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4: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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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창자여 (스플랑크니조마이)

지금까지 우리가 예레미야를 통해 살펴본 바는 하나님을 등진 백성들이 돌아오라고 하는 부름에도 돌아올 줄을 모르고 계속해서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거부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도 한 절 한 절 살펴보면서 같이 은혜를 나누면 좋겠습니다.
4장 11절. “그 때에 이 백성과 예루살렘에 전할 자가 있어서 뜨거운 바람이 광야에 있는 헐벗은 산에서 내 딸 백성에게 불어온다 하리라 이는 키질하기 위함도 아니요 정결하게 하려 함도 아니며”.
예레미야 선지자가 계속해서 회개의 메시지를 선포합니다. 그런데 돌아오라고 하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돌아올 생각이 없는 백성들. 그래서 이제 그들에게 심판의 때가 닥쳐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바람이 불어오는데 뜨거운 바람이라고 합니다. 이 바람은 가뭄을 몰고 오는 메마르고 뜨거운 바람입니다. 그리고 이 바람은 가나안 땅, 팔레스타인의 농업을 망치는 바람입니다.
그런데 12절에 보니까, “이보다 더 강한 바람”이 불어올 것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훨씬 더 강하고 뜨거운 바람이 사막에서 불어올 것이다. 이것은 북아프리카에서 유럽 남부로 불어오는「Sirocco」바람을 비유한 표현인데, 본문에서는 범죄한 사람을 삼켜버리는 / 하나님께서 내리는 징계의 바람이고, 겨와 함께 알곡까지 날려 버리는 맹렬한 심판의 바람이 될 거라는 경고의 메시지입니다.
그러니까 유다를 치기 위해 내려오고 있는 심판자들 / 예루살렘을 치기 위해 내려오는 바벨론 제국의 맹렬한 기세를 뜨거운 바람이라는 은유적 표현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11절에 바람이 불어오는 까닭이 뭐냐면 “이는 키질하기 위함도 아니요 정결하게 하려 함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성도님들 키 아시죠? 이렇게 이렇게 까부르면서 키질을 하면 알곡만 남고 껍데기는 바람에 다 날려가잖아요. 그래서 바람이 살살 불어올 때 키질을 하는데 오늘 본문은 “키질을 하기 위함도 아니고 알곡과 껍질을 구별하기 위함도 아니고 정결하게 하기 위한 것도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그 바람은 심판의 바람인데, 알곡도 겨 껍데기도 모두 날아가 버릴 거란 말씀입니다.
시편 1편 4절입니다.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은 하나님의 선민이고 하나님을 잘 믿는 의인이라고 굳게 믿었는데 그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큰 착각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스라엘 백성 모두가 심판의 대상이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13절입니다.
“보라 그가 구름 같이 올라오나니 그의 병거는 회오리바람 같고 그의 말들은 독수리보다 빠르도다. 우리에게 화 있도다 우리는 멸망하도다 하리라”
구름 같이 올라온다고 하는 건 어떤 의미일까요? 우리가 구름 같은 인파, 구름 같은 관중 등등. 요즘 같은 휴가철에도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광경을 볼 때 흔히 구름에 비유하여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이 구름은 수많은 바벨론 군대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기병과 병거(전차) 부대가 “흙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맹렬한 기세로 이스라엘을 집어 삼키고 정복하기 위해 달려드는 모습을 연상시키기도 하는 것입니다.
또한 바벨론의 병거를 회오리바람에 비유합니다. 회오리바람은 모든 걸 휩쓸어 가잖아요. 땅에 있는 것들을 휩쓸어서 하늘로 흩어지게 합니다. 그만큼 심판의 도구로 쓰일 바벨론 군대의 기세가 맹렬하고 무시무시하다는 의미이고 그들이 타고 오는 말들도 얼마나 빠른지 독수리보다 빠르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응입니다. 13절 하반절입니다. “우리에게 화 있도다. 우리는 멸망하도다 하리라”. 공포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아 이제 우린 끝이구나. 다 죽었구나.” 그때 예언자가 말합니다. 새가 사냥꾼의 그물에서, 그들의 올무에서 벗어나듯이 심판에서 벗어날 방법이 한 가지 있다.
그게 뭐죠? 14절입니다. “예루살렘아 네 마음의 악을 씻어 버리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네 악한 생각이 네 속에 얼마나 오래 머물겠느냐”라고 말입니다.
