 이름을 의도적으로 선택해서 그 뒤에 오는 이 모든 속성의 중심이요 주제로 삼는다. 여호와라는 이름이 그가 완전한 존재라고 언급하는 것처럼 이 모든 속성은 그 신적 존재의 탁월성과 완전성을 언급한다. 그리고 이 이름은 자신에게 여호와, 즉 나는 존재한다라는 이름을 붙인 그는 어떤 하나님인지에 대한 각별한 설명이며 묘사일 뿐이다.

그러나 (나의 목적에 훨씬 부합하는) 하나님 자신의 언급과 더불어 처음으로 선포된 계시는, 자비의 징표요 기호였으며, 훨씬 특별한 의도를 갖고 전해 준 것이었다. 첫 번째라는 것은, 그 뒤에 오는 것의 전범(典範) 혹은 표준이다. 그러므로 다른 모든 이름 중에서 여호와라는 이름은 자비와 은혜라는 속성과 가장 잘 어울리고 가장 잘 결합한다. 여호와라는 이름을 은혜와 자비를 가리키는 기호 및 징표로 가장 먼저 제공하고 계시해 주었다는 것은 이처럼 자명한 사실이다.

하나님이 불타는 가시떨기에서 처음으로 모세에게 나타나서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 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 이제 가라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히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다(출 3:7~10). 그러자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은혜를 베푸는 하나님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하나님에게서 정보와 확증을 추가로 얻기 위해 특히,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을 어떤 이름으로 나타내야 하는지를 알기를 원해, 하나님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의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라고 물었다(13절). 그러자 하나님은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14절), 그리고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칭호니라”고 말씀해 주셨다(15절). 에인스워스(Ainsworth)는 모세의 이 질문과 탄원을 통찰하면서 이때 모세의 취지는 다음과 같다고 생각했다. 즉, 하나님이 모세를 자비(순수한 자비)의 메시지에 입각해 보내시는지 아니면 심판의 메시지에 입각해 보내시는지를 하나님에게서 더 충분하고 명확하게 답변을 얻어내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신이 사용하기를 원하는 어떤 특별한 이름에 의해 더 많은 것을 나타내고 입증할 것으로 생각한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준 답변에서 먼저 언급해 준 이름은 ‘에히에’, 즉 ‘나는 스스로 있는 자’였다(14절). 그리고 이 이름이 모세의 요청에 대한 첫 번째 응답이었다. 자, 이 ‘에히에’라는 이름은 본질적 의미로 여호와라는 이름과 똑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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