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심의 사람, 아브라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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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사랑과 은혜가 많으신 삼위 하나님, 이 시간 저희들의 예배를 받아주시며, 모든 영광 받아 주옵소서. 우리의 지난 죄됨들을 고백합니다. 자기 의를 자랑하며, 자기 수고를 자랑했습니다. 또한 우리의 즐거움을 쫓아 보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보다 나의 삶이 중요했음을 고백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을 의지하여 저희들의 죄를 용서해주시길 간구합니다. 주의 십자가에 우리의 죄됨을 함께 못박게 하시고, 죄가 우리를 더 이상 주장하지 않게 하소서. 오직 주님의 의로운 마음이 우리에게 덧입혀져 우리 또한 주님을 닮아가는 거룩한 삶 살아가게 하소서.
이 시간 주님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에 들리게 하시고, 삶의 자리에서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오직 성령께서 주장하시며, 이끌어 주옵소서.
또한 주님께 주신 것들 감사하여, 예물드립니다. 주님께서 기뻐 받으시며, 사용되는 곳마다 주의 나라가 확장되게 하시며, 생명이 전해지게 하옵소서.
이 시간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 모든 감사와 영광을 올려드리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아브라함은 누구인가?>
원래 이름은 “아브람”: “존귀한 아버지”
나중에는 하나님께서 이름을 창대하게 하셔서, “아브라함”으로 개명시켜 주심: “열국의 아버지”
이것의 성취는 갈라디아서 3:7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 과 같이 성취되었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즉 믿음의 아버지가 되었다.
이 말은 단순히 혈통적인 자손 뿐만 아니라, 믿음의 모든 자손들이 아브라함의 계보를 잇는다고 말할 만큼 그의 이름을 크게 하셨다. 믿음을 이야기한다면, 아브라함을 보라! 이렇게 말할 수 있게 하셨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출발은 다소 우울하다.
그 출발은 창 11:27 아래에서 등장한다.
아브라함에게는 남자 형제가 2명 더 있었다. 하란과 나홀이다. 내가 해석하기에는 아브라함은 막내가 아닐까 싶다. 왜 그렇게 해석하는지 궁금하신 분들은 개인적으로 묻거나, 찾아오시라.
그런 아브라함이 먼저 형 하란의 죽음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또 결혼을 했는데, 아내 사라가 임신을 하지 못한다. 그리고 11장 끝에는 아버지의 죽음을 경험하게 된다.
곧 아브라함의 출발은 ‘죽음과 결핍’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의 이름은 ‘존귀한 아버지’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형제와 아버지가 죽는 가운데 삶에 대한 의미를 깊이 성찰하게 되었을 것이다.
나 또한 교회 장례가 있거나 친척이 죽으면 삶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게 된다. 나 또한 영정 사진이 주인이 될텐데, 어떻게 삶을 살아야하는가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상실의 경험 속에서 극심한 고뇌가 있었을 텐데, 자녀가 없다는 것이다. 그의 마지막을 슬퍼할 후손이 없다는 것, 그의 이름을 기억해 줄 후손이 없다는 것, 그는 그저 소멸될 뿐이구나라는 비통한 심정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12장에서 ‘음성’을 들려주신다. 11장과 12장이 전혀 다른 내용이 아니다. 연결되는 내용이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이렇게 전개된다.
영어 성경에서는 ‘Now’가 많이 쓰이기도 한다. 이제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고난 중에서 음성을 발하신다. 우리 삶에서 다른 대안이 없을 때, 하나님께서 그 분의 음성으로 새로운 길을 제시하신다.
<하나님의 ‘가라’ 명령은 왜 주셨는가?>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가라! 이것이 명령이다. 좀 다르게 표현하면 “떠나라!”는 표현이다.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 왜 떠나라고 하시는가. 우리는 쉽게 이해하기가 어렵다.
오히려 나를 위로하고, 내가 기댈 수 있는 지지 기반에 머물러 있는것이 합당하지 않는가.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목적이 있어서 가라!, 떠나라! 말씀하신다.
여호수아가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옛적에 너희의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버지, 나홀의 아버지 데라가 강 저쪽에 거주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
본문에서는 선명하게 나타나지 않지만, 여호수아 말씀을 보면, “아브라함의 집은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라고 말한다. 달리 말하면 우상을 섬겼다는 것이다.
우상을 섬기는 것이 무엇이 대수일까. 이렇게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우상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게 하는 것이다. 또 여러분들이 생각하기에 ‘우상’은 단순히 조각상 앞에 엎드려 비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성경을 우리가 면면히 살펴보면, 우상이라는 것은 ‘하나님’ 외에 다른 무언가를 의지하는 것이 곧 우상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당시에 우상이라는 것도 사실 그리스 로마 신화와 유사하다. 길가메쉬라는 당대의 신화 작품을 보아도 그렇다. 그러나 그 안에 내용을 보면 어떤가. 모두 다 추구하는 것들이 오늘날 우리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부를 추구하고, 미를 추구하며, 힘을 숭상하고, 건강과 자녀와 명예를 추구하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안정과 안락함이다. 즐거움과 쾌락이다.