성도님들 본문에서 말하는 악은 뭐죠? 심판의 경고를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뭘 해야 되나요? 이것은 우리가 어제도 4장 1-10절 말씀을 통해 살펴본 내용입니다. 참된 회개! 사랑의 대상을 바꿔야 합니다. 우상을 섬기고 세상 것들을 사랑하고 하나님 뜻대로 살지 않았던 죄에서 돌이켜 오직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구원에 이르는 참된 회개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랑의 대상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해야 할 하나님을 우리가 바라는 세상의 것들을 얻기 위하여 이용하고 있지는 않은지 스스로를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과 지식과 경험에서 자라감에 따라 더욱더 구할 것은 하나님 그분 자체이지 / 하나님을 축복과 도움의 통로로만 여기거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들에만 관심을 두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러한 삶이 악이라고 말합니다. 바로 이 재앙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똑바로 알고 돌이켜야 심판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의 풍요와 안락을 위해 선택했던 삶의 방식이 결국은 뭐죠? 우상숭배! 하나님이 아닌 세상의 것에 마음을 빼앗기고 살아가는 삶. 이것을 악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인류의 타락 이후로 사람들은 욕망과 두려움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때 좌절하고, 그나마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들을 잃게 될까봐 두려워하며 살아갑니다. 불투명하고 불안한 미래를 걱정하면서 입으로는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하지만 실상은 세상의 것에 마음이 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서로를 이용하기도 하고 거짓말하고 미워하고 원망하기도 합니다.
이런 세상에 대한 사랑이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의 삶”에서 떠나게 했고 “청년 때의 인애와 사랑의 공동체”를 무너뜨리고 망가뜨리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심판의 도구로 들어 쓰실 것이라고 경고하게 된 것이죠.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는 것이 바로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급한 상황입니다. 15절. “단에서 소리를 선포하며 에브라임 산에서 재앙을 공포하는도다” 성도님들 “브엘세바에서 단까지”라는 표현 많이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마치 우리나라 “백두에서 한라까지”라는 말과 유사한 표현입니다. 단이라고 하는 것은 이스라엘 영토의 최북단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이 우리나라 강원도 만한 크기의 땅인데 그나마도 남북으로 나누어져 있는 거죠. 지금 북 이스라엘 국경을 넘어서서 이민족들이 침입해 오고 있습니다. 단에서부터 급한 소식이 들려오고 에브라임산. 에브라임 산은 북 왕국 이스라엘의 중심지로 유다의 북쪽 턱밑에 위치해 있구요. 예루살렘에서 불과 16km 떨어진 곳입니다. 이제 남 유다의 수도 예루살렘에 가까이 왔습니다. 풍전등화의 위기가 지금 닥쳐왔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거역한 죄 때문에 이민족들을 심판의 도구로 삼아서 그들을 치고 있는 것입니다.
17, 18절입니다. “네 길과 행위가 이 일들을 부르게 하였나니” 결국은 이 모든 고통과 재앙의 뿌리는 이스라엘이 선택했던 삶과 행위의 결과이고 / 더 거슬러 가면, 인간의 죄성! 바로 내면의 악이라는 것입니다. “악함이 네 마음에 깊은 곳까지 미쳤다.” 결국 악한 뿌리에서부터 심판이 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신이 불러들인 죄의 결과이고 유다의 “소행”이 만들어낸 재난이라고 예레미야는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17절에 보면, 다윗 왕 이래 난공불락의 성이라고 자랑했던 예루살렘은 포위당하고, 20절. 튼튼한 성 예루살렘은 바벨론이라는 회오리바람에 힘없이 날아가 버릴 한낱 장막과 휘장처럼 갑자기 파멸될 것이라고 합니다. 궁극적으로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의해 멸망하게 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19절에 보면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마음을 대언하고 있습니다. “슬프고 아프다” 성도님들 성경책을 보면 “슬프고 아프다” 옆에 주석이 달려 있죠. 뭐라고 써 있습니까? “내 창자여, 내 창자여” 히브리어 원문에는 “메아이, 메아이” 이렇게 같은 말을 두 번이나 반복하면서 하나님의 절절한 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새 번역 성경은 19절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아이고, 배야. 창자가 뒤틀려서 견딜 수 없구나. 아이고, 가슴이야. 심장이 몹시 뛰어서, 잠자코 있을 수가 없구나. 나팔 소리가 들려 오고, 전쟁의 함성이 들려 온다.”
창자라고 하는 것은 옛날부터 사람들이 인간의 가장 깊숙한 정서가 머무는 자리라고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애가 탄다”, “애 끓는다”, “애간장이 녹는다” 그런 표현들 많이 쓰잖아요. 예부터 우리 조상들은 희, 노, 애, 락, 애, 오, 욕, 일곱 가지 감정, 칠정(七情)이 자리 잡은 곳이 바로 창자라고 여겨왔습니다.
성도님들 ‘모원단장(母猿斷腸)’ 어미 ‘원숭이’의 창자가 끊어졌다 라는 중국 고사성어를 들어보신 적이 있을 겁니다.