이런 측면에서 우리로 하여금 가장 하나님을 찾지못하게 하며,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 곧 우상이다. 내 삶에 부족함이 없노라 생각하면, 굳이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볼 것인가? 굉장히 성숙한 신앙이 아니고서는 하나님을 바라보기가 어렵다.
그렇기에 이러한 우상의 땅을 하나님은 땅 끝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바벨이 그러한 곳이었고, 우르는 이곳보다도 더 먼 곳이었다.
내가 땅 끝에서부터 너를 붙들며 땅 모퉁이에서부터 너를 부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나의 종이라 내가 너를 택하고 싫어하여 버리지 아니하였다 하였노라
이스라엘이 바벨론에서 돌아올 떄에도 땅 끝에서부터, 땅 모퉁이에서라고 부르지만, 지금 아브라함의 경우에도 동일하다. 하나님을 쳐다보기 너무나 어려운 곳에서 옮기신다는 것이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여기서도 영적으로 보면, 흑암의 장소에서 하나님을 아는 자리로 옮기셨다는 것이다.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하나님의 인자하시고, 성실하신 성품을 아는 자리로 초대되었다는 것이다.
<지도 63>
지도를 살펴보자.
아브라함이 떠난 고향은 ‘우르’라는 곳이 출발점이다. 가장 오른쪽 아래에 있다. 1차 출발지이다.
여기서 아브라함은 가족 모두와 출발한 것으로 보인다. 이곳에서 하란은 죽었을 것으로 보이고, 그 외 모든 가족이 함께 이주해서 하란이라는 곳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이 지역들은 모두 강이 있는 지역이고, 유사한 문화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온 가족들이 더 중요한 자리로 나아가지 못하고, 하란에서 멈추는 것을 보게 된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2차로 다시 부르시면서, 하란을 떠나서, 너의 고향을 떠나고, 너의 친척들이 있는 집을 떠나서, 너의 아버지의 집, 즉 형제들이 있는 곳을 떠나라고 말씀하신다.
이런 점에서 신앙은 철저히 하나님과 각 개인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신앙에서 이것과 짝하는 말씀이 누가복음 14장에 동일하게 나타난다고 생각된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이 장소적인 이동은 결국은 우리가 영적인 부분이 굉장히 중요함을 인식하게 된다.
이 말은 단순히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를 버리라는 말은 아니다. 다만 주님이 가장 우선되어야 함을 보여준다. 때로는 신앙에 있어서 오히려 방해가 된다면 이들을 떠나야함을 보여준다.
아브라람에게 있어서 2차 출발은 바로 이러한 도전이었다. 하란까지는 큰 강줄기가 함께 하는 장소였지만, 이제 아래부터는 강줄기 희미하다. 때때로 우물을 파야만 하는 곳들도 많을 것이다. 새로운 모험과 같은 곳, 이곳에서 아브라함 믿음의 도전을 하고 있다. 믿음으로 나아가고 있다. 가시적인 측면에서 분명한 것은 없다. 오직 하나님의 음성과 말씀만 있을 뿐이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신데, 왜 구체적인 무언가를 주시지 않으시는가. 왜 보여주는 땅이 아니라. 보여줄 땅으로 미래형으로 표현하는가. 왜 이토록 모험을 하도록 하시는가.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오직 그 분의 음성에만 귀기울이기 원하시기 때문이다. 때로는 우리에게 이러한 상황으로 내몰리게 하신다. 그때 우리는 흑암의 길을 걷는 기분이고, 물 위를 걷는 기분이 든다. 불안하다.
그 가운데서 우리는 소리에 집중해서 나아간다. 베드로가 주님의 음성에 의해서 물 위를 걸어나갔던 것처럼, 또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음성에만 귀를 기울이며 나아갔던 것처럼 말이다.
이런 점에서 아브라함은 보다 철저한 예배자였다. 그가 도착하는 곳곳 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제단들이 세워졌다. 어떤 이들은 상수리나무가 마을의 제단이라고 생각되는데, 그곳에서 아브라함의 다른 제단, 곧 하나님을 예배하는 제단을 대항하듯 쌓았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나름 합당하게 여겨진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당장 아브라함에게 필요한 것을 주실 수 있지만, 주시지 않는 이유는, 그 분에 음성에 귀를 기울이기 원하시기 때문이다. 그저 가라고 말씀하시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그렇기에 아브라함의 발걸음은 믿음과 순종의 발걸음이라 말할 수 있다.
신약에서 히브리서 기자의 말을 들어보자.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아브라함은 시각적으로 어디를 가야할지는 몰랐다. 다만 믿음과 순종으로 나아간 것이다. 그의 포커스는 이 땅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초점해서 간 것이다. 하나님의 음성과 그 분이 무엇을 원하시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하나님의 약속은 무엇인가?>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여기서 약속을 압축적인 키워드로 정리해보면, 하나는 ‘민족’, ‘이름’, ‘복’ 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모든 것들은 사실 아브라함이 갈급하게 느끼고 있던 것들이다. 자녀가 없었고, 그렇기에 그의 이름은 ‘존귀한 아버지’ 그 이름 그대로 어울리기 보다는 수치가 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그의 결핍과 부족한 부분을 채우시는 하나님의 복이 필요했다.
하나님의 약속은 놀랍다. 그저 자녀를 주시는 것에 만족하지 않으신다. 자녀의 범위는 ‘민족’이다. 달리 말하면, ‘나라’이다.
얼마나 놀라운 약속인가. 얼마나 위대한 약속인가. 부자가 잘 가도 3-4대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복은 무엇인가. 시간이 지나도 무너지지 않는 나라이다. 민족이다. 날로 강대해지는 약속이다.
바라건대, 우리 모두의 이름을 아브라함의 이름에 대신 넣어보길 원한다.
(NKRV)
내가 (승일)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승일) 네게 복을 주어 (승일)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승일)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아브라함의 이름을 크게 하신다는 것은 그의 존재감을 크게 하신다는 말이 된다. 곧 그의 존재가 커지는 것과 함께 한다.
(시간이 되면), 이성진 감독 이야기 <성난 사람들>
골든 글러브, 에이미 상 8관왕
여기서 사람들이 감독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그가 돈이 많아서 기억하는가. 아니다. 그 안에 무엇인가 있기 때문이다. 그가 남들보다 큰 존재인 내면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복은 어찌보면 가장 핵심적이다. 복을 가만히 살펴보면, 이건 뭐 거의 하나님과 동의어로 보인다. 아브라함은 무적과 같은 존재이다. 아브라함 그 자체가 복이다. 모든 족속이 아브라함으로 복을 받는다. 아브라함을 축복하면 복을, 아브라함을 저주하면 저주를 받는다. 거의 하나님과 동일할 정도의 무게의 복이다.
무엇을 말하는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함께하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하나님의 친구라고 부르기도 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의 삶은 그렇기에 담대하다. 위축되지 않는다. 남들의 말과 남들의 행동에 그다지 크게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 가장 집중할 것은 하나님께 집중하면 된다. 다만 하나님의 음성에 집중해서 듣고, 나의 발걸음을 그리로 옮겨야 한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는 바로 이와 같다. 그저 내가 내딛는 발걸음이 아니라, 하나님과 대화하며, 하나님을 알아가고,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을 살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하나님께서는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실 때 함께 상의하듯 대화하신다.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그리고 곧 아브라함 또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방식으로 행동하도록 택하셨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과 같이, 그와 같이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인도하셨음을 말한다.
<기억할 아브라함은 누구인가?>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위대한 약속을 주셨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동일한 기업과 유업을 주셨다. 에베소서에서도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 알았으면 좋겠다고 바울이 이야기하지 않았는가.
우리 또한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에, 이처럼 우리의 갈급한 필요를 채우실 것을 약속하신다. 아브라함에게 ‘자녀’, ‘이름’, ‘복’이 갈급했던 것처럼 우리 또한 채우실 것을 약속하신다.
단순히 우리가 요구하는 정도가 아니라, 우리의 상상의 범위를 뛰어넘어 응답하실 것을 약속하신다. 아브람이 아브라함되게 하시는 약속이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할 것은 약속과 더불어 명령이 있다는 점이다. 즉 우리에게 결단을 촉구하신다. 가라! Just do it 처럼, 일단 움직이고, 일단 떠날 것을 촉구하신다.
그렇기에 아브라함은 아래와 같이 기억되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믿음과 순종의 사람이 바로 아브라함이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순종을 요구하신다.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없는가.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며 순종함으로 나아가야 한다. 예수님의 손을 붙잡고 순종함으로 나아가라. 가야한다.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기도제목1. 우리 또한 믿음과 순종의 삶 살게 하소서.
기도제목2. 수련회 가운데 주님께서 함께하시고, 역사하셔서, 우리 모두 정결한 그릇되게 하시는 은혜가, 주께서 귀히 쓰시는 그릇되게 하시는 은혜가 있게 하옵소서.
*말씀-결단찬양-기도제목1-기도제목2-축도-송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