(예화) 중국 진나라 ‘환온’이 촉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여러 척의 배에 군사를 나누어 싣고 가던 중 양쯔강 중류를 지날 때 한 병사가 원숭이 새끼 한 마리를 잡아 왔습니다. 새끼를 잃은 어미 원숭이는 환온이 탄 배를 좇아 백 여리를 뒤따라오며 슬피 울었고 배가 강어귀가 좁아지는 곳에 이를 때 그 어미 원숭이는 몸을 날려 배 위로 뛰어들었습니다. 그런데 어미 원숭이는 자식을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애를 태우며 달려왔기에 안타깝게도 배에 오르자 죽고 말았습니다. 배에 있던 병사들은 죽은 어미 원숭이의 배를 갈라보았는데, 창자가 토막토막 끊어져 있었다고 합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환온은 곧바로 새끼 원숭이를 풀어주고, 새끼 원숭이를 잡아 왔던 병사를 매질한 다음 쫓아버렸다는 이야기입니다.
얼마 전에도 큰 수해가 닥쳤을 때 실종자 수색에 동원된 해병대 일병이 목숨을 잃은 사건 모두 잘 아실 겁니다. 그 어머니가 자식을 갖기 위해 무려 10년간을 시험관 시술을 시도한 끝에 정말 어렵게 얻은 아들이었다고 합니다. 거센 강물에 휩쓸려간 아들이 살아 돌아오기만을 애타게 기다리던 어머니는 자식의 싸늘한 주검을 보고 혼절하고 말았습니다. “내 창자여, 내 창자여” 자식을 잃은 부모의 마음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오늘 본문 11절에서 이스라엘을 “내 딸 백성”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죄로 인한 심판 앞에 선 이스라엘을 보시고 “메아이, 메아이” “내 창자여, 내 창자여” 하고 예레미야의 입술을 통해 탄식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에서도 동일한 내용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 많은 기적과 이적을 행하시면서 종종 반복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문둥병자를 치료하실 때 “불쌍히 여기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실 때 목자 없는 양 같은 사람들을 향해 “내가 불쌍히 여기노라”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눈뜨기를 간청한 맹인과 독자를 잃은 슬픔에 울고 있는 나인성 과부를 “불쌍히 여기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사용된 동사 “불쌍히 여기다”는 헬라어로 ‘스플랑크니조마이(splagcnivzomai)’인데 바로 창자, 내장, 심장을 의미하는 헬라어 ‘스플랑크논’(splavgcnon)에서 유래한 표현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그 사랑하는 백성들을 보시며 “내 창자여 내 창자여” 애통해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마음을 깨달았을 때 우리가 해야할 일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바로 참된 회개입니다.
마지막 21-22절 말씀입니다. “내가 저 깃발을 보며 나팔 소리 듣기를 어느 때까지 할꼬 내 백성은 나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요 지각이 없는 미련한 자식이라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하도다”
성도님들! 이 구절이 얼마나 슬픈 말씀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대로 살 능력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문제는 뭔가요? 악을 행하는 데는 재빠릅니다. 그런데 선을 행하는 데는 무능력하다고 말합니다. 21-22절 말씀을 사도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롬 7:18-25) “나의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구나.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않는 악을 행하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이것이 예레미야 선지자가 궁극적으로 전하고자 하는 “새 언약”에 대한 메시지입니다. 슬픈 메시지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에게 희망의 메시지가 됩니다. 우리는 이렇게 못난 사람들인데 하나님은 여전히 이스라엘 백성을, 이스라엘 백성과 전혀 다를 바가 없는 우리를 버리실 수 없는 거예요. 왜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우리와 언약을 맺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 능력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 예수님이 필요한 것입니다. 예레미야서가 궁극적으로 전하고자 하는 “새 언약”. 회개해라 돌이켜라 그러나 해도 해도 안돼서 결국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심으로 새 언약을 완성하실 하나님의 계획이 오늘 본문에도 담겨 있는 것입니다.
지난주 월요일 새벽에 말씀을 전하셨던 장로님께서 누가복음 24장 44절 말씀을 풀어서 설명해 주셨잖아요.
(눅 24:44-25)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예수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입니다. 모세의 율법(토라)과 시편으로 대표되는 성문서와 오늘 우리가 나누고 있는 예레미야서를 포함한 모든 선지서,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구약 성경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증언하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오늘 예레미야 4장 본문은 당시 이스라엘의 회개를 촉구하는 메시지이지만 동시에 구약 성경이 증언하고 있는 새 언약의 완성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이기도 한 것입니다.
한 가지 더 강조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말씀드린대로 언약의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버리신 적이 없지만, 그렇다고 죄를 짓고도 평안하고 형통하게 살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우리가 잘 아는 요한일서 말씀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공평과 정의가 하나님 보좌의 기초”라고 시편 97편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반드시 걸어야 할 길이 있는 것입니다. 시편 1편 말씀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슬프고 아프다, 내 창자여, 내 창자여” 탄식하며 기다리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진정한 회개의 삶,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힘쓰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진심으로 소망하면서 오늘 말씀 나눔을 마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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